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31)

4. 결혼의 이유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남자에게 청혼을 받았다.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애절하고 절절한.

감격스럽거나 놀랍거나, 하다못해 당황하는 모습이라도 보이는 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겠지마는.

루비아나는 딱히 당황스럽거나 놀랍거나 감격스럽지 않았다. 의외성을 노리고 어이없어하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고.

그저, 루이먼드에게 잡힌 팔을 떨떠름하게 내려다보았다.

덥석 팔을 잡혔다. 루비아나에겐 난데없는 청혼보다 이게 더 충격적이었다.

‘전혀 경계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어.’

그렇다는 건 루이먼드가 최강의 암살자라거나, 토끼나 다람쥐만도 못한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인 듯했다.

이런 토끼나 다람쥐만도 못한 인간이 있다니.

‘신기하네.’

루비아나는 새삼 루이먼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얼마나 허약하기에 그런 건가 싶었는데, 그리 허약한 것 같지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봐야 할 정도로 키가 컸고, 말랐지만 골격이 탄탄하고 뼈가 굵었다.

‘잘 먹이고 잘 재우고 훈련 좀 잘 시키면, 쓸 만하겠는데.’

아무튼, 신기한 사내였다.

루비아나는 그렇게 루이먼드를 훑어보느라 그의 간절한 시선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

“아니, 잘못 들은 거 같아서.”

루비아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민망해서 그런 거였는데, 그녀에 대한 흉악한 헛소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보이는 듯했다.

‘네 허튼 말을 한 번은 못 들은 척해 주마. 또 그딴 말을 지껄인다면 네 머리통 이 부위를 화살로 뚫어 주지. 칼로 박아 줄 수도 있고.’

루이먼드라고 다르지 않은 듯했다.

“그, 그게…….”

겁먹어 머뭇대는 루이먼드의 모습은 여인에게 청혼하는 남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설마 결혼하자고 했겠어? 잘못 들은 거겠지.

“아니,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무슨 말이었는지 모르지만, 귀찮을 것 같으니까 못 들은 척하자.

루비아나는 머뭇대는 루이먼드에게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실례했습니다. 아까 오딜 후작 영애에게 말한 것처럼, 제게 불만이 있다면 펠트하르그 공작가로 연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마무리 짓고 산뜻하게 돌아서려는데 루이먼드가 팔을 놔주지 않았다. 붙잡는 힘이 꽤 다부졌다. 공격력은 없는데 힘은 세다니. 재미있는 반전이었다.

“가, 가지 마십시오. 아직 제 청혼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뭘 답해야 하는 겁니까?”

역시나 ‘청혼’이라는 단어는 흘려들은 루비아나가 물었다.

“결혼 말입니다. 저는 방금, 공작님께 청혼했습니다.”

“뭘 했다고요?”

“……?”

“청혼이요. 청혼!”

“……!”

루비아나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그냥,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으니까 자신도 모르게 그만 그렇게 돼 버린 건데.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화를 낸다고 멋대로 해석하고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알아요, 놀라셨지요. 당황스러우실 겁니다.”

“예, 뭐. 그……”

렇습니다만, 이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말할 틈을 주질 않았다.

“절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절 알든 모르든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겠지요. 네, 저도 제가 왜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기…….”

“아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러고 있는 거겠지요. 더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뭐……”

“딱 3년. 3년만 저와 결혼 생활을 유지해 주십시오.”

“그게 무……”

“그 뒤에 이혼해 달라고 하신다면 기꺼이 이혼서에 도장을 찍겠습니다. 아니, 아예 결혼 전에 계약서를 적어도 좋겠지요. 어차피 공작님께서는 지금 결혼할 분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신께 한 ‘피의 맹세’ 때문에요.”

“……!”

순간, 루비아나의 눈빛이 돌변했다.

“잠깐. 잠깐만……”

그녀는 급히 루이먼드를 제지했지만, 루이먼드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하지만 결혼 상대가 쉽게 나타나지 않아 고민이시지요? 장담하건대 그 고민은 앞으로 쭈욱- 이어질 겁니다. 결혼 상대를 찾기 쉽지 않으실 테니, 절 받아 주십시오.”

