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31)

***

시시각각으로 옷이 벗겨졌다. 일렝시아 백작 부인은 나긋한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이며 루이먼드의 뺨을 쓸어내렸다.

“자, 잠깐만요, 부인.”

루이먼드는 일단 일렝시아 백작 부인에게서 도망쳤다.

무슨 말을 했기에 작정하고 덤빈 그녀가 순순히 물러났는지는 루이먼드 본인도 알지 못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으니까.

루이먼드는 반쯤 헐벗은 상태로 넓은 정원을 달리며 계속 제 목을 만져 보았다.

검으로 벤 상처도,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던 피도, 없었다.

“으악.”

목을 만지느라 앞을 제대로 못 봐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데굴데굴 굴러 연못 근처에 쓰러졌다. 아픈 무릎을 문지르며 일어서다 우연히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거기에 어린 루이먼드가 있었다.

술과 향락에 찌든 청년 말고, 겁탈당할 뻔한 상황에서 겨우 도망쳐 나와 겁에 질려 있는 10대 소년이.

‘어째서?’

글자도 모르는 멍청한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당연히 답을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덧없이 꽤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고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찌 됐건, 좋아. 난 아직 죽지 않았어. 어리고, 아마도 과거로 돌아온 것 같고.’

고작 이 정도 결론을 내리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던지.

‘내가 왜 안 죽고 과거로 돌아왔는지 백날 고민하면 뭐 해? 이미 일어난 일인걸. 그냥 앞으로 어떻게 살지, 어떻게 하면 그때처럼 개죽음당하지 않을 수 있는지만 고민하자.’

루이먼드는 회귀하여 2회 차 인생을 살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생각을 했다.

‘이번엔 조용히 살자. 누구의 눈에 띄지도 말고. 조용, 조용히. 그리고 적당할 때 도망치자.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단 왕비와 첫째 왕자에게 자신은 왕위를 전혀 욕심내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보여 줘야 했다.

칼레나의 반란은 먼 위험이었고, 왕비와 첫째 왕자의 암살 시도는 눈앞의 위험이었다.

눈앞의 위험을 피해 살아남아야 나중의 위험을 피할 기회도 얻는 법.

루이먼드는 1회 차 인생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둘의 경계를 풀었다.

그는 조용하고 착한 바보가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헤헤, 웃었다. 특히나 첫째 왕자의 말엔 껌뻑 죽었다.

“아, 그분이야말로 국왕 전하의 뒤를 이을 최고의 후계자시지요.”

“저는 정말이지 그분을 너무도 존경합니다.”

“어제 멀리서 그분을 뵈었는데 얼마나 설레던지, 아직도 마음이 콩닥콩닥 뜁니다.”

누굴 만나든 첫째 왕자의 칭찬부터 늘어놓았다. 첫째 왕자가 잘하든 못하든 루이먼드는 무조건 첫째 왕자의 편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먼드는 ‘첫째 왕자의 딸랑이’라는 괴상한 별명을 얻었다.

이렇게 구니, 왕비와 첫째 왕자는 놀랍게도 금방 경계를 풀었다.

어느샌가부터 연회에 참석하면 왕비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첫째 왕자는 먼저 말을 걸어 주었다. 루이먼드는 조금 많이 허탈했다.

루이먼드는 뒤늦게나마 글자를 배울 수도 있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전하의 핏줄인데, 네 이름을 쓸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첫째 왕자의 아량 덕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 생에서도 이럴 것을. 난들 어찌 알았겠어? 왕비와 왕자가 아부에 약하다는 걸.’

괜히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처먹다 속 다 버리고, 오는 여자를 거부하지 않고 난잡하게 굴다 난잡한 놈이라 손가락질이나 당했던 지난 생이 허무할 따름이었다.

루이먼드는 첫째 왕자를 철저히 찬양하는 한편, 첫째 왕자가 선심 쓰듯 뿌리는 금화를 족족 받아 챙겼다.

그 모습은 그의 아름다운 외모와는 별개로, 꽤 추저분하고 탐욕스러워 보였다. 몇 푼 안 되는 금화 주머니를 사양 않고 꼬박꼬박 챙기다니.

