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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했던 게 바로 아까 전이었던 거 같은데.
“당신이 뭔 짓을 하든 어차피 우린 결혼하게 되어 있어!”
또 들어 버렸다.
“꺄악-은 무슨. 이번에 또 넘어질 줄 알고? 천만에!”
또 봐 버렸다.
‘루이먼드 어쩌고저쩌고’라는 황제의 반란군 낚시용 미끼가 여자에게 붙잡혀 결혼을 강요당하고 있는 모습을.
황제의 옆자리를 지키다가 슬쩍 바깥바람을 쐬러 나온 건데. 하필이면 그녀가 거닐던 정원에서, 예의 그 남녀가 또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바람 쐬러 나오지 말걸.’
그새 북부의 찬 날씨에 익숙해져 버린 게 죄였다.
루비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자. 다시는 답답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황궁에서까지 치정 싸움을 벌이는 두 남녀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조용히 돌아서려고 했는데.
“오늘에야말로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겠어요!”
여인이 대뜸 루이먼드에게 매달렸다.
리바두르 후작 부인 연회 때 허무하게 떠밀려 넘어지고 루이먼드를 놓친 게 정말 원통했던 듯했다.
열 손가락에 반지를 주렁주렁 끼고 와서는, 그 손을 꽉 주먹 쥐어 루이먼드의 배를 내리치는 게 아닌가?
퍽 소리가 났다.
‘와.’
루비아나가 감탄할 만치 완벽한 제압법이었다.
“윽.”
루이먼드는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여인은 재빠르게 그를 힘껏 밀어 넘어뜨렸다.
‘오오.’
루비아나는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칠 뻔했다.
털썩.
두 사람이 수풀 속으로 자빠졌다.
남자 위에 올라탄 여인은 반지를 잔뜩 낀 손으로 남자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나도 이 고운 얼굴 다치는 건 정말 싫거든요. 그러니까 순순히 내 것이 되어요. 그레이움 백작님께서 계획하시는 그 일에, 우리 가문의 협조가 꼭 필요하다는 걸 기억하면서요. 이미 내 아버지와 그레이움 백작님 사이에 혼담이 오가고 있는 참이니까.”
여자의 다른 한 손이 남자의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재킷의 단추 구멍 사이로 쏙 들어갔다.
루이먼드의 몸이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파드득, 튀었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어찌나 가련하고 애달파 보이던지.
꿀꺽.
루비아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너무 컸다.
‘아차.’
“누구지?”
여인은 용케 그 소리를 알아듣고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넘어가 주지.
“아, 이런. 실례.”
루비아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지나갈 테니 하시던 일을 계속하심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뒤늦게라도 몸을 빼려 했건만.
“사, 살려 주세요! 사람 살려.”
루이먼드가 손을 뻗으며 도움을 요청했다.
“…….”
“…….”
당연하게도 두 여인의 눈이 루이먼드에게 모였다.
‘다시 봐도 잘생겼군.’
별생각 없이 그저 외모에 감탄하는 무심한 눈빛 하나.
“나 말고 딴 여자한테 손을 내밀다니!”
원한에 불타는 눈빛 하나.
여인은 발끈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루이먼드의 가슴을 꾹 눌렀다.
“윽!”
루이먼드는 도로 쓰러졌다.
‘저런.’
루비아나는 그 한 떨기 꽃 같은 가련한 모습을 딱하게 바라보았다.
“비, 비켜. 비키십시오.”
루이먼드가 콜록대며 여자를 밀치려 하였지만,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여자는 이미 루이먼드의 배 위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으니까. 루이먼드의 꿈틀거림 따위는 그녀를 밀어낼 수 없었다.
“가만히 좀 있어요.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 다 알아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여자는 제 밑에서 콜록대는 루이먼드를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 아쉴레앙 공작님……이시군요.”
이런 광경을 남에게 보였는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기는 듯했다.
하필 그 불청객이 루비아나라는 것이 의외인 듯했으나.
“저는 오딜 후작가의 리사나입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사랑하는 그이와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요.”
“그런 것 같습니다.”
알지, 알지. 루비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공작님께서 오시는 걸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공작님의 산책을 방해한 것을 정중히 사과드려요.”
여인이 생긋 웃어 보였다.
‘알아서 좀 비켜 가지, 굳이 방해하고 싶었니?’라는 말을 이다지도 우아하게 돌려 하다니.
‘역시나 오딜 후작가의 여식.’
루비아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물론 감탄과는 별개로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오딜 후작가가 아직 폭군을, 아이너스 왕가를 지지하고 있는 건가?’
오딜 후작가는 옛 왕국의 유서 깊은 명문가였다.
폭군에게 충심 어린 조언을 했다가 죽을 위기에 처하고,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 영지로 내려가는 수모를 겪었다.