숨 한 번 쉬지 않고 줄줄 쏟아 낸 길고 멋대가리 없는 청혼이 비로소 끝났다.

허억, 허억. 루이먼드는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없는 물이라도 한 잔 만들어서 건네주고 수고했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게 만드는 모습이었으나, 루비아나는 홀리지 않았다.

“내가 신께 ‘피의 맹세’를 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차가운 목소리가 헉, 헉 거친 숨소리를 갈랐다.

피의 맹세.

그건 칼레나와 루비아나, 그리고 동석했던 화공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루비아나 본인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고, 칼레나 또한 그러할 터였다.

그러면 남은 건 화공뿐인데.

칼레나의 업적을 기록하기 위해 따라다니던 화공은 귀머거리에 벙어리였다. 칼레나에게 충성을 맹세한 정직한 사람이었고.

그가 함부로 소문을 내고 다녔을 리 없다.

‘그럼 누가?’

루비아나의 녹색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피의 맹세가 세간에 알려지는 건 전혀 상관없었다. 하지만 황제 주변의 정보가 폭군의 사생아에게까지 흘러드는 건, 무척 상관있는 일이었다.

주변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루이먼드는 살갗이 따끔따끔하게 아파 오는 걸 느꼈다.

이전에 목을 뎅겅 잘리기 전 여러 번 겪어 본 적 있는 느낌이었다. 살기.

‘아, 지금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건가?’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적당한 변명거리가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아, 그것이…….”

“…….”

루이먼드를 바라보는 루비아나의 눈빛은 더욱 싸늘해졌다. 그걸 보다 못한 루이먼드는 생긋, 필사의 영업용 눈웃음을 선보이고야 말았다.

“비, 비밀입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상황이 급해지니 첫 번째 삶에서 곧잘 썼던 기술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다들 어쩔 수 없다는 듯 넘어가 주었건만.

스릉.

루비아나는 바로 검을 뽑아 루이먼드의 목을 겨눴다.

“……!”

“그 비밀은, 그대의 목을 자른 후 내가 따로 알아보도록 하지.”

귀에 닿는 목소리는 목에 닿은 검보다 싸늘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만약 자신 혼자만의 일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황제의 신변과도 관련 있는 일이었다.

검 끝이 루이먼드의 목젖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한 번 더 주지. 말해라, 누구냐?”

루비아나가 물었다.

“저는, 그저…….”

루이먼드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도미넨트 공작에게 세 번. 펠트하르그 공작에게 네 번.

이번에 도미넨트 공작에게 죽어 두 공작에게 똑같이 네 번씩 죽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생뚱맞게 아쉴레앙 공작에게 죽게 됐다.

트리플 크라운!

기어이 세 공작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건가?

그동안 자신을 한 번도 안 죽인 아쉴레앙 공작에게 혼자 내적 친밀감을 느꼈던 걸 후회할 따름이었다.

아쉴레앙 공작, 당신도 똑같아. 툭하면 남의 목이나 자를 생각부터 하는 거.

‘죽기 싫다고.’

두려움, 무력감, 억울함 따위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루이먼드가 눈을 내리깔자,

또르륵.

뺨을 타고 내린 눈물이 검에 떨어졌다.

그 처연한 아름다움은 냉혈한 북부의 공작, 루비아나의 무심한 손길마저 잠시 멈칫하게 했다.

서럽게 우는 루이먼드를 보고 있자니, 이대로 죽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쟁터에서 어떤 포로를 봐도 이런 느낌은 안 들었는데.

아무튼, 잘생기고 볼 일이었다.

“왜 그렇게 우는 거지?”

“……억울, 해서요.”

“뭐가?”

“이렇게 죽는 게요.”

“죽는 게 싫은가?”

“죽는 게 좋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어차피 사람은 죽어.”

“대부분은 곱게 늙어 죽지요. 저도 그렇게 죽고 싶을 뿐입니다. 편안히 별 탈 없이, 평범하게 살다가 나이 들어 침대에 누운 채 잠들듯 편히 죽는 죽음이요. 젠장, 이번에는 진짜 그렇게 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씨,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거야? 루이먼드는 옷자락으로 눈을 거세게 문질렀다.

