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31)

1. 언니잖아

룩센 백작은 아덴 왕국의 남부 지방 유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여러 장원을 가졌으며, 대를 이어 충성을 맹세한 수십 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선대 백작 대에는 중앙에서 요직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대로 수도에 머물며 중앙 귀족들과 혼맥을 이었더라면, 중앙의 권세가로 우뚝 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선대 룩센 백작은 그 눈부신 영광을 뒤로한 채 지방의 영지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룩센 백작가는 그대로 남부 지방의 유지로만 남게 되었다.

룩센 백작은 아버지의 결정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감사했다.

아버지가 미래를 내다보고 눈앞의 영광을 포기했기에 그와 그의 가문이 무사할 수 있었으니까.

당대 아덴의 왕은 역대 그 어떤 왕과도 비교할 수 없는 쓰레기, 변태, 살인마였다.

폭군이 가지고 있어야 할 악덕을 모두 갖추었으며,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하는 선한 마음 따윈 태어날 때 어머니 배 속에 놓고 온 듯했다.

적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활을 쏴 죽였다. 적의 아내는 적의 다른 적에게 선물로 보냈고 자식은 아무리 어려도 반드시 죽였다.

그는 기분이 나쁠 때마다 자신의 충신을 적이라 여겼고, 적에게 하는 짓을 고스란히 저질렀다.

수도는 침묵과 공포, 피의 도시가 된 지 오래였다.

중앙의 귀족들은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었다. 왕에게 등을 보이는 즉시 왕의 적이 될 게 뻔했으니까.

지방의 귀족들은 그저 납작 엎드려 숨죽였다.

왕이 세금을 올리라 하면 올리고, 볼모를 보내라 하면 없는 사생아를 만들어서라도 보냈다.

그러면서 왕이 저 멀리에 떨어져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룩센 백작 또한 그리 생각하는 지방 귀족 중 하나였다.

그저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인 시대에, 룩센 백작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이 있었다.

큰딸은 루비아나.

작은딸은 칼레나.

두 살 터울이었고 그럭저럭 사이가 좋았다.

루비아나는 붉은 머리카락에 녹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꽤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타오르는 횃불 같은 머리카락이 워낙 강렬해 인상이 흐릿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름도 루비아나였다. 루비의 축복.

부모님은 꽤 고심해서 지은 이름이겠지만, 루비아나는 어릴 적부터 제 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동생 칼레나는 고수머리 금발에 녹색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뒤돌아볼 만큼 아름다웠다.

또한 매우 똑똑했다.

루비아나는 열다섯 살의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다. 동생이 예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똑똑하다는 걸.

이 험한 시대에 작위를 잇고 가문을 넘겨받는 기준은 누가 먼저 태어났느냐가 아니었다. 누가 작위와 가문을 무사히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였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대 룩센 백작은 칼레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처럼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건만.

“언니, 이 레이스는 내가 가져갈게. 역시 나한테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

칼레나가 은실로 짠 레이스를 흔들며 눈앞에서 얼쩡거렸다. 똑똑하기는 하나 아직 열세 살에 불과한 동생이 또 언니의 물건을 탐내는 것이었다.

칼레나가 팔랑팔랑 흔드는 폭 넓은 레이스는 아버지가 루비아나에게 열다섯 번째 생일 선물로 사 준 것이었다.

“당장 그 더러운 손을 떼는 게 좋을 거야.”

루비아나는 동생의 영특함과 가문의 계승권, 앞으로의 미래 등에 대한 고민일랑 잠시 잊고, 칼레나에게 달려들었다.

감히 하늘 같은 언니의 물건에 손대다니. 이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루비아나는 동생을 잡아 가정 교사가 있는 서재로 질질 끌고 갔다. 숙제를 미처 못 한 동생이 혼나는 걸 구경하며, 잠시 접어 두었던 생각을 마저 정리했다.

그리고 칼레나가 언니의 물건에 손대지 않을 만큼 철이 들면, 부모님께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을 부모님께 말씀드리기 전.

부모님이 수도로 불려 가 죽임을 당했다.

죽음의 이유는 왕실 모독죄. 왕께 바친 진주에 티끌만 한 흠집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루비아나도 칼레나도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어느 날의 일이었다.

둘의 후견인으로 외삼촌이 급히 달려왔다. 외삼촌은 어린 조카들을 대신해 룩센 백작 대리가 되었다.

룩센 백작 대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수도로 올라가 왕께 룩센 백작령의 장원 중 가장 세금이 많이 걷히는 장원을 바치고 백작 부부의 시신을 돌려받는 일이었다.

루비아나는 숨넘어갈 듯 우는 칼레나를 껴안고 부모의 시신을 맞이했다.

백작 부부의 시신은 성치 않았다. 온갖 변태스러운 고문을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루비아나는 부모님의 시신이 장의사의 집으로 들어가는 걸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봤다.

장의사의 집 문이 닫히고야 동생의 눈을 가렸던 손을 풀어 주었다.

장례식은 사흘 동안 진행되었다.

본래라면 칠 일간 진행해야 했으나 왕에게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사흘밖에 허락받지 못했다. 조문객 또한 없었다.

그 사흘은 루비아나가 열다섯 살의 어느 날에 했던 결심을 뼛속에 새기는 기간이었다.

외삼촌은 다감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조카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룩센 백작 위를 감히 노리지 않았다.

루비아나가 열여덟 살이 되어 성인식을 치르자, 외삼촌은 그녀에게 룩센 백작 위를 넘기려 했다.

루비아나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사양하고, 후계자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가 자신이 스무 살이 되기 한 달 전. 칼레나가 열여덟 살 생일을 맞이하자, 루비아나는 칼레나의 열여덟 번째 생일 선물로 룩센 가문의 인장 반지를 주었다.

가문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룩센 백작 작위를 칼레나에게 넘기겠다는 의미였다.

루비아나는 스무 해 동안 룩센 백작의 후계자였다. 딱히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고, 후계자로서 룩센 가문의 일을 잘 이끌어 왔기에 가신들과 친지들의 반대가 컸다.

루비아나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속세의 삶을 포기해야 했다.

그녀는 룩센 백작가의 장원에 세워진 수도원 중 적당한 곳을 골라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평생 수도사로서 살며, 속세의 모든 권리를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가신과 친지들도 더는 루비아나를 잡지 않았다.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니 일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칼레나는 얌전했다. 언니의 열여덟 번째 생일 선물을 거절하지도, 수도원으로 들어가겠다는 발표를 말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다들 두 자매가 미리 입을 맞춰 놓고 행동한 것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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