워낙 가문의 명망이 높아 폭군도 차마 오딜 후작을 죽이지 못하고, 눈에서 보이지 않도록 수도 밖으로 치워 버렸다고 들었다.
그래서 당연히 옛 왕국의 폭군을 미워하리라 생각했건만.
아이너스 왕가 복권을 위해 그레이움 백작가와 교류하고 있었다니.
‘하긴 왕국이 멸망하고 나서도 끝까지 이쪽으로 굽히고 들어오지 않긴 했지.’
칼레나는 그 꼿꼿함을 높이 평가해 오딜 후작가의 작위와 영지를 보장해 주었다. 오딜 후작도 그 즈음해서는 순순히 칼레나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고.
‘정말 복속한 게 아니라, 반역의 추진력을 얻기 위해 잠시 몸을 웅크렸을 뿐인 건가?’
루비아나는 혀를 차며 리사나를 내려다보았다.
“부디 다른 분들께 오늘 본 우리의 정겹고 다정한 모습을 언급하지는 말아 주셔요. 아직은, 조심스럽고 부끄럽기만 해서요.”
‘부탁인데, 빨리 가서 딴 사람들한테 우리가 이런 사이라고 떠들어 대 줄래?’라는 뜻이었다.
말을 마친 리사나는 눈을 내리깔며 얼굴을 붉혔다.
정말이지, 앙증맞고 예뻤다. 붉은 두 뺨은 물이 잔뜩 오른 복숭아 같았다. 한번 깨물어 보고 싶었다.
바로 밑에 깔린 사내의 외모가 조금만 덜 빛났어도, 루비아나는 리사나의 수줍음에 홀려 그러겠노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이거 방해해야겠는데?’
리사나의 내숭에 넘어가지 않은 루비아나는 이렇게 생각했고, 곧바로 그런 건설적인 생각을 한 것 자체를 후회했다.
‘귀찮은데, 그냥 돌아가서 펠트하르그 공작에게 맡길까?’
어디선가 카드릭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것까지 귀찮아하면 숨은 왜 쉬냐?’
루비아나는 어쩔 수 없이 게으름을 이겨 내고 움직여야 했다.
그간 카드릭이 보낸 연락을 무시했던 것도 미안한데 이런 일까지 떠넘겨서는 쓰나,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동생을 향한 충성심이 울컥 솟아서는 더더욱 아니었고.
그냥.
“사, 살려…… 윽.”
살려 달란 말조차 하지 못하고 헐떡이고 있는, 저 빛나는 외모가 눈에 들어와서였다.
잘생김이란 이처럼 대단한 것이었다.
저만큼은 아니어도 꼭 잘생긴 남자를 남편으로 삼아야지. 루비아나는 다시 한번 결심하며, 앞으로 나섰다.
“거기, 아래에 깔린 영식은 영애와 생각이 다른 거 같은데.”
“뭐, 라고요? 그럴 리가요!”
리사나가 눈을 치켜뜨고 루이먼드를 쏘아보았다.
“루이, 당신이 너무 수줍어하니까 공작님께서 우릴 사일 의심하잖아요.”
“마, 맞습니다. 살려…… 읍.”
“아무리 부끄러움이 많으셔도 그렇지. 어떻게 한 입으로 두말을 하시나요? 절 수치스럽게 만들 생각이신 거예요?”
리사나가 흑흑, 우는 척했다. 그러느라 루이먼드를 짓누르고 있던 손이 느슨해졌다. 루이먼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리사나를 밀었다.
“꺄악!”
리사나가 뒤로 넘어갔다. 그대로 뒤통수가 땅에 박힐 뻔했으나.
“이런.”
루비아나가 발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등을 감싸 주었다.
루이먼드가 몸을 빼냈기에 루비아나는 어쩔 수 없이 리사나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아 들어야 했다.
루비아나는 리사나가 부끄러워할 틈을 주지 않고 그녀를 내려 주었다.
“가, 감사…… 으윽.”
리사나는 두 발이 땅을 밟자마자, 몸에 밴 예절대로 인사를 하다 말았다. 그러고는 물기 어린 눈을 크게 떠 루비아나를 노려보았다. 굳이 번역해 보자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일 터.
“음.”
루비아나는 구해 주고도 감사하다는 인사 한마디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하지만 등에 닿은 묵직한 느낌 때문에라도 리사나에게 무례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어느새 이쪽으로 온 루이먼드가 그녀의 등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멀리서 보기엔 비쩍 마르고 비리비리해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의외로 어깨도 떡 벌어지고 골격도 꽤 단단하고 두꺼워 보이고.
그러니 그가 아무리 몸을 웅크리고 숨어도 다 가려질 리 없었다.
“어, 어떻게…….”
