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인술 >
소주잔이었다.
술병이 안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눈에 안 띄는 테이블 아래로 치워놓은 게 분명했다.
임태수 회장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고 강주석 상무도 아차 싶었다.
소주병은 급히 테이블 아래로 숨겼지만, 소주잔은 너무 다급해서 미처 거기까지 손을 못 썼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처음부터 숨기지 않은 것만 못해버리는 결과 아닌가.
강주석 상무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회가 너무 맛있어서 딱 한 잔씩만 마시기로 하고 술을 시켰습니다.”
좌중 모두가 임태수 회장의 표정을 살핀다.
“핫하하하. 역시 회에는 소주죠. 가볍게 반주로 한두 잔 마시는 거야 뭐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강 상무님 너무 그렇게 죄송해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업무 시간 중에 술을 마시는 건 역시 잘못했습니다.”
“괜찮아요. 자 우리 마음 편하게 점심 먹읍시다. 서 과장이랑 나도 그럼 주문할까.”
곧바로 직원이 주문을 받는다.
“이거 괜히 내가 와서 분위기가 이상해진 건 아닌지 모르겠네.”
“전혀 아닙니다. 회장님.”
“아유. 맛있네. 종종 와야겠어.”
점심식사는 그렇게 별 탈 없이 끝났다.
임태수 회장은 퇴근 시간 후 집에서 임하나가 귀가하기를 기다렸다.
“다녀왔습니다.”
“잠깐 이리 와 볼래.”
“네.”
“점심때 말이다. 술은 강 상무가 시킨 거냐?”
“네. 그런데 아빠 강 상무님도 시킬지 말지 한참 고민하시다가 딱 1병만 주문하셨어요.”
“누구누구 마셨냐?”
“상무님이 따라 주시니까 다들 받기는 했죠.”
“너도 마셨니?”
“아니요. 전 안 마셨어요.”
“이 부장은 강 상무가 술 시킬 때 옆에서 뭐했니?”
“부장님이야 별말 없으셨죠. 상무님이 마시자는데 뭘 어쩌시겠어요.”
“하나만 더 물어보자. 원래 화요일에는 점심을 그렇게 일찍 나가서 먹니?”
임하나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거짓말을 감히 시도할 분위기가 아님을 깨달았다.
하지만 고민은 됐다.
여기서 사실대로 털어놓을지 아니면 상사들이 둘러댄 대로 자기도 동참할지.
털어놓으면 임하나 자신은 살아남고 나머지 팀원들에게는 불호령이 떨어질까? 그렇다고 거짓말에 동참하면 아버지를 끝까지 속여넘길 수 있을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는 결정을 내렸다.
“네. 최근에는 점심시간에 근처 식당들이 너무 붐벼서 일찍 나가서 먹기 시작했어요.”
“훗후흐흐흐. 그래?”
아버지의 저 웃음은 뭘 의미하는 걸까?
“아빠.”
“알았다. 알았으니까 그건 됐어. 일은 배울만하냐?”
“힘들던데요.”
“남의 돈 버는 게 어디 쉬울 줄 알았니. 사람 상대하는 게 제일 힘든 법이야. 그거 직접 안 하려고 종업원들한테 월급 주면서 일 맡기는 거다. 저녁은 먹었냐?”
“이제 먹어야죠.”
“그래. 조만간 중국 출장가지?”
“그것도 아빠가 시킨 거죠?”
“외국에 나가봐야 해. 놀러 가는 거 말고. 특히나 중국은 우리가 앞으로 계속 상대해야 하는 국가다. 이번 기회에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좋지. 서지오가 일하는 걸 옆에서 보고 잘 배워둬.”
“과장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제가 영업 3팀에 와서 직접 보니까 사실상 과장님이 하드캐리. 아니지. 아빠는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
“하드캐리가 뭔데?”
“고군분투? 혼자서 팀 전체를 끌고 나간다는 뜻이에요.”
“그런 뜻이냐? 써먹어야겠구나.”
“괜히 부하 직원들한테 하드 캐리 이런 말 쓰지 마세요. 가벼워 보여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하여튼 괜히 저 신경 쓰신다고 괜히 영업 3팀 사무실에 막 아무 때나 오고 그러지 마세요.”
“갈 수도 있지.”
“강 상무님 자주 오시는 것만 해도 불편한데 아빠까지 오시면 제가 너무 눈치 보이잖아요.”
“강 상무가 얼마나 자주 오는데?”
“요즘에는 거의 1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오시던데요.”
“그래?”
임하나는 괜히 강 상무 얘기를 꺼냈나 싶었다.
“알았다. 씻고 저녁 먹어라.”
“아빠는요?”
“난 방금 먹었어.”
“네.”
임태수 회장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응 나다.]
[네.]
[목소리를 들으니 여전히 나한테 화가 많이 나 있구나.]
