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에게 듣는 최고의 찬사 >
“민수 씨.”
“왜?”
“내 변호사 말이야. 일을 너무 못해.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어. 맨날 기다리란 말만 늘어놓고.”
“변호사라는 것들이 원래 그렇잖아.”
“일만 못 하면 또 모르겠는데. 가끔 엉큼한 눈으로 날 훑어보는 것 같아.”
“그거야 당신 몸매가 워낙 섹시하잖아.”
“하여튼 기분 나쁜 사람이야. 그래서 말인데 변호사를 바꿀까 싶어. 소개해줄 만한 사람 있어?”
“내가 아는 변호사는 딱히 없는데.”
“자기 지금 재산분할 재판한다며? 그 변호사는 일 처리 어때?”
“나쁘지는 않지.”
“그러면 나 소개해 줘.”
“그냥 지금 변호사 계속 맡기는 게 좋지 않겠어?”
“안돼. 재판을 너무 질질 끌어. 돈 많이 받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단 말이야.”
“알았어. 얘기는 해볼게.”
“자기는 늘 말만 알았다니까 변호사 번호 줘봐. 내가 전화해볼게.”
이지영은 나민수에게 번호를 받아서 핸드폰에 곧바로 저장했다.
첫인상이 중요했다.
따라서 전화를 언제 거느냐도 세심하게 선택했다.
일과 시간은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
퇴근 직후는 퇴근을 서두르느라 역시 별로고.
야심한 시각은 초면에 무례한 사람으로 기억되기 쉽다. 밤 9시 정도면 제일 적절하겠지.
[여보세요. 이성호 변호사입니다. 누구신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늦은 밤에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네요. 저는 이지영이라고 해요. 나민수 씨 와이프입니다.]
딸 둘을 낳고 현재 동거 중이다. 아직 혼인신고만 올리지 않았을 뿐 충분히 와이프라고 소개할 만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세요?]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제 사건 의뢰를 맡기려고요.]
[제가 얼핏 듣기로는 현재 전 남편분과 이혼소송 중이시지 않습니까? 그러시면 지금까지는 변호사 없이 혼자 소송 중이셨던 건가요?]
[아니요. 그건 아니구요. 따로 변호사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 제 마음에 안 들더군요. 그래서 새로 괜찮은 분을 찾고 있었어요.]
[아 네. 그러셨군요.]
[마침 민수 씨 사건도 지금 맡아서 도와주시고 해서 저도 같이 부탁드리면 어떨까 하고 연락드렸습니다.]
[네. 저야 당연히 좋습니다. 요즘 워낙 불황이라 변호사 업계도 서로 경쟁이 치열하거든요. 사건 하나라도 더 맡아야죠. 제가 이혼 사건 전문은 아니지만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능력 있는 변호사분이라는 칭찬 많이 들었어요.]
[제가요? 핫하하하.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내일쯤 제가 한 번 사무실로 찾아봬도 될까요? 아니다. 그것보다도 제가 아이들 아빠 대신에 감사 인사도 드릴 겸 따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사무실 말고 밖에서 뵙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됩니다.]
첫인상으로 너무 밀어붙이는 여자도 곤란하다.
[그럼 제가 편하신 시간에 사무실로 내일 찾아뵐게요.]
[네. 그렇게 하시죠.]
다음날 이지영은 최대한 신중하게 옷을 골랐다.
자신의 장점을 확실하게 보여주되 이상한 여자로 생각되지는 않도록 한계선을 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단정하면서도 몸매 라인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게 포인트.
어차피 숨기고 싶어도 애초에 숨길 수가 없는 몸매였다.
이지영은 남자들의 시선이 어디에 언제 머무르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성호 변호사의 사무실은 마침 분리된 개인 독방 구조였다.
개방된 구조보다는 훨씬 서로에게 집중하기 좋다.