말투나 행동이 그리 우아해 보이진 않았다. 주인이 안 보는 곳에서 투덜대는 하인 같달까.

‘이상해.’

왕의 사생아였다. 어머니는 유서 깊은 백작가의 막내딸이었고.

물집 하나 잡히지 않은 고운 손을 보건대 연필 말고 무거운 건 들어 본 적도 없는 듯한데. 어찌 이리 자연스럽게 하인같이 굴 수 있는 걸까?

세상 물정 모르는 학자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다시없을 바람둥이같이 굴었다. 그도 모자라 이제는 평생 허드렛일이나 하고 살았던 하인처럼 굴고 있었다.

‘이상한 자다. 종잡을 수 없어.’

목을 겨눴던 검이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루비아나는 검 끝으로 루이먼드의 어깨를 건드렸다.

루이먼드가 파드득, 떨며 루비아나와 눈을 마주쳤다.

겁에 질린 젖은 눈이 애처롭게 반짝였다. 덕분에 목을 자르고 싶은 마음이 살짝 가라앉았다.

너무 예쁜 꽃은 오래 두고 보고 싶어서 꺾지 않고 놔두는 기분이랄까?

칼레나라면 단번에 꺾어 제 어깨를 장식했겠지만.

“그렇게 살고 싶다면 솔직하게 말해.”

“살려, 주실 겁니까?”

“나를 이해시킨다면.”

“…….”

“마지막 기회다. 내가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로 완벽하게 거짓말을 하든가, 그러지 못하겠다면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어깨에 걸친 검은 언제든 그의 목을 그을 수 있었다. 그걸 루비아나도 알고 루이먼드도 잘 알았다.

“내가 신께 피의 맹세를 한 걸 어떻게 알았지?”

“그건…….”

루이먼드는 아직 적당한 변명을 떠올리지 못한 상태였다.

‘어쩌지?’

잠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문득, 지도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72개의 길이 네게 답이 아니기에 우리는 73번째 길을 발견했지. 학문이란 그런 것이란다. 삶도 그런 것이 아니겠니? 무엇이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끝까지 매달리거라.’

덩달아 그레이움 백작의 야비한 얼굴이 생각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그래, 이거야!’

루이먼드는 눈을 번쩍 떴다.

“제 할아버지, 그레이움 백작이 감히 반역을 꿈꾸고 있습니다!”

제73번째의 길. 그것은 그레이움 백작에게 누명을 씌우는 길이었다.

어차피 지은 죄가 많을 텐데, 거기에 이런 거 하나 더한다고 티가 나겠는가? 루이먼드는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아아.”

루비아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미 알고 있는 걸 말해 주니 놀랍진 않았다. 다만 좀 의외긴 했다.

‘설마 그레이움 백작이 반역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말을 그레이움 백작의 손자에게 듣게 될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래서?”

“그레이움 백작은 황제 폐하의 곁에서 얼쩡거리며 정보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우연히, 지나가는 말로 피의 계약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을 제 할아버지, 그레이움 백작이 알게 되었었거든요.”

“으음.”

“폐하께서 언제 어디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도 우연히 얻어들은 거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알게 된 겁니다.”

황제 주변을 맴돌며 정보를 모은다라.

‘그레이움 백작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긴 하지.’

제법 그럴듯했다.

‘레나가 그날의 일을 쉽게 말하고 다닐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지.’

황제가, 그녀의 동생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서 문제지.

‘거짓말을 하고 있군.’

루비아나는 감히 제 앞에서, 칼레나를 운운하며 잔꾀를 부리는 미인을 보았다.

“그렇게 그레이움 백작의 귀에 들어갔단 말이지?”

속아 주는 척하니, 루이먼드는 대번 얼굴이 환해졌다.

“그, 그럼!”

당장 결혼 승낙을 받은 것처럼 굴었다.

간식을 빼앗겼다 되돌려 받은 개 같아 보여서, 루비아나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잠깐.”

“예?”

“아직 이해 안 가는 게 있는데.”

“뭐, 뭐가 또……?”

