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만남
칼레나가 황궁과 가까운 곳에 있는 저택을 주었다. 루비아나는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그 소식이 단번에 중앙 사교계에 퍼졌다.
루비아나는 하루 황궁에서 머물고 다음 날 하사받은 저택으로 갔는데. 그녀보다 먼저 도착한 초대장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새 왕조가 들어선 지 고작 몇 년. 제국이 세워진 것 또한 고작 몇 년.
‘그 고작 몇 년 동안 중앙 사교계가 이렇게나 번성했다니.’
루비아나는 감명 받았다. 연회와 티타임에 참석해서는 중앙 귀족들의 우아한 태도를 경험하고서 더욱 감명 받았다.
앞다퉈 초대장을 보내면서도, 막상 그녀가 모임에 참석하면 ‘정말 왔어?’란 눈빛으로 쳐다보며 슬금슬금 물러서는 모습들이라니.
루비아나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수도 사교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기분과 상관없이 매주 적당량의 사교 모임에 참석해야 했다.
그 적당량을 정하는 건 칼레나와 칼레나가 저택에 딸려 보낸 시녀장이었다.
칼레나는 세 공작과의 우애 있는 모습을 내보이며, 수도의 세련된 싸가지들을 찍어 눌러야 했다. 그러니 칼레나가 참석하는 사교계 모임엔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시녀장은 좀 더 루비아나의 목적에 충실했다. 산더미 같은 초대장에서 젊고 유망한 영식들이 참석할 만한 모임을 기가 막히게 골라냈다.
칼레나가 의도한 건지 우연인지 모를 일이나, 시녀장은 자매의 외할머니를 꼭 닮아 있었다.
때문에 외할머니와 사이가 좋았던 루비아나는 시녀장에게 감히 모질게 굴지 못했다.
자연히 저택의 실세는 시녀장이 되었다.
루비아나는 저택의 실세가 내미는 두툼한 초대장들을 무력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젠장, 젠장.”
“아름다운 숙녀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법이랍니다.”
초대장을 갈기갈기 찢으려 할 때마다 외할머니는, 아니, 시녀장은 상냥하고 우아한 말씨로 루비아나를 다독였다.
그나마 사교 모임에 드레스를 입고 가라고 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처음엔 어디서 가져온 건지 곱디고운 드레스를 몇 벌 내밀기도 했다.
그러면 루비아나는 씩- 웃으며 드레스를 쫙쫙 찢어 버렸다. 그럴 땐 외할머니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다는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자, 그 뒤부터는 연미복이나 정장, 금술이 달린 제복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치마가 아니라 바지였다.
금술이니 황금 띠, 마노와 오닉스 장식이 달린 예복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 정도는 참기로 했다.
치수 한 번 재지 않았는데 기가 막히게 몸에 딱 맞는 옷을 가져오는 시녀장의 노고를 높이 사서라도.
‘그러면 뭐 해? 늘 이 상태인데.’
루비아나는 손에 든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한숨을 삼켰다.
연회장에는 수십 명의 젊은 귀족들이 모여 보석과 금시계 따위를 뽐내고 있었다. 하하 호호, 방정맞은 웃음소리가 요란했다.
루비아나는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끼지 못하고,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시녀장이 챙겨 준 다이아몬드 박힌 회중시계는 주머니에서 나올 기회를 얻지 못했다.
‘최신 유행이니, 남들과 대화할 때 무심하게 꺼내서 보여 주라고 했는데.’
시녀장의 세심한 노력이 오늘도 헛수고가 될 듯했다.
오늘 참석한 연회는 리바두르 후작 부인의 높은 명망을 흠모한 미혼의 영애, 영식들이 두루 참여하여 학식과 제국 정세에 대한 의견을 뽐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결혼 전 자유롭게 연애 한번 해 보려고 침 흘리며 달려드는 모임이었다.
원래 취지는 앞서 말한 고상한 그것이 맞으나 금세 변질되었다.
청춘 남녀들이 모이는데 어찌 건전하게 학식만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다 마음도 나누고 몸도 맞추고 하는 거지.
리바두르 후작 부인의 명성 때문에 가까스로 품위 있는 분위기와 평판만은 유지되고 있었다.
시녀장은 이 모임이야말로 루비아나의 목적에 딱 부합하는 곳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초대장이 오는 족족 루비아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참가하겠다는 답변을 보냈다. 루비아나가 알아차렸을 때는 항상 이미 늦은 뒤였다.