“안녕하세요. 이지영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성호입니다. 실물을 뵈니 정말 대단한 미인이시네요. 핫하하하. 이런 칭찬은 너무 많이 들어서 질리시겠어요.”
첫 만남부터 외모에 대한 칭찬.
아주 좋은 출발이었다.
남녀가 처음 마주 대하면 그 결말이 운명적인 사랑이든 본능의 자극이든 승부는 3초 안에 끝난다.
이성호의 시선이 자신의 눈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한다.
만 명 중 한 명꼴이지만 몸매를 전혀 쳐다도 안 보는 남자가 물론 있다. 만 명 중 겨우 하나둘 정도? 보는 듯 마는 듯 아주 잠시 스치기만 하는 남자도 극소수 있고.
하지만 대부분은 길든 짧은 반드시 쳐다본다.
이렇게 단둘이 밀폐된 공간이라면 그 시간은 더욱 길어진다.
만난 지 10초도 안 됐지만, 이성호 변호사는 이미 이지영 자신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살짝 자세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그곳을 따라 움직인다.
이지영이 판단하기에 눈길이 뜨거운 정도로 치자면 이성호는 남자 만 명 중에 최상위 5퍼센트 안에 드는 인간이다.
이런 남자를 요리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요. 금방 왔어요. 시간이 빠듯해서 서둘렀더니 좀 덥네요. 겉옷 잠시만 벗을게요.”
“네. 그러세요. 에어컨을 틀어드릴까요?”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고요. 괜찮습니다.”
얌전하고 여성스러운 겉옷에 비해 안쪽 상의는 굉장히 파격적인 것으로 골랐다.
이성호의 시선이 단숨에 고정된다.
머리와 옷매무새를 만지는 척하면서 더 육감적인 분위기를 풍겨줬다.
“민수 씨가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다른 분께 맡길까 하다가 아무래도 아는 분께 부탁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감사합니다. 전 그저 최선을 다해서 의뢰인분들을 도와드릴 뿐인데요. 아유 이런. 그러고 보니 손님이 오셨는데 따로 음료수도 준비를 못 했네요.”
“아니에요. 저기 정수기 있네요. 제가 물 좀 따라 마셔도 되죠?”
“제가 따라 드리죠.”
“아니에요. 종이컵도 옆에 같이 있네요. 제가 마시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지영은 천천히 일어서서 정수기 쪽으로 향했다.
이성호에게 자신의 뒤태 감상할 기회를 느긋하게 줬다.
마침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일 수 있도록 정수기도 낮은 위치에 있었다.
“물이 참 시원하네요.”
“대접이 변변치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차 마시러 온 것도 아닌데요 뭘.”
천천히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지금 변호사분은 그럼 해고하신 겁니까?”
“아니요. 아직 말씀을 못 드렸어요. 죄송해서요. 하지만 바꿀 의향은 분명합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실은 제가 선약이 따로 있어서요. 지금 상세한 상담을 못 드리겠어요.”
첫 만남은 너무 길면 안 된다.
강렬한 자극은 일단 줬으니 나머지는 이성호의 상상력이 저절로 발휘되도록 내버려 둘 시간이 필요하다.
“아 네. 바쁘신가 보죠?”
이성호의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말 쉬운 남자구나.
“네. 그래서 말인데 오늘 저녁에 시간 어떠세요? 제가 저녁이라도 대접하면서 천천히 상담을 드리고 싶은데요.”
중요한 건 여지를 계속 남겨두는 거다.
“오늘이요? 좋습니다. 딱히 바쁜 약속도 없고요.”
“저녁 드시면서 와인도 한 잔 마실 괜찮은 곳을 알아요. 제가 모실게요.”
“핫하하하. 이렇게 초면에 제가 얻어먹을 순 없죠.”
“아니에요. 특별히 부탁드리는 건데 성의 표시는 해야죠. 장소는 따로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등 뒤로 이성호의 뜨거운 시선을 확실하게 느끼면서 사무실을 나왔다.
