< 파격적인 제안 >
[법원에 실제로 가서 접수할 수 있는 시간은 일과시간인 6시까지지만, 6시를 넘어서면 법원 당직실에 접수해도 됩니다. 전자소송으로도 가능하고요. 아직 시간은 있습니다.]
그래?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지.
[하수진에게 다시 연락해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법원에 접수할 준비는 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곧바로 다시 하수진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뚜우우. 뚜우우.
신호만 가고 받지를 않는다. 대신 문자를 남겼다.
[꼭 아셔야 할 사항이 있어서 다시 연락드렸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을 변호사님에게 전했더니 오늘 자정까지 재산분할 청구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재판해 볼 의향이 생기시면 연락 주십시오. 두려우시겠지만 제가 보내드린 음성 파일을 한 번 들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후 4시 ··· 그리고 5시.
어느덧 6시가 됐지만 아무 답이 없다.
나민수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나 사실 코인으로 너희는 도저히 상상도 못 할 돈을 벌었어.’
상상도 못 할 돈이란 게 과연 얼마일까?
일이십 억 원이라기엔 그놈 태도가 너무 당당했다.
인터넷을 둘러봐도 코인으로 십억을 벌었다 혹은 이십억을 벌었다는 사람은 심심치 않게 있다. 우리가 충분히 들어봄 직하다. 그 정도를 가지고 상상도 못 할 돈이라기는 애매하지.
분명 최소한 수백억 원대일 것이다.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나민수라는 인간이 과연 떳떳하게 그 돈을 자기가 한 푼도 빼놓지 않고 다 써도 될 놈인가?
그건 절대 아니지.
이대로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동환이냐? 나야 지오. 다름이 아니라. 하수진 말인데. 연락이 안 돼서.]
[전화 안 받아?]
[일부러 안 받는 것 같아. 꼭 할 말이 있는데.]
[나민수 때문이지? 전해 들었다. 그런 개새끼일 줄은 누가 알았겠냐. 그런데 나민수 전처한테 무슨 말 하려고?]
[그건 내가 따로 직접 말해야 해.]
[내가 직접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수진이가 이혼하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대. 나민수가 잘 다니던 회사 갑자기 때려치웠잖아. 사업한다면서 돈도 많이 빌려 쓰고 그랬다는데. 나민수 퇴직하고 나서는 수진이가 카페 일해서 번 돈으로 생활했다더라고. 수진이 부모님 돈도 많이 끌어다 썼을걸. 사업자금이라면서.]
[그래? 그 카페 이름이 뭐니?]
[그건 잘 모르겠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라 뭐였는데. 라쿠? 라키? 무슨 마로 끝났어. 위치는 대강 양재역 근처 쪽이야.]
[고맙다. 내가 찾아볼게.]
전화를 끊고 곧바로 인터넷을 뒤졌다.
양재역 카페라고 검색하자 수십 개가 뜬다.
이건가?
라로 시작하면서 마로 끝나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라크리마’
매장으로 전화를 걸어봤다.
[카페 라크리마입니다.]
여기 맞네. 하수진의 목소리였다.
[아까 연락드렸던 서지오입니다.]
[여긴 어떻게 아셨어요?]
[동환이가 얘기해줬습니다. 걔도 정확한 카페 이름은 모르더군요. 제가 검색해서 찾았습니다.]
[새삼 옛일을 들추고 싶지 않습니다. 다 끝난 일이에요.]
[문자 안 보셨죠? 오늘 밤까지는 여전히 재산분할 청구 가능합니다.]
[이혼소송 중이라고 하셨죠?]
[네.]
[겪어보시면 알 거예요. 굉장히 피곤한 과정이었어요. 법원에서도 그 사람 재산이 얼마인지 모두 조사했지만 나온 건 별로 없었어요. 그 뒤로는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요.]
[나민수가 자기 입으로 상상도 못 할 돈을 코인으로 벌었다고 했습니다.]
[허풍이겠죠.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다니던 회사를 갑자기 관두더니 창업하겠다면서 참. 하아~.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네요. 우리가 살던 집은 물론이고 부모님 계신 집까지 모두 팔았어요. 이혼하고 보니 제 손에 남는 건 위자료 5천만 원이 전부더라고요. 변호사가 그러데요. 결혼 기간도 짧은데 5천만 원이면 상당히 많이 받은 거라고. 그 말 듣고 항소하려다가 그냥 포기했죠.]
겨우 5천만 원이라고?
그건 말도 안 되지.
나민수가 한 짓을 고작 5천만 원으로 퉁치는 건 있을 수 없다.
[인생에는 3번의 기회가 온다지 않습니까. 저는 그랬거든요.]
처음에는 그저 흔해빠진 스팸 문자인 줄로만 알았다. 12시까지 캐시백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을 때 만약 그냥 웃어넘겼더라만?
지금 나는 여전히 돈의 노예로 허겁지겁 살았을 것이다.
