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31)

***

‘또? 또 돌아왔다고?’

목은 멀쩡했다. 금이 가 있지도 않았고 피가 콸콸 터져 나오지도 않았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까! 아아, 루이먼드. 두려워하지 말렴. 기분 좋은 놀이를 하려는 거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너는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된단다. 모든 걸 내게 맡기고 말이야.”

일렝시아 백작 부인이 달콤하게 속삭이며 루이먼드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첫 번째 삶에서도, 두 번째 삶에서도, 일곱 번째 삶에서조차 들었던 말이었다.

어쩜 이렇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을 수 있는지.

일렝시아 백작 부인 덕에 이번 생이 여덟 번째라는 게 실감 났다.

일곱 번.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

일곱 번을 죽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여덟 번째 삶.

루이먼드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나, 수줍어하기는.”

귓가에 닿는 일렝시아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더는 무섭게 들리지 않았다. 한 번도 아니고 여덟 번이나 반복해 듣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래, 그렇게 가만히 있으렴.”

그녀는 생긋, 웃으며 루이먼드의 턱을 추어올렸다.

장미향 화장수 내음이 훅 다가왔다. 그 향을 맡는 순간, 루이먼드는 일곱 번의 삶 동안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그만. 인제 그만 좀 해요.”

“으응?”

일렝시아 백작 부인이 새끼 고양이의 앙탈을 보듯 루이먼드를 내려다봤다.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라던데, 그렇다면 루이먼드는 그냥 새끼 고양이가 아니라 벌써 목숨을 여덟 개째 쓴 고양이였다.

루이먼드는 앙탈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저리 치며 소리쳤다.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뭐?”

“당신 아들보다 어린 나한테 이러고 싶어?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 줄 알아?”

제 위에 올라탄 일렝시아 백작 부인을 밀어냈다.

세게 확 밀치지는 않았고, 양어깨를 잡고 뒤로 젖히는 정도로만.

네 번째 삶에서 확 밀쳤다가 일렝시아 백작 부인이 크게 다치는 걸 봤던 터라, 손에서 절로 힘이 빠졌다.

다행히도, 일렝시아 백작 부인은 그 정도만으로도 밀려났다.

“꺄악!”

비명을 지르며 맨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루, 루이?”

백작 부인이 루이먼드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루이먼드는 그 손이 닿기 전, 후다닥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날, 만지지 말아요. 나는 당신에게 나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직접 거절한 것은.

언제나 당하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단 한 번도 이렇게 대놓고 싫다고 말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다.

여덟 번째 삶을 살게 되어서야,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멋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뭐, 뭐라고?”

일렝시아 백작 부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녀는 지난 일곱 번의 삶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 단 한 번도 거절당해 본 적 없는 사람이 거절당한 것처럼 수치스러워했다.

“또 한 번 이런 식으로 날 희롱하려 든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네,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일렝시아 백작 부인은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여인이었다. 금방 마음을 진정하고는, 감히 제게 협박하는 루이먼드를 곱게 흘겨보았다.

“나는 그레이움 백작 부인의 오랜 친우이고, 사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그러니까 다들 당신의 말을 믿지 내 말은 안 믿을 거라는 말이군요.”

루이먼드가 피식, 웃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속이 텅 비고 텅 비어, 울지 못해 웃는 웃음이었다.

일렝시아 백작 부인은 그런 그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애송이였다. 가끔 슬쩍 다가가 목덜미나 뺨을 문질러도 피하지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붉히고 마는.

내내 군침만 삼키고 있다가 오늘, 날을 잡고 덮쳤건만.

‘하루 만에, 아니, 한 시간도 안 되어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렸잖아?’

인생 8회 차쯤 되어 보이는 지친 눈을 뜨고는 저리 싸가지 없게 말하다니.

일렝시아 백작 부인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런 그녀에게 루이먼드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아니, 경고했다.

“나는 루이먼드 휀 룩스 아멜 폰 그레이움. 내 아버지는 아덴 왕국의 지배자이시며 나의 어머니는 그레이움 백작의 따님 되시는 분입니다. 내 이름이 내 부모가 누군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내 이름을 걸고 당신을 법정에 고발할 겁니다.”

“그, 그게 무슨!”

“내 몸에 흐르는 피의 반은 왕실의 것. 당신은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나를, 내 몸속에 흐르는 왕족의 피를 더럽히려 했습니다. 나는 왕실 법정에서 그것을 고백하고 국왕 전하께 판결을 내려 달라고 할 겁니다.”

“……!”

일렝시아 백작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왕이 저를 닮은 사생아를 총애하든 관심조차 가지지 않고 있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왕실 법정에서 왕의 사생아가 일렝시아 백작가를 고발한다?

그건 피에 미친 폭군에게 일렝시아 백작가라는 훌륭한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었다.

