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갈공명의 비단주머니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임? 사기꾼이라니? 동탄의 그녀는 절대 그럴 리 없음.-
-방송 못 봤어요? 차용증이 떡하니 있는데 잡아떼기는.-
-나도 전에 중고 안전 거래하다가 사기당한 적 있는데 갑자기 짜증이 확 치미네.-
-방송이 사실이라면 이건 단순히 중고거래 사기 수준이 아니지. 아예 작정하고 한꺼번에 여러 군데 빌려서 튄 거 아닙니까.-
-그럼 도대체 총 얼마를 해 먹었다는 소리?-
-동탄의 그녀 이지영이 설마 그런 인간일 줄이야.-
-실명은 지우세요.-
-ㅇㅈㅇ 나가요 출신이라던데.-
-유명한 XXX랑 OOO에서 일한 전적도 있다고 함.-
-이번 방송에 나왔던 정 모 씨가 거기 새끼 마담으로 일했었음.-
-증거 있어요? 님이 그걸 어찌 아세요? 직접 가 봤어요?-
-어쩐지 ㅇㅈㅇ 그런 삘이 나더라니.-
-그 여우 같은 꽃뱀 X년이 우리 잘생긴 이사님한테 꼬리 쳐서 한탕 뜯어내려다 실패한 거지 뭐.-
-물타기 오지네. 사람이 과거 청산하고 새 출발 할 수도 있지. 지금 여기서 유흥업소 안 가본 사람만 ㅇㅈㅇ한테 돌 던지세요.-
-맞아요. ㅇㄴㄹ가 개새끼지 ㅇㅈㅇ이 무슨 죄가 있음? 여러분 안 그래요?-
‘이것이 이혼이다’ 추가 방송이 나간 후 인터넷 게시판은 또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인터넷 게시판도 찬반이 갈렸다.
남성 사이트 쪽에서는 임누리 편을, 여성 사이트 쪽에서는 이지영 편을 주로 든다.
어느 사이트를 가도 임누리와 이지영 중 누가 더 잘못했느냐로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
굳이 내가 안 거들어도 이지영은 욕을 바가지로 긁어먹고 있었다.
주말을 맞이해서 원룸을 돌아다니던 중에 김지영 변호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네. 변호사님.]
[이지영 측 김승재 변호사로부터 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번에는 뭐라고 하던가요?]
[똑같은 소리뿐입니다. 봐달라 그거죠. 최소한 위자료라도 좀 깎아달라는 소리뿐입니다.]
[변호사님이 알아서 대응해주십시오. 아직 저한테까지는 직접 전화가 안 걸려오네요.]
[네. 제가 그렇게 경고를 했습니다. 만약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서 귀찮게 해드린다면 절대 합의해주지 않겠다고요.]
역시.
매 순간 오로지 자신의 의뢰인만 생각하는 저 투철한 직업정신은 진짜 본받아야지.
사소한 것 하나도 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경 쓰는 모습이 아주 그냥. 참 잘 골랐어.
다른 변호사였어도 이랬을까.
이혼은 언젠가 마무리된다.
솔직히 요즘 나는 내 이혼보다 하수진의 재판에 더 관심이 쏠린다.
하수진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이긴다면 재산분할로 얼마나 받을까?
난 그럼 거기에서 절반을 제대로 챙길 수 있을까?
그런 의문들 말이다.
나민수가 얼마나 코인을 잘 숨겨놨길래 2년 전 법원에서는 도대체 못 찾았단 말이냐.
이러다가 이번 재판에서도 아무 성과 없이 그냥 헛돈만 날리는 거 아닌가.
하수진에게 철석같이 약속했다.
재판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모든 비용을 내가 부담하겠다고.
하수진의 재산분할 재판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나민수의 숨겨둔 코인을 얼마나 제대로 찾아내느냐가 관건이다.
[변호사님. 보통 이혼소송에서 재산분할을 하면 법원에서는 어떻게 조사하나요?]
[보통 법원에서 재산목록을 제출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사실대로 다 써내는 사람은 물론 드뭅니다.]
[그 재산목록에 코인도 들어가나요?]
[코인은 생긴 지가 얼마 안 돼서 법령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대신 실무에서는 당연히 재산에 포함시켜 분할 해줍니다.]
[그럼 나민수는 재산목록에 코인을 빼고 제출했겠네요.]
[그랬겠죠.]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무슨 대책이 필요하겠는데요.]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물론 제가 재산조회 신청을 하긴 할 겁니다. 나민수가 무슨 재산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법원에 요청하는 거죠.]
[2년 전에도 그랬는데 못 찾은 거 아닙니까?]