주인은 간식을 준 적도 없는데, 멋대로 받았다 착각했던 개가 또 간식을 빼앗겼다는 듯 울상 지었다.

없는 간식도 만들어 주고 싶게 만드는 모습이었으나, 루비아나는 그의 어깨에서 검을 치우지 않았다.

“나에게 청혼한 속셈이 뭐지?”

“그건…….”

“그건?”

“……살기 위해서입니다.”

“살기 위해서?”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그레이움 백작이 감히 황제 폐하께 반역을 저지르려 합니다. 그 구심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저 아니겠습니까?”

루이먼드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히 말했다.

그래도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까지 숨길 순 없었다. 그걸 본 루비아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는 평생 학자의 집에서 살고 죽으려 했던 학자입니다. 또한 지금은 황제 폐하께 녹봉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 황실 관리입니다. 이미 멸망해 버린 나라의 왕위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황제 폐하께 충성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이 반역의 구렁텅이에서 도망치고자……”

“나에게 청혼을 했다?”

루비아나가 그의 말을 받았다.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사랑하지 않는데 청혼했다는 말을 듣고도 실망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더없이 그녀다웠다.

루이먼드 역시 감히 널 사랑하지 않는 주제에 청혼해 미안하다는 표정 따윈 짓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 그런 게 통할 리 없잖아.’

첫눈에 반했다느니,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을 준비 안 해 온 것은 아니나 아까 목에 검이 닿았을 때 깔끔히 버려 버렸다. 그리고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저를 바라보는 무감정한 녹색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몇 번의 삶을 반복해도 변치 않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그를 바라보는 여인들의 눈빛이었다.

굳이 뭘 할 필요도 없었다. 그윽하게 바라만 봐도 알아서 몸을 던졌고 사랑을 속삭였다.

진심이든, 그를 한번 가지고 놀려는 속셈이든, 어쨌든 그를 욕망했다.

그러지 않는 여자는 이 세상에 딱 둘뿐이었다. 황제 칼레나와 아쉴레앙 공작 루비아나.

그렇기에 루이먼드는 사랑 같은 감정적인 면에 호소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공작님께서 신께 어떤 맹세를 했는지 대략 알고 있습니다. 남편이 필요하신 거지요.”

그녀의 필요에 저를 끼워 맞추고자 했다.

“음.”

루비아나는 맞는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남편이 아니라 아이긴 하지만. 아무튼, 남편을 얻으면 해결될 일이니까.

“제가 그 남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적어도 3년은 저와 결혼 관계를 유지해 주십시오. 원하신다면 그 뒤에 바로 이혼해 드리겠습니다.”

루이먼드는 계약 결혼을 제안했다.

“내가 왜?”

루비아나는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씀드렸다시피 공작님께서는……”

“그래, 나는 결혼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지.”

그래서 하녀장과 황제에게 휘둘리며, 수도의 온갖 행사에 끌려다니고 있었다.

벌써 지쳐서, 아무나 적당한 놈이 나타나면 바로 붙잡아다 결혼하자는 생각을 할 뻔도 했지만.

“하지만 결혼 상대가 반드시 당신이어야 할 이유는 없어. 세상에 널린 게 남잔데 내가 왜 하필이면 반역 사건에 휘말려 있는 당신을 남편으로 삼아야 하는 거지?”

그를 둘러싼 조건이 너무 안 좋았다. 특히나 폭군의 사생아라는 것.

“그건…….”

루이먼드는 머뭇거렸다.

답을 알지만 차마 말할 수 없는 자의 답답함이란.

‘세상에 널린 게 남자지만 당신은 앞으로 몇 년 뒤까지 결혼을 못 한다고. 남편감들이 죄다 당신의 악명에 무서워 도망치거나…….’

루이먼드는 일곱 번째 삶에서 제 목을 자르던 펠트하르그 공작, 카드릭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그때 당시에, ‘나의 루비’라고 했다.

여장 남자를 좋아하는 변태 귀족이 펠트하르그 공작에게 루비 보석을 빌렸다가 안 돌려줘서 그 사달이 났을 리는 없으니.

분명 그 루비란 루이먼드의 눈앞에 서 있는 이 루비일 것이다.