리사나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그녀는 눈물을 닦는 대신, 그 좋던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오늘은 반드시 루이먼드를 자빠뜨리고 뜨거운 밤을 보내고야 말리라, 그리 다짐했던 이 밤을 망친 주제에 자신을 구해 준 루비아나.
그녀는 그 루이먼드가 제 등에 찰싹 붙어 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 좀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루이먼드를 귀찮아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정말 귀찮아하는 거였지만 리사나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이제 루이는 내게 있다, 뭐 그런 의미로 지금 나한테 으스대는 거야?’
이어진 루비아나의 제안은, 리사나의 오해를 부채질하기에 충분했다.
“영애, 이 자리는 이만 이대로 정리하도록 하지요. 내일이든 모레든 날이 밝은 다음,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다시 만드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레이움 가문의 영식은 제가 잘 다독여 안전히 들여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 상황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는 저 차분한 모습이라니.
‘이럴 순 없어.’
이 밤의 주인공은 리사나, 자신이어야 했다. 루이먼드와 저렇게 찰싹 붙어 있는 것도 자신이어야 했고.
그런데 그 모든 걸 빼앗겨 버렸다. 은실로 자수를 놓은 검은 망토를 두른 북부의 잔혹한 살인마 공작에게.
눈물이 나올 만큼 원통하고 억울했으나 루비아나에게 대들 용기는 없었다. 아쉴레앙 공작, 루비아나의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산 채로 마수에게 던져 버린다거나, 마수의 피에 중독되어 때때로 사람의 피를 마신다는.
“오, 오늘 일은 절대로 묵과하지 않을 거예요.”
리사나는 이 한마디를 던지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펠트하르그 공작가로 연통을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쉴레앙 공작가 말고 펠트하르그 공작가. 루비아나는 그 부분을 특히 강조해 말했다. 귀찮은 뒷수습을 카드릭에게 떠넘기려는 것뿐이었지만.
‘뭐, 뭐야? 아쉴레앙 공작가와 펠트하르그 공작가, 두 가문이 힘을 합쳐 나를 찍어 누르겠다고? 펠트하르그 공작까지 루이먼드를 노리는 거야?’
리사나는 전혀 다르게 알아들었다.
북부의 살인마 공작도 모자라 펠트하르그 공작마저 루이먼드를 노리고 있다니.
어쩌면 둘은 변태적인 밀약을 맺고 루이먼드를 공유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리사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역시 아버지 말씀이 맞아. 이 제국은 잘못됐어. 황제도 공작들도, 다들 천박하고 탐욕스러워.’
레이먼드만큼은 아니지만 꽤 어여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조금 전, 싫다는 루이먼드를 기어이 자빠뜨려 불타는 밤을 보내려 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였다.
“루, 루이먼드.”
리사나는 루비아나 뒤에 선 루이먼드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그 두 변태 공작들에게서 꼭 당신을 구해 내겠어요.’
아버지가 하려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는 이유가 생겨 버렸다.
리사나는 루이먼드를 저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공작에게 빼앗긴 채 돌아서야 하는 슬픔에 취해,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획 돌아섰다.
사라락, 구겨진 데다가 끝자락에 풀물까지 든 드레스가 출렁였다.
그렇게 리사나가 사라지자.
루비아나는 곧바로 제 망토를 붙잡고 늘어지는 루이먼드의 손을 쳐 냈다.
“그럼, 이만.”
딱히 루이먼드와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구해 달라고 절절한 눈빛을 보냈기에 구해 줬고, 잘생긴 얼굴을 가까이서 구경도 했다.
이제 끝.
어서 칼레나에게 가서 오늘 일을 말하고 무슨 계획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가만두고 보고만 있느냐 물어봐야 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돌아섰다.
“어?”
루이먼드는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왜 들이대지 않는 거야? 그냥 가?’
절 바로 앞에 두고 저렇게 깔끔하게 돌아서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문제는 그 처음이 아쉴레앙 공작이라는 것이었다.
“자, 잠깐만!”
루이먼드가 덥석, 루비아나의 팔을 잡았다.
“……?”
루비아나가 몸을 반쯤 돌려 루이먼드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정말 순수하게, ‘왜 잡아?’라고만 묻고 있었다.
루이먼드는 난감했다.
그래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얼뜨기도 하지 않는 짓을 해 버리고야 말았다.
“겨, 결혼해 주세요.”
“이거 놓, 뭐?”
“아니, 결혼, 결혼합시다. 나랑 해요, 그 결혼 나랑 하자고요!”
대뜸, 결혼하자고 말해 버리고야 만 것이다.
이제 고작 두 번 본 사이인데. 춤 한 번 안 춰 본 사이면서.
‘그럼 어떡해? 이번 생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이 여자를 잡아야 하는걸! 또 죽고 싶지 않아, 이번에는 죽고 싶지 않다고!’
루이먼드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