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렁으로 이끌다 (2연참 1/2) >
[네. 전화 바꿨습니다. 박하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이것이 이혼이다’ 박하준 피디님 맞으시죠?]
[네 그런데요. 누구신지요?]
[저는 미주그룹 임누리 상무님의 소송대리인입니다.]
[아 네.]
임누리 측이 왜 전화했을지는 뻔했다.
방송이 나가면 늘 양쪽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이 내용은 틀렸고 저 내용은 맞으니 수정해서 다시 내보내달라. 뭐 그 비슷한 항의 전화겠지.
[제보할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말씀해보십시오.]
어지간히 쇼킹한 게 아니면 지금 여론을 못 뒤집을 텐데.
임누리는 천하의 개새끼로 낙인찍혔다.
특히 여초 사이트 등지에서는 친일파 앞잡이보다 더 쳐죽일 놈으로 전락했다.
[이지영이 과거 접대부 출신인 건 알고 계십니까?]
[그래요?]
괜찮은 소스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좀 약하다.
물론 자극적이긴 한데. 접대부 출신이라고 해서 임누리의 협박 사실이 과연 묻힐까?
[그게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단순히 접대부 출신이란 사실만으로 제가 전화 드렸겠습니까?]
[그럼 또 뭐가 남았죠?]
박하준 피디는 이것저것 예상을 해 봤다.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악질적인 사기꾼입니다. 접대부 은퇴하려고 그 바닥에서 발을 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수억 원의 돈을 빌리고 튀었습니다. 그중에는 같이 일하던 동료도 많습니다. 접대부면서 동료까지 등쳐먹은 거죠. 증거도 있습니다. 여러 명에게 차용증까지 써 줬더군요. 직접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사기꾼?
요거 괜찮네. 시청자 게시판이 얼마나 들썩거릴지 벌써 기다려진다.
역시 싸움은 양쪽이 팽팽해야 제맛이다. 그래야 불길도 오래 계속되고. 마침 더 거세게 타오를 장작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지금은 너무 한 쪽이 일방적이라 재미가 없다.
묵직한 통나무 장작으로 딱이지. 아주 활활 불타오르겠네.
[증거라고 하셨는데요. 지금 바로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차용증 사본을 따로 복사해서 보내드리죠.]
[이지영 씨에게 돈 빌려주셨다는 분도 혹시 직접 방송에 출연하실 수 있으실까요?]
[그건 곤란해하십니다.]
[그렇군요.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재연 전문 대역 배우를 써도 되고요. 그건 상관없으시죠?]
[좋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게 진정한 개싸움이지.
진흙탕을 마련해주는 건 ‘이것이 이혼이다’의 메인 피디인 박하준 자신이 할 일이다.
누가 누가 더 추잡한가.
폭로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신이 나서 죽겠다.
이미 ‘이것이 이혼이다’는 종편 프로그램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 중이다. 사장까지 직접 열심히 하라며 격려금을 보내줄 정도니 승진은 따논 당상이지.
전혀 미안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말 고맙다 이지영 그리고 임누리 너희 둘 다.
**
김정민 변호사는 호텔 화장대에 앉아 화장을 고치고 있는 이지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자신은 이지영과 서지오의 이혼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최대한 이지영에게서 멀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이지영의 전화를 받고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여기 이지영과 함께 있다.
뇌가 녹아서 판단력 자체가 사라져 버린 건가? 아니면 이지영이라는 여자의 몸뚱이가 그리워서 돌아버린 걸지도 모르겠네.
중독이었다.
담배나 술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중독.
혼자 있을 때뿐만 아니라 변호사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때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온통 이지영의 몸만 떠오를 뿐이었다.
사랑은 분명 아니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이지영이 미웠지만, 도저히 그 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파멸로 이끄는 여자라는 걸 잘 알지만, 전화를 받자마자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당장 약속장소로 차를 몰았다.
“조만간 검사한테 대질신문 다시 하자고 요청할 거야. 그때 분명히 참석할 거지?”
“···.”
“왜 대답이 없어?”
“생각해보고.”
“자기야. 자기 없이는 나 너무 힘들어. 알지?”
“요즘에는 몇 명이나 만나고 다니는 거야?”
