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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가 마르기 전, 루비아나는 칼레나를 쫓아 수도원을 떠났다.
왼손에 붕대를 두르고, 칼레나가 준 새 검을 허리춤에 찼다.
칼레나를 따르는 무리는 이미 꽤 큰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 폭군에게 핍박받던 남부의 귀족과 백성이 그녀의 군대가 되었다.
거기에 루비아나를 따르는 루텔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더해졌다.
칼레나는 군대를 이끌고 천천히 북상했다. 바로 중앙으로 쳐들어가지 않고, 동쪽으로 갔다.
동쪽의 유지, 도미넨트 백작가가 성에 백기를 걸고 성문을 열었다.
도미넨트 백작은 외동아들인 루단테, 왕국 최고의 검사로 이름 높은 그를 항복의 증거로 바쳤다.
루비아나는 루단테를 자신의 기사로 임명하고 오른쪽 자리를 내주었다.
도미넨트 백작이 항복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동부의 귀족들은 앞다투어 칼레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칼레나는 동부를 무혈로 얻었다.
루비아나는 칼레나의 명을 받들어 왕국의 서부로 갔다. 그곳에선 자잘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가 시작되면, 루비아나는 높은 탑, 오래된 나무에 숨어들었다.
몇 날 며칠 숨죽여 기다리다가 상대편에서 가장 작위 높은 자가 나타나면 화살을 쏘아 목을 꿰었다.
높은 자를 죽이고 나면 남은 자들은 순순히 항복했다.
루비아나가 죽이지 못한 유일한 자는 서부의 유지, 펠트하르그 변경백이었다. 그는 폭군에게 부모와 어린 동생들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자였다.
그는 루비아나가 날린 화살에 한쪽 눈을 잃었으나 죽지 않았고, 기어이 루비아나를 찾아내 그녀의 어깨에 검을 박았다.
사이좋게 한 방씩 먹은 두 사람은 각자 눈과 어깨를 싸맨 채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항복과 귀부 사이에서 치열하게 줄다리기를 했으나 쉬이 결론이 나지 않았다.
루비아나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칼레나가 홀로 말을 타고 서부에 오고서야, 항복으로 결론이 날 수 있었다.
젊은 펠트하르그 변경백은 홀로 말 타고 달려온 칼레나를 보고는 바로 항복했다.
루비아나는 그가 칼레나에게 반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쉽게 됐네.’
애꾸가 됐지만 잘생기고 몸도 좋아 남편감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잠깐 했더랬다.
신께 바친 피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결혼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이왕 하는 거면 잘생긴 놈이랑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펠트하르그 변경백은 루비아나가 본 남자 중에 제일 잘생긴 사내였다.
도미넨트 백작가의 장자가 비슷하게 잘생겼으나 그는 나이가 어리고, 나대는 성격이어서 루비아나의 취향이 아니었다.
펠트하르그 변경백이 딱이라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동생에게 반하다니.
쯧, 루비아나는 혀를 한 번 차고는 바로 단념했다.
이후 루비아나는 어쩌면 제부가 될지도 모를 사내의 한쪽 눈을 날려 버렸다는 생각에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남편감이 눈 하나 없는 건 괜찮지만, 동생 남편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히 거슬렸다. 눈깔 하나를 제가 해치웠다고 생각하고 나니 기분도 안 좋았고.
언니의 우울한 마음을 알 리 없는 칼레나는 남부와 동부, 서부까지 손에 넣은 기세를 몰아 곧바로 중앙의 수도로 진격했다.
북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북부의 산맥에 똬리를 튼 드래곤 때문에, 왕국의 북부는 왕실조차도 손을 놓은 지 오래였다.
도망친 죄인들이 만든 도시가 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인, 버려진 땅이었다.
폭군의 폭정에 시달리던 중앙의 수도가 젊은 룩센 백작의 반란을 감당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칼레나는 큰 어려움 없이 일곱 관문을 뚫었다.