폭군은 버릇없는 사생아를 죽일까, 아니면 왕의 사생아를 희롱한 일렝시아 백작 부인을 벌할까?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사생아를 사랑해서? 천만에. 일렝시아 백작가가 그레이움 백작가보다 덜 필요하니까. 사생아 한 명을 죽이는 것보다 일렝시아 백작가를 멸문하는 게 더 재미있을 테니까.

“어, 어떻게 그런! 그, 그러면 너는, 너는 무사할 줄 알아?”

“끽해 봐야, 죽기밖에 더 할까.”

“뭐, 뭐?”

“백작 부인, 나는요. 죽는 게 싫어요. 끔찍합니다. 그런데 어차피 죽을 거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 붙잡고 늘어져 같이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죽으면 목을 베여 죽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고.”

루이먼드의 검은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일렝시아 백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뒤로 엉금엉금 물러났다.

루이먼드는 감히 절 건드리기는커녕,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려 안간힘 쓰는 일렝시아 백작 부인을 가만 바라보았다.

하하, 웃음이 나왔다.

‘나는 이런 여자를, 무서워했구나. 이런 여자에게 휘둘려서 괴로워했던 거구나.’

허탈했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라느니, 앞으로 조심하라는 유치한 말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루이먼드는 일렝시아 백작 부인을 놔두고 등을 돌렸다.

“루, 루이. 잠깐만!”

허락한 적 없는 애칭이 불렸다.

하지만 더는 무섭지도, 끔찍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루이먼드에게 그 어떤 의미도 될 수 없었다. 넘을 수 없는 크고 큰 벽이 아니었다. 밟고 일어서면 넘을 수 있는 돌부리였다.

그동안의 삶에서 그는 그저, 그 돌부리에 걸려 종종 넘어졌던 것뿐이었다.

살짝 무릎이 까지고 아프기는 했지만, 그의 삶을 통째로 쥐고 흔들 만큼 큰 고통은 아니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일곱 번이나 죽고 나서야.

루이먼드는 저택 안으로 뛰듯 걸어 들어갔다.

저택의 고용인들이 루이먼드를 보고는 기겁했다.

“도련님?”

“도련님, 무슨 일이세요!”

“아니, 옷차림은 그게 또 무슨…….”

하인,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후원에는 코빼기도 안 비쳤으면서, 어디 있다가 이제야 단체로 몰려나오는 걸까?

이전이라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상황이 이제는 더없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일곱 번째 삶에서 변태 귀족의 하인으로 살았던 기억이 루이먼드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그런 거였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아는 게 힘이라고 했던가?

‘백작 부인에게 뒤꽁무니로 돈을 받고 얼씬하지도 않았던 거구나. 그런 주제에 새삼, 걱정해 주는 척하다니.’

저택의 주인인 백작부터 하인, 하녀에 이르기까지, 여기엔 누구 하나 그의 편이 없었다.

아무도 그를 걱정해 주거나 지켜 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를 이용할 생각뿐이었다.

이제야 깨달은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다가오지 마. 쫓아오지 마. 아무도 내 방에 들어오지 마.”

“도련님, 하지만!”

“마님께서 걱정하실……”

하인들은 누구 하나 루이먼드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몇몇은 기어이 방 안까지 따라 들어오려고 했다.

루이먼드는 그들의 얼굴 바로 앞에서 문을 쾅! 닫았다.

문밖에서 뒤로 나자빠지는 소리, 들으라는 듯 크게 내뱉는 욕설 따위가 들렸다.

“도련님, 저예요. 한스입니다. 문을 열어 보십쇼.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 옷차림은 또 뭐고요?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저는, 저는 들여보내 주셔야지요. 네? 저 한스입니다! 도련님!”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도 했다.

어떤 충성스러운 하인이 감히 귀족의 문을 이렇게 요란하게 두드릴 수 있을까? 웬만큼 우습게 보지 않는 이상에는 절대 불가능하리라.

또 한 번 정신이 아득해졌다. 색다른 배신감은 시큼한 맛이 났다. 심장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나는…….”

루이먼드는 문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하하, 웃음이 났다. 웃음은 울음처럼 번졌다.

뚝, 뚝.

굵은 눈물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첫 번째 삶에서도, 두 번째 삶에서도, 루이먼드는 진심과 가짜를 구분할 줄 몰랐다.

그래서 하인 하녀들의 염려 어린 눈빛, 다정한 보살핌이 진짜라 믿었고, 그들에게 상냥한 주인이 되고자 노력했다.

자신이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면 그들은 더더욱 자신을 더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호구 취급받다 못해 헐값에 내다 파는 물건 취급당하는 줄 모르고.

‘불쌍한 루이먼드. 멍청한 루이먼드.’

루이먼드는 쿵쿵 흔들리는 문에 머리를 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스를 비롯한 하인들은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이제 루이먼드는 그들이 무얼 걱정하는지 잘 알았다.

‘내가 할아버지나 할머니, 삼촌들에게 고자질할까 봐 무서운 거겠지.’