이 부장이 허튼소리를 늘어놨을 때도 당당히 대꾸하지도 못했겠지. 임누리가 전략기획팀장 자리를 줄 테니 이지영과의 소송을 포기하라고 했을 때도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게에 손님이 오셔서요. 이만 끊을게요. 죄송합니다.]
전화를 붙잡고 호소할 게 아니라 아예 만나서 나민수의 목소리를 들려줘야지.
양재역이면 내가 있는 회사에서 먼 거리는 아니다. 지하철로 30분 이내면 도착한다. 퇴근 시간이라 택시를 타도 비슷하겠네.
양재역에는 6시 40분에 도착했다.
곧바로 라크리마를 찾아갔다. 아주 작은 동네 개인 카페였다.
덜컥.
저분이 하수진 씨구나.
한눈에 봐도 삶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서 오세요. 무엇으로 주문하시겠어요?”
카페 안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양재역이라 근처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즐비한데 이런 곳에서 개인 카페로 장사가 잘 될까.
“저는 서지오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급히 왔더니 목이 마르네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주십시오. 계산은 현금으로 할게요.”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얼굴에 피곤만 역력했다.
“저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안 드릴 게 있습니다.”
나에게는 제안이지만 하수진 당신에게는 누구나 인생에서 3번 찾아온다는 기회가 될 것이다.
틀림없다. 느낌으로는 확실하다. 그날 직접 나민수를 상대해 본 나는 알 수가 있다.
“소송 비용 전부를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재판이 대법원까지 올라가더라도 상관없이 하수진 씨의 계좌로 입금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필요한 모든 비용 일체를 제가 부담하죠.”
“저한테 왜 그러시죠?”
“대신 5:5입니다.”
“네?”
하수진 당신은 불행했던 과거를 걸고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미래를 건다.
당신과 내가 수중에 남은 과거와 미래를 한밑천 삼아 크게 한판 벌여보는 거다.
나민수라는 호구를 같이 털어먹어야 하지 않겠어?
지금까지는 하수진과 내가 호구였겠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나민수에게 받을 돈을 반반으로 나누는 겁니다. 공평하죠? 수진 씨는 돈 걱정 하나도 하실 필요 없이 여기 카페일 계속하십시오.”
“절 왜 굳이 도와주시려는 건가요?”
“이걸 들으시면 알게 됩니다.”
핸드폰을 하수진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수진이한테 재산분할 안 당하려고 얼마나 힘들게 숨겼는지 말도 마라.’
이 부분에서는 하수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전부 다 들려줬다.
“이게 모두 사실인가요?”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민수 음성 기억하시죠? 자기 입으로 술에 취해서 떠벌렸습니다.”
“원래 허풍이 심했어요.”
“허풍인지 정말인지는 재판해보면 알게 되겠네요. 어떻습니까? 결정하십시오.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벽에 붙은 시계를 손으로 가리켰다.
현재 시각 7:30.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저도 뭐가 뭔지 도저히 갈피를 못 잡겠어요.”
“저는 잠시 나가서 전화 좀 하겠습니다. 다시 돌아오면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카페를 나가서 김지영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호사님. 하수진 씨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녹음 파일을 들려줬더니 몹시 당황하네요.]
[하수진 씨가 마음을 정할까요?]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그리고 변호사님. 혹시 하수진 씨가 변호사님에게 의뢰하면 최대한 수임료를 많이 받으세요.]
[핫하하하. 갑자기 그건 왜요?]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하시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받으셔야죠. 전 다시 하수진 씨에게 가보겠습니다. 결정되면 곧바로 연락드리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하수진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저는 나민수라는 인간에게 완전히 이용만 당한 걸까요?”
“분하십니까?”
“네. 분하고 억울해서 미치겠어요. 우리 부모님 돈까지 모조리 끌어다 쓰고는 오리발을 내민 셈이잖아요. 그 당시 저한테 다른 여자는 절대 없다면서 거짓말까지 늘어놓고. 저는 그걸 믿고 나민수가 다시 저한테 돌아오길 기다렸습니다.”
“그럼 하나만 여쭤보죠.”
“뭔가요?”
“아무것도 몰랐던 어제까지의 하수진 씨. 행복하셨습니까?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내가 여기 온 지 한 시간이 다 됐지만, 손님은 한 명도 없다.
장사가 잘되는 집은 주인 얼굴에 생기가 넘치다 못해 폭발한다.
반면 안되는 집은 주인 얼굴에서 죽음의 기운마저 맴돈다.
내가 본 하수진의 첫인상은 이대로 놔두면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이번 재판으로 하수진 씨 안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나민수를 완전히 쓸어내 버리십시오. 그 끝에 엄청난 거금이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압니까? 제가 돈으로 돕겠습니다. 물론 절반을 대가로 받고요.”
김지영 변호사가 나한테 그랬다.