‘펠트하르그 공작이 뒤에서 몰래 죽여 버릴 거라고.’

이렇게 말할 순 없지 않은가?

앞서 일곱 번이나 삶을 반복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을뿐더러,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속일 수도 없었다.

그는 도합 일곱 번의 삶을 반복해서 살았으나 항상 일찍 뒈져서 미래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다.

좀 오래 살았을 때는 제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국 내 사정을 잘 알지 못했고.

그러니 다른 이유를 대야 했다.

아쉴레앙 공작, 루비아나가 폭군의 사생아이자 반역의 꽃이 될 그를 남편으로 맞이하고 싶어질 매력적인 조건을.

“……반역, 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누가 반역에 가담했는지. 그러면!”

“그건 조사하면 알 수 있는 내용이고.”

“내부자인 저의 고발보다 정확하지는 않을 겁니다.”

“또 다른 내부 고발자를 찾으면 되겠지.”

“……조, 조신하고 성실하게 결혼 생활에 임하겠습니다. 나대지 않고 열심히 내조하고, 시키는 일은 뭐든 다 하고……”

“그것 역시 다른 남편을 얻어도 해결될 일이고.”

누가 감히 아쉴레앙 공작과 결혼해서, 조신하고 성실하게 살려 하지 않겠는가? 목숨이 아홉 개나 붙어 있는 고양이 인간이 아닌 이상.

‘그건, 그래.’

루이먼드 역시 바로 이해했다.

“…….”

“더 없나?”

어깨 끝에 걸쳐져 있던 검이 목에 바싹 가까워졌다.

“자, 잠깐만요!”

“그래.”

루비아나는 기꺼이 기다려 주었다. 엷게 웃기까지 했다.

루이먼드는 그 모습을 보며, 그레이움 백작에게 끌려가 억지로 알현해야 했던 황제를 떠올렸다. 어쩐지 비슷했다.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 걸까?

‘어쩔 수 없네.’

루이먼드는 자신이 가진 비장의 한 수를 떠올렸다.

‘이 말을 들으면 아쉴레앙 공작도 어쩔 수 없이, 나와 결혼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확신했기에,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다.

“절대, 절대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사랑을 원하지 않으시잖아요. 그저 완벽한, 완벽한 남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뭐?”

“오직 피의 맹세를 지키기 위한 계약 결혼을 제안합니다. 공작님께서 원하시는 게 이런 거지 않습니까?”

이건 두 번째 삶에서 감명 깊게 읽었던 모든 연애 소설에서 여주인공이 초반에 남주인공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남주인공 중 여주인공과의 계약 결혼을 거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어떠냐? 나의 필살의 계약 결혼 조건이!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를 마주 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하여 루비아나는 계약 결혼 성립 100% 효과를 자랑하는 마법 주문 같은 말을 듣고는, 바로 계약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

기는 개뿔.

‘뭔 개소리야?’

눈앞의 미인이 제정신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결혼 전엔 어쨌든 일단 결혼했으면 아내에게 충실해야지. 감히 딴 여자랑 놀아나겠다고 대놓고 말해?’

앞서 여러 번 말했지만, 루비아나는 잘생기고 참한 남편감을 찾고 있었다.

잘생김은 예선이요, 참함은 본선이었다.

그런데 예선을 만점으로 통과한 자칭 남편감이 본선의 룰을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폭군의 사생아라 심히 불리하거늘.

‘설마 날 조롱하는 건가?’

사생아라도 폭군의 자식은 자식. 제 아비를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는, 이런 방법으로라도 모욕을 줘서 복수하려는 건 아닐까?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잘생긴 얼굴에 비열한 기색이 조금이라도 비치면 바로 목을 뎅겅, 해 버릴 생각이었는데.

‘그건 아닌 거 같긴 한데.’

아무리 봐도 토끼만도 못하게 약해 보였다. 황제의 언니인 아쉴레앙 공작에게 사기 결혼, 계약 결혼을 빙자한 불륜 조장을 내밀만 한 사람은 못 되어 보였다.

‘지금도 저렇게 떨고 있는데, 진짜 결혼이라도 하고 나면 내가 무서워서 바람피울 수나 있으려나?’

