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31)

***

며칠 후.

루비아나는 황궁 연회에서 그 남자를 다시 만났다.

얼굴을 마주치고 통성명을 한 것은 아니고, 넓은 연회장에서 멀리 떨어져 얼굴이나 확인한 정도였다.

남자의 주변에는 여인들이 빽빽했다. 미혼, 기혼을 가리지 않았다. 꿈꾸는 듯한, 혹은 욕망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남자를 보고 있었다.

남자는 정원에서 보여주었던 거친 모습은 어디다 던져 버렸는지, 차분하고 우아했다. 눈짓 한 번, 손짓 하나로 여인들의 마음을 살살 녹이고 있었다.

‘내숭?’

워낙 예쁘고 잘생겨서 가증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루비아나는 벽에 기대 술을 홀짝이며 그 광경을 구경했다.

한참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뒤늦게 도착한 펠트하르그 공작 카드릭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양손에 술잔을 들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그보다 술잔을 더 반겼다.

“잘 차려입고 왔네.”

카드릭을 완전히 무시한 건 아니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그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건너편,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남자에게 들릴 리 없건만. 남자는 휘파람 소리를 들은 것처럼 루비아나를 흘깃, 보았다.

루비아나는 술잔에 집중하느라 제 뒤통수에 꽂히는 남자의 시선을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아채긴 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살기가 없었으니까.

카드릭 또한 알아챘는데, 그는 무시하지 않고 경고하듯 눈길을 보냈다.

루비아나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의 눈빛이 제법 살벌하게 오갔다.

루비아나가 새 술잔에 입을 대며 고개를 들자, 먼 곳의 미인이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뭐야, 저거?”

카드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루비아나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바로 눈에 띄는 미인을 보고는 픽, 웃었다.

“뭐야, 눈이 하나여도 예쁜 건 알아보는가 보지?”

“누구 덕에 하나를 잃어서 더 예민해졌거든.”

“보통 반대 아닌가?”

“왜? 내 눈이 안 보였으면 좋겠어?”

카드릭이 버릇처럼 외눈 안대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는 루비아나에게 당한 상처를 가리기 위해 검은 안대를 쓰고 있었다. 황제가 내린 안대에는 오닉스와 금강석이 세밀하게 박혀 있었다.

“설마.”

루비아나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항복 신호였다.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동생의 남편 후보감을 애꾸로 만든 것을.

그러니까 카드릭에게 미안한 게 아니라 칼레나에게 미안한 것이었다.

“말이나 못하면.”

카드릭은 짧게 혀를 찼다. 능글맞게 구는 루비아나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늘 루비아나에게 이렇게 뻣뻣하게 굴었다. 루비아나가 언감생심, 그를 남편감으로 넘보지 않는 이유였다.

“그나저나 저자는 누구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두어 달 아팠다더군. 그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네가 모르는 것도 당연할 거야.”

“그래서 누구냐고?”

“그레이움 백작의 손자.”

쯧, 카드릭이 또 혀를 찼다. 루비아나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레이움?”

그레이움 백작가라면 루비아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폭군의 측근이었으며 새벽 전투 때 성문이 열리자마자 일가족 전원이 이쪽에 투항했던 가문.

원래대로라면 숙청 0순위였으나, 칼레나가 왕족 외엔 누구든 투항하면 살려 주겠다고 공언했던 터라 죽이지 못했다.

‘이리저리, 잘 빌붙어 살아남는군.’

루비아나의 감상은 그 정도였다.

이후 그레이움 백작은 심심하면 어디선가 얼굴 번드르르한 사내들을 구해 와 황제에게 바쳤다.

무슨 생각인지 칼레나는 그레이움 백작을 곁에 가까이 두었다. 그의 아부와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마냥.

‘넌 또 계획이 있구나.’

루비아나는 저게 또 뭔 꿍꿍이가 있어 그러는구나 싶었지만. 황제의 부군 자리를 대놓고 노리는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는 그렇게 여유롭게 보지 못했다.

‘아으, 투항이란 말을 꺼내기 전 죽였어야 했는데.’

루단테는 두고두고 그레이움 백작을 죽이지 못한 걸 후회했다.

루비아나는 그레이움 백작은 물론 그의 가족들도 얼추 기억하고 있었다.

그레이움 백작가 사람들은 하나같이 밀빛 머리카락과 짙은 고동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근육이 붙지 않아 흐물흐물한 몸에, 키만 허울 좋게 큰 키.

누구도 저렇게 선명한 은발과 검은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은발에 흑안, 뛰어난 외모.

겉모습만 따지자면 그는 그레이움 백작가 사람이라기보다 차라리, 폭군의 숨겨진 아들 같아 보이…….

“……!”

“이제 알아챘나? 느리군.”

