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걸로는 부족하다 >
[나루 코인 현재 시총이 얼만 줄 알아? 자그마치 2조 5천억이 넘어. 현재 전 세계 코인 순위 30위권이야. 그중 십 분의 일 이상을 나민수 혼자 갖고 있다는 뜻이라고.]
이지영이 저렇게 벌써 자기 돈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대는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니겠지.
나루 코인이라면 비트코인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한때 다단계 사기 아니냐고 욕을 먹으면서 사회문제가 될 뻔했던 코인이었다. 사기 코인이라면서 망하니 마니 그러더니 어찌어찌 지금까지 굴러가고 있었나 보네. 비트코인에 이어서 코인 2위까지 올랐다고 광고를 엄청 해댔었던데.
나루 코인도 비트코인처럼 만든 사람이 실제로 누군지 알려지지 않아서 더 유명했었다. 나루가 한국어라서 개발자가 한국인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지만, 누군지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었다.
그 개발자가 나민수였구나.
궁금한 건 아무리 나민수가 나루 코인 개발자라지만 한 명이 왜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느냐다.
[나민수 혼자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다고?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뭐가 위험해. 만약을 대비해서 안전 자금으로 보유한 거겠지. 그건 알 필요 없잖아. 하여튼 나민수 개인 계정에 보유한 나루 코인은 현재 시세로 계산하면 2800억 원어치야.]
이러면 골치 아픈데.
현금화가 쉽지 않겠다.
당장 이걸 팔아치운다?
전체 나루 코인의 10퍼센트가 넘는 물량을 한꺼번에 시장에 내놓으면 어떻게 될까.
가격 폭락 수준이 아니다. 어느 수준까지 떨어질지 짐작도 안 되는데.
위자료로 코인을 받더라도 아주 조금씩 찔끔찔끔 팔아서 돈으로 바꿔야겠네.
아니면 아예 하수진이 공동개발자로 이름을 올려서 나민수와 코인을 반반 나누든지 해야지. 그래야 시장에 영향이 없을 것이다.
[그럼 코인 말고 다른 재산은? 나민수가 나루 코인 개발자면 그동안 틈틈이 팔아서 돈으로 바꿨을 거 아니야. 그러니 나민수가 그렇게 돈 자랑을 해댄 걸 테고.]
[현금으로 얼마나 바꿨는지는 나도 몰라.]
오주현 변호사가 거기까지는 모르나 보네.
아직은 굳이 변호사를 들먹거릴 필요가 없다.
[혹시 집안에서 나민수 말고 다른 이름으로 된 통장 본 적 있어?]
[나민수든 누구든 종이 통장 자체를 본 적이 없어. 핸드폰은 내가 살펴보려다 실패했고. 돈 관리가 얼마나 철저한데.]
[나민수가 돈을 어딘가로 빼돌려놨을 거 아니야.]
[이봐 서지오 씨. 하여튼 난 할 만큼 했어. 코인 정보 줄 테니까 그걸로 끝내. 첫 번째 이혼조정기일에서 이혼해.]
아직 이지영에게 캐낼 수 있는 건 많다.
코인은 당장 돈으로 바꾸기 힘든 최후의 보루 느낌이고 어느 정도는 분명 현금으로 미리 바꿔뒀을 것이다.
난 그것도 필요하다.
여기서 만약 숨겨둔 돈이 분명 있을 테니 그것까지 찾아오지 않으면 이혼 못 해주겠다고 몰아세우면 어떻게 될까.
이지영은 돈으로 움직이는 여자다.
그저 막연히 다그치거나 윽박지른다고 말을 들을 인간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코인 정보까지 주겠다는데 이제와서 딴소리냐며 무슨 엉뚱한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건 어떨까.
[제안할 게 있어. 나민수가 숨겨둔 현금을 찾아주면 그 돈의 20퍼센트를 줄게.]
수수료라고 생각하자.
돈으로 이지영을 유혹해야 한다.
지금은 최대한 나민수의 돈을 많이 찾아내는 게 우선이다.
[20퍼센트?]
[정확히는 니가 찾아낸 돈에서 하수진 씨가 재산분할로 받게 되는 현금의 20퍼센트. 코인은 빼고.]
[너랑 하수진이랑 무슨 사이길래 나민수 전처 재산분할 받을 돈까지 마음대로 결정하는 건데?]
[아직 하수진 씨한테 허락을 받은 건 아니야. 하수진 씨랑은 나민수라는 공동의 적이 있으니 협력하는 사이지. 어때 관심이 생겨? 10억만 돼도 2억이야. 2800억 원어치 코인을 남겨둔 나민수가 겨우 10억만 현금으로 숨겨뒀겠어?]
[들키면 어쩔 건데?]
[안 들키면 되지. 나민수에게 제일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건 너잖아.]
[생각해볼게. 그런데 말이야. 제일 위험을 감수하는 건 난데 겨우 20퍼센트는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최소한 절반은 줘야지. 남자가 쩨쩨하게 굴 거야.]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일단 이혼부터 마무리해. 숨겨둔 뒷돈 문제는 이혼 후에 얘기하고.]
