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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속 반복됐다.
언제 죽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늘 눈을 뜨면 일렝시아 백작 부인이 자신을 덮치고 있었고, 무슨 짓을 해도 목이 뎅강 잘려 죽었다.
펠트하르그 공작 카드릭과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 두 사람은 사이좋게도 퐁당퐁당 번갈아 가며 루이먼드의 목을 벴다.
그나마 제일 오래 버텼던 게 일곱 번째 삶이었다. 가장 충동적인 삶이었지만 그래서인지 가장 길게 살 수 있었다.
루이먼드는 일렝시아 백작 부인 밑에서 빠져나오며 그녀의 보석 머리 장식을 빼 들고 달아났다.
몇 년 버티며 도망갈 틈을 노릴 여유 따윈 더 없었다.
하녀들의 숙소에 숨어들어 하녀 옷으로 갈아입고, 신분패를 훔쳤다. 슬프게도 여장은 더없이 잘 어울렸다. 치마는 좀 많이 짧았지만.
어설프게 얼굴에 진흙을 발라 ‘엄청나게 아름다운 미남이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얼굴에 진흙을 바르고 정체를 숨기려 했지만 그런데도 숨겨지지 않는 미모를 뽐내고 있음’ 상태인 것보다는 ‘나는 정말 예쁜 미녀인데 하녀 옷으로 미모를 숨김’인 게 그나마 정체를 숨기는 데 이로웠다.
두 번째, 세 번째 삶에서 그의 목을 벤 펠트하르그 공작이 알려 준 팁이었다.
왜 두 번이나 팁을 전수받았냐고 묻는다면, 멍청하게도 두 번째 삶에서 실패한 걸 반성하지 못하고 세 번째 삶에서 똑같이 얼굴에 진흙을 바르고 도망가다가 또 펠트하르그 공작에게 붙잡혀 목이 뎅강 잘렸기 때문이었다.
역사를 잊은 자에게 미래는 없다.
이 귀한 진리를 루이먼드는 한 번 죽으면 될 걸 굳이 두 번 죽어서야 체득할 수 있었다.
일렝시아 백작 부인의 머리 장식을 팔아 도망치던 루이먼드는 그레이움 백작가가 그를 뒤쫓아 잡기 전에 인신매매단에게 붙잡혔다.
인신매매단은 여자인 줄 알고 납치한 미인이 사실은 남자라는 걸 알고는 매우 놀랐다.
“뭐야, 변태냐?”
“이렇게 잘생겼는데 변태라니.”
“그러게, 모처럼 남자로 태어나선 변태짓이나 하다니.”
“난 변태가 아니다! 나에게는 사정이……”
루이먼드는 거세게 발버둥 치며 자기 자신을 변호했으나 인신매매단은 들어 주지 않았다.
“아아, 그쪽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늘 그렇게 말하더라.”
“맞아, 구구절절하게.”
“뭐, 그런 게 좋다면 평생 그렇게 살 수 있는 쪽으로 팔아 주지.”
인신매매단은 넓은 포용력과 호의를 보이며, 루이먼드를 멀고 먼 서쪽 왕국의 어느 귀족에게 팔아 버렸다.
루이먼드는 짐마차에 갇힌 채로 국경선을 넘었다. 여섯 번의 회귀, 일곱 번째 삶 만에 처음으로 반란이 일어나기 전 국경을 넘은 것이었다.
하지만 감격스럽진 않았다. 변태 여장 남자 취급을 받으며 노예로 팔려 가는 중이었으니까.
‘이렇게까지 살아남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잠깐 진한 허무감을 느꼈지만, 자살을 시도하진 않았다.
목을 찌를 만한 날붙이도 없었거니와 자살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도 살아야지. 살고 싶어.’
살고 싶었다. 목을 베여 죽고 싶지 않았다. 여섯 번이나 죽고 난 후에도.
루이먼드를 산 귀족은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여장 남자를 좋아했다. 다행히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성불구자였다.
그의 저택에는 이미 수십 명의 노예가 있었다. 모두 남자였으나 여장을 하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 사람도 있었고, 보자마자 ‘내 눈! 으악, 내 눈!’ 하고 비명을 지를 만한 흉측한 여장 남자도 있었다.
그의 취향은 여장이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여장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날 산 거냐고, 루이먼드는 변태 귀족의 멱살을 잡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변태 귀족의 총애를 다투려는 것처럼 보일까 봐 무서웠으니까,
루이먼드는 가장 아름다웠기에 가장 험한 취급을 받았다. 저택을 쓸고 닦는 궂은일은 다 루이먼드의 몫이었다.
금제 만년필보다 무거운 걸 들어 본 적 없던 손은 금세 거칠어졌다.
