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31)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다행히 루단테도, 일렝시아 백작 부인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근심 가득한 학자들의 얼굴뿐이었다.

‘내 목!’

루이먼드는 깨자마자 목부터 더듬었다. 다행히 아직 뎅겅 당하지 않은 상태였다.

‘살았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루이먼드와 학자들은 도미넨트 공작저의 별실에 모여 있었다. 손발이 묶여 있진 않았으나 다들 안색이 어두웠다.

“어떻게 된 거야?”

“참 빨리도 물어본다.”

피오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학자의 집이 무너졌어. 황제가 다 때려 부쉈대. 그리고 우리를 황실에서 다 고용하겠대. 황실 관리로.”

“황실 관리?”

“학자의 집을 지켜 준다고 했잖아? 그건 왕일 때 했던 약속이고, 지금은 황제니까 지킬 수 없대. 황제로서는 그런 약속 같은 거 안 했다고.”

“……그건 비겁한 거짓말이야.”

“그러니까 말이야. 자, 일단 이거 받아. 아까 나눠 주는 걸, 내가 받아 뒀어.”

피오나는 대신 받아 두었던 루이먼드의 신분패를 건네주었다.

-루이먼드 휀 룩스 아멜 폰 그레이움

겨우 떨쳐 냈던 이름에 다시 매여 버렸다.

돌아온 건 이름만이 아니었다.

“루이먼드! 내 손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움 백작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왔다. 그는 도미넨트 공작에게 정식으로 항의하여 루이먼드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아…….”

루이먼드는 다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차라리 아까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눈을 뜨자마자 그레이움 저택에 불을 질러 버리고 튀어 버렸을 텐데. 이번엔 진짜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레이움 백작은 루이먼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나 홀로 눈물겨운 상봉 장면을 이어 나갔다.

“더 여윈 것 같구나.”

“그러기에 그 험한 곳에 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게냐?”

“내가 네 걱정에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든 날이 없었단다.”

등등.

눈물겨운 표정과 절절한 목소리만 보고 듣노라면 세상에 이렇게 자상한 할아버지가 또 없었다.

눈.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만 아니었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지도.

‘뭐지? 왜 저렇게 보는 거야?’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폭군의 사생아 따위, 나랑 상관없다고 외면해야 하는 거 아닌가?’

폭군이 죽고 새 황제의 시대가 열렸다. 그레이움 백작가는 아직도 잘나가고 있는 듯했고. 그렇다면 폭군의 사생아 따위, 깔끔하게 손절하고 남인 척하는 게 이로울 텐데.

어째서인지 그레이움 백작은 여전히 그를 향한 집착과 탐욕을 가지고 있었다.

절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두 번 기절하기 전,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가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

지난 일곱 번의 삶과 학자의 집에서의 학습이 루이먼드를 이만큼이나 똑똑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똑똑함을 최대한 발휘해도 좀처럼 답을 찾을 수 없었건만, 그레이움 백작이 제 입으로 정답을 말해 주었다.

“루이, 황제를 꼬시거라.”

덜컹덜컹. 마차가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차를 타서 정신없고 멀미도 나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루이먼드는,

“그래, 맞아. 황제라고 했…… 네? 뭐라고요?”

한 박자 늦게 기겁했다.

“새 황제가 아직 결혼을 안 했단다. 양옆에 얼굴 좀 반반한 공작들을 거느리고 있긴 한데, 그래서 아무래도 남자 보는 눈이 아주 높은 것 같아. 웬만한 놈을 들이밀어도 눈 하나 꿈쩍하질 않는구나.”

“그걸 왜, 저에게……”

“황제에게 어울리는 남자는 너뿐이란 소리지, 뭔 말이겠니? 얘야, 전력을 다해 황제를 꼬시거라.”

“…….”

“루이, 황제가 널 취하면 옛 왕실과 결합한다는 정통성도 얻고 미남도 얻고, 일거양득 아니겠니!”

저 입은 정녕 얼굴에 씌울 가죽이 부족해 뚫어 놓은 걸까? 방귀 소리보다도 가치 없는 소리가 줄줄 흘러나오는 걸 보니 입 구멍과 똥구멍이 반대로 달린 게 분명한데.