[아닙니다. 정 마담 연락처를 주신 건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다. 저녁에 들어오면 서재로 잠깐 와. 할 말이 있어.]
[알겠습니다.]
[요즘은 ···. 아니다. 이따가 얘기하자.]
[네.]
참 이상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구나.
딸을 대할 때랑 임누리를 대할 때가 다르다.
아들과 딸의 차인가 싶기도 했지만 역시 친자식이 아니어서 그런 건가.
임누리는 밤늦게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술 마셨니?”
“그냥 좀 마셨습니다.”
“누구랑? 요즘도 정신 못 차리고 여자 만나고 다니는 거냐?”
야단치려고 부른 건 아닌데 임태수 회장 자신도 모르게 다그치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나도 궁금해서 인터넷을 좀 찾아봤다. 이지영을 욕하는 분위기가 많이 늘었더구나. 반면에 너는 예전보다 욕을 덜 먹고.”
“애초에 그런 쓰레기가 저를 상대로 한탕 해 먹으려는 수작질이었으니 당연합니다. 사람들도 이제는 깨달은 거죠. 정 마담이 그러더군요. 떼먹은 돈은 지옥까지 쫓아서라도 기어코 받아낼 거라고요.”
“그렇겠지. 한두 푼이 아니라면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여론은 완전히 돌아설 겁니다. 이지영 그게 벌써 언론 플레이까지 하더군요. 그래 봤자 씨도 안 먹히겠지만.”
“합의금 10억을 달라고 하던데 어쩔 셈이냐?”
“한 푼도 안 줄 작정입니다. 변호사가 그러던데 잘하면 합의 없이도 실형을 면할 수도 있다더군요.”
“괜히 자존심 싸움하지 말고 적당히 주고 일찍 끝내는 건 어떻겠니?”
“절대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원래 고집이 센 아이였지만 이번 일에는 더더욱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임태수 회장은 정 마담의 연락처를 주고는 더 개입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임누리가 어떻게 하나 지켜보기로 했다.
“오늘 보자고 한 건 그 일 때문이 아니다. 널 전무 이사로 승진시킬 작정이다.”
임누리가 깜짝 놀라서 임태수 회장을 쳐다본다.
“주주총회를 열어서 절 해임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생각이 바뀌었다. 몇몇 단체에서 미주그룹 불매 운동을 벌인다고는 하지만 우리 실적에는 별로 상관이 없어. 여론도 많이 바뀌었고.”
“하지만 절 오히려 승진시키시면 그것들이 더 길길이 날뛸 텐데요.”
“어차피 욕은 먹는다. 대외적으로 공표할 필요까지는 없어. 법적으로는 여전히 똑같은 이사야. 회사 내부적으로 승진시키는 거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널 전무이사로 승진시키는 의미를 알겠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버지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여론이 조금 바뀌었다는 것만으로 임시주총 여시겠다는 말씀을 번복하는 건 아버지답지 않으시고요.”
“그래. 그렇지. 한번 시험해보고 싶었다. 니가 어떻게 회사를 운영하는지 궁금했어. 난 당분간 뒤로 물러나 있을 테니까 마음대로 해봐라.”
임누리는 곰곰이 생각했다.
왜 아버지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을까?
당장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기회다.
자신이 뜻한 바대로 회사를 운영할 다시 없을 기회.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썩은 부분을 도려내도 상관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인가요?”
“그래. 전적으로 맡긴다고 하지 않았니. 말 난 김에 하나 물어보자. 누굴 제일 먼저 자르고 싶으냐?”
원래는 다른 놈들이었다.
고액 연봉만 받아 처먹으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중역들과 시간만 때우는 일부 부장급 인사들.
하지만 최근에 1순위 타깃이 바뀌었다.
서지오.
그 시건방진 새끼를 어떻게든 당장 잘라내고 싶다.
“영업 3팀 서지오 과장입니다.”
“···.”
임누리는 아버지의 표정을 신중하게 살폈다.
“유능한 직원이라는 건 압니다.”
“그런데?”
“최근에 일이 좀 있었습니다.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덕분에 회사 내에서 제 체면이 땅바닥에 처박히는 것도 모자라 조롱까지 당하게 됐죠.”
“무슨 일이었는데?”
“거기까지 말씀드리기는 곤란합니다. 회사를 운영하는데 기강을 바로잡으려면 서지오를 잘라서 일벌백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임태수 회장이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린다.
한동안 말이 없다.
“서지오는 건드리지 마라.”
“하지만 서지오를 그냥 놔두면.”
“유능한 직원을 함부로 대하면 다른 직원들이 일할 의욕이 생기겠니?”
“제 권위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서지오가 기고만장해하는 꼴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로 잘난 척할 인물은 아니다.”