이지영이 나중에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
[김지영 변호사님과 잠깐 통화하고 내가 곧바로 다시 걸게. 우선 끊어.]
[야. 이대로 끊으면 어떡해.]
뚜우뚜우뚜우.
곧바로 김지영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뒤로 미룰 수가 없을 만큼 중요한 정보였다. 중요한 일이 생기면 시간에 상관없이 전화를 걸라고 했었다.
띠이이.
[여보세요.]
신호가 울리자마자 곧바로 받는다.
[변호사님 밤늦게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안 자고 있었어요. 어쩐 일이세요?]
[이지영한테서 방금 전화가 왔습니다. 코인 정보를 얻었습니다. 나루 코인 들어보셨어요?]
[네. 알기는 압니다.]
[나민수가 그 나루 코인의 창립자랍니다. 현재 2800억 원어치의 나루 코인을 보유 중이고요.]
[그래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코인 말고도 따로 나민수가 현금을 어느 정도는 숨겨두고 있을 것 같거든요.]
[그렇겠죠. 그런데 그건 법원에서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 유명 정치인 비자금 찾기라면 몰라도 단순한 이혼 재산분할 소송에서 법원이 그렇게 따로 영장을 발부받아야 할 만큼의 수사를 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지영에게 일단 제의를 해 봤습니다. 숨겨둔 현금을 이지영이 찾아오면 하수진 씨가 받을 몫에서 20퍼센트를 주겠다고요. 제 마음대로 제안을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잘 하셨습니다. 일단 이지영에게 생각할 거리가 늘어난 건 우리한테 좋은 일입니다.]
[이지영은 절반이나 달라더군요.]
김지영 변호사가 잠시 말이 없다.
[절반이요? 훗.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말씀하십시오.]
[네? 정말 그래도 되나요?]
[일단은 나민수가 가진 전 재산이 수면 위로 나오는 게 급선무입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가 나민수에게 받아낼 수 있는 건 별로 없으니까요.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됩니다. 이지영이 과연 추후 하수진 씨에게 절반을 실제로 받아낼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절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선생님. 제가 악당 같아 보이시나요?]
[아닙니다.]
[재판이란 게 그렇습니다. 선악이 없습니다. 결국에는 이기는 쪽과 지는 쪽만 남죠. 그리고 한쪽이 100퍼센트 완벽하게 이기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제 임무는 선생님과 하수진 씨를 최대한 많이 이기게 해드리는 겁니다.]
[그럼 이지영에게 절반을 주겠다고 약속할까요?]
[네 일단 그렇게 말해두세요. 그리고 코인 정보도 확실하게 받으시고요. 하수진 씨에게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수진 씨는 이번 소송에서 모든 결정을 전적으로 저한테 맡기셨습니다. 저는 의뢰인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쪽으로 결정할 뿐이고요.]
[이혼 합의는 어떻게 할까요?]
[지금 이지영을 너무 몰아세우는 건 좋지 않습니다. 코인 정보를 받으면 이혼에 합의해주겠다고 하십시오. 이지영에 대한 고소도 물론 취소하고요. 일단 코인 정보를 얻는 게 급선무입니다. 상대는 아마 이혼조정일 당일에 주겠다고 할 겁니다. 그것도 괜찮다고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변호사님이랑 얘기를 하고 나니까 안심이 되네요.]
[전화 잘 하셨습니다.]
괜히 미안하네.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밤늦게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소송하다 보면 갑작스러운 상황은 언제든지 생깁니다. 새벽에 자다가 깨서 전화 받는 경우도 흔합니다. 저는 원래 늦게 자니까 죄송해하실 필요 없으세요.]
도대체 하루 몇 시간을 깨어 있는 겁니까? 출근도 일찍 하실 텐데.
[쉬십시오. 내일 출근하셔야 할 텐데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일이 생기면 또 연락 주세요.]
끊고 15분 정도 기다렸다가 이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금 변호사님과 통화를 했어.]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그러던데 내가 융통성은 꽤 있는 편이라고 했다.
김지영 변호사의 조언은 충실히 따르되 약간 변형을 가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절반까지는 무리야. 20퍼센트가 적당하다고 하셨어.]
[고작 20? 야 서지오. 장난해?]
[그 대신 코인 정보를 주면 우리가 얘기한 조건 그대로 첫 번째 이혼조정기일에 곧바로 이혼해줄게. 나민수가 혼인신고 응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이혼한 당일 아예 곧바로 혼인신고도 해버리면 되겠네. 직원이 깜짝 놀라겠다. 너 같은 여자는 처음 본다면서 놀라지 않을까.]
[댁이랑 농담 주고받을 기분 아니야. 20퍼센트로는 같이 일 못 해.]
