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 전 무한 캐시백 당첨-62화 (62/65)

<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

나민수의 변호사 오주현에 대해서는 김지영 변호사가 더 상세하게 찾아보기로 했다.

오주현은 이지영과 이미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지영이 나민수의 코인에 대해 어찌 알아냈겠어.

다음날 출근했더니 엉뚱한 공문이 도착했다.

조만간 중국으로 출장을 가라는 내용.

중국 출장이야 몇 번 가 본 적 있으니 이상할 게 전혀 없다.

문제는 임하나와 함께 가라는 것이었다.

보통 회사에서 어떻게든 비용을 아끼려고 출장은 무조건 혼자 가는 게 원칙이다.

아주 드물게 2명 갈 때도 있지만 그럴 때도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보내는 게 기본이다.

의외로 출장 가서 엉뚱하게 눈 맞는 경우가 꽤 있다.

아무래도 서울을 벗어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단둘이 있다 보면 잡생각이 들지 않을까.

영 불편한데. 임하나와 단둘이라니. 차라리 김호창이라면 모를까. 이건 누가 봐도 임하나의 경험치를 쌓아주려는 윗선의 지시가 분명하다. 출장 가는 김에 나한테서 이것저것 배우라는 뜻도 담겨 있을 것이다.

이기수 부장이 오전부터 따로 부른다.

“휴우우우. 담배를 줄였더니 한 대 피울 때마다 미치겠어.”

이 부장 표정은 거의 마약이라도 빠는 분위기였다.

“그러시겠네요. 금연 패치라도 붙여 보시죠.”

“소용없어. 무슨 짓을 해도 이건 못 끊겠다니까.”

이기수 부장은 내가 본 골초 중에서 최고였다.

담배를 맛깔나게 피우는 걸로도 으뜸이지.

“서지오 씨. 중국 출장 말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하나 씨를 보필해서 잘 다녀오겠습니다.”

“불편하겠지만 어쩌겠어. 우리야 위에서 까라면 까는 사람들이잖아. 대신 서 과장도 오랜만에 좋은 호텔에서 묵고 맛있는 것도 사 먹어. 그동안 가성비만 따지면서 비즈니스호텔 전전했잖아.”

“그랬었죠.”

“솔직히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미주그룹이 그런 데는 좀 인색해. 그지?”

“네.”

“나도 부하 직원 눈치 보면서 회사 생활하는 게 쉽지는 않아. 하나 씨 온 이후로 담배도 마음껏 못 피우고 말이야. 강 상무님도 만날 때마다 하나 씨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고 묻는 통에 귀찮아 죽겠어. 핫하하하.”

그러고 보니 1년에 몇 번 올까 말까 하던 강 상무가 하루가 멀다하고 뻔질나게 영업 3팀을 들락거린다.

덕분에 오히려 좋은 점도 있었다.

전에는 와 봤자 기껏 골목백반 정도가 끝이었는데 임하나가 온 이후로는 비싼 곳으로만 골라서 점심을 사준다.

“이혼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나도 집사람 텔레비전 보는 틈에 옆에서 ‘이것이 이혼이다’ 가끔 접하는데 요즘 난리더라고.”

“언젠가는 이혼 마무리되겠죠.”

“그렇겠지. 슬슬 들어갑시다. 곧 점심시간이네.”

“네. 가시죠.”

사무실 안이 시끌벅적하네.

누가 왔나?

“상무님 오셨어요?”

“이 부장. 곧 점심시간인데 어디 갔었어? 직원들 배고프잖아. 하나 씨. 오늘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강 상무가 오늘도 점심시간에 찾아왔다.

그런다고 임태수 회장이 더 예뻐할 것도 아닌데.

사실 상무이사 자리에서 퇴직한다고 끝은 아니다.

임태수 회장 정도면 은퇴한 중역에게 괜찮은 자리 한 군데 알아봐 주는 거야 일도 아니지. 끝까지 잘 보여서 마지막까지 한 그릇 거하게 얻어먹고 싶은 게 평범한 사람 마음 아닐까.

“전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아니지. 그래도 기왕 내가 왔는데 하나 씨 먹고 싶은 걸로 고르지. 다른 사람들은 어때요?”

“좋습니다.” “저도 좋습니다.”

누가 싫다고 그러겠냐. 점심값도 아끼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는데. 다들 오히려 임하나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정작 임하나는 불편한 눈치다. 너무 노골적인 특별 대우긴 하지.

