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31)

3. 빙글빙글 반복되는 루이먼드의 인생

루이먼드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면 속이라도 편할 텐데. 단 하나의 기억이 발목을 붙잡고 늘어져 사람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아가, 네 이름은 루이먼드 휀 룩스 아멜 일 아이너스란다. 휀과 룩스, 아멜. 이 세 이름 모두 태양을 의미하지. 너는 신의 가호를 받은 태양의 아이란다. 이 나라를 지키는 신의 축복이 너와 함께하기를.’

눈물에 젖은 달콤한 목소리. 이마에 와 닿는 입술의 감촉. 눈가를 간질이는 보드라운 머리카락의 느낌.

그 모든 게 생생하건만.

***

어머니 아니샤는 그레이움 백작가의 막내딸이었다. 줄줄이 아들만 셋인 집안의 고명딸.

부모님과 오빠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으나 그런 아이들 특유의 오만과 고집불통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레이움 백작가의 혈족들과 오랫동안 백작저에서 일해 온 하인, 하녀들에게 전해 들은 말이니 신빙성이 높으리라.

아니샤에 대해 말하는 하인, 하녀들의 얼굴엔 늘 안타까움이 가득했으니까.

‘오, 신이시여. 우리 아가씨가 당신 곁에 계신 줄을 믿나이다.’

하녀들은 말을 하기 전 늘, 손으로 성호를 그으며 아니샤의 명복을 빌었다.

죽어서도 사랑받았던 아니샤는 살아서는 자신이 만난 사람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걸 ‘사랑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아덴 왕국을 다스리는 왕은 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너스 왕가의 핏줄이면서도 폭군이라 불렸다.

폭군은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는 것뿐 아니라 예쁜 여자를 밝히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레이움 백작가는 그런 폭군에게 아부와 간신 짓을 일삼았다. 왕이 뿌려 주는 단물을 받아먹으며 덩치를 불린 살찐 돼지 가문이었다.

당연하게도 폭군의 눈에 막 성인이 된 어여쁜 아니샤가 들어왔다.

폭군은 술에 취해 그녀를 취했다. 아니샤는 겁에 질려 싫다는 말 한마디 못 해 보고 끔찍한 밤을 견뎌야만 했다.

폭군은 거칠고 제멋대로였으며 가학적인 취향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약한 것을 보면 손에 쥐고 터뜨리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었다. 아니샤의 여리고 순진한 모습은 그의 가학적인 성미를 더욱 북돋았다.

아니샤는 폭군의 침실에 끌려가 사흘 내내 그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왕성으로 달려간 그레이움 백작과 세 아들은 사흘 뒤에야, 홀로 왕의 침실 문을 열고 나오는 아니샤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레이움 백작과 세 아들은, 가문의 하나뿐인 딸이며 동생인 아니샤를 사랑하고 아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 주었고, 엄한 사내들이 수작 부리는 걸 나서서 막아 주었다. 때론 아니샤의 명예를 위해 장갑을 던지는 것도 불사했다.

그런 그들이 왕의 침실에서 걸어 나오는 아니샤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어야 옳았을까? 어떤 행동을 보였어야 했을까?

정답이 없는 문제이나, 적어도 그 가련한 여인을 다시 왕의 침실에 밀어 넣는 것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으리라.

그토록 아니샤를 아끼고 사랑했던 그레이움 백작과 세 아들은, 폭군이 아니샤를 취한 것을 기회로 여겼다.

좀 더 권력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 어쩌면 다음 대 왕의 몸속에 그레이움 백작가의 피가 흐를 수 있을지도 모를 기회.

어머니는 권력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딸을 도구로 이용하려는 남편과 아들들을 외면했다.

말리거나 꾸짖는 게 아니라 그저 외면할 뿐. 그건 침묵의 긍정이었다.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아들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아니샤도, 그래. 이미 그 애가 왕의 여인이 되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데 차라리 왕의 정부로라도 인정을 받는다면, 왕비가 되지 못해도 어느 좋은 가문과 맺어질 수 있겠지.’