누가 뭐래도 루이먼드는 그레이움 백작이 공들이는 ‘최상급 상품’이었다.

하인들이 뒷돈을 받고 사교계의 동정 연하 킬러 귀부인에게 루이먼드를 넘긴 걸 안다면, 어떻게 될까?

첫 번째 삶에서 루이먼드는 일렝시아 백작 부인이 일을 치르고 자리를 뜬 뒤에도 수풀에 숨어 흑흑, 울기만 했다.

뒤늦게 하인들이 그를 찾아왔다. 하인들은 헐벗고 있는 루이먼드를 등에 업고 방으로 데리고 가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들은 루이먼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했다. 자기들끼리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기 바빴다.

그걸, 루이먼드만 몰랐다.

“도련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희는 모르겠지만.”

“암요, 저희는 전혀 모르지요.”

“아무튼, 그냥 잊으십시오.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마시고요. 특히나 나리와 마님께는 말이지요.”

“두 분이 오늘 도련님이 한 일을 알면 얼마나 화를 내시겠습니까?”

‘당한 일’은 ‘한 일’이 되었다. 착한 데다가 멍청하기까지 했던 첫 번째 삶의 루이먼드는 그게 그들이 저를 배려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겠다며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백작 부부에게 말하지 않았고, 일렝시아 백작 부인이 제멋대로 떠들고 다녀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결국 일렝시아 백작 부인의 말이 사실이 되었고, 추잡한 소문을 부채질했다.

루이먼드는 어린 나이에 유부녀인 백작 부인을 노리고 덤벼든 놈이 되었고, 온갖 유부녀들의 놀잇감이 되었다.

난잡하고 헤픈 루이먼드 전설의 시작이었다.

한동안 쿵쿵대던 하인들은 루이먼드가 끝까지 문을 열지 않자 포기하고 돌아섰다. 문을 부술 용기까지는 없는 듯했다.

루이먼드는 문밖이 조용해진 뒤로도 오랫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창밖의 하늘, 불을 켜지 않은 방이 어두워졌다.

루이먼드는 무심코 몸을 일으켜 작은 탁자 위 등불에 불을 붙이러 갔다.

성냥을 손에 들고는 불을 붙이기 전, 픽 비웃음을 흘렸다.

‘좀 안 보이면 어때서? 그런다고 목이 베여 죽지도 않을 텐데.’

손에 든 성냥을 꾸깃꾸깃하게 분지르고 집어 던졌다.

그의 눈에 등불 옆에 놓인 물병이 걸렸다. 유리를 빚어 만든 유리병은 유려한 곡선을 자랑했다.

“내가 나를 죽여도 또다시 시작될까?”

답을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바로 확인하는 방법이 있으니까.

루이먼드는 베란다 쪽으로 물병을 던졌다.

와장창.

물병이, 덤으로 창문까지 박살 났다.

바닥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깔렸다. 깨진 창문에선 찬 바람이 쏟아졌다.

루이먼드는 유리 조각 중 가장 뾰족하고 큼지막한 것을 집어 들었다.

날카로운 끝을 목에 가져다 대고.

후우.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순간이면 된다. 망설이지 말고 힘을 주어, 푹. 그러면 끝.

이대로 반복되는 삶이 끝날까? 아니면 또 눈을 떠 일렝시아 백작 부인의 얼굴을 올려다보게 될까?

제발 전자이기를.

눈을 감았다.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

그리고.

“…….”

진짜 그리고.

“……싫어.”

쨍그랑. 피에 젖은 유리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루이먼드는 유리에 베인 손을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욱, 우윽. 울음이 쏟아졌다.

“아파, 아파.”

이렇게 살짝만 베여도 아픈데, 어떻게 자기 손으로 자기 목을 찌를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눈뜨면 일렝시아 백작 부인 아래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지금 당장 죽는 게 더 무서웠다.

“죽고 싶지 않아.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왜 죽어야 하는가?

제 목에 유리 조각이나 들이대려고, 그 숱한 회귀를 견뎌 온 게 아니었다.

“살고 싶어.”

살고 싶었다. 사람답게. 평범하게. 행복하게.

타인에게 휘둘려 엉망으로 사는 삶 말고. 진짜,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 보고 싶었다.

‘남들에겐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인데, 왜 나는 일곱 번 죽고, 여덟 번 살아도 불가능한 건데?’

억울했다.

너무 억울해서, 이렇게 죽을 수 없었다.

루이먼드는 깨진 유리 조각에 비치는 수십, 수백 개의 얼굴을 보며 젖은 눈을 부릅떴다. 수백 개의 자화상이 덩달아 눈을 부릅떴다.

루이먼드는 수백 명의 자신을 보며, 다짐했다.

“두고 봐, 반드시 살아남겠어. 살아서, 행복해질 거야. 이번엔 절대 그딴 식으로 안 죽어.”

반드시 이번 생은, 살아남으리라.

그래서 사람답게 살리라.

평범하게, 또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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