“설마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건 아니지요? 농담, 이시죠?”

어쨌거나 피가 섞인 친할아버지였다.

저를 왕위 쟁탈전이라는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 했고, 쓸모없어지자 밥이나 축내는 쓰레기 취급하긴 했지만.

첫 번째 삶에서 난잡하게 살 때 눈살을 찌푸리며 말리는 척이라도 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사람이.

“루이, 너라면 할 수 있단다. 내가 힘을 좀 쓰면 황제의 침실에 널 집어넣는 건 일도 아니란다. 물론 거기 들어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응?”

손자에게 이딴 말이나 지껄이면서 징글맞게 웃다니.

‘아니,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건가?’

그러고 보면 그레이움 백작은 원래 이런 작자였던 것도 같았다.

권력을 위해서 딸을 폭군의 침실에 밀어 넣고 사생아 손자를 왕위 쟁탈전에 밀어 넣을 수 있는 속물.

‘탐욕스러운 인간이란 건 알았지만, 설마 내 얼굴이 반반한 것만 믿고 폭군의 사생아인 날 새 황제의 침실에 밀어 넣을 생각을 할 줄이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조금 전,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에게 목젖을 공격당해 두 번이나 기절했던 건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

“루이, 다 널 위해 하는 말이란다. 학자의 집이 파괴되었으니 네가 돌아올 곳이 우리 그레이움 백작가 말고 어디 있겠느냐?”

말을 안 들으면 가문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협박인 걸까?

“우리 가문을 위해서, 또 널 위해서 나는 네게 남자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주려는 거란다.”

그레이움 백작은 황제의 부군 자리를 이미 얻은 듯 당당하게 말했다.

‘아니, 누구 마음대로 준다 만다야?’

끄응. 루이먼드는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했다.

“제가 왕의, 아니, 이젠 폐왕이라고 해야겠지요. 그자의 사생아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어찌 그렇게 말하느냐? 너는 내 딸이 남긴 나의 보석이란다.”

“그렇게 말한다고 제가 폐왕의 사생아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요. 그런데 그 폐왕을 죽인 황제에게 절 가져다 바치겠다고요?”

내 친할아버지라는 작자가 이렇게 멍청한 자였나? 권력에 대한 욕심만 드글드글해서는 눈앞에 불구덩이가 있는지도 모르고 뛰어드는?

‘젠장. 그럼 혼자 뛰어들지, 날 왜 끌어들여?’

황제의 침실에 기어들어 갔다가 도미넨트 공작이나 펠트하르그 공작에게 목을 썩둑 잘리는 자신의 모습이 생생하게 상상되었다.

아직 안 잘린 목이 다 서늘했다.

“황제는 새벽 전투가 끝나자마자 폐왕과 아이너스 왕실의 피를 이은 왕족들을 죽였습니다. 하나 남은 날 가만 놔두겠습니까? 그 자랑스러운 그레이움 백작가에 불똥이 튀지 않을 것 같습니까?”

루이먼드는 절 목이 잘릴 위기에 밀어 넣으려는 그레이움 백작을 노려보며 시니컬하게 말했다.

‘아니, 얘가 왜 이렇게 똑똑해졌대?’

그레이움 백작은 내심 당황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폭군의 충신이었다가 얼른 노선을 바꿔 새 황제로 갈아타 살아남을 정도로 노련한 능구렁이였다. 어린 손자의 투정 따위에 쉬이 흔들리지 않았다.

“걱정 말거라. 폐하께서는 새벽 전투 전에 속세와 모든 인연을 끊고 학자의 집으로 들어간 너의 용기를 높게 사서,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

안 죽이겠다는 말하고 남편으로 삼겠다는 말이 같은 말도 아닌데, 고작 그 말 한마디에 이렇게 자신만만하다고?

루이먼드가 차게 식은 표정을 짓자, 그레이움 백작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들어 보렴. 제국을 선포한 개국 축하연에서의 일이란다.”

