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엉뚱한 곳에서 대박 >
어린이용 자전거였다.
그것도 2대나 있었다.
2대 모두 핑크색 예쁜 스타일이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남자 어린아이의 것.
그렇다면 최소 어린 남자 꼬마가 둘 있다는 뜻인데.
어린아이면 남녀 할 것 없이 층간 소음에는 최악이지만 그중에서도 꼬마 남자아이는 차원을 달리한다.
산책시켜 달라고 조르는 강아지조차 지쳐서 집에 돌아가자고 애원하게 만들 정도의 강철 체력.
달리기와 점프가 일상이다.
거기에 남자아이가 2명이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서로 얼마나 우당탕 싸우면서 뒹굴까. 집에 오자마자 레슬링부터 한판 시작할 나인데.
하마터면 모르고 계약할 뻔했네.
이사 간다는 사람도 과연 정말 취직을 해서 여기를 떠나는 것일까?
“과장님. 저게 있다는 말은.”
“하나 씨는 층간 소음이 뭔지 모르고 자랐을 거야. 직접 안 겪어본 사람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나도 처음에는 층간 소음 때문에 살인 난다는 말을 이해 못 했거든. 고시원에서 살아보니까 이해가 되더라고.”
중개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까?
“중개사님. 여기 어린아이 사는 거 알고 계셨어요?”
“몰랐어요. 정말입니다. 난 그저 여기 사시던 분 얘기만 들었지. 그분이 말씀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5층은 원룸이 아니었다.
혹시 몰라서 벨을 눌러봤다.
[네. 누구세요?]
[4층에 집 보러 온 사람입니다.]
[네. 그런데요. 왜 그러시죠?]
[죄송합니다만 혹시 여기 어린아이들이 사나요?]
[아 그것 때문에 그러시는구나. 우리 애들은 조용해요. 뛰어다니지도 않고. 얼마나 내가 주의를 시키는데.]
[네. 알겠습니다.]
아이들 엄마겠구나. 엄마니까 당연히 그렇게 말하겠지만 밑에서 사는 사람은 아닐걸.
“건물주 아들 내외가 관리도 할 겸 여기 살아요. 어린 애들이 있는 줄은 몰랐네.”
“저는 그럼 4층 원룸은 계약 안 하겠습니다.”
“그래요. 다른 곳 구경하시겠어요.”
“아니요.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다음에 구경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여기 명함 받으세요. 사장님도 명함 한 장 주시면 제가 연락드리죠.”
“저는 명함이 따로 없어서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임하나와 함께 차로 돌아왔다.
“과장님. 명함 일부러 안 주신 거죠?”
“아까 중개사 표정 봤어?”
“네. 많이 당황하던데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건물주 아들 내외가 여기 사는 걸 알았다면 자녀가 있다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잖아.”
“그렇죠.”
“조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입 다무는 거지.”
“과장님 덕분에 하나 배웠네요. 위층을 올라가 봐라. 거기 누가 사는지 반드시 체크한다.”
“저렇게 어린애들 관련된 물건이 눈에 띄면 일단 피하는 게 좋아. 애들은 조용히 하라고 타이른다고 조용해질 수가 없어. 그게 애들이잖아.”
“오늘은 그만 보시겠어요?”
“하나 씨 차 얻어타서 덕분에 편하게 돌아다녔어. 고마워.”
“아닙니다. 저야말로 오늘 돌아보고 많이 배웠어요.”
부잣집 딸인데도 어쩜 저렇게 겸손한지.
잘 사는 집 자식들일수록 더 바르고 착하다는 말이 틀린 게 없다. 냉정하게 내가 겪어본 바로도 그랬다.
“저기서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가세요. 제가 쏠게요.”
“내 방을 더 많이 봤잖아. 하나 씨는 몇 군데 구경도 못 했는데. 오히려 내가 사야지. 차도 얻어타고. 내가 살 테니까 따라와.”
“감사합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임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동생이 과장님 얘기를 하던데요. 뭐하시는 분인지 모르겠다면서. 핫하하.”
“영업 3팀 과장이잖아.”
“우주가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어요. 같이 게임도 하고 재미있었다던데요.”
“고맙네. 나 같은 아재랑 재밌게 놀아줘서.”
“과장님은 아저씨 느낌 안 나세요.”
“하나 씨도 아부가 많이 늘었어.”
“아니요. 정말이에요. 부장님은 그런 느낌 확 나는데. 담배를 많이 피우셔서 그런가.”
역시 담배는 노화의 지름길이지. 끊길 잘했네.
“잘 들어가.”