저쪽에 도착했을 답신을 도로 가져올 수 없으니 어쩌겠나?
루비아나는 외할머니를 닮은 시녀장을 꾸짖는 대신 금술 달린 연미복을 걸치고 연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벽에 붙어 홀짝홀짝, 술이나 축냈다.
시녀장이 루비아나가 연회장 내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까지는 모르는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상하네요, 이쯤이면 슬슬 공작님께도 작위와 돈을 노리는 어린 영식들이 달라붙기 마련인데요.’
‘뭐야, 나한테 그런 얼치기들이 붙길 바라고 있는 거였어?’
‘공작님께선 그중에서 얼굴 반반하고 아랫도리가 튼실한 분으로 고르시면 됩니다. 괜히 똑똑하고 야망 있는 분을 부군으로 고르시면 피곤하실 텐데요? 공작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그렇긴 하지.’
‘후대를 생각하셔서 너무 머리가 빈 분은 고르지 마시기를 권합니다.’
그리 말하며 인자하게 웃는 하녀장의 얼굴은 그야말로, 외할머니 판박이였다.
‘루비, 내 새끼. 너는 나중에 꼭 적당히 멍청하고 얼굴은 반반하고 아랫도리는 실한 남편을 얻으려무나.’
‘왜요?’
‘왜긴. 장차 네가 네 아버지를 이어 룩센 백작이 될 테니까. 함부로 너의 권위를 넘볼 것 같은 놈은 쳐다도 보지 말아야 해요.’
‘어어- 그럼 똑똑하고 잘생긴 남편을 얻으면 되잖아요?’
‘똑똑한 데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남자? 그런 남자는 흔하지 않아요. 있으면 금방 소문이 퍼져서 저어기- 수도의 권세가 가문에서 냅다 채갈걸.’
‘저한테까지 순서가 돌아오지 않겠네요.’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란다. 공주님이나 공녀님쯤 되어야 순번이 돌아오겠지. 그러니 남아 있는 놈들을 가지고 제일 나은 선택을 하려무나.’
‘우웅, 싫다.’
‘어쩌겠니? 세상에 그만한 사내가 그렇게 희귀한 것을. 적당히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단다. 그래야 괜히 욕심부려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아.’
‘할머니 말씀을 들어 보니, 그게 맞는 말씀인 거 같아요.’
‘그러엄. 아유, 내 새끼. 날 닮아 이렇게 말귀를 잘 알아듣는구나. 루비,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 꼭 이 할미의 말을 기억하려무나. 감히 너의 권위에 대들지 않고, 쓸데없이 나대며 너의 명성과 재산에 누를 끼치지 않을 만한 놈을 남편으로 고르렴.’
‘네에.’
‘다만, 얼굴은 타협하지 말렴. 낮에도 불이 꺼진 침대 위에서도 남자 얼굴은 아주 중요하단다.’
외할머니는 항상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들키면 늘 한 소리를 들었다.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된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
‘인생의 참 진리를 알려 주고 있었지.’
‘어머닛!’
외할머니의 조기 교육은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덕분에 루비아나는 남편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적당히 멍청하지만 잘생기고 아랫도리가 튼튼한 놈.
동생 덕에 공작이 되었으나 똑똑하면서 잘생기기까지 한 남자를 얻겠다는 헛된 욕심을 품지는 않았다.
‘내전과 연이은 정복 전쟁으로 괜찮은 사내들이 많이 죽었을 테니까. 괜히 희귀한 것을 찾다가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자. 애만 둘 낳으면 돼.’
희귀한 건 당연히 황제인 동생의 몫이었다. 예를 들면 펠트하르그 공작 카드릭이나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 같은 거.
루단테는 약간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게 좀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루비아나는 소박하게, 남편감을 찾았다. 잘생기고 아랫도리가 튼튼하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교 모임을 돌아다니고 연회에 참석해도 적당한 사내가 도통 눈에 띄지 않았다.
역시, 내전과 연이은 정복 전쟁으로 괜찮은 남자들이 너무 많이 뒈져 버린 걸까?
잘생기고 실한 건 둘째 치고,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걸 수 있는 사내조차 찾기 힘들었다.
어떤 연회에 참석해도 그녀의 주변은 썰렁하다 못해 휑- 했다.
누구 하나 루비아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이 정도 배포도 없는 사내들이 아랫도리라고 실할 리 없었다.