‘부유한 그레이움 백작가의 비호를 받는 놈이 돈이 없어 이럴 리는 없고. 배포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었군. 이런 걸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니.’

첫째 왕자는 그런 루이먼드의 태도를 보며 루이먼드를 더욱 하찮게 여겼다.

‘최대한 많이 긁어모아서 도망 자금으로 쓰자. 허파에 허세가 든 왕자 덕에 도피 자금이 술술 모이는구나.’

그레이움 백작가의 재산을 손대는 건 한계가 있었다.

할아버지인 백작과 삼촌들은 루이먼드를 다음 대 왕으로 미는 것과는 별개로, 루이먼드를 가문의 중대사에 전혀 참여시키지 않았다.

말로는 ‘훗날 나랏일을 맡으셔야 하는 분인데, 고작 백작가의 일 따위를 신경 쓰시게 할 순 없지.’라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루이먼드를 무시하고 있었다.

예쁘고 말 잘 듣고 멍청한 꼭두각시.

그레이움 백작가 사람들이 원하는 루이먼드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다.

때문에 루이먼드는 성인식 이후에도 자신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예산을 받지도 못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매번 그레이움 백작을 찾아가 돈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야 했다.

‘내가 왜 너에게 돈을 퍼붓고 있는지, 잊지 말거라.’

주름 잡힌 크라바트를 한 개 살 때도 이런 말을 듣는데, 돈을 빼돌려 도망 자금을 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첫째 왕자가 기분 내킬 때마다 내려 주는 상급은 사막에 내리는 보슬비요, 마른 가뭄의 소나기였다.

‘다른 왕국으로 넘어가서, 적당히 외진 곳에 땅과 저택을 사서 평생 놀고먹으며 지내자. 그 나라 몰락 귀족을 수소문해 돈을 적당히 주고 족보에 입적해 달라고 하면, 평생 놀고먹으며 지낼 수 있을 거야. 이 왕성이 있는 쪽으로는 머리를 두고 자지도 말아야지.’

루이먼드는 두둑해지는 비자금을 보며 죽지 않아도 될 미래를 꿈꾸었다.

참고로, 이렇게 자세한 계획을 짤 수 있었던 건 우연히 접한 연애 소설 덕분이었다. <도망친 후작 영애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제목에 혹해 읽었는데, 여주인공이 제국 황제의 동생이자 북부의 차가운 대공인 남주인공을 피해 도망치는 방법이 꽤 흥미로웠다.

루이먼드는 절박한 마음으로 이 책이 꽂혀 있던 선반에 있던 책들도 전부 독파했다.

<늑대 공작의 아이를 품고>, <7년의 밤, 붙잡힌 백작 영애>, <냉혈한 황제와 도망친 남작 영애는>, <그 영애는 오늘도 도망칩니다.>, <백 번의 도망, 백한 번의 청혼>, <집착하는 황제의 아이를 가지고 튀었습니다> 등등.

책들은 어떻게 해야 무사히 도망칠 수 있는지, 도망친 후에 무슨 짓을 하면 반드시 들키고 마는지 알려 주었다.

그렇게 첫째 왕자의 발닦개가 되어 도망칠 궁리만 하던 중 어느 날.

남부의 룩센 백작 칼레나가 반란을 일으켰다. 루이먼드가 기억하는 것보다 2년이나 일찍.

루이먼드는 왕궁에서 소식을 듣자마자 아픈 척하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간 모은 돈과 옷가지를 가방에 쑤셔 넣으며 절규했다.

“왜! 어째서어어!”

루이먼드는 알지 못했지만, 반란이 앞당겨진 건 루이먼드의 탓도 없잖아 있었다.

루이먼드가 첫째 왕자의 신임을 얻어 옆자리를 차지하니 이전 생에서 딱 루이먼드의 위치에 있었던 어떤 귀족이 제자리를 잃고 수도에서 주우욱 밀려나 버렸다.

어쨌거나 첫째 왕자의 세력이긴 하니, 그냥 밀려나지는 않고 남부에서 세금 징수를 관리 감독하는 관직을 맡게 되었다.

