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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루비아나는 눈이 팅팅 부은 칼레나를 놀리다 어깨를 한 대 얻어맞고, 골절을 의심하며 의원에게 갈까 고민하다 그냥 그대로 떠났다.
짐은 단출했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활과 한 묶음의 화살, 옷 몇 벌과 책 몇 권, 수도원장에게 찔러 줄 은화 한 주머니.
루비아나는 백작령의 어느 장원 끄트머리에 선 수도원으로 갔다.
루텔 수도원의 원장은 루비아나의 예상대로, 루비아나보다 그녀가 내미는 은화 주머니를 더 반겼다.
원장은 기꺼이 수도원장실을 내주었고, 루비아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햇살이 잘 비치는 방, 폭신한 침대 위에서 한 달 동안 뒹굴뒹굴했다.
이후 두 달 동안은 매일 한 병씩 지급되는 포도주와 질 좋은 치즈, 부드러운 흰 빵을 먹으며 숨만 쉬고 살았다.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하는 것과 숨만 쉬고 사는 것의 차이는 매우 컸다. 후자의 경우,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산책하러 나갔다 왔으니까.
석 달 정도 지나니 수도원 생활에 적응했다.
루비아나는 이후 2년간 평화롭고 고요한 수도원 생활을 이어 나갔다.
적당히 늦잠을 잤고, 다른 수도사들이 성서 필사에 열을 올릴 때 동생이 보내 준 편지를 뒤적였다. 남들이 기도할 때 졸고, 남들이 노동할 때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그래도 손바닥의 굳은살이 사라지지 않은 건, 그녀가 모두가 잠든 깊은 밤마다 수도원 뒤뜰의 외진 곳에서 활과 화살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칼레나가 보내온 편지엔 나날이 심각해져 가는 영지와 왕국의 사정들이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이제 왕은 늙지 않겠다며 아이들의 피로 목욕하고, 매일 열 명의 미녀들과 잠자리에 든다고 했다.
세금은 백성은 물론 귀족들까지 파산하고 도망칠 정도로 높아졌지만,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세금을 만들기 바쁘다고도 했고.
‘이래도 나라가 유지될 수 있는 건가?’
고개가 절로 절레절레 흔들릴 만큼 말도 안 되는 내용뿐이었지만, 루비아나는 매번 편지를 꼼꼼히 읽었다.
답변을 보낼 땐 편지에 적혀 있는 어떤 내용에 대해서도 적지 않았다. 그저 계절 따라 동생의 건강을 걱정했다.
비슷한 하루가 반복되어도 꼬박꼬박 해가 바뀌고 세월이 흘렀다.
수도원에 온 지 4년째가 되던 해의 어느 날, 그러니까 루비아나가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던 편지 배달꾼이 수도원에 오지 않았다. 대신, 은빛 갑주로 무장하고, 갑주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장검을 찬 기사가 찾아왔다.
그녀는 빛나는 금발에 녹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수도원은 기도 시간이었다. 루비아나는 당당히 포도주 창고로 들어가 빈 오크 통에 기대 자고 있었고.
루비아나는 자신을 찾으러 온 수도사에게 이끌려 홀로 나갔다. 엉클어진 붉은 머리를 정돈할 틈도 없었다.
수도원장이나 앉던 단상 위 돌의자에 칼레나가 앉아 있었다.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지는 오색의 빛이 그녀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멍하니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4년 만에 보는 동생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제 준비가 다 끝났어. 난 그 개새끼를 끌어내 죽일 거야. 순서를 바꿔 죽인 다음에 끌어내려도 상관없고.”
칼레나가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언니, 도와줘.”
그녀는 여전히, 어떻게 하면 언니를 부려 먹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
똑똑한 동생에게 작위와 가문을 넘겼다.
폭정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동생과 작위와 가문을 모두 지킬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똑똑해도 너무 똑똑한 동생은 단지 가문과 영지를 지켜 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폭군을 쳐 내고자 마음먹었다. 준비도 이미 다 끝났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루비아나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동생을 돕는 것.
루비아나는 몸에 맞지 않는 수도복을 벗었다. 사원 창고에 처박혀 있던 가죽 갑옷의 먼지를 털고, 손때 묻은 활과 화살집을 어깨에 멨다.
다시 칼레나를 찾았을 때, 칼레나는 오색의 빛 아래 서 있었다.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신께서 이 땅에 인간 왕을 내려 주셨을 때를 기록한 성서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
천사들이 땅 위에 무릎 꿇은 인간에게 왕관과 뿔 나팔을 내밀고 있는 장면. 그 오색 유리를 통과한 빛 속에 칼레나가 서 있었다.
루비아나는 동생 앞에 무릎 꿇었다.
“루비 언니?”
“그렇게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
“루비아나 경, 혹은 크리스틸 경이라고 부르면 되지 않을까? 물론 그 전에 네가 날 기사로 임명해 줘야겠지만.”
“뭐?”
칼레나가 어처구니없어했다. 루비아나는 그 얼굴에서 앳된 옛 모습을 찾아냈다.
그러고 보면 여기까지 와서는 한 말이 고작 ‘언니, 도와줘.’였다.
그건 루비아나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주문이긴 했으나, 폭군에게 맞서고자 들고 일어선 새 왕의 어록으로 남기엔 가벼운 감이 없지 않았다.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고.
어쩌겠나, 언니가 나서서 정리해 줘야지.
루비아나는 칼레나 옆에서 펜을 놀리는 화공을 힐끗,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한껏 눈을 부라렸다.