“고르기 힘들면 내가 괜찮은 곳으로 안내할게요. 봐둔 데가 있어. 자 갑시다.”

아직 점심시간 시작하려면 20분이나 남았는데 말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한두 명도 아니고 영업 3팀 전부 다 데리고 가버리겠단 소리잖아.

“그럼 다들 다녀오시죠. 저는 속이 안 좋아서 나중에 간단하게 먹겠습니다.”

나도 따라가서 맛있는 거 법인 카드로 실컷 먹고 싶지만, 괜히 눈치가 보인다.

“서 과장이? 그래요 그럼 우리 먼저 점심 먹으러 갑시다.”

“네.” “알겠습니다.”

“상무님 어디로 가시게요?”

“근처에 횟집 새로 오픈한 데가 있어.”

“저도 거기 들었습니다. 역시 상무님은 회에 대해서 제대로 아시네요. 아주 유명한 일식 주방장이 독립한 곳이라던데요.”

“그래요? 핫하하하. 이 부장은 이상하게 나랑 취향이 참 잘 맞아.”

“기대 되네요. 어서 가시죠.”

모두 사라지고 혼자만 영업 3팀 사무실에 남았다.

전화야 핸드폰으로 착신 전환해 두었기 때문에 사실 사무실을 굳이 지킬 필요는 없다.

고객들이 거는 AS 문의 전용 회선은 원래 안 받고 이메일로 대체하기 때문에 상관없다.

하지만 만약 누가 오다가다 우리 사무실을 보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진다.

점심시간을 20분이나 남겨두고 팀원 전체가 자리를 비워버리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어. 참 잘 돌아간다 그러겠지.

똑똑.

응?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온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오늘 외부 방문객이 온다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

영업 3팀 자체가 외부인이 올 만한 곳이 아니다.

어지간한 업무는 전화 아니면 이메일로 처리한다.

손님이 오더라도 따로 방문자를 만나는 공간이 정해여 있다. 사무실로 예고도 없이 누가 찾아올 만한 일이 없는데.

“네. 누구십니까?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누군가 고개를 들이민다.

이런.

하필이면.

제일 와서는 안 될 사람에게.

그리고 절대 보여서는 안 될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임태수 회장이었다.

“서 과장 혼자 있네. 다들 어디 갔어?”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침착하자.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니다. 여기서 잘만 대답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잘만 대답하면 말이야.

머릿속으로 온갖 예상 답변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

‘회의 중이십니다.’ 땡.

회의는 무슨 얼어 죽을. 회의실이 따로 있긴 하지만 정작 영업팀이 회의를 하러 거기 가는 경우는 전혀 없다. 영업팀은 철저하게 각개전투에 소규모 편제다.

사내 메신저조차 이용을 안 하는데 무슨 회의실에서 PPT 자료 화면보고 토론을 해. 바로 옆 책상에 앉은 동료한테 출력해서 손으로 넘겨주는 판국인데.

그렇다고 ‘먼저 식사하러 다들 나가셨습니다.’

이건 땡이 아니라 꽝이지.

강 상무와 이 부장이 잘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안달 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한 번에 잘리지는 않겠지만 임태수 회장한테는 아주 제대로 찍힐 것이다.

100번 간접보고 받는 것보다 한 번 눈으로 직접 확인당하는 게 더 위험하다.

일단 솔직하게 밥 먹으러 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른 변명은 통할 리가 없다.

대신 특별한 사정이 필요하다. 회장이 분노하지 않을 만큼이면 족하다.

“얼마 전부터 매주 화요일은 주변 식당이 특히 붐벼서 저희들 영업 3팀 자체적으로 10분에서 20분 정도 일찍 나가서 먹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정시에 나가면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해서요. 대신 그만큼 오후 업무는 일찍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 화요일이 그렇게 번잡했었나?”

그따위 통계가 있을 리는 없지만 일단 거짓말을 시작했으면 우겨야지.

“보통 주초가 제일 바쁩니다만 요즘은 화요일에 제일 식당이 복잡했었습니다.”

“그랬구만. 하아~. 이거 어쩌나. 오랜만에 하나랑 같이 밥 먹으려고 들렀는데. 미리 전화를 하고 올 걸 그랬네.”

“하나 씨도 다른 팀원들이랑 함께 식사하러 가셨습니다.”