“상황이 이런데 무슨 남자를 만나. 이혼소송 시작하면서 남자 만난 건 자기가 처음이야.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거짓말하지 마. 나 말고도 다른 남자 여럿 있는 거 알고 있어.”
“거짓말 아니라니까. 귀찮게 연락 오는 놈들은 있지. 내가 그거까지 어떻게 막을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그런 새끼들 때문에 전화번호를 바꿀 수도 없고. 그런 것들은 전화번호 바꿔도 어차피 또 귀신같이 내 번호 알아내서 전화해.”
김정민 변호사는 속이 뜨끔했다.
이지영의 핸드폰에 위치추적 어플을 몰래 깔아서 서지오에게 역삼역 호텔을 가르쳐줬던 게 떠오른다.
이지영이나 서지오 둘 다 자기를 가만 내버려 두질 않는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몸이 뇌의 명령을 거부한다.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해. 서지오 그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내가 역삼역에 간 걸 알았냐 그 말이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몇 달 전에 핸드폰에서 이상한 어플을 찾았어. 주변에 물어보니까 위치추적 어플이라데. 곧바로 지우긴 했지만.”
“내가 범인이라는 거야?”
“훗. 왜 갑자기 발끈하고 그래. 수상한데.”
“난 아니야.”
“마지막 기회를 줄게 솔직히 말하면 용서도 해주고. 만약 거짓말하면 슬프지만, 우리 다시는 못 만나.”
“···.”
“자기가 한 짓이지? 서지오한테도 자기가 정보를 줬고? 잘 생각해서 대답해. 우리 만남이 오늘로 영원히 끝날지도 모르니까.”
여기서 잡아뗀다고 이지영이 뭘 어쩌겠나.
김정민 자신이 했다는 증거가 없질 않나.
“아니라니까.”
“그래? 실망이네. 난 자기 믿고 있었는데. 이번 이혼만 마무리되면 자기랑 새 출발 하려는 생각도 했었단 말이야. 자기는 내가 돌싱에 딸 두 명 있는 것도 이해해주는 남자잖아. 요즘은 그런 이해심 많은 남자가 드물더라. 거짓말하는 남자는 내가 믿고 인생을 함께할 수가 없잖아.”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이지영의 몸매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지영이 화장대에서 일어나서 김정민에게 다가왔다.
김정민의 손 위에 앉는다.
그러더니 턱을 김정민의 왼쪽 어깨에 올리고 빤히 쳐다본다.
자연스럽게 이지영의 몸이 김정민의 왼팔에 밀착됐다.
“솔직히 얘기해. 그럼 다 용서해줄게. 대신 나도 부탁이 있어.”
“뭔데?”
“대질신문이 또 열리면 나와서 좋은 얘기해 줘. 자기는 똑똑한 변호사잖아. 어떻게 해야 내가 무죄 받을 수 있는지 알 거 아니야.”
“···.”
“자기가 위치추적 어플 내 핸드폰에 깔고 서지오한테 일러준 거 맞지?”
“나랑 결혼하면 다른 남자랑 안 만날 자신 있어?”
“자기 하기 나름이지. 와이프한테 신경만 잘 쓰면 여자가 왜 바람피우겠어? 안 그래? 서지오 그 새끼는 돈 벌어서 생활비만 갖다 주면 남편 역할 다 한 줄 아는 등신 새끼였어. 자기는 잘 할 거잖아.”
“대질신문 또 벌어지면 연락해. 검사가 우리 요청에 응할지는 아무도 몰라.”
“훗후흐흐. 내 핸드폰에 위치추적 어플 깐 건 용서해줄게.”
“그건.”
“말 안 해도 알아. 날 사랑해서 실수로 그랬던 거잖아. 내가 다른 남자 만나고 다닐까 봐 불안해서.”
“앞으로는 안 그럴게. 용서해줘.”
“이미 다 용서했어. 그런데 말이야. 대질신문에 나와서 나한테 유리한 얘기 안 해주면 그때는 정말 끝이야. 영원히 나 못 볼 줄 알아.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았어. 정말 미안해.”
김정민은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자기 왼쪽 팔 전체를 감싸다시피 한 이지영의 몸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
[선생님. 이지영 측에서 추가 대질신문을 요구한 모양입니다. 검찰청에서 출석 요구서가 방금 도착했습니다.]
