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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목을 뎅강 잘리지 않고 살아남을 것인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루이먼드는 그날 일로 그레이움 백작과 백작 부인, 삼촌들, 저택의 고용인들과 한바탕 씨름을 한 후 방에 틀어박혀 고민했다. 아주 심각하게 고민했다.
성인식을 치르기 전 도망쳐도 실패했고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도망쳐도 실패했다.
반란이 일어나기 전 도망쳐도 잡혀 죽었고, 반란이 일어난 혼란스러운 상황에 맞춰 몸을 숨겨도 여지없이 실패했다.
먼저 룩센 백작에게 접선해 살려 달라 빌고 싶었으나, 그럴 방법이 없었다. 왕비와 첫째 왕자, 그레이움 백작가가 그를 겹겹이 감시하고 있으니까.
“그레이움 백작가, 왕비, 첫째 왕자. 그것들을 다 끊어 내 버릴 수만 있다면!”
루이먼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바라며 제 고운 은발을 쥐어뜯었다.
“확 수도사가 돼 버리면, 딱인데. 하지만 난, 예배당에도 못 들어가잖아.”
사생아가 성직자가 되는 건 죽었다가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었다.
으아아. 루이먼드는 책상을 쾅쾅 내리치며 괴로워했다.
책상이 덜컹덜컹 흔들리니 책 선반이 덩달아 덜그럭 흔들리다 받쳐 들고 있던 책을 우르르 쏟았다.
“으악.”
루이먼드는 두 손을 엇갈려 머리를 감쌌다. 유독 모서리가 날카로운 책 한 권이 루이먼드의 정수리를 찍었다.
“억.”
순간 눈앞에 별똥별이 튀었다.
루이먼드는 눈물이 그렁한 눈을 들어 제 머리를 찍은 원흉을 확인했다.
그의 도망 계획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인문학 책이었다. 국가의 치수 사업에 대한 역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치수 도량 변화와 그 원인, 어쩌고저쩌고.
도망치는 데는 도움이 안 되어도, 벽난로에 집어 던지면 활활 타기는 하겠지.
루이먼드는 원한에 불타 책을 움켜쥐었다. 책 하단에 박아 넣은 저자명이 금박도 아닌데 선명하게 반짝였다.
- 학자의 집 지음
“……!”
루이먼드는 그 원수 같은 책, 아니, 은혜로운 책을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올렸다.
“이거야!”
책 속에 길이 있다더니, 책 표지에 살길이 있었다. 그걸 여덟 번 살고 나서야 깨달은 루이먼드는 곧바로 저택을 뛰쳐나갔다.
그레이움 백작에게 알리지도 않고, 왕비와 첫째 왕자가 붙인 감시자가 제 뒤꽁무니를 쫓아오고 있는 것도 따돌리지 않았다, 그렇게 곧장 학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쇠사슬로 꽁꽁 묶인 학자의 집 문에 매달려 외쳤다.
“공부, 공부가 하고 싶습니다. 평생, 공부만 하고 살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공부, 공부 좀 하게 해 주세요!”
아름다운 은발이 나풀나풀 허공에 날렸다. 검은 눈이 촉촉하게 젖어서는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망원경으로 문밖을 내다본 학자들은 그 애처로운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요즘 세상에 저렇게 공부에 깊은 뜻을 가진 젊은이가 아직 남아 있었다니!”
“게다가 예뻐!”
“저 우는 모습을 보시오, 분명 수학을 공부하고 싶어 할 거야.”
“웃기시네, 저런 감성은 문학을 공부해야 나오는 거라고!”
“어서, 어서 데리고 오자!”
학자들은 앞다퉈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학자의 집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젊은이여. 우리는 세상의 진리를 깊이 탐구하는 학자들이오. 기꺼이 당신을 동문으로 받아들이겠소.”
그렇게 독서라곤 두 번째 삶 때 어깨너머로 겨우 글자를 깨쳐 임신튀…… 아니, 도망법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연애 소설을 읽은 게 전부였던 루이먼드는 학자의 집에 입성했다.
그날은 룩센 백작 부부가 시체가 되어 어린 딸들에게로 돌아간 날이기도 했다.
***
“우리가 널 어떻게 길렀는데!”