가족들은 아니샤를 다시 왕의 침실에 밀어 넣었다.

왕에게는 이미 왕비가 있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여러 아들딸을 두었다.

첫째 왕자는 반듯하고 정의로운 후계자로 자랐다. 비록 흉포한 아비의 눈을 피해 납작 엎드리고 있으나, 그의 마음에는 아비를 향한 분노와 울분이 쌓여 있었다.

아직 죽임당하지 않은 충신들은 오직 첫째 왕자가 왕이 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레이움 백작과 세 아들은 아니샤가 계속 왕의 총애를 받아 아들만 낳는다면, 왕비와 왕비가 낳은 왕의 자식들을 얼마든 모함해 죽여 버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만큼 폭군은 종잡을 수 없고, 잔악무도한 자였다.

아니샤 이전에 왕의 침실에 끌려들어 갔던 여자들의 결론이 어떠했는지, 그간 왕의 정부가 얼마나 자주, 손쉽게 뒤바뀌었는지 잘 알면서.

그래도 그레이움 백작은 헛된 꿈을 꾸었다.

‘어차피 더럽혀진 몸. 왕의 은혜를 입었으니 왕의 정부로 인정받고, 나아가 왕비까지 되는 게 아니샤를 위한 길이지.’

‘맞습니다, 아버지. 이게 다 아니샤를 위한 일인데.’

‘아니샤도 나중엔 우리의 노고를 알아줄 겁니다.’

‘부디 아니샤가 오랫동안 전하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들의 비겁하고 잔인한 말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아니샤의 심장에 꽂혔다.

폭군이 두려워서 그런 거라고. 사실은 자신을 보내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왕께 보낸 거라고.

자신을 지키고자 애썼으나 끝내 지켜 주지 못해, 가족들도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 자신은 가족을 위해, 가문을 위해 이 지옥 같은 나날을 의연히 견뎌내야만 한다고.

그리 생각했던 아니샤는 왕의 침실로 끌려들어 갔던 첫날에 느꼈던 것보다 더 큰 절망을 맛보았다.

‘나는 더럽지 않아요. 나는 더럽혀진 게 아니에요!’

아니샤는 절규했으나 아버지와 오빠들은 그때만 귀를 틀어막았다.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붙잡았던 유일한 끈, 가족에 대한 애정까지 산산이 조각나자, 아니샤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

아니샤는 살아만 있는 인형이 되었다.

가족들이 자신을 왕의 침실에 밀어 넣어도, 폭군이 온갖 행위를 강요해도, 반항하거나 울지 않았다.

왕은 그런 아니샤에게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녀를 정부로, 나아가 왕비로 삼기는커녕 얇은 속옷 바람으로 내쳤다.

폭군은 바로 다음 희생자를 찾아 왕궁 연회를 헤집고 다녔다.

아니샤는 왕궁 뒷문으로 끌려 나가 맨발로 오들오들 떨다 겨우 짐마차를 얻어 타고 그레이움 백작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백작저로 돌아온 아니샤는 두 달을 앓았다.

겨우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침대를 빙 둘러싼 가족들은 절망 대신 환희를, 비명 대신 환호를 외치고 있었다.

“아이, 네가 아이를 가졌구나. 아니샤, 왕의 아이를 가졌어!”

그레이움 백작의 말을 듣자마자 아니샤는 다시 기절했다.

가족들은 부산을 떨며, 의사를 불러와 그녀의 상태를 진찰하고, 온갖 몸에 좋다는 영약들을 사들였다.

세 오빠들은 아니샤가 임신했다는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 발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사교계의 모임을 찾아다녔다.

백작 부인은 벌써 아이의 옷을 만든다며 왕궁 제일의 재단사들을 불러들였다.

