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라고? >
“앉으세요. 요즘 회사 생활은 어떠십니까?”
수상하다.
임누리 답지 않게 존댓말을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왜 내 회사 생활이 궁금하지. 넌 그런 놈이 아니잖아.
“지난번 내 제의를 거절한 건 솔직히 실망이었어요.”
“저는 이지영에게 고개를 숙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뭐 됐어요. 지난 일이고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으니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누리가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얘기했었죠. 전략기획팀을 신설할 생각이라고. 미주그룹 전체를 한 단계 스텝업 할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서지오 과장만한 인재가 없어요. 전략기획팀장 자리를 맡아줘요.”
자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팀장으로 승진시켜주겠다는 말이냐?
게다가 기존의 영업팀장 급이 아니라 아예 신설할 부서의 총책임자로? 누가 봐도 엄청난 초고속 출세인데.
그런데 왜 냄새가 나지.
아주 구린 악취가 진동한다.
“그 대신 이번에는 제가 전무님께 무얼 해드려야 합니까?”
“아직 난 전무이사가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 조건도 없어요. 오로지 난 서지오 씨의 능력만 보고 판단한 겁니다.”
사람이 어디 그리 쉽게 변하나.
날 원망하고 있을 텐데 이제와서 갑자기 아무 조건도 없이 파격적인 승진을 시켜주겠다니. 너무 수상하잖아. 설마 내가 자리에 눈이 멀어 덥석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승낙하리라 예상했던 건가.
샐러리맨에게 이유 없는 승진은 없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함정이거나 자르기 위한 전초 작업일 뿐이지.
내 경력상 과장이 된 것도 남들보다 빠른데 갑자기 팀장이라면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기 딱 좋다.
결정적으로 임태수 회장이 임누리를 진짜 후계자로 생각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임하나를 굳이 영업 3팀 말단에 꽂아 넣은 이유가 뭘까.
난 왜 임하나 쪽에 임태수 회장의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지.
여기서 임누리의 라인을 타기는 싫다.
“죄송합니다. 정말 감사한 말씀이지만 아직 제가 갈 자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회사에 저보다 뛰어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임누리의 인상이 일그러진다.
“서 과장. 내 호의를 2번이나 연달아 거절하겠다는 거야?”
그래. 이게 너한테 어울리지. 거절하니까 곧바로 반말이 시작되네.
“저번은 호의라기보다는 명령이셨지 않습니까. 나 대신 이지영에게 머리를 숙여라 그러면 전략기획팀장 자리를 주겠다.”
“야.”
“분명히 말씀드리는 게 좋겠네요. 이번에도 거절하겠습니다.”
“흐흐흐. 서지오. 너 감히 날 이렇게 두 번 연달아 엿 먹이고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냐?”
지갑이 두둑해지고 나니까 나한테도 선택지라는 게 생겼다.
회사를 언제든지 그만둘 수도 있다는 또 다른 가능성. 예전처럼 눈치만 보고 살 필요는 없어졌다.
지금 일이 재미있으니 계속 다니는 거다. 이기수 부장이나 김호창 대리, 차지영도 모두 내 눈치를 어느 정도는 봐서 인간관계 스트레스도 확 줄었고. 회장 큰딸 임하나가 들어오긴 했지만 나한테 별로 영향은 없다.
“상무님. 저를 자르시는 건 상무님 마음입니다. 전 그저 잘릴 때까지 일하다가 나가면 그만이고요. 이혼소송하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말자. 그리고 남들한테 휘둘리지 말자. 내 갈 길만 묵묵히 걷자.”
“···.”
임누리가 말이 없다.
그룹 오너의 장남이 까라면 까는 거지 일개 과장 주제에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그런 표정이다.
“서지오. 하나만 물어보자. 도대체 어떻게 회장님의 눈에 든 거냐? 어째서 회장님이 널 자르지 말고 가만 내버려 두라고 직접 지시까지 하시냔 말이야.”
그래? 어쩐지.
그래서 임누리가 곧바로 날 못 잘랐구나.
해임되기는커녕 전무로 승진했다면 1순위로 나부터 잘랐을 텐데 못 한 이유가 그거였어.
회장한테 흰색 스포츠카를 판 인연이 이런 식으로 굴러가네. 사람 팔자는 참 신기하단 말이야.
“저도 모릅니다. 잘 봐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이죠.”