[우린 같이 일하는 사이가 아니야. 곧 이혼할 사이지.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는 데 난 나민수가 숨겨둔 돈에 관해 알고 싶다고 했지 니가 어떤 식으로 그걸 얻는지는 관심도 없고 전혀 모르는 거야. 괜히 엉뚱한 일에 엮이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기는. 절반이야. 절반 아니면 안 해.]
이지영은 분명 나민수가 자기랑 혼인신고 안 해줄까 봐 불안해하고 있다.
그런 이지영의 불안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나민수가 혼인신고 안 해주려고 그러지?]
[언제부터 그렇게 내 재혼에 관심이 많았어. 절반에 할 거야 말 거야?]
[김 변호사님은 20퍼센트도 절대 안 된다는 걸 내가 겨우 설득해서 주겠다는 거야. 어차피 나민수가 하수진 씨한테 줬어야 할 돈이었어. 거기서 20퍼센트나 받아갈 수 있는 게 오히려 다행이지.]
[웃기시네.]
[솔직히 말할게. 나민수랑 재혼한다고 나민수가 가진 돈 전부 니가 쓸 수 있냐? 나민수가 그렇게 해줄 인간이냐고. 어차피 나민수는 양육비니 생활비니 그러면서 겨우 생색만 내는 수준이겠지. 안 그래? 너도 이번 기회에 딴 주머니 차야지.]
[···.]
[20퍼센트 챙기면 그거 니가 따로 관리하면 되잖아. 최소 일이 십억은 넘을걸.]
[아무리 그래도 20퍼센트는 너무 적어.]
[현실적으로 절반은 안돼. 너도 알잖아. 하수진 씨가 절반이나 주겠냐?]
[그럼 어쩌라고. 이혼 안 할 거야?]
[30퍼센트까지는 내가 다시 설득해볼게. 거의 3분의 1이잖아. 그 이상은 말도 못 꺼낼 분위기야.]
[하수진이랑 통화해봤어?]
[그래. 하수진 씨도 말도 안 된다면서 화만 내더라.]
[몰라. 난 하여튼 절반 아니면 못해. 절반 내놔.]
그래? 그럼 다 같이 죽자.
우린 이혼 못 하고 넌 나민수한테 언젠가 버림받고.
[이지영. 그럼 우리 다 같이 망해볼까? 누구 인생이 더 처참하게 망가지는지 한번 끝까지 가볼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지영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묻어나기 시작한다.
[소송 계속하면 아파트는 결국 되찾아. 위자료도 받을 만큼 받을 테고. 내 인생은 그렇게 잘 흘러가겠지. 하지만 넌 어떨까? 이미 대한민국에 신상 다 까발려졌는데 그나마 민수랑 재혼이라도 안 하면 어떻게 살래? 난 말이야 나민수가 재산분할로 왕창 토해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
[···.]
[욕심 그만 부리고 이걸로 끝내자. 30퍼센트 떼주자고 내가 마지막으로 하수진 씨 설득해볼 테니까 우린 이혼하자. 이게 마지막 제안이야. 더는 없어.]
이지영이 한참 말이 없다.
늦은 밤 서로 피곤하기는 매한가지다.
[좋아. 그렇게 해. 이걸로 끝내. 대신 코인 정보는 이혼조정기일에 합의되면 줄 거야.]
[서로 동시에 주고받으면 되겠네. 그건 알았어. 그럼 다 된 거지?]
[그래. 아주 지긋지긋하다.]
뚜우뚜우뚜우.
너무 늦은 시각이라 김지영 변호사에게는 내일 다시 보고하기로 했다.
**
이지영은 약이 올라서 미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지오 그 개새끼가 자신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나민수가 하필 서지오의 대학 동아리 동창이자 친했었다는 게 뼈아프다. 나민수가 어떤 인간인지 서지오는 잘 안다.
내심 절반까지 기대했지만 할 수 없다.
30퍼센트라도 건지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민수가 외출한 사이 온 집안을 구석구석 샅샅이 뒤졌지만, 단서가 될 만한 걸 전혀 못 찾겠다.
워낙 돈에 관련해서는 빈틈없는 놈이었지만 이렇게까지 흔적 하나 안 남겨뒀을 줄이야.
역시 나민수의 핸드폰을 노리는 수뿐이다.
하지만 나민수는 하루 24시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를 않는다. 잠자리에 들 때도 머리 바로 옆에 놔둔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핸드폰을 마음껏 들여다볼 수 있을까? 방법이 분명 있을 텐데.
오주현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완전히 자신의 편이 된 남자다.
[변호사님. 저예요.]
[지영 씨. 오늘 시간 되세요?]
[너무 자주 만나면 나민수가 눈치챌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 변호사님. 나민수가 코인 말고 다른 재산은 빼돌린 게 없나요? 비자금 통장이라든가 뭐 그런 거요.]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실망이네요. 저는 이혼 때문에 불면증까지 시달려서 수면제 먹고 겨우 잠드는데 그에 비해 같이 사는 나민수는 저렇게 ···. 잠시만요.]
[지영 씨. 왜 그러십니까?]
이지영은 화장대 위에 놓인 약봉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 그걸로는 부족하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