[법원이 검찰이나 국정원처럼 그렇게 개인 정보를 샅샅이 뒤져서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2년 전 하수진 씨는 겨우 위자료 5천만 원밖에 못 받았겠죠. 더구나 코인 같은 경우는 찾기가 정말 힘듭니다. 사실상 나민수가 끝까지 잡아뗀다면 마땅한 방법이 없긴 해요.]
어쩐지 쉽지 않을 것 같더라.
이대로라면 또 2년 전처럼 나민수에게 당하기만 할 게 뻔하겠네.
괜히 하수진을 부추겨서 재판하자고 그랬나.
무슨 특단의 방법을 찾아야겠네.
미주그룹 영업3팀 과장으로 일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외부에서 내부 정보를 알아내는 건 정말 힘들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되지.
미주그룹에 납품하려는 업체를 찾아가서 단가가 얼맙니까? 물어본다고 솔직히 답해줄 리가 없잖아.
그럴 때 나는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어떻게든 찾아서 구슬렸다. 평소에 미리 인맥관리를 해 두는 게 그래서 중요했다.
퇴직한 사람을 찾아가는 게 제일 좋다.
그중에서도 잘려서 회사를 나간 사람이면 딱이지.
술이나 한잔 사주면서 같이 예전 회사 욕을 잔뜩 해준다. 그리고는 우리가 당신 예전 직장의 어떤 물건을 구매해서 팔려고 하는데, 대강 어느 정도 단가면 그곳에서 응하겠냐?
그러면 자기 경험에 비추어 직접 얘기해주거나 아니면 아직 회사에 남아있는 동료한테 넌지시 물어봐 주곤 했다.
[변호사님. 혹시 이러면 어떨까요? 나민수 주변에 우리가 포섭할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니지. 그것보다는 아예 이지영과 협상을 하는 겁니다. 위자료를 적게 받겠다. 대신에 나민수가 가진 코인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 그렇게요. 이지영은 자기 이득을 위해서는 누구든지 이용할 여자입니다.]
[···.]
김지영 변호사가 말이 없다.
왜 그러지?
[선생님. 제갈공명이세요? 선생님은 가끔 저한테 비단주머니를 하나씩 주시는 것 같아요.]
아니 이분이 갑자기 평소에 안 하던 농담을.
당황스럽네. 젊은 여성이 삼국지 인물을 언급하는 것도 웃긴다.
[이지영은 나민수와 여전히 불륜관계를 유지 중일 겁니다. 나민수가 자기 입으로 그랬잖아요. 이지영이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고요. 이지영은 분명 나민수의 코인에 대해서 정확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아 이 남자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돈이 많을 수도 있겠다. 이렇게요.]
[그렇겠네요. 현재로서 이지영의 두 딸 친부는 나민수가 거의 확실하니까요. 여러 남자를 만났던 이지영이 굳이 나민수의 딸을 낳았다는 건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건 베팅이었을 겁니다.]
그래. 이지영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언제든지 더 돈 많은 남자에게 갈아타기 위해서 항상 준비 중인 여자. 프로환승러.
나민수가 정말 자기 말대로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돈을 벌었다면 이지영이 뼈를 묻을만하겠지.
[제가 이지영과 직접 통화해서 얘기를 꺼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불편한 일들은 모두 변호사님께만 맡기게 되네요.]
[선생님. 변호사로서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역시 마무리는 언제나 그 섹시한 멘트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안녕히 계십시오.]
전화를 끊고 5분도 안 돼서 또 전화가 걸려온다.
임우주였다.
주말에 미인 2명이 연달아 전화를 걸어오다니.
아마도 지금이 내 인생 최고의 황금기가 아닐까?
[과장님. 지금 어디세요?]
[방 보러 다니던 중이야. 오늘 게임 할 시간이 없어. 다음에 하자.]
[그러니까 지금 어디신데요?]
얘가 갑자기 왜 이리 스토커처럼 어디냐고 캐묻지.
[여기 신사동 쪽인데.]
[제가 지금 그리로 갈게요.]
[왜?]
[저번에 저한테 부탁하셨잖아요. 수정이 아버님 뵙게 해달라고.]
[응.]
[수정이 아버님이 지금 마침 강남 어느 미술관에 계세요. 수정이가 얘기해줬어요.]
[그래?]
[만나 뵙기 힘든 분이니 이럴 때 우연을 가장하고 미술관에서 마주치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 연고도 없는 과장님을 갑자기 수정이 아버님과 만나게 해드릴 방법이 없더라고요. 오늘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그래. 이건 기회지. 이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다.
무조건 잡아야지.
[정말 고마워. 내가 어디로 가면 될까?]
[제가 신사동으로 지금 갈게요. 별로 안 멀어요. 10분 내로 도착합니다.]