재판이 끝나면 이지영과 나민수를 완전히 잊어버리라고. 맞는 말이지.
그런데 완전히 잊어버리려면 한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더는 미련이 남지 않을 정도로 다 해본 후라야 한다.
모조리 비워내야 다시 새로운 걸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저는 너무 두근거립니다. 나민수가 얼마나 황당할까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딱 2년이 되기 하루 전 소송을 당할 줄 상상이나 했겠어요?”
하수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나민수도 저 못지않게 고생하며 산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잊고 지내려고 했는데 오늘 들으니까 전혀 아니네요.”
강남역 술집에서 자랑을 늘어놓던 나민수는 행복에 겨워 미칠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제 형편이 보다시피 이래요. 당장 변호사 선임할 돈이 없습니다. 월세도 못 드려서 2달 밀려 있는 상황이에요. 제 인생은요. 더 물러설 곳도 없습니다. 이런 마당에 나민수가 히히덕거리면서 즐거워하는 건 도저히 못 참겠네요.”
“비용은 하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건 저와 하수진 씨 간의 동업입니다. 소송에 들어가는 비용 일체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덕분에 나민수를 한 대 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제 변호사님께 전화 좀 드리겠습니다.”
뚜우우.
[여보세요.]
첫 신호가 울리자마자 김지영 변호사가 곧바로 전화를 받는다.
[하수진 씨가 승낙했습니다.]
[잘됐네요. 전화 바꿔주시죠. 전자 서명을 받고 지금 당장 소장을 접수하겠습니다. 서류는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전화 받아서 통화해보세요. 제 변호사님입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다시 쳐다봤다.
저녁 7:50.
하수진이 한참 김지영과 통화를 한다.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불러주고 이것저것 김지영이 시키는 대로 누르기 바쁘다.
“전화 바꿔 달라고 하시네요.”
[네. 변호사님.]
[하수진 씨의 전자 서명은 잘 받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하수진 씨의 소송대리인이 되어 재산분할 청구를 진행하겠습니다.]
[물론 여전히 제 변호사이신 거죠?]
[훗. 당연합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이지영과 하숙향에게 완전히 승소하실 때까지 선생님의 변호사입니다.]
‘영원히’라고 했더라면 더 멋질 뻔했지만, 이걸로도 충분하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오늘 중으로 모두 마무리 짓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얼마 후면 이번 달 비트코인 캐시백이 입금된다.
저번 달 12억 원이나 주고 산 골드바.
220%면 무려 26억 4천만 원.
살 떨리는 액수다. 서울의 큼직한 아파트 한 채 값.
이걸로 또 얼마나 더 불릴 수 있을지.
인생이 너무 재미있어서 미치겠네.
이 하수진이라는 불행했던 여자에게도 내 운을 조금이나마 나눠주고 싶다.
하수진이 당연히 받았어야 했을 돈.
반드시 되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절반을 거머쥔다.
양재역에 오면서 라크리마가 무슨 뜻인지 찾아봤었다.
라틴어로 ‘눈물’이었다.
“사장님. 이번 재판 이겨서 돈 많이 버시면 가게 이름부터 바꾸십시오. 왜 사람들이 그러지 않습니까. 운명은 이름 따라간다고요.”
“네 그럴게요.”
띠링.
[방금 접수를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하수진 씨께서는 승소 시 선생님께 절반을 지급하겠다는 각서도 작성하시겠답니다.]
김지영 변호사, 카레 라크리마의 하수진 사장님, 그리고 미주그룹 영업 3팀 과장 서지오.
3명이 어우러져 나민수가 감히 상상도 못 할 불의의 일격을 날렸다.
저녁 8:30.
2년이 되기 직전, 자정을 불과 3시간 30분 남겨둔 시점이었다.
**
띠링.
[재산분할 청구의 소
원고 하수진 ···.]
문자를 확인하고 나민수는 황당했다.
이게 뭐야? 스팸인가? 스팸치고는 너무 악질적인데.
법원에서 무슨 착각이 있었던 거겠지.
하여튼 공무원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일 처리가 이 모양이라니까.
이미 2년 전에 다 끝난 일인데.
지우려고 삭제를 누르다가 순간 멈칫했다.
문자 마지막에 적힌 날짜가 2년 전이 아닌 올해 저번 주였다.
당장 2년 전 재판을 맡겼던 변호사의 번호를 찾았다.
[여보세요.]
[2년 전 이혼소송을 맡겼던 나민수라고 합니다.]
[아 네. 어쩐 일이신지요? 혹시 새로 저한테 부탁하실 일이라도 생기셨어요?]
[그게 아니라 방금 문자를 받았는데 또 재산분할을 하자는 내용이었어요. 이미 끝났는데 무슨 또 소송입니까?]
[그래요? 저한테 문자를 보내주시겠어요.]
5분 후에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저기 선생님.]
변호사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가 날짜를 찾아봤는데요. 아무래도 새로 소송을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파격적인 제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