“생각 같아서는 당장 창고관리나 맡기고 싶은데 회장님의 명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어. 설마 너 회장님께 미리 언질이라도 받은 거야?”
“그건 아닙니다. 미주그룹에 머무는 동안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상무님이 나중에 회사 오너가 되시면 그때 마음껏 자르십시오.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야.”
오늘 임누리와 얘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큰 소득이 있다.
회장이 날 무척 총애한다는 점.
회장이 건재할 동안 잘릴 일은 없겠구나.
임누리를 테이블에 남겨두고 식당을 나왔다.
오늘 점심은 내 돈으로 탕수육이나 사 먹어야겠네.
그래 통장에 돈도 많은데 내 돈으로 마음 편히 맛있게 먹자.
**
“혼인신고 언제 할 거야?”
“똑같은 얘기를 도대체 몇 번씩 되풀이하는 거야. 서지오랑 이혼부터 마무리 짓고 난 후에 하자니까. 법적으로 돌싱 되는 것부터가 먼저 아니니?”
“서지오랑 이혼은 금방 끝나. 조만간 첫 번째 조정기일이 열린다고 변호사가 그랬어. 거기서 이혼할 수도 있어.”
“잘됐네. 그럼 그때 가서 얘기해.”
“얘기는 다 끝났잖아. 서지오랑 이혼하면 곧바로 우리 혼인신고하자고. 혼인신고 서류에는 왜 서명 안 해?”
“원래 사인은 미리 아무 때나 해 두는 게 아니야. 뭐가 그리 급해.”
“자기가 이렇게 질질 끄니까 그렇지. 남자가 나서서 척척 해결하는 맛이 있어야지, 사람 이렇게 자존심 상하도록 만들거야? 결혼 구걸하는 기분 들어서 짜증 나.”
“아니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이혼부터 마무리하면 당연히 혼인신고 해줄게.”
이지영은 나민수의 태도에 질려버렸다.
매번 말로만 혼인신고해주겠다면서 정작 혼인신고 신청 서류를 들이밀면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나민수 말대로 서지오와 이혼부터 하는 게 맞긴 하다. 하지만 나민수의 미지근한 태도가 문제였다.
“잠깐 나갔다 올게.”
“늦은 시간에 어딜 가?”
“담배 사러.”
“그래? 일찍 들어와.”
“알았어.”
혼인신고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이런 식으로 자리를 피한다. 이지영은 오늘 적당히 넘어갈 생각이 없다. 반드시 혼인신고 서류에 도장을 받아내고야 말 작정이었다.
잠시 후 나민수가 들어온다.
그런데 담배를 사러 간다고 했으면서 빈손이었다.
이지영은 여자의 촉이 발동했다.
“핸드폰 내놔봐.”
“갑자기 왜 이래.”
“담배 사러 간다면서 왜 빈손으로 들어오지?”
“···.”
“대답해봐.”
“생각해보니 담배 남은 게 있는 것 같아서.”
“어디?”
“당신 왜 이래. 검찰청 몇 번 들락거리더니 매사에 의심만 많아졌어.”
“뭐? 지금 뭐라 그랬어? 검찰청 들락거려?”
“미안해. 말실수였어.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어.”
“핸드폰 당장 내놔.”
“이러지 마.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
“내놓으라니까.”
“그만 좀 하자. 지긋지긋해. 서지오랑 이혼하고 와. 그럼 혼인신고는 해 줄게. 해 주면 되잖아.”
“핸드폰 끝까지 못 보여주겠단 말이지? 오 그래. 알았어.”
“부부 사이라도 핸드폰은 함부로 들여다보는 게 아니야. 프라이버시는 존중해줘야지.”
“훗. 프라이버시? 어차피 안 보여줄 거잖아. 그래 마음대로 해. 나도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딜 가?”
“나민수 씨. 당신은 알 필요 없어.”
이지영은 집은 나서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변호사님.]
[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럼요 저는 잘 지내죠. 부탁하신 소송 말씀인데요. 얘기가 길어지겠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네. 제가 지금 집이라 곧바로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걸 봐서 마누라가 옆에 있나 보네.
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지영 씨.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저녁에는 전화하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옆에 사모님이 계셨어요?]
[네. 집에서 저녁 먹던 중이라서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사이에 죄송하긴요.]
[주현 씨라고 불러도 되죠? 저한테 말 놓으시라고 했잖아요.]
[흐흐흐.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조용히 웃는 걸 봐서 여전히 누가 들을까 조심스러운 상태임이 분명했다.