“설마?”

“루이먼드 휀 룩스 아멜 폰 그레이움.”

네 개의 이름을 가지는 건 왕족의 증표.

은발에 흑안, 네 개의 이름까지.

그는 그들이 무너뜨린 아이너스 왕가의 일원이었다.

“마지막 혈족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게 정확하겠군.”

카드릭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폭군의 사생아.”

눈이 절로 그에게로 향했다. 어째서인지 그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윽.”

루비아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왜 저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그는 죽음을 앞둔 억울한 사형수처럼 절절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내 관심을 끌고 싶은 거 같은데, 방향을 잘못 잡았어.’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다.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래도 이건 확인하고 넘어가야 했다.

“새벽 전투 때, 폭군과 아이너스 왕가의 혈족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지 않았나? 갓 태어난 아이까지 전부 다.”

“그렇지.”

“그런데 사생아가 살아 있어? 살아 있는 것도 모자라 황궁 연회에 참석해?”

북부에 머물고 있던 몇 년 새, 황제와 두 공작이 단체로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루비아나가 카드릭을 미친놈 보듯 봤다.

“안 건 얼마 안 돼. 학자의 집 출신이었단 말이야.”

카드릭은 급히 변명했다.

“학자의 집?”

“그래, 설마 그것까지 잊은 건 아니지?”

“알지. 너무 잘 알지.”

저 미친 미모와 미친 모범생 집단이 영 연결이 안 돼서 문제지.

루비아나의 표정이 뚱해졌다.

학자의 집.

탑처럼 높은 담을 쌓고 그 안에 틀어박혀 평생 공부만 하는 미친 학자들의 집단.

그곳에 들어가려면 가문도 이름도 버리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공부만 하다가 죽겠다고 신께 서약해야 했다.

한번 발을 들이면 죽어서야 나올 수 있는 곳이어서, 어떤 의미로 수도원보다 더 수도원 같은 곳이었다.

항상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고 백성의 존경을 받고 있기에, 폭군은 물론이거니와 폭군을 죽이려고 수도를 포위한 칼레나마저도 학자의 집은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그런 곳에 폭군의 사생아가 있었다고?’

그렇다면 새벽 전투 때 발견해 죽이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딱 거기까지만.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왜 학자의 집 일원이 왜 그 높은 담 밖으로 나와 버젓이 황궁 연회에 참석하고 있단 말인가?

“아, 북부로는 연락이 안 갔나?”

“응.”

루비아나는 당당했다. 따로 연락받은 게 없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카드릭은 살짝 당황하는가 싶더니,

“……맞아, 그럴 리 없어. 내가 정기적으로 사람을 보냈으니까. 중앙 사정 정리한 보고서 들려서.”

할 말 많은 눈으로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내가 매달 보낸 서류, 안 본 거야?”

“…….”

따로 연락받은 게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이번 달에도 또 수도에서 뭔가 왔다고 들고 쫓아오던 부하의 모습이 생각나는 것도 같았다.

‘황제 폐하께서 보낸 거야?’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펠트 뭐시기 공작이라고 쓰여 있던데요.’

‘그럼 급한 거 아냐. 아무 데나 놔둬. 나중에 시간 날 때 확인할게.’

그리고 확인한 적이 있었던가?

‘한 번도 안 봤던 거 같은데.’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봤겠지.”

“봤겠지?”

“봤을 거야.”

“안 봤군.”

“봤다니까.”

“설마 한 번도 안 열어 본 건 아니겠지?”

“……설마.”

“한 번도 안 본 게 분명하군.”

끄응. 카드릭이 신음했다.

“내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괜히 종이 낭비하려고 매달 구구절절 써서 보낸 줄 알아?”

“…….”

사실, 그렇게 생각했다.

‘공작씩이나 돼서 시간이 남아도나? 왜 자꾸 이런 걸 보내? 수도는 꽤 한가한가 보지?’

라고.

‘아니었단 말인가?’

루비아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

“북부에서 고립되지 말고, 수도 사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정도는 알아 두라고 일부러 보낸 거야.”

카드릭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런데 읽어 보지도 않았다니.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군.”

“아니야, 봤어. 봤다니까.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럼 내가 지난달에 보낸 내용이 뭔지 말해 봐.”

“…….”

말할 수 있을 리가.

“뭐, 나도 보내면서도 딱히 네가 잘 들여다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이쯤 하지.”

카드릭이 씁쓸히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속이 타는지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후우- 긴 한숨은 덤이었다.

루비아나는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지나가던 시종에게 술이 든 잔을 받아 카드릭에게 내밀었다. 나름의 선물이었다.

“이런 거에 마음 풀리는 내가 등신이지.”

카드릭은 자신이 등신임을 새삼 고백하며 잔을 건네받았다.