“댁까지 태워드릴까요?”
“아니야. 가까워. 조금만 가면 되는데 들어가. 오늘 고마웠어.”
“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고시원에 돌아오다가 편의점에 들렀다.
저번 장모가 와서 행패 부렸을 때 나 대신 욕을 실컷 날려준 여자 알바가 오늘도 근무하고 있었다.
담배 2갑을 피우라고 사준 이후로는 나만 보면 희미하게 웃는다. 딴에는 최대한 친절하게 웃는 게 분명하다. 그거라도 고맙네.
전에는 찾는 거 어디 있냐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한 번 가리키고 끝이었는데 최근에는 말로 설명까지 해준다. 엄청난 특별 대우지.
오늘도 음료수와 간식거리 몇 개 사고 계산하니까 한 번 웃어준다.
나도 미소로 화답했다.
음료수를 사 들고 고시원 휴게실에 앉았다.
밖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좁은 방 안으로 들어가려니 갑갑했다.
역시 이사를 가기는 가야겠네.
좀 더 알아보면 괜찮은 원룸이 나오겠지.
하필 또 그 ‘이것이 이혼이다’ 편을 재방송해주고 있었다. 화제의 인기 프로라서 어쩔 수가 없다.
“동탄의 그녀 실물 한 번 봤으면 좋겠네요.”
“봐서 뭐하게.”
휴게실에서 자주 마주치는 두 녀석이었다.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건지 아니면 고향이 같은 건지 항상 붙어 다닌다.
“실물이 얼마나 대박이면 남자들이 저렇게 매달리겠어요.”
“인터넷에 동탄의 그녀 검색하면 나올걸. 전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요?”
“무슨 캡처 사진이었는데. 뉴스 인터뷰였나? ‘이것이 이혼이다’ 방송 나가고 나서부터 유명해졌잖아. 네티즌들이 얼마나 집요하냐. 신상 털다가 찾았나 봐.”
“형. 근데 뉴스 인터뷰라는 건 원래 연기자 섭외해서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니었어요?”
“거의 그런데 가끔 진짜 일반 시민들한테 인터뷰 딸 때도 있잖아. 기왕이면 예쁜 여자로 했겠지. 인터넷에 인터뷰녀 검색해봐라. 레전드 인터뷰녀들 몇 명 있어.”
“동탄의 그녀 정도 외모면 레전드 맞네요.”
“충분하지. 개인적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본다.”
대단한 여자네.
동탄을 휘젓고 다니면서 인터뷰는 또 언제 했었냐.
참 활동력 하나만큼은 알아줘야 하는 여자다.
그러니 그 많은 남자를 쉬지 않고 만났겠지.
“찾았네. 여기 봐봐.”
“모자이크 없는 얼굴은 처음 봐요. 엄청난 미인이네요.”
“몸매는 더 예술이야. 돌싱이라도 좋으니 이런 여자 만날 수만 있다면. 크~.”
“옷을 보니까 최근은 아니네요. 몇 달 전 같기도 하고.”
어쨌든 얼굴과 몸매가 워낙 눈에 띈다. 방송국에서도 기왕에 뉴스 자료 화면으로 나갈 바에야 조금이라도 외모를 따질 수밖에 없다. 시청률에 직결되는 문제잖아. 뉴스도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데.
“무슨 백화점 개장 특가 행사 때였었네. 뒤에 배경 봐봐.”
“형. 동탄에도 백화점 있어요?”
“한두 개 있지 않을까.”
개장 행사라···.
그때쯤이었구나.
기억을 최대한 더듬어봤다.
동탄에 새 백화점이 들어선다며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던 게 떠오른다.
내가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렸던 그즈음 이었는데.
혹시···.
핸드폰으로 ‘동탄의 그녀’를 검색해봤다.
대부분은 모자이크 처리된 ‘이것이 이혼이다’ 자료 화면이었다.
그중 드물게 이지영의 실물 사진도 있었다.
휴게실에서 재방송을 보고 있는 두 녀석이 말했던 바로 그 인터뷰 캡처 사진이었다.
얼굴은 멀쩡하다.
당연하지. 눈 주위가 맞아서 부었는데 인터뷰에 쓸 리는 없고.
그 백화점 개장 특가 행사도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21일부터 27일까지 1주일간이었다.
내가 자신을 때렸다고 이지영이 주장하는 시각은 20일 자정 그러니까 21일 0시.
21일 저녁 7~8시경 이지영은 역삼역 호텔에서 고준호를 만났다.
만약 개장 특가 행사 첫날인 21일 오후 이지영이 저 인터뷰를 한 거라면?