뒤늦게 도착한 그레이움 백작가 사람들이 루이먼드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다.
그래도 학자의 집 문이 열리지 않자, 담벼락을 빙 둘러 장작을 쌓아 놓고 불을 지르려 했다.
“불타 죽기 싫으면 나오겠지.”
그레이움 백작이 찌질한 악당처럼 웃으며 횃불을 집어 던지려 할 때.
“그만! 당장 그만두지 못할까!”
첫째 왕자가 백마를 타고 나타났다. 그는 왕의 명령을 들먹이며 그레이움 백작을 물리쳤다.
첫째 왕자는 겁먹어 도망치는 그레이움 백작의 뒷모습을 실컷 구경하고는 학자의 집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모처럼 좋은 선택을 했구나, 루이먼드. 스스로 그곳에 걸어 들어간 용기를 높게 사 네가 그곳에 있는 한, 너를 죽이려 들지 않겠다. 그러니 너도 내가 죽기 전까진, 그곳에서 다시는 나올 생각을 하지 말거라.”
***
루이먼드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첫째 왕자가 제게 뭐라 지껄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그는 학자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었던 이 말의 후폭풍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일단, 어떤 공부가 제일 쉬웠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벼운 시험을 치러야 했다. 꼬박 일주일 동안 72개 과목의 지식을 확인하는, 아주 가벼운 시험을.
당연히 72개 전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객관식인데 0점을 받은 과목도 7과목이나 되었다.
“정말, 공부가…… 쉬웠습니까?”
루이먼드를 바라보는 학자들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사실 우리 분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객관식에서 0점을 맞을 수 있겠어?”
0점 맞은 7과목 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했으나 나머지 65과목 대표들의 반대에 묻혔다.
루이먼드는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며, 무조건 시키는 대로 했다.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새벽 공부. 아침 먹고 잠깐 산책 후 아침 공부. 점심 먹고 잠깐 명상 후 점심 공부. 저녁 먹고 잠깐 산책 후 저녁 공부, 취침.
오직 공부, 공부, 그리고 공부였다.
공부라고는 소설책 한 선반 읽어 본 게 전부인 루이먼드가 견딜 수 있을 만한 일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먼드는 버티고 또 버텼다. 선배 학자들은 루이먼드의 근성에 감동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 공부를 좋아하는데 공부를 못할 수도 있지.”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중요하지. 발전 속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어.”
학자들은 감동한 김에 영차영차 힘을 합하여 루이먼드를 위한 제73의 길을 만들어 주었다.
이름하여 ‘교양 학문’.
72개 과목의 내용 중 가장 쉽고 재미있는 내용만 모아 만든 과목이었다.
루이먼드는 그렇게 학자의 집에서 사랑받는 막내가 되었다.
‘행복하다. 이런 게, 평범한 행복이라는 걸까?’
루이먼드는 처음으로 아침에 눈뜨는 게 두렵지 않은 삶을 경험했다.
이곳은 공부에 미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이었다. 루이먼드의 아름다운 외모나 왕의 사생아라는 출생의 비밀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학자 중 절반은 여성들이었는데, 그들은 밤중에 침대에 뛰어들기는커녕 낮에 공부할 때 루이먼드가 제 옆에 앉는 것조차 꺼렸다.
“미안하지만 좀 멀리 떨어져 줄래? 네가 싫은 건 아닌데, 너무 반짝거려서 옆에 있으면 금방 눈이 피곤해져. 난 오늘 적어도 이 책을 100페이지 이상 봐야 하거든. 눈이 금방 피곤해지면 100페이지를 다 못 볼지도 몰라.”
“이러면 옆에 앉아도 될까?”
루이먼드가 로브를 푹 눌러써 머리카락과 얼굴을 감추고 다시 묻자, 그녀는 루이먼드를 위아래로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런다고 네 외모가 완전히 가려지지는 않는데, 촛불보다 눈을 더 피곤하게 만들 정도는 아닌 거 같아.”
비로소 루이먼드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더불어 그녀의 이름이 피오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친한 친구가 되었다.
여전히 공부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루이먼드는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고 싶어졌다.
“이대로 10년 정도만 더 공부하면, 교양학과의 대표 학자가 될 수도 있겠구나.”