[알았어. 주소 문자로 보내줄게.]
정말 고맙다.
자기 일처럼 이렇게 열심히 알아봐 주다니.
임우주한테 나중에 제대로 한턱 쏴야겠어.
10분도 안 돼서 차가 도착했다.
“과장님. 오랜만이네요. 요즘 바쁘셨나 봐요?”
“응 이것저것 일이 많았어. 너도 알다시피 이혼 중이잖아.”
“너무 남의 일처럼 얘기하시네요. 어서 가요. 미술관 여기서 별로 안 멀어요.”
“정말 고맙다. 이 은혜 잊지 않을게.”
“과장님.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은혜 어떻게 갚으실지 기대하고 있어요.”
이런 곳에 미술관이 있었나?
하긴 나는 미술이라곤 단 1의 관심도 없던 놈이었으니. 얼핏 보면 미술관이 아니라 무슨 가구점이나 인테리어 매장 같기도 했다.
강남 한복판 4층짜리 건물을 통으로 미술관으로 쓰다니. 이곳에 다른 빌딩을 지어서 상가 임대를 하면 얼마를 벌 수 있을까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쪽팔리지만 고백할게. 사실 나 미술관이라는 데를 태어나서 처음 와봐.”
“상관없어요. 어서 들어가요.”
입구부터 뭔가 알 수 없는 괴이한 쇳덩어리들이 우리를 반겼다. 1층에는 그림보다 조각 위주로 배치되어있었다.
임우주가 두리번거리면서 수정이 아버님을 찾는 눈치다. 1층에는 안 계신듯했다. 2층도 마찬가지.
“이상하네. 분명 여기로 오신다고 수정이가 그랬는데.”
“맞겠지. 아직 3층이랑 4층도 남았잖아.”
“거긴 수정이 아버님이 좋아하실만한 그림이 없단 말이에요.”
“일단 3층도 가 보자.”
허탕인가?
임우주와 3층 올라가는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어? 너 우주 아니냐?”
3층에서 내려오는 어떤 남성이 임우주에게 아는 체를 한다.
“안녕하세요. 휴우우~.”
“왜 한숨을 쉬니? 운동 좀 해야겠다. 계단이 그렇게 가파르지도 않은데. 핫하하.”
오직 나만이 임우주가 내쉰 한숨의 의미를 알겠구나.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구경하러 왔니?”
“네.”
수정이 아버님이란 분이 날 슬쩍 쳐다본다.
“남자친구냐?”
“아니요.”
단호하게 말하네.
수줍게 귀까지 빨개지면서 ‘아직은 아니에요.’ 뭐 이런 낯간지러운 드라마 대사를 솔직히 1% 정도는 기대했는데.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서지오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우주 친구 아빠예요. 그림에 관심이 많은 분이신가 봐요.”
“아닙니다. 저는 종합 상사에서 일하는 평범한 샐러리맨입니다.”
“그래요? 재미있는 분이시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구경이나 하시죠.”
‘그래 그림 잘 구경해 다음에 보자’ 이러면서 우릴 보낼 수도 있었다.
호탕한 분이신 듯하다.
여기서 뭐라고 해야 임우주 친구 아버님의 관심을 끌지?
임우주가 수정이 아버님과 이런저런 근황 얘기를 하면서 내 눈치를 본다.
적당한 틈을 봐서 끼어들라는 사인이 분명했다.
임우주가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다.
“다음 달에 이진수 화가 ‘무제’ 경매에 나오는 거 아시죠?”
“응. 안 그래도 내가 눈여겨보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참 이거 곤란하게 됐어.”
“뭐가요?”
“위작이란 소문이 지금 파다해. 넌 못 들었니?”
“아 그랬군요.”
“경매사에서 한 번 도난 당했다나 봐. 곧바로 되찾긴 했지만 아무래도 찜찜하잖니. 미술품은 도난 경력이 있으면 진위 판정이 곤란해져. 이번 경매에 참가할지 말지 고민이다. ‘무제’말고 다른 건 눈에 들어오는 게 없던데.”
임우주. 멋진 어시스트였다. 너의 역할은 여기까지면 충분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마무리할게.
“이진수 화가의 ‘무제’가 100퍼센트 확실한 진품이라는 증거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수정이 아버님이 뒤돌아본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죠?”
평범한 샐러리맨이랬잖아. 넌 도대체 뭐냐. 그렇게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이번 경매에서 제가 최고가로 ‘무제’를 낙찰받겠습니다. 경매수수료 15%는 제가 부담할 테니 선생님께서 낙찰가 그대로 저한테서 다시 구매해주십시오.”
수정이 아버님이 날 빤히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래도 여기보다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군요.”
< 제갈공명의 비단주머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