첫 만남의 성과는 완벽했다.
목석같은 남자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기우였다. 가장 쉬운 편에 속했다.
분명 이성호는 오늘 밤에 선을 넘는다.
저녁에 뭘 입을지도 이미 정했다. 낮과 밤이 달라야 한다. 몸매에서 아예 눈을 떼지도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몇 번만 더 만나면 이성호 변호사는 알아서 정보를 가져다 바치게 될 것이다.
**
띠리리리. 띠리리리.
이지영?
웬일이지? 이지영 쪽의 변호사도 아니고 이지영이 직접 나한테? 김지영 변호사한테서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이혼을 시작하면서 이지영이 직접 나한테 곧바로 전화를 걸어오기는 처음이었다.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사소한 것까지 김지영 변호사에게 일일이 물어보기에는 좀 그렇다. 일단 통화를 해보고 경과를 보고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
[여보세요.]
[나야.]
[그래. 왜?]
[미리 말해두겠는데 이건 자존심이니 기 싸움이니 그런 문제가 아니야. 철저하게 그쪽과 내 인생의 미래가 걸린 아주 현실적인 문제란 얘기지.]
무슨 소리를 늘어놓으려고 이렇게 서론이 긴 거냐.
[변호사가 그러던데 조만간 이혼조정이 시작된대.]
[나도 들었어. 이혼소송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거치는 절차라던데.]
[다가오는 첫 번째 이혼조정기일에서 우리 이혼 끝내.]
왜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지?
아니 그보다 그거야 니가 하기에 달린 거잖아.
우리가 요구하는 조건을 이지영 니가 모두 수용하고 백기를 들면 당연히 일찍 끝내지. 이혼 질질 끌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 하긴 그런 사람은 있다더라. 상대 괴롭히려고 일부러 이혼 안 해주고 버티는 거지.
[그건 니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어. 지금까지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으면서 위자료 더 깎아달라느니 아파트는 못 돌려주겠다느니 하면서 우겼잖아.]
[난 지난 과거에는 관심 없어. 이봐요 서지오 씨. 우리 앞만 보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 아직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많이 남았잖아.]
[짧게 얘기하자. 그래서 김지영 변호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나한테 전화한 용건이 뭐야?]
[그쪽이 요구하는 조건 모두 들어줄게.]
응?
이렇게 갑자기?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오히려 수상한데.
[감옥 가는 게 겁나긴 했나 봐.]
[구질구질한 얘기는 할 필요 없고.]
나한테 제일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위자료 액수는 사실 별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재산분할이다.
현재 내 수중에는 거의 10억 원에 달하는 현금이 있다. 종로 금은방에서 골드바를 모조리 처분하고 현재는 여러 저축은행 입출금 통장에 보관 중이다.
저축은행 입출금 통장의 금리가 요즘 거의 4퍼센트에 육박하더라고. 아무 때나 입출금이 자유로운 건 둘째치고 잠시 맡기는 거라도 이자가 4퍼센트면 10억일 때 한 달 이자만 3백만 원이 넘는다.
[재산분할 때 서로 현재 재산이 얼마인지 법원에 제출해서 재산분할 비율을 정한다고 들었어. 난 숨길 생각이 없으니 솔직하게 말하지.]
[당신 어차피 빈털터리잖아. 빚이 줄긴커녕 오히려 늘었을걸. 그래서 빚이 얼만데?]
[10억이야.]
[훗후흐흐흐. 그래 빚 10억 껴안고 앞으로 잘살아봐.]
[마이너스 10억이 아니라 플러스 10억이야.]
이지영이 잠시 말이 없다.
[그럴 리가? 무슨 수로 갑자기 10억을 번 거야? 아니지 10억을 갚고 10억을 더 벌었다는 소리잖아.]
[그땐 몰랐으니 다시 재산분할 하자면서 나중에 물고 늘어질까 봐 미리 말해두는 거야.]