내가 무죄라는 완벽한 증거다.
김지영 변호사가 그랬었지.
엘리베이터 영상은 법원에서 증거가 안 될 수도 있다고.
아마도 김정민 변호사가 이지영의 폰에 불법으로 위치추적 앱을 깔았고 우린 그 김정민한테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방송국에 전화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고객센터 운영 시간이 아닙니다. 평일 오전 9시부터 6시까지 다시 전화해주십시오. 긴급 제보를 원하시는 시청자께서는 0번을 눌러주십시오.]
늦은 시간이라 역시 고객센터는 안 된다.
혹시 몰라서 0번을 눌러 보기로 했다.
잠시 통화 연결음이 울린다.
[안녕하십니까. 긴급 제보 센터입니다.]
[안녕하세요. 제보 드릴 게 아니라 한 가지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긴급한 사건 사고 제보만 받고 있어요. 일반 업무는 평일 일과시간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저기요. 그러면 하나만 여쭤볼게요. 이브닝 뉴스 제작진과 곧바로 연결할 수 있는 직통 내선 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상담사가 귀찮아하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도 그만큼 절박하다.
[잠시만요. 내선 번호를 불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안 받으실 거예요. 내일 전화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궁금해서 도저히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뚜우우. 뚜우우.
[보도국입니다.]
다행히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무작정 가르쳐 달라고 하기에는 너무 막무가내고. 그렇다고 이것저것 상세히 털어놓기에는 부담된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평소에 이브닝 뉴스를 즐겨 보는 애청자입니다.]
[감사합니다.]
[방송을 보다가 우연히 제가 아는 사람이 인터뷰를 하더라고요.]
[그러셨어요.]
전화 통화하는 남자는 내 말에 별로 관심이 없다. 전화기를 귀에다 대고 눈은 모니터를 응시하는 게 분명했다. 내가 가끔 그래서 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이 정확히 언제 인터뷰를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네? 그건 지금 확인해드리기 힘든데요. 저희가 워낙 인터뷰하는 분도 많고. 또···. 잠시만요.]
통화에 전혀 집중을 안 한다. 아마 야간 당직인 듯하다. 이런 전화를 상대하는 것 자체가 피곤하겠지.
[죄송합니다. 하여튼 그래서 지금 제가 알려드릴 수가 없네요. 내일 오전에 다시 전화 주시겠어요?]
[‘이것이 이혼이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방송했던 동탄의 그녀 아시죠?]
잠깐 말이 없다.
[네. 그런데요.]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겨우 관심을 끌었네.
[그 사람이 이브닝 뉴스에서 인터뷰했었고 그게 방송에 나왔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동탄의 그녀가 정확히 언제 인터뷰했는지 그겁니다.]
[날짜 말씀입니까?]
[네.]
[날짜만 알려드리면 되나요? 그런데 하나만 여쭤볼게요. 동탄의 그녀랑 어떤 사이시길래 그게 궁금하신지요?]
[죄송합니다. 그건 알려드리기 부담스럽습니다.]
눈치껏 상상해라. 아까보다 한결 더 호기심이 생긴 게 분명하다.
[아 네. 저희랑 그분이 인터뷰했던 날짜 말씀이죠?]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침 제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왠지 재미있는 일 같네요.]
제발.
방송국이니 몇 달 전 자료라도 폐기하지 않고 오래 보관하지 않을까.
[여기 있네요. 저희 리포터가 동탄 백화점 개장 행사 때 인터뷰한 화면이네요. 이때 저도 같이 가서 기억하는데 백화점 개장 첫날이었습니다. 이런 인터뷰는 무조건 첫날에 가서 찍습니다. 편집 전 영상에 기록된 시간은 21일 오후 1시로 나오네요.]
훗후흐흐흐.
21일 0시에 나한테 맞았다면서.
21일 오후 1시에는 멀쩡한 얼굴로 백화점 행사에서 인터뷰를 해?
이번에는 절대로 못 빠져나갈 거다.
내 핸드폰은 모든 통화가 자동녹음되도록 설정되어 있다.
녹음 파일을 곧바로 김지영 변호사에게 전송했다.
5분도 안 돼서 전화가 걸려온다.
[선생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니요. 천만에요.]
김지영 변호사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처음 뵀을 때 512기가짜리 SD카드 3개 주면서 절 놀라게 하시더니 오늘 또 해내시는군요. 내일 방송국에 정식으로 인터뷰 사본을 요구하겠습니다. 정말 큰일 하셨습니다.]
< 엉뚱한 곳에서 대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