“아버지가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집에까지 초대해서 저녁까지 같이 드시고. 듣자니 서지오한테서 구하기 힘든 차를 구매하셨다면서요. 그것 때문에 은혜라도 갚으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고 해두자. 하여튼 서지오는 절대 안 돼. 그건 내가 허락할 수 없다. 나머지는 니가 원하는 대로 해라.”
임태수 회장이 뜻밖에 단호하게 서지오를 옹호하고 나선다.
임누리는 그게 유일한 불만이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무이사라.
상무든 전무든 직함은 별 의미가 없다.
핵심은 오너인 임태수 회장이 미주그룹에 던지는 메시지.
해임이 아니라 오히려 승진.
명백하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지가 분명하다.
“서지오를 제외하면 너의 그 살생부에는 누가 맨 앞에 적혀 있니?”
“강주석 상무입니다.”
“강 상무라. 왜?”
“이사진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놈입니다. 직원들과의 거리를 좁힌다는 명목으로 점심을 사주면서 고작 만 원도 안 되는 백반집에 데려가는 위선잡니다. 자기 혼자 처먹을 때는 한 끼에 수십만 원짜리만 골라 가면서 말이죠. 애초에 아버지가 왜 그런 인간을 이사 자리에 앉히셨는지도 저는 의문입니다.”
“회사 초창기부터 함께 한 동료였다. 원래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지.”
“지금까지 이사 연봉 받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의리는 다 지키셨습니다.”
“직원들 월급을 아까워하는 게 아니다. 어차피 세금으로 나가든 월급으로 나가든 써야 할 돈에 불과하지.”
“강 상무는 하는 일도 전혀 없습니다.”
“이사라는 게 원래 그런 역할이다. 법으로 정해놨으니 우리야 누군가는 이사로 앉혀야 하는 것뿐이고. 개국 공신에게 주는 포상으로 생각해라.”
“제게 모두 맡기셨으니 지켜봐 주십시오.”
“미안하구나.”
“미안하다니요? 저는 오히려 감사합니다. 제 뜻을 펼칠 기회를 주셔서요. 그럼 쉬십시오.”
임태수 회장은 임누리가 나가기 전에 한마디 덧붙였다.
“너무 늦게 다니지 마라. 엄마가 걱정하시잖니.”
“알겠습니다.”
“결혼할 여자는 아직도 없는 거냐?”
“결혼까지는 모르겠지만 만나보고 싶은 여자는 있습니다.”
“누군데? 뭐 하는 집안이냐?”
“변호삽니다.”
“그래? 집에 한 번 데리고 와라.”
“노력해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서 과장.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
“과장님 아니었으면 저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감사합니다.”
김호창과 차지영도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같은 팀원끼리 무슨 인삽니까. 괜찮습니다.”
이기수 부장이 어지간히도 고마웠나 보네.
어제도 고맙다고 그렇게 등을 두드리더니 오늘은 출근하자마자 좋은 아침 대신에 고맙다는 인사부터 건넨다.
이기수 부장도 보면 참 대단한 양반이란 말이야.
그 짧은 순간에 기가 막히게 스토리를 간파하고 딱 아귀가 맞게 말을 지어내다니. 저런 건 배워야지.
“서지오 씨. 오늘 점심 내가 살게. 뭐 먹고 싶어?”
“아이참. 부장님도. 괜찮다니깐요.”
뭘 얻어먹지?
어제는 고급 일식집에서 회를 잔뜩 먹었으니 오늘은 중화 코스 요리로 가 볼까?
“아니야. 무려 회장님께서 직접 우리 사무실에 오셨는데 점심시간을 한참 남겨두고 아무도 없었다? 서 과장 아니었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정 그러시면 탕수육 시켜주십시오. 갑자기 먹고 싶네요.”
“알았어. 점심때 우리 중국집 갑시다. 내가 쏘지. 하나 씨.”
“네.”
“어제 회장님께서는 별말씀 없으셨어?”
“네.”
임하나가 살짝 머뭇거리는 게 영 찜찜한데.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자 일합시다.”
오늘은 칼같이 12시를 채워서 사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옆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안내판에 뭐가 붙었길래 저러지.
“무슨 공고가 떴나 봅니다.”
“방금 붙였나 본데. 우리 출근할 때만 해도 없었잖아.”
“그러게요.”
‘특별 인사이동 예정 공고문. 임누리 상무이사를 전무이사로 승진 발령합니다.’
임누리가 상무에서 전무로?
이건 곤란한데.
임누리한테 대놓고 들이받은 난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서지오 과장님.”
아는 목소리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가 아니라 점심시간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는구나.
임누리 이제는 전무이사였다.
“시간 되시면 저랑 같이 식사나 하시죠. 어떠세요?”
왜 이리 다정하지?
식사라면 최후의 만찬이라도 되는 건가.
“전에 잠깐 언급했던 전략기획팀에 대해서 제안 드릴 것도 있고 해서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일단 들어나 보자.
“좋습니다.”
< 용인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