그런 주제에 무슨 생각으로 불륜하겠다는 말을 비장의 카드인 양 꺼내 놓는 건지, 원.

“결혼 후에 아내 말고 딴 여자를 마음에 담을 생각인 건가?”

“아니요.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저 같은 사생아를 만들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루이먼드는 가당치 않다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이런 쪽으로는 꽤 고지식해 보였다.

그렇게 고지식해서 첫 번째 삶에서 그렇게 놀아난 거냐고 묻는다면 나름 할 말은 있었다.

‘한 번도 내가 먼저 꼬신 적은 없어. 그리고 아무리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피임은 철저히 했다고.’

자신 같은 사생아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아, 피임하고 외도를 하시겠다?”

“아니요. 저는 오직 제 아내에게 충실할 겁니다. 제 인생에 제 아내 말고 다른 여자는 없습니다.”

루이먼드는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상대방의 눈치를 살펴 만들어 낸 답이 아니라 평소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던 생각인 게 분명해 보였다.

일단 결혼 기간 중엔 아내에게만 충실하겠다는 조신한 자세는 마음에 들었다. 그와 별개로, 루이먼드의 제안은 영 별로였다.

‘대놓고 바람을 피우겠다는 건 아니라는 건데. 그러면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는 건가?’

결혼해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겠다. 딱 3년만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3년 뒤 깨끗하게 이혼해 주겠다.

루이먼드가 말한 조건들을 추려서 합쳐 보면 자연히 유추되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레이움 백작의 반대가 심한가 보지? 작위가 낮다거나 아예 신분이 귀족이 아니라거나. 그래서 일단 내 그늘로 들어와 급한 비를 피한 뒤 그 사랑을 이루겠다는 계획인가?’

그런 거라면, 저렇게 필사적인 걸 이해할 것도 같았다.

‘3년 기한의 계약 결혼이라.’

비로소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루이먼드의 돼먹지 않은 계약 결혼 제안보다는, 아무래도 루이먼드의 미모에 마음이 갔다.

‘폭군의 사생아라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는데. 뭐, 3년 뒤 이혼할 거라면 상관없겠지?’

상관있거든! 아주 상관있거든! 저 멀리서 카드릭이 목 놓아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루비아나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한번 결혼하면 끝이지. 그렇게 생각했던지라 유통 기한 있는 결혼은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더랬다.

막상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 않았다.

피의 맹세는 첫 아이를 신전에 스무 해 동안 바쳐 신께 봉사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만들겠다거나 평생 한 남자만을 남편으로 삼겠다거나 결혼 생활을 죽는 날까지 유지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하여 대를 이어 황제와 제국에게 충성할 후계자를 한 명 더 낳고 싶은 것이었고.

애만 둘 정도 얻을 수 있다면야, 3년 결혼 생활 후 깔끔히 이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3년 정도면 애 둘 정도는 낳을 수 있겠지?’

혹시나 루이먼드의 씨가 부실해 애를 하나밖에 못 얻는다고 해도 3년 뒤에 다른 실한 놈을 고르면 될 일이었다.

애만 얻을 수 있다면야 3년 뒤 깔끔하게 이혼해도 전혀 상관없었다. 애들 옆에 아버지가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부족함 없이 기를 능력이 있으니까.

루비아나는 평생 수도에 머물 사람이 아니었다.

북부 장벽 너머의 마수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불어날 터였다. 주제도 모르고 다시 장벽을 넘어오려고 할 것이고.

그러면 그녀는 다시 북부로 가서 장벽 너머의 마수들을 해치워야 했다.

아이 하나는 수도의 신전에 맡기면 황제가 어련히 잘 돌봐 줄 테고, 마수들이 잠잠할 때 간간이 보러 오면 된다.

둘째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북부에 데려가 기르면 금방 적응하겠지. 잘 훈련하면 북부의 장벽을 물려받을 정도는 될 것이다.

두 아이 다 옆에 아버지가 없다고 외로워할 틈 없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고로 피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결혼해야 하는 루비아나의 사정과 3년의 계약 결혼을 원하는 루이먼드의 제안은 공존이 가능했다.