지도 학자의 말을 듣고는 10년 뒤 그날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그대로 아무 일 없이 10년이 후루룩 지나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룩센 백작 칼레나의 반란이 일어났다.
바깥일에 신경 쓰지 않는 학자의 집마저도 술렁였다. 노학자들은 이번에야말로 왕조가 바뀔지 모른다며 혀를 찼다.
루이먼드는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덩달아 불안해졌다.
‘제발, 제발 이곳이 무사하게 해 주십시오. 제발, 제발 좀요.’
생전 안 하던 기도까지 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서일까? 학자의 집은 새벽 전투 중에도 무사했다.
새 왕이 된 룩센 백작 칼레나는 학자의 집을 존중해 주었다. 이전 왕실이 했던 것처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도 해 주었다.
루이먼드는 안도했다.
‘이대로 살다가 편안히 늙어 죽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낡은 후드로도 가리지 못한 곧은 턱선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눈물의 감동이 채 사그라들기 전.
새 왕, 아니, 새 황제는 그 믿음을 한 방에 부숴 주었다.
***
쿵. 쿵.
이른 아침, 지진이 났다.
학자들과 루이먼드는 눈을 억지로 비벼 뜨고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야?”
학자들이 웅성댔다.
쿵, 쿵.
땅은 계속 울렸다.
“이상하다, 오늘 지진이 올 리가 없는데.”
지질학자가 머리를 움켜쥐고 괴로워했다.
옆에 서 있던 건축학자는 학자의 집과 담벼락이 이 지진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고민했다.
“어, 어어! 어? 잠깐만. 이건 지, 지진이 아니야. 지진이 아니라고! 저걸 봐!”
해양학자가 화들짝 놀라며 문 쪽을 가리켰다.
학자들이 모두 그쪽을 바라보자,
쾅!
기다렸다는 듯 땅이 흔들렸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큰 진동이었다.
으아악.
공부밖에 모르는 비실이 학자들이 픽픽 쓰러졌다. 그들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학자의 집 정문이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보았다.
해양학자의 말대로였다. 이 지진은 땅속 진원지에서 시작된 지진이 아니었다. 문을 부수고자 들이박는 공성기로 인한 진동이었다.
문이 박살 나고, 거대한 공성기가 위용을 드러냈다.
“허억.”
“우와.”
전술학자와 군병기 제작학자가 그 와중에 입을 쩍 벌리고 감탄했다.
문을 부순 공성기가 제 임무를 다했다는 듯 뒤로 물러나니,
“조, 조금만 더 보여 줘!”
“내가 설계한 거야! 오오, 정말 저걸 구현할 수 있다니. 하, 한 번만 만져 볼 수 있게 해 줘! 가지 마!”
엉금엉금, 공성기를 향해 기어가기까지 했다. 옆에서 같이 굴러다니던 학자들이 얼른 그들을 붙잡았다.
부서진 문 너머로 기사와 병사들이 우수수 쏟아져 들어왔다.
“기병 100, 보병 450? 65?”
수학자들이 그들의 수를 셌다.
그 많은 병력이 양옆으로 쫙 갈라지며 길을 트자, 튼실한 밤색 말을 탄 사내가 걸어 나왔다.
“누구지?”
“잘생겼군.”
“몸도 좋아, 잘 단련한 몸이야.”
학자들은 어지러워 일어나지도 못하면서도 말을 탄 사내가 누군지 궁금해했다. 학자란 본디 호기심 빼면 시체인 족속이니까.
“어억.”
루이먼드는 그들이 모르는 걸 알았다.
학자의 집에 입성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른 학자들이 모르는 걸 그가 알다니.
하지만 그걸 뽐내거나 기뻐할 여유는 없었다. 루이먼드는 그를 알아보자마자 두 손으로 제 목을 감싸 쥐었다.
“이런, 이른 아침부터 과격한 방법으로 인사를 드려 미안하게 됐습니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
“나는 우리 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입니다. 편하게 도미넨트 공작님이라고 불러 주시면 되겠습니다. 매우 공손하게요.”
예의 바른 척하지만,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태도.
“이 바쁜 몸이 왜 여기 왔냐 하면, 우리 폐하께서 여러분이 좀 필요하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학자 여러분. 아니, 우리 폐하의 예비 관료분들.”