수도의 백성은 꽃을 뿌리며 칼레나와 그녀의 군대를 환영했다.
왕과 그의 신하들이 왕성을 굳게 걸어 잠그고 마지막 전투를 준비할 때.
왕은 멀찍이서 칼레나를 보고는, 그녀의 빛나는 외모에 반해 협상 사절을 보냈다. 칼레나를 왕비로 삼고 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다음 대 왕으로 삼자는 것이었다.
굳이 칼레나가 대답할 것도 없었다. 루비아나가 단번에 사절의 목을 베었다. 펠트하르그 변경백은 둘로 나뉜 머리와 몸통을 예쁘게 말에 매어 왕에게 돌려보냈다.
그날 밤,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다.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칼레나가 겁에 질린 폭군의 목을 베었을 때, 먼 하늘에서 동이 터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마지막 전투를 ‘새벽 전투’라고 불렀다.
새벽이 몰고 온 새로운 하루가 열렸을 때.
왕국의 주인은 바뀌었다.
칼레나.
루비아나의 하나뿐인 동생은 왕국의 왕이 되었다.
이제 됐구나, 라고 마음을 놓기도 전에.
“언니, 도와줘.”
칼레나가 손을 내밀었다.
루비아나는 폭군도 왕이랍시고 충성했던 자들을 모조리 찾아내 죽이고, 막 피에 젖은 손을 씻던 중이었다.
씻고 얘기하자는데 굳이 따라 들어와서는 하는 말이 저것이었다.
‘설마 왕관이 무거우니 대신 써 달라는 건 아닐 테고. 해 봤자 북쪽에 올라가 드래곤을 잡아 달라는 정도겠지.’
루비아나는 가볍게 생각하고 뚱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또 뭘?”
“난 내 왕국을 제국으로 만들고 싶어. 도와줄 거지?”
칼레나는 왕이 아니라 황제가 되길 원했다.
“아, 드래곤은 그 뒤에 잡으러 가자.”
그것도 그냥 황제 말고. 옥좌를 드래곤 가죽으로 장식한 황제.
“굳이?”
“굳이.”
“안 귀찮아?”
“안 귀찮아.”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응.”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걸 보니, 이미 단단히 마음먹은 듯했다.
“알았어. 내가 뭘 하면 돼?”
칼레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녀가 가는 길을 지키며, 그녀가 원하는 걸 이루겠노라고.
그런 루비아나에게 선택권 같은 건 없었다.
루비아나는 칼레나와 함께 원정에 나섰다. 루단테와 펠트하르그 변경백도 함께했다.
넷은 인근 왕국을 모조리 점령했다.
대부분은 멸망시켜 흡수하고, 대륙 변두리의 몇 개 왕국은 남겨 두고 충성 맹세를 받았다.
원정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드래곤을 사냥했다. 군대를 잠깐 대기시켜 놓고 칼레나와 루비아나, 루단테와 펠트하르그 변경백, 이렇게 네 사람만 북부의 산맥으로 갔다.
칼레나는 주로 구경했고 루단테가 날뛰었다. 루비아나와 펠트하르그 변경백은 적당한 선에서 보조했다.
“가죽이 상하지 않게 죽여야 해.”
칼레나는 세 사람의 검이 드래곤의 가죽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했다.
“나 방금, 밟혀 죽을 뻔한 거 안 보였어?”
“그러게, 언니 조심 좀 해.”
“…….”
루비아나는 뜨거운 자매애에 감동받은 표정을 짓고는 다시 드래곤에게 집중했다.
칼레나가 지루하다며 하품할 때 즈음, 루단테가 드래곤의 두 눈을 찌르고 심장을 갈랐다.
드래곤은 죽어 둘로 쪼개진 드래곤 하트와 깨끗한 가죽을 남겼다.