몸은 고되고 힘들었으나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드레스가 거추장스러웠으나 변태 귀족의 총애를 받는 이들과 달리 레이스와 프릴이 전혀 달리지 않은, 거친 하녀의 옷이기에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다.
고위 귀족 특유의 오만한 품성은 이미 오래전 꺾였다.
‘이렇게 살다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죽겠지. 아니면 그 전에 다른 귀족에게 팔리거나. 다른 저택에 팔리면 드레스는 안 입어도 될까?’
그렇게 태평한 생각이나 하며 물을 긷고 장작을 패고 빨래를 하는 동안 그가 도망친 왕국에선 반란이 일어났다.
역시나 동부의 룩센 백작, 칼레나의 반란이었다.
일찌감치 왕국에서 멀리 도망쳐 온, 아니, 팔려 온 루이먼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전해 오는 소문을 주워 들었다.
새벽 전투, 정복 전쟁, 제국 수립, 드래곤 사냥.
이미 여섯 번 정도 경험했던 일이 똑같이 반복해 일어났다. 그 여섯 번의 삶 동안 일찍 죽는 바람에 경험하지 못한 일들도 일어났다.
제국은 단기간에 루이먼드가 팔려 온 왕국과 국경을 마주했다. 사이에 다섯 개의 왕국이 있었는데 반년도 안 되어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서부의 정복 전쟁을 지휘한 이는 아쉴레앙 공작이 된 룩센 백작가의 첫째, 루비아나였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곧 피를 부르는 불길한 색이 되었다.
루비아나가 이끄는 정복군을 마주치고도 겨우 살아남은 적들은 ‘루비아나’를 ‘블러디아나’라고 불렀다.
루비아나는 효율적으로, 단기간에 정복을 끝내기 위해 초반에 거세게 몰아치곤 했다.
때문에 초반엔 전투가 꽤 격렬했으나 뒤로 갈수록 피 흘리는 전투 없이 승리를 거듭했다.
작은 왕국들이 루비아나가 군을 이끌고 근처에 도착하기만 해도 겁먹고 성문을 열어 항복했으니까.
다행히도 루이먼드가 팔려 간 왕국은 재빨리 왕의 첫째 아들을 항복 사절로 보내 왕국을 보존했다.
그러니 블러디아나의 정복 전쟁도, 제국의 선포도 모두 ‘남 일’이었다.
루이먼드는 이대로 이 왕국에서 여장한 하인으로 살며 늙어 죽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막 성립한 제국은 급격히 안정되었다.
황제가 드래곤 가죽으로 황좌를 덮었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전해졌다.
루비아나가 북부의 공작이 되어 마수들을 산맥에 가두고 매년 겨울에 마수 학살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러더니 대뜸, 루비아나가 남편감을 찾고 있다는 소문이 더해졌다.
“남편감?”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블러디아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온 다른 하인들은 그 표정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제국 수도에서 남편감을 구하고 다녔나 봐. 그런데 누가 그 블러디아나랑 결혼하려고 하겠어? 당연히 못 구했지. 그러니까 제국 서부랑 남부랑 동부를 돌며 남편감을 찾아다녔나 봐. 그래도 못 찾겠으니까 아예, 주변 왕국의 미혼 남자들을 만나러 다닌다던데.”
“어? 내가 들었던 말은 좀 다른데? 꼭 아이를 둘 이상 얻어야 한다고, 가임 능력이 보장된 유부남을 노린다고 하던데.”
“애를 낳아? 그 블러디아나가?”
“그러니까 말이야. 무슨, 신께 맹세했나 봐. 그래서 그 약속 때문에 반란에 성공하고 저렇게 나라가 커질 수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신에게 한 맹세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저렇게 남편감을 찾으러 다니나 봐.”
“블러디아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 남자들을 바치고 했는데, 누구든 그 여자의 침실에서 살아 나오지 못했대.”
“미친. 침대에서 남자 목을 베어 그 피를 마신다더니!”
하인들이 대화에 심취해 제멋대로 떠들어 댔다.
이 먼 곳의 하인들까지 이렇게 떠들 정도로 루비아나의 결혼 맹세가 널리 알려졌다.
그만큼 루비아나가 열심히 신랑감을 구하고 있고, 또 실패하고 있다는 의미일 터.
루이먼드는 지난 여섯 번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그간 루비아나는 한 번도 루이먼드를 죽이지 않았다.
‘이름 첫 글자가 같아서인가?’
이런 실없는 생각이 들 만큼 신기한 일이었다.
펠트하르그 공작 카드릭과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가 퐁당퐁당 번갈아 가며 루이먼드를 죽일 동안, 그녀만은 그에게 손 한 번 대지 않았으니까.
모든 삶 속에서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그저 바라보았다.
아무 감정 없는 무심한 눈동자.
삶을 더해 갈수록 자꾸만 그 눈빛이 생각났다.