‘이 이후의 광경을 최대한 멋지게 그리는 게 네 신상에 이로울 거다.’
그렇게 화공을 겁주고는 다시 칼레나를 올려다보았다.
“속명 루비아나, 신명 크리스틸. 과거 룩센 백작가의 식솔이었던 자가 감히 맹세합니다. 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룩센 백작 칼레나 님을 따르겠나이다. 저의 검과 화살은 당신의 적을 겨눌 것이며 저의 방패는 당신의 성을 지킬 것입니다. 당신이 주는 빵과 소금을 먹고,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마음을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당황하던 칼레나는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굳은 얼굴로 루비아나를 내려다보았고, 루비아나의 맹세가 끝나자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아버지의 유품이며, 대대로 룩센 백작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검이었다. 칼레나는 그 검으로 루비아나의 양 어깨를 두드렸다.
“그대의 맹세를 믿고 그대에게 나의 빵과 소금을 주노니, 나의 믿음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충성의 대가는 달 것이며, 배신의 열매는 독을 품을지어다. 속세에서의 그대도, 신께 바쳐진 그대도 모두 내게 속하였나니. 나는 그대에게 새로운 성을 내려 두 이름을 모두 내게 속하게 하고자 하는도다. 루비아나 크리스틸 폰 아쉴레앙, 그대의 검을 들어 나를 따르라.”
엄숙한 군주의 맹세가 루비아나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렇게 루비아나 폰 룩센은 루비아나 크리스틸 폰 아쉴레앙이 되었다.
루비아나는 검을 바라보았다. 검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엇갈려 비쳤다.
단상 위에 올라선 칼레나.
무릎을 꿇은 루비아나.
두 사람은 두 살 터울의 자매로 지금까진 그럭저럭 사이가 좋았다.
기꺼이 작위와 가문을 양보할 만큼. 반역을 두려워하여 손위 자매를 독살해 죽이지 않을 만큼.
이제 그 관계는 다른 관계로 재정립될 것이다. 입맞춤 한 번으로.
문득,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스쳤다.
동생과 치열하게 치고받고 싸웠던 모든 순간. 똑똑한 동생을 아득바득 이기려 애쓰다 단념하고 말았던 순간. 동생의 눈을 가리고 부모님의 시신을 맞이했던 순간. 동생에게 모든 걸 넘기고 백작저를 떠나던 그 순간까지.
이후 4년간은 공백이었다. 오늘의 만남이 그 공백을 찢었다.
4년 만에 보는 동생은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분명 더 똑똑해지기도 했으리라. 숨죽여 살아남기보다 칼을 들고 맞서 싸우고자 결심한 만큼.
그러니 덜 똑똑하고 게으른 언니도 조금은 달라져야 했다. 목숨을 걸고 반역의 길로 나서는 동생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 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꺼이 따르겠나이다.”
루비아나는 칼레나가 내민 검 끝에 입을 맞췄다.
‘신이여.’
루비아나는 마음속으로 신을 불렀다. 수도원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신을 부르는 것이었다.
‘저는 그리 신실하지 않은 인간입니다. 솔직히, 당신이 존재하신다는 것도 별로 믿기지 않았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저딴 폭군을 이 세상에 냈단 말인가? 부모님을 그렇게 죽게 놔뒀단 말인가?
그러니 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저런 왕이 왕이어도 신이 벌하지 않는 세상, 부모님이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세상.
이 세상에 정녕 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거겠지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믿을 이유가 없다. 신이 존재한다 해도 땅 위 인간들을 사랑해 주지 않는다면 역시나 믿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신을 믿지 않았다.
수도원에 몸을 의탁한 건, 그저 동생에게 작위를 물려주기 위함일 뿐.
수도원에서 지내도 믿음은 자라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만약에.
신이 존재하고, 이 땅의 인간들에게 티끌만 한 애정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정녕 성서에 쓰인 것처럼 땅 위 사람들이 신이 사랑하는 자녀라면.
‘내 동생이 이루려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내 동생을 지켜 주십시오.’
그래야 신이 존재하는 것도, 인간을 굽어살핀다는 것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루비아나는 칼레나가 내민 검을 왼손으로 움켜잡았다. 검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살점이 갈라지고 피가 흘렀다.
화끈한 고통이 밀려왔으나 검을 놓지 않았다. 더 꽉 움켜쥐었다.
“언니?”
칼레나가 검을 빼려 했지만, 그랬다간 루비아나의 손이 더 베일 뿐이라는 걸 깨닫고는 멈춰 섰다.
피가 뚝, 뚝, 떨어져 돌바닥을 적셨다. 금세 작은 피 웅덩이가 고였다.
루비아나는 그 피에 대고 맹세했다.
“맹세합니다. 신이여, 신께서 맺어 주신 나의 왕이여. 당신께서 이루고자 하는 일이 성공한다면, 나의 첫 아이를 신께 바치겠나이다. 스무 해 동안 신께 몸과 마음을 다해 봉사토록 하겠나이다. 이후 나의 왕께서 주신 성, 아쉴레앙의 핏줄이 이어지는 한 이 맹세는 대를 이어 계속될 것입니다.”
피의 맹세였다.
칼레나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미 한 맹세를 무를 수는 없지만,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또 한 번 어설프고 앳된 반응을 보이는 동생을 보며, 루비아나는 그저 웃었다.
‘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이 정도 대가를 바치는 것으로 네가 하려는 일을 수월히 이룰 수만 있다면 무척 싸게 먹히는 거야.’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의 대가를 언니가 대신 치르고자 한다는 걸 알면, 혹여나 미안해할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