“네가 북부에 가 있는 동안 중앙이라고 마냥 편안했던 건 아니야.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나랑 루단테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아닌 게 아니라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루비아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저 사생아가 황궁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행정 제도를 새로 만드는 데 인력이 부족해지니, 황제 폐하께서 명하셨거든. 현실을 외면한 학문 따위는 존재 가치가 없으니 학자의 집을 부수고 학자들을 끌어다 일 시키라고.”

음. 루비아나는 침묵했다.

‘레나라면 그러고도 남지.’

싶달까.

“모두 제국 관리로 고용했어. 봉급도 꼬박꼬박 주고 있고, 당연히 그들의 이름과 가문을 되찾아 주었고.”

“그래서?”

“그래, 그래서 발견된 거야. 폭군의 사생아가.”

카드릭이 루이먼드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알고 나서도 살려 뒀어?”

“폐하의 뜻이야.”

“폐하께서 왜……”

루비아나가 말을 하다 멈췄다. 뭔가 마음에 걸렸다.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카드릭을 바라보았으나, 안 보느니만 못했다.

“그래, 그 설마.”

“이런.”

“역시 깨닫는 게 늦는군.”

“빙빙 돌려 말하니까 그렇지.”

루비아나는 이죽대는 카드릭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억!”

비명이 무척 듣기 좋았다.

‘아직도 폭군을 따르고 왕국을 재건하겠다고 헛수고하는 잔챙이들이 있다더니. 그들에게 구심점을 만들어 줘서 한 번에 쓸어버리려고 하는 건가? 계속 그레이움 백작을 가까이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루비아나는 카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카드릭이 아직 남아 있는 한쪽 눈을 내리깔며 루비아나를 보았다.

“귀찮으신 거군.”

“귀찮으신 거지.”

둘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루비아나는 혀를 찼다.

‘일일이 찾아 족치기 귀찮으니까 모아서 치겠다는 건가?’

그 세력이 단단히 뭉쳐 커질 것을 걱정하지 않는 게 참 칼레나다웠다.

“아무튼, 귀찮은 거 싫어하는 건 똑같다니까.”

카드릭의 생각은 다른 것 같지만.

“내가 뭘? 나랑 황제 폐하를 같이 묶지 마. 난 그렇게 막무가내가 아니야.”

“정말?”

“정말.”

“하, 도미넨트 공작이 이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술맛 떨어지니까 그 녀석 말 하지 마.”

루비아나는 고개를 돌려 연회장의 조명 역할을 하느라 눈부신 미인을 바라보았다.

카드릭의 말을 듣고 보니, 그의 곁에 모인 사람들이 다시 보였다.

여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남자들도 꽤 껴 있었다.

모두 옛 왕국의 충신 가문 귀족들이었다. 죽은 폭군의 발아래에서 꿀 좀 빨던 귀족들이란 소리였다.

딱 봐도, 잘못 건드리면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게 분명해 보였다.

‘그때 피하길 잘했지.’

루비아나는 뿌듯해하며, 그와 눈을 마주치기 전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왜 저렇게 절절한 눈으로 이쪽을 힐끔거리는 걸까?

카드릭의 말을 듣고 보니 귀찮음을 무릅쓰고 고민해 볼 일이었다.

‘설마 자신이 반란 세력을 낚을 미끼로 쓰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고민을 좀 해 보려 할 때였다.

“폐하께서 드십니다!”

입구에 선 시종이 우렁차게 외쳤다.

“가자.”

카드릭이 어깨를 툭, 쳤다.

“아, 응.”

루비아나는 모처럼 고민하던 것을 뒤로 미루고, 카드릭과 함께 연회장 입구로 걸어갔다.

닫혀 있던 황금 숲의 문이 열렸다. 연회장의 음악이 그치고, 귀족들이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보라색 공단을 두른 황제 칼레나와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카드릭과 루비아나는 계단 아래에서 두 사람이 내려오길 기다렸다가 뒤따랐다.

세 공작의 망토가 펄럭였다. 망토엔 각 가문의 문장이 금실과 은실로 수놓여 있었다.

단기간에 왕국을 무너뜨리고 제국을 세운 황제와 그를 보좌하는 세 공작.

귀족들은 두려움과 존경, 혹은 시기를 담은 눈으로 그들을 우러러보았다.

그 시선 속에는 루이먼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의 애절한 눈빛도 포함되어 있었다.

루비아나는 목덜미가 찌릿하게 저리는 걸 느꼈으나 애써 무시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니까.’

루비아나의 마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폐하나 다른 놈들이 알아서들 잘 처리하겠지. 난 적당한 남편감이나 찾아서 다시 북부로 가자.’

절대, 황제가 공들이는 저 아름답고 귀찮은 미끼와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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