그레이움 백작은 이 기쁜 소식을 아이의 아버지에게 알리겠다며 왕궁으로 찾아갔다가 왕에게 문전박대당했다.

반나절 만에 다시 깨어난 아니샤는 홀쭉한 배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그리고 그대로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창문 아래에는 가지치기하던 정원사가 서 있었다. 정원사는 얼결에 아니샤를 덥석 끌어안았고, 아니샤는 죽지 못했다.

아니샤를 살린 정원사는 더러운 손으로 왕의 아이를 가진 귀한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이후 아니샤는 기회가 되는 대로 죽고자 했다.

수많은 자살 미수 시도가 쌓이자, 가족들은 아예 아니샤의 양팔과 다리를 침대에 붙들어 매 놓았다.

아니샤는 그 상태로 달을 채워 아이를 낳았다.

폭군은 모든 귀족이 모인 자리에서 아니샤가 자신 말고 딴 남자를 만나 그놈의 아이를 낳았다고 화를 냈다.

자신을 배신한 아니샤를 죽이고 내친김에 그레이움 백작가를 몰락시켜 그 재산을 빼앗겠다는 것이었다.

폭군이 늘 자신의 옛 정부와 사생아에게 이토록 잔인하게 굴었던 건 아니었다. 임신한 정부를 적당한 귀족과 결혼시켜 제 사생아를 적법한 아이로 만들어 준 경우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가차 없이 버린 경우가 더 많았다. 안타깝게도, 아니샤는 후자의 경우였다.

아니샤와 그레이움 백작가 사람들은 아이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아이 때문에 죽을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레이움 백작은 겨우 눈 뜬 갓난아이를 포대기로 싸매고 왕궁으로 달려가, 모든 귀족이 보는 앞에서 포대기를 펼치고 아이를 들어 올렸다.

아이는 은발에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갓난아이의 쭈글쭈글한 얼굴에서 무얼 볼 수 있겠냐마는, 노귀족들은 그 쭈글쭈글한 얼굴에서 폭군의 얼굴을 찾아냈다.

그 누구도, 폭군마저도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더는 부인할 수 없었다.

폭군이라 할지라도 차마 모든 귀족이 보는 앞에서 절 쏙 빼닮은 아이를 제 핏줄이 아니라 부정하고 죽일 수는 없었다.

새삼 부정이 치솟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폭군은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 아들도 경계하고 죽일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자였다.

핏줄보다 중요한 체면. 체면 때문에 갓난아이와 아니샤를 죽이지 않았다.

그레이움 백작이 가문의 재산 절반을 왕실에 기부하자 선심 쓰듯 아이의 이름을 내려 주었다.

그때 하필 손에 고문서를 들고 있었던지라, 눈에 띄는 단어 세 개를 골라내 이름으로 주었다.

휀. 룩스. 아멜.

모두 태양을 뜻하는 고문자였다.

루이먼드는 왕이 왼손에 들고 있던 술잔에 새겨진 장인의 이름이었다.

루이먼드 휀 룩스 아멜.

그 뒤에 더해진 성은 당연하게도 ‘일 아이너스’가 아니라 ‘폰 그레이움’이었다.

왕의 애정이 식은 후 태어난 아이인 주제에 왕을 꼭 빼닮은 외모.

그 때문에 그레이움 백작가는 아이를 죽이지 않고 미래에 투자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이에 왕비와 첫째 왕자는 위기감을 느꼈고, 루이먼드는 옹알이하기 전부터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다.

그건 아니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레이움 백작가는 아니샤와 루이먼드를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으나, 아이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아니샤가 독이 듬뿍 든 포도주를 마시는 걸 막지 못했다.

왜 아니샤가 잔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를 맡고도 포도주를 마신 건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철이 들기 전부터, 살기 위해 바보, 망나니, 난봉꾼이 되어야 했다.

왕위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멍청하게. 당장 술독에 빠져 죽고 매독에 걸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방탕하고 난잡하게.