말끝마다 ‘우리 폐하, 우리 폐하’거리는 말버릇까지.
루단테는 여덟 번째 삶에서도 여전했다.
‘이번 생엔 저 공작에게 목이 잘리게 되는 건가?’
루이먼드는 곧 닥쳐올 자신의 미래를 떠올려 보았다. 아무튼, 목이 뎅겅.
“예비 관료라니?”
“아니, 그보다 황제?”
“우리가 사는 대륙에 제국이 있었던가?”
학자들은 당황했다.
루단테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우왕좌왕하는 학자들, 아니, 제국의 예비 관료군을 보며 재수 없게 웃었다.
“자세한 건 황궁으로 가서 들으시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병사들이 학자들에게 달려들었다. 병사 한 명당 학자 한 명. 비리비리한 학자들을 장작 들듯 옆구리에 꼈다.
루이먼드 역시 어느 병사의 옆구리에 끼였다. 루이먼드는 감히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반쯤 찬 밀 자루처럼 덜렁덜렁 흔들리며 이동하는데.
“잠깐.”
루단테가 루이먼드를 들고 지나가는 병사에게 손짓했다.
“……!”
루이먼드는 숨을 멈췄다.
루이먼드를 옆구리에 낀 병사가 냉큼 루단테 앞에 섰다.
“은발이군.”
검 끝으로 후드를 걸어 뒤로 넘기니 우수수, 빛나는 은발이 쏟아져 내렸다.
‘젠장. 이번엔 이렇게 죽는 건가?’
루이먼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절로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여러 번 목이 잘려 본 경험상, 최대한 목에 힘을 빼야 금방 끝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이러면 한칼에 못 잘린단 말이야.’
반쯤 잘리고 또 칼질당하는 그 고통은, 당해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루이먼드가 고개를 숙이고 파들파들 떨자, 루단테는 루이먼드의 턱에 검을 가져다 댔다.
루이먼드는 차갑고 날카로운 감촉에 밀려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실눈을 뜨고 루단테를 올려다보았다. 루단테가 짜증을 내고 있었다. 뭔가 질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왜? 뭘?’
의아할 새.
“예쁘군, 기분 나쁘게.”
루단테가 혀를 찼다.
“왜 폐하께서 이걸 원하시는 거지? 그냥, 실수로 죽여 버렸다고 할까?”
루단테가 자연스럽게, 루이먼드의 목젖을 쿡 찔렀다.
검이 박혀 피가 날 정도는 아니고, 그냥 살짝.
하지만 목이었다. 아무리 살짝이어도 목을 찔린 것이었다.
일곱 번쯤 목이 잘려 죽어 본 사람은 그 정도도 감당할 수 없었다.
끄억.
루이먼드는 게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어? 이런. 뭐 이리 약해?”
내가 약한 게 아니라 니가 무식하게 센 거야. 니가 내 목 뎅겅, 자른 게 몇 번인 줄 아냐? 니가 공작이면 다야?
……그래, 다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마저 눈치를 봐야만 하다니. 소심한 자신이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났다.
그 웃음이 겉으로 드러난 걸까?
“어라? 공작님, 이거 웃는데요?”
당황하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이번에도 어이없게 죽는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 취소.
루이먼드는 죽지 않았다. 눈을 뜨니, 그의 앞엔 일렝시아 백작 부인이 아니라 루단테가 서 있었다.
“안녕? 정신이 들어?”
루단테가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진짜 싫다.’
루이먼드는 속이 쓰려 가슴을 움켜쥐었다.
“괜찮아?”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12를 12번 곱한 걸 다시 12번 곱하면 몇인지 말해 봐.”
“정신을 차렸구나. 다행이다, 다행이야.”
학자들이 곁으로 몰려들었으나,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이는 건 오직 눈앞의 재수 없는 면상이요, 들리는 것 또한 그놈의 목소리뿐이었다.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 게 분명해.’
루이먼드는 다시 꼬르륵,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버렸다.
“어? 공작님, 이거 또 기절했는데요!”
“아씨, 바빠 죽겠는데 왜 자꾸 기절하고 난리야?”
루비아나가 한참 북부에서 마수들을 때려잡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