몇몇 얼치기들이 저들끼리 똘똘 뭉쳐 허세를 부리며 괜히 큰소리를 내고 루비아나를 힐끔힐끔 보긴 했다.
입으로 떠드는 대로라면 당장 루비아나에게 달려가 춤이라도 청할 기세였다.
같잖았지만, 한 놈이라도 그렇게 용기를 내 제게 말을 걸고 물꼬를 트면 다른 사람들도 좀 더 편하게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가만두었다.
그렇게 자비를 베풀면 뭘 하나?
얼치기들은 우연히라도 눈이 마주치면 후다닥 달아나기 바빴다. 한 명도 빠짐없이, 히이익- 같은 괴성을 지르며.
그 뒤엔 으레, 그 소문이 반복해서 들렸다.
피의 공작.
잔혹한 살인마.
피도 눈물도 없는 북부 공작.
마수들을 부리고 가련한 북부인들을 핍박하는 마수의 왕.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별명들이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피의 공작?
왜? 새벽 전투 때 폭군의 신하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서?
하지만 그건 펠트하르그 공작, 카드릭과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도 함께했던 일이었다. 오히려 그들이 더 미친개처럼 날뛴 감이 없잖아 있었다.
‘난 아주 정중히, 단칼에 죽여 줬다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누구든 허투루 죽인 적도 없고.
잔혹한 살인마라거나 피도 눈물도 없는 북부 공작, 마수들을 부리고 가련한 북부인들을 핍박하는 마수의 왕이란 별명은 또 뭐란 말인가?
북부에서 마수들을 보이는 족족 잡아 죽여서?
죄인들이 제멋대로 세운 북부의 도시들을 습격해 그들을 매우 말 잘 듣는 병사들로 만들어서?
그 덕에 제국은 마수의 습격으로부터 안전해졌다. 자체적으로 보급품과 병력을 충원해, 제국의 국고에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게 북부를 잘 밟아 놨기에 제국이 이렇게 평안할 수 있는 건데.
‘고마워할 일이지 무서워할 일은 아니지 않나?’
억울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굳이 도망치는 사람들을 불러다 세우고 그 소문이 엉터리라고 해명하진 않았다.
그건 너무 귀찮은 일이었다. 누명을 쓰면 썼지, 뭐 귀찮게 해명을 하고 다닌단 말인가?
‘맘대로 생각하라지.’
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빠직.
들고 있던 유리잔이 손안에서 바스러졌다.
억울해서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간 건 아니었다. 절대로.
‘후작가 재정이 많이 어려운가? 뭐 이리 부실한 걸 써? 누가 다치면 어쩌려고?’
쯧쯧, 혀를 차며 손을 터니,
“꺅, 괜찮으신가요?”
“여, 여기. 얼른 약과 붕대를!”
주변에 서 있던 하녀들이 달려왔다.
“아, 미안. 그리고 약은 필요 없네.”
어쩔 줄 모르는 하녀들에게 사과하며 마른 천을 받아 손을 마저 털었다.
유리 조각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손에선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얇은 유리 조각 따위는 굳은살 박인 손바닥에 작은 상처도 내지 못했다.
“역시 피의 공…… 읍.”
“……다, 다치지 않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하녀들이 존경과 두려움의 눈빛으로 루비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주변에서 서성대던 귀족 영식들은 움찔, 놀라며 좀 더 뒤로 물러섰다.
어째서인지 근처에서 꺄아악- 하고 숨죽인 비명도 들려왔고.
“역시, 아쉴레앙 공작님!”
“어째서 나랑 같은 여자인 거야!”
“저분의 품에 한 번이라도 안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애들의 시선이 뜨거웠다. 익숙한 일이었다. 구혼에 큰 방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가만 놔두고 있지만.
‘……?’
문득, 이질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절박. 절실. 절절. 루비아나가 가장 싫어하는 3절이 모두 담겨 있는 찐-득한 눈빛.
멀지 않은 기둥 뒤에 숨어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었다.
‘또 저와 약혼한 영애가 나한테 푹 빠져서 자존심 상한다느니, 그런 떨거지인 건가?’
루비아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보통은 저러다 말았다. 뒤에서 다 들리게 수군거리기나 할 뿐.
감히 루비아나 앞에 나서서 결투를 신청하는 담력을 가진 사내는 여태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늘도 망했군.’
루비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리바두르 후작 부인을 찾아갔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옷이 젖어 오늘은 이만 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루비아나가 젖은 소매를 들어 보였다.