그레이움 백작가는 왕비와 첫째 왕자의 눈을 피하고자 ‘척’만 하라고 말했다.

왕비와 첫째 왕자는 루이먼드가 괜히 그러는 ‘척’만 하는 게 아닐까 눈을 치켜뜨고 지켜보았다.

루이먼드는 양쪽의 감시 속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시작했다.

사교계의 꽃.

눈만 마주쳐도 넘어오는 헤프고 가벼운 사내.

멍청하지만 예쁜 꽃.

머리에 든 거라고는 오로지 섹스와 술, 도박뿐인 방탕아.

루이먼드는 성인식을 치르기 전부터 사교계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은발과 검은 눈은 그가 고귀한 아이너스 왕가의 혈통이라는 걸 증명해 주었으며. 어머니를 닮은 순한 눈매와 아버지를 닮은 오뚝한 코와 차가운 입매는 세상에 다시없을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 냈다.

그가 지나가면 남자든 여자든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고, 반해 버렸다.

그가 예배당에 발을 들일 수 없는 사생아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여인들은 앞다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이먼드는 기꺼이, 매일같이 여자를 바꿔 가며 난잡하게 뒹굴었다.

그가 아는 건 오직, 침대 위에서 여자를 어떻게 기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일부러 글자를 익히지 않았다. 예절은 더더욱 몰랐다.

스무 살쯤 되었을 땐 자신이 원래 그런 놈인 건지 그런 척하는 건지, 자신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웃지 않는 건 오직, 어머니의 묘비 앞에 홀로 앉아 있을 때뿐이었다. 그는 잘 때도 가식적인 미소를 잊지 않았다.

그쯤 되자 왕비와 첫째 왕자의 독살 시도가 띄엄띄엄해졌다.

아주 완벽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가끔 한 번씩 독이나 암살자를 보내지 않으면 손이 근질근질한 듯했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그를 차기 왕으로 밀어 올리고자 했던 그레이움 백작가는 슬슬 그를 포기했다.

노쇠한 그레이움 백작은 루이먼드만 보면 그간 퍼부은 돈이 아깝다며 역정을 냈다.

백작의 세 아들은 대놓고 그를 쓰레기 취급했다. 백작 부인은 루이먼드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끔찍해했다.

‘이제야 겨우 살 만해진 건가?’

안심할 즈음.

남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젊은 룩센 백작 칼레나의 반란이었다.

폭군과 왕실은, 수도의 귀족들은 그 반란을 가볍게 생각했다.

폭군의 폭정에 대항해 반역의 깃발을 든 존재가 칼레나 하나뿐이었겠는가? 그녀 이전에도, 그녀와 동시에, 왕국 곳곳에서 난이 일어났다.

그리고 대부분의 난은 허무하게 진압되었고, 어떤 불꽃도 수도까지 번지지 못했다.

폭군은 수백의 기병대를 남부로 내려보내고는 칼레나의 이름을 잊었다.

기병대가 한 번 싸워 보지도 않고 그녀의 편으로 돌아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백의 기병대 기사 중 누구도 자신이 배신했다고 수도에 연통을 보내지 않았으니까.

칼레나는 다른 반역자들과 달랐다. 무턱대고 수도로 돌격하지 않았다. 왕국의 남부와 동부, 서부를 모두 손에 넣고 그 뒤에야 수도로 진격했다.

수도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폭군은 시종 분장을 하고 도망치다가 잡혀 처참하게 죽임당했다.

왕비와 첫째 왕자는 개처럼 질질 끌려왔다. 모든 왕족, 폭군의 사생아들이 왕궁의 가장 큰 홀에 떠밀렸다.

술에 취해선 어느 자작 부인의 치마 속에 기어들어 가 있던 루이먼드도 마찬가지였다.

반란의 우두머리, 칼레나는 단상의 옥좌에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한 머리칼을 가진 기사가 호위로 서 있었다.