“할 수 없지.”

“네. 그럼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그런데 자네는 왜 같이 안 갔나?”

이럴 때는 점수를 좀 따자.

너무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어차피 지금은 아무도 없잖아.

“매주 화요일에는 만약을 대비해서 따로 정해진 점심시간 12시까지 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제가 대처해야 하니까요.”

“팀원들이랑 같이 나가는 게 아니라 자네 혼자서만 대기한다고?”

“네.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요. 부하 직원들에게 맡기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중간관리자라면 이럴 때 책임감 있는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제가 자처하고 있습니다.”

“음. 그렇겠구만. 혼자서 고생이 아주 많아.”

“전혀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

“기왕에 왔으니 하나 대신 자네랑 같이 점심 먹으면 되겠구만. 12시도 마침 됐네. 같이 나가지.”

이건 내가 생각한 그림이 아닌데.

회장이랑 단둘이 점심이라. 영 불편하지만 못 먹겠다고 거부할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난 회장댁에서 저녁까지 얻어먹은 사이잖아.

“저랑 같이 드시면 회장님께서 불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불편할 게 뭐 있나. 우리 집에서 저녁도 같이 먹었는데.”

“알겠습니다.”

졸지에 회장이랑 단둘이 점심을 먹게 됐다.

조수석 문을 열려는데 회장이 부른다.

“서 과장.”

“네.”

“내 옆에 타. 이야기도 나눌 겸 그게 편하지.”

회장이 타라면 타야지. 회장 옆 뒷자리에 앉았다.

“회사 생활은 어때?”

‘안녕하세요’랑 거의 동급인 질문이네.

임태수 회장이든 강 상무든 하여튼 만나기만 하면 저 질문부터 던진다.

마치 가수가 노래 부르기 전 애드립으로 ‘워어어어 우어어어’을 날리는 느낌이네.

“열심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면 안 되지.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내가 이것저것 적당한 주제를 이어나가야 한다.

“차는 잘 타고 계십니까?”

“말도 마. 힘이 어찌나 좋은지. 최근 몰아본 차 중에 최고야.”

“잘됐네요.”

“정말 고마워. 나한테 팔아줘서. 요즘 드라이브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딘가에 도착했다.

회사 근처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다 왔어. 내리지.”

“네.”

회장이 앞장서서 어느 골목으로 걸어 들어간다.

저쪽에 무슨 식당이 있었나?

“여기야. 들어가자고.”

“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식당이었다.

회장이랑 같이 오니까 이런 곳에서 먹어보네.

그런데.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니?”

“어? 회장님.”

안 좋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어쩐지 새로 오픈한 가게 같더라니. 거기다 일식집.

아까 강 상무가 가자고 하던 바로 그 집이었구나.

안쪽에는 이미 강 상무와 영업 3팀원들이 한 상 거 하게 차려놓고 먹고 있었다.

모두 서둘러 자리에서 허겁지겁 일어난다.

특히나 강 상무는 부스럭거리더니 버선발로 뛰어나오다시피 달려온다.

“회장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영업 3팀에 갔더니 아무도 없고 서 과장만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고. 격려도 할 겸 같이 밥 먹으려고 데리고 왔어요.”

“그러셨군요. 잘 하셨습니다. 저도 영업 3팀 직원들 밥 사주려고 갔다가 여기 함께 왔습니다.”

“강 상무는 요즘도 팀원들이랑 같이 점심 먹고 그러나 봐?”

“네. 물론이죠. 현장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려면 아무래도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 나누는 게 최고 아니겠습니까.”

임태수 회장이 이기수 부장을 쳐다본다.

“이 부장. 그런데 요즘 회사 근처 식당들이 그렇게 붐비나?”

“네?”

이기수 부장님. 당신의 눈치를 믿습니다. 이럴 때 우리 그동안 한솥밥 먹으면서 갈고 닦은 팀워크를 보여줘요.

이기수 부장이 날 슬쩍 쳐다본다.

“네. 요즘 주변 식당들이 하나같이 바쁘더군요. 점심을 좀 일찍 나와서 먹고 있습니다.”

“그랬구만. 이렇게 모였으니 나랑 서 과장도 합석할까?”

“물론이죠. 이쪽으로 앉으시죠.”

임태수 회장이 테이블을 둘러보다 구석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이 커진다.

<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