본래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연금만 타 먹는 편한 자리였으나, 이 귀족은 첫째 왕자에게 바칠 비자금을 마련해 다시 수도로 복귀하고자 권한을 남발했다.

남부에 백성뿐만 아니라 귀족들마저 연이어 파산할 만큼 심각한, 대수탈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룩센 백작 부부는 남부 귀족 대표로 세금 감면을 요청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나 죽었다.

세금 징수관이 된 중앙 귀족은 단순 강도 사건이라 발표했으나, 남부 귀족들은 그가 룩센 백작 부부를 죽인 거라 생각했다. 룩센 백작의 두 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룩센 백작의 둘째 딸은 성인식을 치른 날 밤, 반란을 일으켰다.

세금 징수관을 죽이고, 군대를 모아 폭군 타도를 외쳤다.

이번에도 폭군은 룩센 백작의 반란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첫째 왕자마저 룩센 백작이 중앙 귀족을 죽인 것에 분노했다.

두 번째 생을 사는 루이먼드만이 그 불티같은 반란을 두려워했다.

루이먼드는 첫째 왕자에게 룩센 백작의 반란을 조심하라고 조언하지 않았다. 해도 첫째 왕자가 들을 리도 없거니와, 알려 주고픈 의리도 없었다.

루이먼드는 그날 밤, 그동안 모은 돈을 들고 튀었다.

그가 도망치고 열흘 뒤까지, 수도의 누구도 그의 도망을 알지 못했다.

그레이움 백작가도 첫째 왕자 쪽 세력도 입으로만 루이먼드가 중요하다 귀하다 말할 뿐이었으니까. 정말로 그를 아끼고 걱정해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루이먼드는 추격이 따라붙지 않는 걸 보며 슬퍼하지 않았다.

그저 감사했다.

‘이대로 영원히 날 놔줘. 제발.’

그대로 도망가 휀 룩스 아멜 어쩌고 하는 이름 따위 버리고 어느 시골 마을의 한스, 크리스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루이먼드의 도망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루이먼드가 생각하기로, 도망 과정은 완벽했다. 연애 소설에 나온 성공한 도망법대로만 움직였으니까.

금화는 동화로 환전해 썼다.

머리를 어두운 색으로 염색하고. 얼굴엔 진흙을 덕지덕지 발랐다.

더러운 옷을 입었고, 허름한 여관에서만 묵었고, 썩은 냄새가 나는 수프와 딱딱한 검은 빵도 꼭꼭 씹어 삼켰다.

여주인공들이 늘 들킬 때 저지르는 실수 따윈 하나도 하지 않았다.

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구하겠다고 금화를 뿌리지도 않았고, 굶주린 아이에게 빵을 사 주며 귀족 특유의 우아한 말투를 쓴다거나 제 본명을 밝히지도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방심해 원래의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왕국의 국경선을 넘기 직전, 서부의 변경백 카드릭에게 잡히고 말았다.

무려 ‘첫째 왕자의 충신’으로 분류된 루이먼드는 즉결 처분 대상이었다.

“어, 어떻게 나를 찾아낸 거지?”

왜 들킨 거지? 뭐가 잘못된 거지?

루이먼드가 패닉에 빠져 외쳤다. 카드릭은 ‘이게 미쳤나?’라는 표정을 지으며 싸늘히 말했다.

“왕자의 광대, 그 얼굴을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검이 은빛 잔상을 뿌리며 루이먼드의 목을 벴다.

“아!”

더러운 옷, 거친 염색약, 진흙 팩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외모 때문에 붙잡히다니.

그가 읽은 어떤 소설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이유였다.

책에서 보면 아무리 예쁜 여주인공도, 하녀의 옷을 입고 로브를 쓰면 아무도 못 알아봤건만.

“젠, 장…….”

털썩.

루이먼드의 몸이 맥없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루이먼드는 두 번째로 죽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루이먼드는 다시 열다섯 살 그때로 돌아와 있었다.

그레이움 백작가 정원의 구석진 수풀 더미 속. 일렝시아 백작 부인에게 깔려 옷이 벗겨지고 있던 그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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