단상 아래에는 펠트하르그 변경백 카드릭과 왕국 최고의 기사 루단테가 서 있었다.

아이너스 왕가의 피를 몸속에 한 방울이라도 가진 자들은 두려움에 질려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루이먼드는 제일 뒤에 고꾸라져 살려 달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목이 턱 막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숨조차 쉬기 버거웠다.

루이먼드는 그저 덜덜 떨며 단상 쪽을 바라보았다.

단상 아래에 서 있던 두 사내가 검을 휘둘렀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피와 비명이 퍼졌다.

아악!

살려 줘- 억!

시, 싫어어어!

루이먼드는 제일 뒤에 앉아 있었던 죄로, 모두가 죽는 걸 본 뒤에야 죽을 수 있었다.

“으, 더러운 놈.”

루단테가 인상을 찡그리며 눈앞에서 검을 휘둘렀다.

‘내가 뭐가?’

살아남고자 발버둥 친 게 더러운 건가? 라고 생각하자마자 목이 허전해졌다. 아니, 목에서 뭔가 팟, 하고 터져 나왔다.

“컥.”

루이먼드는 목을 움켜잡고 쓰러졌다. 털썩.

피로 물든 눈이 부들부들 떨렸다.

흐릿한 시야로 저를 경멸하듯 내려다보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후 돌아서는 루단테. 쯧, 혀를 차는 카드릭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단상 위, 무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붉은 머리의 여자가 눈동자에 맺혔다.

그녀는 루이먼드가 이곳으로 끌려온 후부터 검에 베일 때까지, 그를 보고 눈을 찌푸리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죽고 싶지 않아. 이렇게……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려고, 나는, 나는…….’

루이먼드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적막.

루이먼드는 죽었다. 아니,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 왜 눈을 뜨니, 열다섯 살 그때로 돌아와 있는 걸까?

그것도 성인식도 치르기 전, 그레이움 백작가 정원에.

티파티에 초대받아 와서는 자신을 보고는 대뜸 수풀로 끌고 들어가 옷을 벗기던 일렝시아 백작 부인에게 깔린 채로.

정작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그 즈음이거나 더 이전의 일일 터.

떨리는 목소리, 코끝을 감도는 달콤한 냄새, 얼굴을 간질이던 머리카락의 감촉. 그 모든 걸 기억하면서 얼굴만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진짜가 아니라서?’

루이먼드는 그 단 하나의 기억이 혹시나,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어린아이의 환상이나 왜곡이 아니었을까 의심했다.

열여덟에 성인식을 치르고, 스무 살이 된 이후에는 그런 의문조차 가지지 않게 됐지만.

진짜 기억인지 왜곡된 기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어머니가 그렇게 말해 준 적이 있었다면, 루이먼드는 뒤늦게나마 어머니에게 대답해 주고 싶었다.

첫째, 당신 아이의 이름 뒤에 붙는 건 ‘일 아이너스’가 아니라 ‘폰 그레이움’이라는 것.

둘째, 네 개의 이름 중 뒤에 붙는 세 개의 모두 다 태양을 의미하는 단어인 건, 생물학적 아버지가 자신을 귀중히 여긴 게 아니라 이름을 짓는 것조차 귀찮아했기 때문이라는 것.

무덤 앞에서 아무리 중얼거려 봤자 어머니께서는 듣지 못하겠지만.

“이 빌어먹을 기억이 진짜라면, 적어도 당신만큼은 날 사랑해 주셨던 거겠죠? 하지만 어머니, 어머니가 정말로 절 사랑하셨다면…….”

루이먼드는 이끼 낀 묘비를 쓸어내리며, 늘 버릇처럼 하는 말을 또 중얼거렸다.

“절 낳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스무 살의 어느 날.

황궁에서 보내 준 생일 선물에 독침이 꽂혀 있어 하인 하나가 죽어 버린,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날의 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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