그건 사소한 변명거리였다. 리바두르 후작 부인은 루비아나의 얼굴에 스친 지루함을 읽어 냈다.
“다음에도 꼭 참석해 줘요.”
리바두르 후작 부인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괜한 말로 루비아나를 잡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일찍 헤어지는 걸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말씀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랍니다. 공작님께서 참석해 주신 뒤로 내 작은 연회가 이렇게나 커졌으니까요.”
“제 체면을 살려 주려 일부러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인의 명성은 먼 북부에까지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모임이 오롯이 그 명성만으로 유지되는 걸 모르는 제국 귀족이 어디 있답니까?”
루비아나는 씩, 웃으며 리바두르 후작 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어머, 리바두르 후작 부인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내 말을 가벼운 인사치레라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뭐, 좋아요. 공작님께선 그만큼 오만해도 되는 위치에 계시니까요.”
후작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루비아나는 후작 부인이 꽤 상냥하다고 생각했다.
매번 와서 벽에 기대 멀뚱히 서 있다가 가는 사람을 이렇게나 환대해 주다니.
남편감을 찾겠다는 원래의 목적은 좀처럼 이루지 못하고 있지만, 사교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리바두르 후작 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뜻밖의 소득이었다.
혹시 아나, 이 우아한 귀부인이 참한 신랑감을 하나 소개해 줄지?
어쩌다 보니 모든 생각이 다 신랑감 찾기로 귀결되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괜히 멋쩍어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잖아. 신께 맹세했다고.’
정말 신이 존재하는 건지, 그녀의 동생은 너무도 수월하게 폭군을 무찌르고 새 왕이 되었다.
그뿐인가?
주변 다른 나라들을 정복해 거대한 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되기까지 했다.
모두 다 동생이 똑똑한 덕분이겠지만 일이 너무 쉽게, 일사천리로 진행된 게 괜히 찜찜했다.
황제가 된 동생은 아직 젊다. 못해도 수십 년은 더 황제를 해 먹을 테고, 그녀의 후손이 대를 이어 이 제국을 다스릴 것인데.
칼레나의 치세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신께서 이 제국을 보살펴 주시기를 바란다면, 일단 신께 바치기로 한 것을 제대로 바쳐야겠지.
……라고 자기 합리화를 시도해 봤지만.
‘그래도 요즘 너무 결혼 결혼 하고 있는 거 같아.’
루비아나는 그런 자신이 마음에 안 들어 쯧, 혀를 찼다.
바로 떠나려 했는데, 아무래도 머리를 좀 식히고 가는 게 좋을 듯했다.
어차피 집에 가 봐야 하녀장이 ‘왜 벌써 왔니?’라는 눈빛으로 쳐다볼 테니.
루비아나는 리바두르 후작 부인이 자랑하는 정원 쪽으로 몸을 틀었다.
‘잠깐 바람이나 쐬고 돌아가자.’
머리를 좀 비우고 여유를 되찾을 셈이었는데.
“당신은 나랑 결혼할 수밖에 없을걸!”
누군가 루비아나의 뒤통수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정말 루비아나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으니까. 하지만 루비아나는 그렇게 느꼈다.
하필 ‘결혼’이라서.
넌 날 죽일 수밖에 없을걸! 넌 나에게 돈을 갚을 수밖에 없을걸! 넌 나에게 밥을 사 줄 수밖에 없을걸!
이런 거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하필이면 결혼이라서.
루비아나의 몸과 영혼은 그 두 글자에 재깍 반응했다.
‘젠장.’
확 짜증이 났지만, 무시할 순 없었다.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가 수풀 너머를 보니, 두 남녀가 보였다.
여인은 엄청난 미인이었다. 고양이 눈처럼 눈초리가 새초롬하니 치켜 올라간 게 특히나 매력적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보석을 두르고 있었으나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사내의 차림은 초라하다 싶을 정도로 단출했다. 하얀 크라바트에 검은 정장이 전부. 그 흔한 금술, 은술조차 달지 않았다.
집안 사정이 좀 어려운가 싶은데, 여인의 옆에 서 있으니 시종으로나 겨우 보일 정도였다.
‘와우.’
그런데도 루비아나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보고 감탄했다. 남자가 아주 많이, 끝내주게 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를 보기 전에 여자를 보고 미인이라고 생각했던 걸 후회하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루비아나는 한때 수도원에 입교해 종신 서약을 한 적 있지만, 남은 평생을 신께 바치겠다고 서약한 사람답지 않게 신의 존재에 회의적이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데 있으면 좋겠고, 정도?