황제는 드물게 높은 단상에서 내려와 귀족들 틈에 섞였다. 당연히 세 공작이 황제의 뒤를 따랐다.

귀족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작위를 막론하고 황제에게 꾸역꾸역 달려들었다.

‘폐하, 이제 이 위대한 업적을 물려줄 후사를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쯤 부군을 맞이하시렵니까!’

어느 멍청한 백작이 충성스러운 척하며 외쳤다.

당연하게도 연회장은 단번에 얼어붙었다.

젊은 황제에게 후사를 논하다니. 이는 황제의 심기에 따라 반역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과거 폭군의 치세를 겪었던 아덴 왕국의 귀족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두려움에 질렸다.

모두 겁에 질려 황제의 눈치를 보는데.

‘이런, 이런. 왜 이런 질문이 안 나오나 했지.’

칼레나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헉. 귀족들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후계를 세우는 것 또한 황제의 의무. 나는 그 의무를 소홀히 할 생각이 없네. 다만 적당한 반려자를 찾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칼레나는 뒤따르는 카드릭과 루단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정도 얼굴을 매일 보고 사는데, 내 성에 차는 반려자감을 찾기가 어디 쉽겠나? 안 그렇습니까, 아쉴레앙 공작?’

‘옳으십니다, 자고로 남자는 얼굴이지요.’

루비아나가 무뚝뚝한 얼굴로 맞장구쳤다.

그날의 일은 귀족들에게 새로운 취미를 만들어 주었다. 대륙을 이 잡듯 뒤져 미남이란 미남을 죄다 황제에게 진상해 올리는 취미를.

“루이, 황제의 부군 자리는 바로 네 자리란다!”

그레이움 백작은 취미 생활로 인생 역전을 꿈꾸며 루이먼드를 황제의 침실에 밀어 넣으려는 것이었다.

루이먼드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맛보았다.

하지만 루이먼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흘 뒤.

루이먼드는 자다가 하인들에게 붙들려 곱게 치장당하고 마차에 태워졌고, 그대로 황궁까지 실려 가 황제를 알현해야 했다.

“오호라, 그레이움 백작에게 손자가 있었던가? 아직 세 아들 모두 자식이 없다 들었는데.”

저 높은 곳에 앉은 지고한 존재, 칼레나는 둘을 내려다보며 흥미로워했다.

‘거짓말.’

루이먼드는 루단테가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왜 폐하께서 이걸 원하시는 거지?’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제 막내딸이 남긴 유일한 보석입니다.”

그레이움 백작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답하고는 루이먼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윽.”

루이먼드는 신음을 참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얼굴을 밝히는 - 걸로 의심받는 - 황제에게 루이먼드의 얼굴을 보여 한눈에 반하게 만들겠다는 그레이움 백작의 원대한 계획이었다.

루이먼드는 불경스럽게도 허락 없이 고개를 쳐들어 황제와 눈을 마주쳤다.

“……!”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게, 남자를 밝히는 눈이라고?’

천만에.

저건 잘생긴 남자를 욕심내는 눈이 아니었다. 배부른 사자가 손안에 쥔 토끼를 가지고 노는 눈이지.

‘미친.’

루이먼드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루이, 뭘 하는 게야? 네 미모를 폐하께 자세히 보여 드려야지. 어서!”

그레이움 백작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루이먼드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어찌나 세게 꼬집던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으나, 루이먼드는 절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목덜미가 서늘했다. 차가운 칼날이 닿아 있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목이 뎅겅, 잘릴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이 시선이 굶주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배가 덜 불렀다면.

‘단번에 내 목을 벴겠지?’

루이먼드는 황제를 알현하는 내내 부들부들 떨었다.

황제는 겁에 질린 루이먼드를 너그러이 내려다봤다. 감히 허락 없이 고개를 든 것도 따로 책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

그녀는 루이먼드에게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움 백작이 루이먼드를 바치겠다는 식으로 말해도 한 귀로 듣고 흘리는 식이었다.

짧은 알현 시간이 끝나자, 낙담한 그레이움 백작은 얼어붙은 루이먼드를 질질 끌고 나갔다.