칼레나는 드래곤 가죽을 덮은 왕좌에 앉아, 드래곤 하트를 박은 왕관을 쓰고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늘 그녀의 곁을 지키며 충성을 다했던 세 기사는 공작이 되었다.
아쉴레앙 공작, 루비아나.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
펠트하르그 공작, 카드릭.
세 공작가의 문장엔 모두 꽃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 가문의 문장에 그려진 꽃을 본떠 이렇게 불렀다.
은장 백합의 아쉴레앙
철십자 장미의 펠트하르그
검은 튤립의 도미넨트
황제 칼레나는 세 공작에게 각각 북부와 남부, 서부를 맡겼다.
본래 동부의 유지였던 도미넨트 공작에겐 서부를. 서부의 유지였던 펠트하르그 공작에게는 남부를. 아쉴레앙 공작에게는 북부를.
드넓은 평야 지역인 동부는 황제의 직속령으로 삼았다.
루비아나는 막 드래곤이 죽은 땅, 황량한 황무지와 깊은 산맥과 숨어든 죄인들뿐인 북부의 주인이 되었다.
북부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죄인들뿐이 아니었다. 드래곤의 피에서 태어난 온갖 마수들, 그것들이 산맥에 득실득실했다.
루비아나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 그 마수들과 싸워야 했다.
“언니를 믿으니까, 언니에게 북부를 맡긴 거야. 나의 제국을 지켜 줘. 부탁해, 언니.”
황제가 된 동생은 둘만의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말이나 못하면.”
루비아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북부로 가 장벽을 쌓고, 마수들을 장벽 위로 밀어 올렸다.
동시에 북부에 숨어든 죄인들을 잡아 족쳐 착한 백성이 되겠다는 피의 서약서를 받고, 세금을 거두었다. 사지가 멀쩡한 놈은 병사로 만들었다.
마수와 싸우는 것보다 죄인을 착한 백성으로 만드는 게 좀 더 까다로웠다.
마수를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했지만 북부를 어느 정도 안정시킬 즈음, 루비아나는 서른을 앞둔 나이가 되었다.
서른이 되기까지 1년 남은 스물아홉 살의 어느 날.
황제의 인장이 찍힌 편지가 도착했다. 수도로의 귀환 명령이었다.
루비아나는 북부의 찬 바람을 휘몰며 수도로 돌아왔다.
제국은 초대 황제의 뛰어난 통치술로 안정되었고, 수도는 제국의 수도답게 번성해 있었다.
중앙 사교계 역시 불과 몇 년 전까지 폭군의 피비린내 나는 폭정에 시달렸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해져 있었다.
그곳에서 루비아나는, 차가운 북부의 공작은 두려움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한 손으로 마수들의 머리를 쥐어 터뜨리는 잔혹한 살인마.
명령을 거역한 병사들을 즉결 처형하는 거칠고 사나운 광전사.
마수의 가죽으로 망토를 만들어 입고 마수의 생살을 뜯어 먹는 잔혹한 야만인.
중앙의 귀족들은 흠모와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세 개 달리고, 키가 2미터가 넘는 근육질이라고 들었는데, 아니네요.”
“전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주 새까맣고 무시무시한 분이라고 들었어요.”
“살짝 부딪치기만 해도 바로 목을 비틀어 버린대요.”
“어머, 어머. 어떻게 그렇게 야만적이고 사나운 분이 우리 폐하의 혈육이실까요?”
새벽 전투에 참여했던 귀족들이, 그들의 아들딸들이 이렇게 떠들어 댔다.
루비아나는 몇 년 새 수도에 기억 상실증을 동반하는 전염병이 돈 게 아닐까 의심했다.
루비아나가 칼레나를 만나 제가 들었던 뒷말을 말하니, 칼레나는 재미난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다른 두 공작과 몇몇 관리들이 함께하는 자리였던지라, 루비아나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했다.