[또 대질신문을 한다고요?]
[네. 이런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정치인의 범죄도 아닌데 이렇게 대질신문을 여러 번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당연히 가야죠.]
[제 생각에는 아마 이지영 측이 무슨 반전을 노리고 수를 쓴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기한테 유리한 증거를 발견했다거나 아니면 우리가 내세운 증거를 무력화시킬 방법을 찾은 거겠죠.]
[설마요?]
[하지만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브닝 뉴스 측에서 받은 이지영의 인터뷰 영상 사본이 있습니다. 이것보다 확실한 증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지영 측이 무얼 들고나오든 이지영은 유죄입니다.]
[알겠습니다. 대질신문 때 뵙겠습니다.]
이지영도 순순히 넋 놓고 곱게 패배를 인정할 여자는 아니다.
자기 딴에는 온갖 발악을 다 하는구나.
그래. 어디 결국 누가 이기나 보자.
김지영 변호사와 미리 한 번 미팅을 가지고 대비를 했다.
추가 대질신문 당일에도 역시 일찍 눈이 떠진다.
검찰청도 두 번째 방문이라 처음처럼 낯설지는 않다.
두근거리기는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이 정도 긴장이면 딱 좋네.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저절로 일찍 일어나게 되던데요.”
“준비되셨죠?”
“물론입니다.”
“그럼 가시죠.”
처음 왔을 때와 똑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우철 검사실 앞에 도착했다.
그때 안내해주던 수사관이 또 우리를 맞이한다.
똑같은 의자였다. 앉아서 기다리기를 30여 분.
데자뷰인가?
이번에도 이지영은 느긋하게 도착했다. 정시에 오기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오늘도 복장이 요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양쪽 아무 말도 없이 의자에 앉았다가 조사실에 입장했다.
“이지영 씨는 매번 늦으시는군요.”
“준비할 거리가 많아서요.”
“그 대답도 매번 마찬가지고요. 서지오 씨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이렇게 두 분을 오시라고 한 건 추가 조사가 몇 가지 필요하다고 제가 판단해서입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네.”
“네.”
“모두 자리에 앉으시죠. 그리고 이지영 씨.”
“네.”
“또 다른 참고인은 언제 오는 겁니까? 원래 조사 시작할 때부터 참석하시기로 하지 않았나요?”
“죄송해요. 검사님. 그분이 오늘 조사에 올지 말지 고민이 많으셨나 봐요. 그래서 저도 여기 오기 전 미리 통화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자기도 모르겠다던데요.”
“출석 요구서를 받고 제대로 확인한 건 맞습니까?”
“그건 틀림없어요.”
또 다른 참고인이 이지영과 미리 통화를 했다고?
사전 미팅에서 김지영 변호사는 그렇게 말했었다.
이미 저번 대질신문에서 양측이 다툴만한 건 모두 다뤘다. 이지영 측이 새롭게 무얼 주장할 만한 여지는 전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우리가 이지영의 백화점 개장 행사 인터뷰를 새로 손에 넣었으니 차라리 잘 됐다는 것이다.
이번 대질신문에서 이지영의 관뚜껑에 못을 박아버리게 될 거라고 말이다.
이지영과 미리 통화를 했다면 이지영이 만나는 남자들 중 하나일 텐데.
김지영 변호사는 그걸 제일 우려했었다.
김정민 변호사가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에게 불리한 말을 늘어놓는 것.
이지영 몰래 위치추적 어플을 깔았다. 거기서 얻은 정보를 근거로 우리에게 역삼역 호텔을 가르쳐줬다.
우린 그걸 악용해서 역삼역 호텔 엘리베이터 영상을 획득했으니 우리가 내민 영상은 증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
똑똑.
“네. 들어오세요.”
“검사님. 출석을 요구했던 참고인분이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덜컥.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역시 너였구나.
김정민 변호사였다.
불나방처럼 하나둘씩 이지영에게 이끌려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몰려드는구나.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그런 불나방을 싸그리 태워 죽일 결정적인 카운터어택이 준비되어 있다.
김정민.
불구덩이에 스스로 날아 들어온 걸 환영한다.
< 수렁으로 이끌다 (2연참 1/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