‘내가 미쳐 가나 보다. 고작 날 안 죽인 정도로 신경이 쓰이다니.’
루이먼드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루비아나에 대한 생각을 떨쳐 냈다.
‘사실 이쯤 되면 미쳐도 될 상황 아닌가?’
여섯 번의 회귀, 일곱 번의 삶. 맨정신으로 버틸 수 없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난 잘 버텼어. 이렇게 이번엔, 살아남고야 말았잖아?’
드레스를 입고 빨래터에 주저앉아 다리를 쫙 벌리고 빨래하고 있는 그를 누가 그레이움 백작의 손자, 폭군의 사생아라고 생각할까?
끔찍한 모습이긴 하나 이렇게 해서라도 목을 베이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이번엔 진짜, 편안하게 늙어 죽을 수 있겠지. 그러면 여덟 번째는 없을 거야.’
딱히 자신이 왜 자꾸 회귀하는지, 삶이 반복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목을 잘리지 않고 평범하게 살다 늙어 죽으면 이 회귀가 끝나지 않을까, 막연하게나마 생각할 따름이었다.
루이먼드는 일곱 번째 삶에 만족하며 퍽퍽, 빨래를 짓이겼다. 루비아나가 남편감을 찾으러 이 왕국으로 온다는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그렇게,
루이먼드는 여장 남자 하인으로 궂은일을 하며 살다 늙어 죽었습니다.
……라고 끝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슬프게도, 그의 일곱 번째 삶은 루비아나의 소문을 들으며 빨래하던 그날로부터 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루이먼드를 하인으로 부리는 변태 귀족이 루비아나에게 청혼했기 때문이었다.
청혼.
무려 청혼.
농담이 아니고 진짜 청혼.
“내가 평생토록 그리던 나의 이상형이야!”
변태 귀족은 진심이었다.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개선식을 치르는 그녀를 먼발치에서 보고 반해 버린 것이었다.
그는 변태 주제에 행동력이 빨랐다. 반한 즉시, 루비아나에게 청혼했으니까.
그리고 곧바로 거절당했다.
옆에 서 있던 하인이 전하기로,
“못생겨서 싫다더라고.”
거절의 이유는 이러했다.
그날 밤.
변태 귀족의 저택은 습격당했다.
습격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저택에 불을 질렀다. 거대한 불길이 단번에 저택을 집어삼켰다.
침대에서 총애하는 여장 남자를 끌어안고 자던 변태 귀족은 속옷 차림으로 끌려 나와 바닥에 쓰러졌다.
혀가 잘렸다. 팔다리가 잘렸다.
그는 산 채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 죽기 직전에 목을 베였다.
저택의 여장 남자 하인들은 줄줄이 밧줄에 묶여 변태 귀족의 죽음을 고스란히 보았다. 그중 루이먼드가 속해 있었다.
‘나 죽어? 이렇게 죽는 거야? 이렇게? 또 죽는 거냐고!’
루이먼드는 그야말로 혼돈, 파괴, 절망 상태였다.
루비아나가 변태 귀족의 청혼을 퇴짜 놨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뭐, 별일이야 있겠어?’
라고 태평하게 생각했다.
루비아나가 고작 이런 일로 변태 귀족에게 해를 입힐 리 없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그를 단 한 번도 죽이지 않은 유일한 제국 공작이었으니까.
‘그래, 잠이나 자자. 내일 또 종일 장작을 패야 할 텐데.’
오늘 같은 내일이 계속되기를. 그리 소박한 바람을 가지고 잠들었건만. 눈을 뜨니, 이 상황이었다.
루이먼드는 변태 귀족의 목을 벤 자를 올려다보았다.
“감히 내 루비를 탐내다니.”
침략자가 싸늘하게 웃으며 피 묻은 검을 털었다.
후드득-.
그 피가 루이먼드의 얼굴에 뿌려졌다.
펠트하르그 공작, 카드릭.
루이먼드를 이미 세 번 죽인 적 있는 남자였다.
“저것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복면을 쓴 자가 공손히 물었다.
카드릭은 여장 남자 하인들을 경멸 어린 눈빛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다 죽여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장 남자 하인들이 꾸에엑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 소리쳤다.
루이먼드는 그게 카드릭의 신경을 거스르는 짓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뒤로 비척비척 물러났지만, 줄줄이 묶여 있는 상태에서 그래 봤자였다.
“시끄럽군.”
카드릭이 인상을 찡그리며 시범을 보이듯 눈앞에 놓인 하인 한 명의 목을 그었다.
그 하인은 당연하게도, 루이먼드였다.
“억.”
루이먼드는 살려 달란 말 한마디 못 하고 또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후후, 루이.”
그의 눈앞에는 당연하게도 일렝시아 백작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야릇하게 웃으며 그를 깔고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