[주현 씨. 우리 또 언제 봐요?]
[저야 지금 당장이라고 달려가고 싶죠.]
[저도 그렇긴 한데 지금은 너무 상황이 안 좋네요.]
[왜 그러십니까?]
[서지오랑 이혼이 어서 마무리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도무지 진전이 없으니 답답해서. 빨리 이혼을 해야 변호사님도 마음 편히 만날 수가 있잖아요.]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상대 변호사가 너무 완강합니다. 합의 조건 낮춰줄 생각을 전혀 안 합니다.]
[위자료니 뭐니 그런 건 상관없어요. 상대가 뭘 원하는지 잘 아시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아 그건. 저도 너무 위험부담이 커서 망설여지네요.]
[주현 씨. 남자다운 모습 좀 보여주세요. 절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주세요?]
[하지만.]
[정말 실망이네요.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제 이혼 빨리 처리해주실 다른 변호사님을 찾아봐야겠어요. 여자 변호사는 제가 좀 불편하고 말이 잘 통하는 젊은 남자변호사님이 좋겠네요. 혹시 주변에 소개해주실만한 분 계세요?]
오주현 변호사의 목소리 톤이 확 높아진다.
[아니. 지영 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엄연히 제가 아직 지영 씨의 변호산데. 저 피 말려 죽는 꼴 보고 싶으십니까.]
[그럼 좀 과감하게 일을 처리해주세요. 이게 뭐예요. 질질 늘어지기나 하고. 전 일이든 사람이든 질질 끄는 건 딱 질색이란 말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민수 그 인간 코인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거 변호사님한테는 일도 아니잖아요. 제가 변호사님께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가요? 변호사님께 지금 사모님과 이혼하시고 저랑 결혼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 오래오래 편한 친구처럼 알고 지낼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오래오래 말입니까?]
[네. 저 잠깐 만나고 그만두실 생각이셨어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는 오늘 당장이라도 뵙고 싶습니다.]
이지영은 고삐를 더 당기기로 했다.
[나민수 코인 정보를 넘겨 주세요. 그래야 서지오랑 이혼을 빨리 끝내고 변호사님이랑 마음 편히 만나죠.]
[···.]
[정보만 넘겨 주시면 오늘 밤에 제가 댁 근처로 갈 수도 있는데.]
[오늘이요? 잠시만요.]
오주현 변호사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지금 오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럼 제가 나민수 씨 코인 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
위이잉. 위이잉.
이지영이었다.
밤 12시가 넘은 늦은 시각이었다.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이 시간에 나한테 전화를 걸 리가 없지.
[여보세요.]
[서지오 씨.]
[늦은 시간인데 왜 전화했어?]
[변호사님이 그러시던데 조만간 우리 첫 번째 이혼조정기일이 열린다고 하셨어.]
[나도 알고 있어.]
[전에 나한테 그랬지? 나민수가 가지고 있는 코인에 대한 정보만 주면 당장이라도 이혼해주겠다고.]
[물론이야. 고소도 전부 취소하고 선처를 바란다는 탄원서도 써주지. 대신 아파트는 원상복구하고 우리 사이에 재산분할도 모조리 포기해.]
[말했잖아. 그쪽 관련된 건 다 지긋지긋하다니까. 아파트고 뭐고. 재산분할도 다 포기할게.]
[그럼 모든 조건은 다 합의됐네. 딱 하나만 빼고. 나민수 코인.]
[훗후흐흐. 맞혀봐. 나민수가 지금 보유하고 있는 코인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일까?]
[장난치지 말고 코인 정보나 넘겨. 그리고 우리 이혼 끝내.]
[맞혀봐. 재미있잖아. 그쪽 상상력이 얼마나 허접한지 알 기회도 되고.]
[코인 정보는 어떤 식으로 줄 거야? 재산분할 재판하는 판사가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해서 보내줘.]
이지영에게 놀아날 생각은 전혀 없다.
[생각해보니 나민수 돈을 다른 년한테 모조리 뺏길 바에야 전처한테 절반 떼주고 나머지 반이라도 내가 쓰는 게 이득이겠더라고.]
너의 그 알량한 남자 등쳐먹을 계획에도 관심 없다.
[현재 시세로 2800억 원이야. 나루 코인이라고 들어봤어? 나민수가 그거 만든 사람이야.]
2800억? 듣자마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 얼마라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