[나민수가 예전 마누라한테 지금 그렇게 당하고 있는 건 알아.]
[김지영 변호사님이 그러시던데 우리 결혼 생활이 사실상 완전히 틀어지고 난 이후 벌어들인 돈이라서 재산분할 때 판사가 전혀 고려 안 할 거라고 했어. 부부 공동재산이 아니라면서. 그러니 괜히 눈독 들이지 마. 이건 순전히 내 돈이야.]
[여전하구나. 훗후흐흐흐. 10억? 아 네. 그러세요. 10억 그 돈 가지고 앞으로 열심히 사시면 되겠네. 내 조건은 변함없어. 대신 나하고 엄마 앞으로 고소한 거 전부 취소하고 선처를 바란다는 탄원서 써.]
이지영.
너는 내가 아는 한 이렇게 쿨한 여자가 절대 아니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지?
분명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그것도 아주 큰.
[그러면 재산분할도 그쪽이 원하는 대로 완전히 포기하고 아파트도 물론 바로 돌려줄게. 그깟 동탄 촌구석 손바닥만 한 아파트. 어차피 소문 다 나서 툭하면 개나 소나 찾아오는 통에 편히 살 수도 없어. 그쪽 관련된 건 다 지긋지긋하니까 싹 다 가져가.]
[그럼 내가 정리할게. 당신 쪽 고소는 내가 전부 취소하고 탄원서 작성. 위자료는 우리가 달라는 대로 모두 주기. 아파트 명의는 다시 내 앞으로 원상복구. 그리고 당신은 재산분할도 완전히 포기한다. 맞나?]
[그래그래. 그렇게 해. 마음대로 해.]
[진지하게 묻는 거야? 나중에 엉뚱한 소리 하지 마.]
[이거 지금 녹음하고 있지? 서지오라는 인간은 녹음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등신이잖아.]
[맘대로 지껄여. 이 조건대로 이혼에 합의하는 거지?]
[그래. 이혼해. 최대한 빨리.]
정말 수상하다.
이지영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할만한 이유?
뭐가 있을까?
갑자기 감옥 가는 게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건 아닐 거야.
법을 무서워하는 인간이 아니다.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부류다.
분명히 돈에 관련된 무언가다.
이혼을 최대한 서두른다? 왜?
이혼을 빨리 매듭지어야만 다른 걸 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
가령 나민수와의 결혼?
그렇다면 나민수와는 왜 결혼을 서둘러야 할까?
돈에 환장하는 이지영이 이혼을 이렇게 서두른다면?
그건 분명.
맞아.
코인이다.
나민수의 코인에 대해서 뭔가 알아낸 게 틀림없다.
[궁금한 게 있어.]
[갑자기 뭘? 그쪽이 요구하는 조건 다 들어주겠다고 했잖아. 이혼 얘기나 빨리 끝내.]
[나민수 현재 코인.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야?]
이지영이 10억이라는 거액을 코웃음 치면서 비웃을 정도의 코인.
나민수가 가진 코인이 도대체 얼마라는 뜻이냐?
[훗. 이봐 서지오 씨. 그걸 내가 왜 얘기해줘야 하지?]
이지영. 한시라도 빨리 이혼하고 싶은 건 너잖아.
내가 이혼 안 해주면 어쩔 건데?
이혼 안 해주면 니가 뭘 할 수 있냐고.
그래서 나민수가 그동안 다른 여자한테 도망가 버리면 니가 얻을 수 있는 게 뭐냔 말이야.
지금부터 시간은 오히려 내 편일걸.
자 어쩔 건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심정으로 다른 여자가 나민수 돈 펑펑 쓰는 거 구경이나 할래?
아니면 싹 다 털어놓을래?
[이혼하기 싫어? 한 3년 질질 끌어줄까?]
[서지오. 야 이 개새끼야. 너 이혼 이딴 식으로 좆같이 할 거야?]
< 적에게 듣는 최고의 찬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