“언니는 안 웃겨? 그렇게 말하는 걸 가만 듣고만 있었어? 바로 목을 비틀어 버렸어야지.”
왜 제게 충성을 맹세한 귀족들의 목을 비틀지 않았냐고 묻는 칼레나에게, 루비아나는 충성의 의미로 아니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소문을 퍼트린 게 폐하십니까?”
“모함하지 마. 내가 뭐 하러?”
“……폐하시군요.”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그러셨습니까?”
“재미있잖아.”
“…….”
“나는 그냥, 언니가 편지로 보낸 북부의 힘겨운 사정을 슬쩍 흘린 것뿐이야.”
“아, 예.”
“언니가 북부에서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잊지 말고 고마워하라고. 멋대로 이상한 소문을 부풀린 건 그들이라고.”
“…….”
“정 마음에 안 들면 그들의 목을 비틀어. 알았지?”
“안 비튼다니까요, 목.”
“진짜? 아쉽네. 좀 기대했는데.”
칼레나는 낄낄대며 웃었다.
도미넨트 공작과 펠트하르그 공작, 그러니까 제국에서 제일 잘생기고 잘나가는 미혼남 두 명이 그런 칼레나를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루비아나는 칼레나 양옆에 앉은 두 꽃 같은 미청년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 옆에 너무 가깝게 붙어 있지 말라고 충고 한마디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당분간 수도에 있어. 그러면 말 같지도 않은 소문들은 금방 가라앉을 거야.”
칼레나가 다시 말을 걸었다.
“북부의 마수들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했습니다만.”
“평생 해도 못 할걸. 공격이 심하지 않은 기간엔 수도에 와 있어.”
“굳이?”
루비아나는 의아했다.
말 아깝게 매년 북부와 수도를 왔다 갔다 할 필요가 뭐 있단 말인가? 딱히 충성심을 의심받는 상황도 아닌데.
여기서 말은 히힝- 하고 우는 그 말이 맞았다. 북부에서 수도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지라 오는 길에 말을 몇 번이고 갈아타야 했다.
물자가 부족하고 척박한 북부에 몇 년 있다 보니, 그런 것마저 아까웠다.
루비아나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 칼레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내 옆에 있으면서 날 좀 도와줘. 아직 체계가 덜 잡혀서 할 일이 많아.”
가벼운 말투였지만 마냥 가볍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칼레나의 얼굴이 좀 수척한 것도 같았다.
물론 루비아나의 관점에서였다. 카드릭과 루단테가 루비아나의 생각을 알았다면 똥 씹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반쪽이 된 건 내 얼굴이겠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마수의 피에 눈이 오염됐나 보군.’
그러나 두 남자는 남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없었다. 루비아나 역시 굳이 제 마음을 소리 내 말하지 않았고.
“알겠습니다.”
그저 황제의 부탁 같은 명령을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루비아나의 마음속에서 카드릭과 루단테, 두 사람의 ‘동생 남편감 후보 점수’가 큰 폭으로 하락했다.
‘그러고 보니.’
남편감 하니 생각났다. 칼레나를 따르기 전 신께 했던 맹세가.
곧 있으면 서른.
‘못 해도 아이를 둘 이상은 낳아야 하는데, 슬슬 구혼 활동을 시작해야 하려나?’
신께 바칠 아이 하나와 공작가를 이어받아 계속 황제에게 충성할 아이 하나.
그러려면 적당한 남편감을 구해야 했다. 아랫도리가 실해서 아이 둘쯤은 너끈히 만들어 낼 수 있는 튼튼한 놈으로다가.
‘온 김에 남편감이나 구해 볼까?’
일하느라 힘든 동생도 돕고, 동생 옆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무능한 동생 남편감 후보들 좀 갈구고, 겸사겸사 본인의 남편감도 찾고.
이 정도면 말을 몇 마리나 바꿔 가며 수도까지 올라온 보람이 있지 않을까?
루비아나는 기분이 좀 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