그 뒤에도 그레이움 백작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루이먼드에게 황제를 꼬시라고 압박했다. 루이먼드를 황제의 침실에 밀어 넣을 계획도 세웠다.

루이먼드는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차라리 굶어 죽겠다고 단식 선언까지 하며 두어 달 동안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버텼다.

그건 큰 문제였다.

루이먼드는 학자의 집 출신 학자였다. 황제는 학자의 집 출신 학자들을 황실 관리로 임명하겠다고 명령했다.

그런데 루이먼드는 두 달 동안 황실에 출근하지 않았다. 이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 곧 반역이었다.

결국, 그레이움 백작은 백기를 들었다. 루이먼드는 절대 널 황제의 침실에 밀어 넣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고야 문밖으로 나왔다.

그레이움 백작은 맹세한 대로 루이먼드에게 더는 황제를 꼬시라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오딜 후작가와의 혼사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루이먼드는 그 혼사가 뭘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는 더 이상 글자도 모르는 멍청한 루이먼드가 아니었다.

‘날 황제의 부군으로 만들지 못할 바엔 황제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건가?’

반역이었다.

루이먼드를 황실에 출근시키지 않는 반역 말고 다른 의미의 반역.

‘……아무래도, 이번 생도 망한 거 같아.’

루이먼드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와중에도 그레이움 백작의 멱살을 쥐고 이렇게 따져 묻고 싶었다.

‘황제가 이걸 모를 리 없잖아!’

루이먼드는 알현실에서 봤던 황제의 눈빛을 떠올렸다. 지금 당장 먹고 싶진 않은 먹이를 보듯 바라보던 그 눈빛이라니.

절 보며 얼굴을 붉히는 리사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도망쳐야 해.’

지난 일곱 번의 삶에서도 늘 했던 생각이었다. 늘 실패해서 그렇지.

황제는 역사상 유례없는 똑똑이였다. 폭군을 죽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뚝딱뚝딱 제국을 세우고 통치 체제를 안정시켰다.

그녀의 제국에서 도망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루이먼드는 지난 일곱 번의 삶에서 충분히 경험했다.

‘적어도 이 반란군의 소굴에서만이라도 벗어나야 해. 하지만 어떻게?’

‘제국에서 도망친다.’가 아니라 일단 ‘이 반역 소굴을 벗어난다.’로 목표를 축소해도, 상황은 절망스러울 정도로 루이먼드에게 불리했다.

루이먼드는 혈육에 대한 정 때문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해 그레이움 백작을 뜯어말렸다. 하지만 백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루이먼드보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겁쟁이가 됐다고 꾸짖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 루이먼드는 결국,

“그래, 결혼. 결혼이야!”

제정신이라면 절대 고르지 않을 방법을 택했다. 주변에서 하도 결혼 결혼 노래를 부르니 생각이 그쪽으로 튀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누구랑?”

루이먼드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제 신붓감의 조건을 따져 보았다.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는 사람. 반란의 한가운데에서 ‘루이먼드 복권왕 만세’를 외치는 그레이움 백작가와 오딜 후작가로부터 자신을 빼낼 수 있는 미혼의 여성.

덤으로, 펠트하르그 공작과 도미넨트 공작으로부터 자신의 목을 지켜 줄 수도 있을 만큼 강해야 했다.

그런 사람이 이 제국에 존재할 리 있나 싶지만, 놀랍게도 한 명 있었다.

제국을 지탱하는 세 공작 중 하나이며 황제의 언니인 사람.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독립적인 군사 지휘권을 부여받고 북부를 다스리는 최고위 귀족.

아쉴레앙 공작.

조금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했다면,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건지 깨달았을 것이다.

폭군의 사생아 주제에 그 폭군을 죽인 황제의 언니와 결혼하려 하다니?

하지만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루이먼드에겐 그런 이성적인 판단을 할 여유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집요하게 루비아나를 쫓다 끝내, 그녀에게 이렇게 외치고야 말았던 것이다.

“겨, 결혼해 주세요.”

“뭐?”

“아니, 결혼, 결혼합시다. 나랑 해요, 그 결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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