하지만 칼레나를 따르고서부터는 달라졌다. 승승장구하는 동생을 보며 신이 정말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단 몇 년 만에 왕국을 무너뜨리고 제국을 세워 초대 황제에 오르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저게 신이 보우하사 이루어진 일이 아니면 뭘까 싶었달까?
그래서 신께 바친 약속을 이루고자 애쓰고 있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신을 보좌하는 천사도 당연히 존재할 터.
이렇게 넓은 세상을 만들 정도의 배포라면, 천사를 덜렁 하나만 만들진 않았으리라. 제각각 다양한 외모와 성격을 가진 천사들을 여럿 만들었을 것인데.
그중 가장 아름답고 성질 더러운 천사가 세상에 내려왔다면 아마 저 모습이지 않을까?
빛나는 은발, 밤하늘보다 검은 눈.
그 아름다운 남자는 짜증 나 있었다. 잔뜩 찌푸린 인상이 참 더러웠는데 그마저도 아름다워 보였다.
‘성깔 더러워 보이는데, 함부로 다가가지 말자.’
멀찍이 서 있는 루비아나의 감상은 이러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감이 안 느껴지고, 멀리서 감상하는 것만도 만족스러운 수준이랄까?
그런데 가까이 서 있는 여인의 감상은 다른 듯했다.
“날, 날 피하지 말아요. 루이먼드.”
여자가 남자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았다.
“놓으십시오. 당신에게 나를 만지도록 허락한 기억이 없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인은 첫인상대로 싸가지 없게 단호했다.
“꺄악!”
여인이 남자를 놓치고 비틀대다 바닥에 쓰러졌다.
‘오, 몸 선이 가는데, 그래도 남자라고 힘은 있나 보군.’
예의는 힘만큼 없는 것 같고.
‘여자 쪽이 먼저 무례를 범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부축해 주긴커녕 괜찮으냐는 말 한마디 없다니.’
남자는 오히려 여자에게 닿은 손을 털어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싸늘하게 여자를 내려다보는 모습 또한 세기의 명인이 최선을 다해 만든 대리석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역시 남자는 얼굴.’
외할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남자는 잘생기고 볼 일이었다. 만약 못생긴 남자가 저딴 행동을 했다면 당장에 칼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가 그 손모가지부터 베어 냈을 것이다.
즉, 루비아나는 남자의 외모 때문에 둘 사이에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 편파적인 태도가 나쁜 행동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만약 부모님이 살아 계셔서 이 꼴을 봤다면, 내가 널 그렇게 키웠냐며 목덜미를 잡으실 터였다.
‘뭐, 저 정도 잘생겼으면 어쩔 수 없지.’
옆에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웃으실 외할머니 생각도 좀 났다.
“어디 간 거야? 분명, 분명 이쪽으로 오는 걸 봤는데.”
남자가 쓰러진 여인을 본 척 만 척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름답고 곱상한 외모와 달리 행동이 꽤 거칠었다.
“루이먼드!”
“그쪽은 좀 닥치고 있어!”
남자가 찾는 게 바닥에 쓰러진 여인이 아닌 건 분명해 보였다. 막 남자가 고개를 돌려 루비아나가 서 있는 곳을 돌아보려고 할 때.
사삭-.
루비아나는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내가 왜 숨지?’
숨고 나서야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으나, 새삼 나 여기 있다고 모습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왠지 귀찮을 거 같아.’
그녀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들키면, 왠지 아주 피곤한 일에 휘말릴 것 같다고.
“젠장, 놓쳤잖아. 아우!”
역시나.
‘날 찾는 건가?’
본능이 옳았다.
주르륵, 등줄기를 타고 불길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천하의 아쉴레앙 공작이, 잘생긴 남편감을 찾는 중이면서 잘생긴 남자를 피해 숨다니.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본다면 뭐 하고 있냐고 비웃을지 모르나, 루비아나는 진지했다.
‘나는 참한 남편감을 찾고 있다고.’
저기서 ‘으아아악!’ 하고 성질을 내는 남자는 ‘참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잘생기면 단가?
참하기도 해야지.
‘잊지 말렴, 루비. 잘생긴 건 예선이야. 성격이 참해야 한다. 너무 지랄 맞으면 못써요.’
네, 할머니.
잊지 않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