‘계속 남편감 찾아다니는 것도 귀찮고.’

루이먼드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하는 쪽으로 슬슬 마음이 쏠렸다.

‘뭐, 저 정도면 내 조건에도 맞는 것 같고.’

루비아나는 제가 생각하는 남편의 조건을 떠올려 보았다. 잘생기고 적당히 멍청하고, 아랫도리가 실한 남자.

거기에 루이먼드를 대입해 보았다.

일단 외모는 합격. 따질 것도 없이 합격이었다. 이렇게 잘생긴 걸 황제에게 안 바치고 제가 꿀꺽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레나한테는 펠트하르그 공작과 도미넨트 공작이 있으니까.’

다른 귀족들도 대륙을 탈탈 털어 미남이란 미남을 모조리 황제에게 진상하고 있다고 하니, 루이먼드 하나쯤 빼먹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래, 괜찮을 거야.’

루비아나는 어릴 적 칼레나에게 레이스, 예쁜 새 조각, 잘 세공된 단검 등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을 빼앗겼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은 적당히 멍청한가 여부.

이 또한 고민할 여지 없이 합격점이었다.

눈앞의 미인은 아주 훌륭한 멍청이였다. 어떻게 학자의 집 소속이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공부 머리랑은 다른가 보지.’

루비아나는 가볍게 생각하고 넘겼다.

이제 단 하나의 조건만이 남았다. 튼실한 아랫도리.

루비아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루이먼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비리비리해 보이지만 은근 어깨도 넓고 흉통도 넓고 뼈도 굵고.

곱상한 외모와 달리 허벅지 역시 제법 튼실했다.

전쟁터에서 부하들이 떠들어 대던 말이 떠올랐다. 남자는 무조건 허벅지라고. 하체가 부실하면 밤에 힘을 못 쓴다고.

그 말에 비추어 보자면, 루이먼드는 밤에 제법 힘 좀 쓸 확률이 높았다.

‘그럼 저기도 제법 튼실하려나?’

루비아나의 눈은 자연히 루이먼드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은 매우 진지하고 강렬했다. 남편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왜, 왜 여길 그렇게 바라보는 거야?’

루이먼드는 그녀의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두 손을 모아 다리 사이를 가렸다.

얼굴이 화끈해지고 괜히 울고 싶어졌다.

이제까지 희롱당하고 추파 받았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윽한 욕망이 느껴진다기보다는, 종마로서 가격이 매겨지는 느낌이랄까.

“저, 저기…… 공작님.”

의도한 건 아닌데 목소리가 좀 떨렸다.

수도 안 여자란 여자는 다 후리고 다녔을 것처럼 생겨서는, 좀 바라봤다고 부끄러워하다니.

‘이래서 사람은 역시 첫인상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거구나.’

루비아나는 반성하며 고개를 들었다.

루이먼드는 그녀의 시선이 다리 사이에서 떨어진 것에 안도했다.

안도하는 표정이 너무 진지했던지라 루비아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좋습니다. 경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루이먼드의 어깨에 얹었던 검을 회수했다.

루이먼드는 일곱 번 죽고 여덟 번째 죽을 기회를 넘긴 사람처럼 격하게 기뻐했다.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따르겠습니다.”

루이먼드는 촉촉하게 젖은 눈을 내리깔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정도로 각오가 되어 있다니, 말하기 쉽겠군요. 사흘 뒤 밤, 내 저택으로 오십시오. 경의 생식 능력을 확인해 봅시다.”

“예. 당연…… 예?”

무심코 대답하던 루이먼드는 한 박자 늦게 루비아나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

입이 쩍 벌어졌다.

“저런, 턱 빠지면 어쩌려고.”

루비아나는 상냥하게도 루이먼드의 턱을 직접 닫아 주었다.

딱.

이가 맞물리기 무섭게 몽글몽글하고 분홍분홍한 감정이 후다닥 달아났다. ‘아, 미안. 우리가 잘못 찾아왔네요. 여긴 우리가 오면 안 될 곳이었어요!’

“무, 무슨 능력 말입니까?”

루이먼드가 버럭 소리 질렀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갰다.

“내가 신께 했던 맹세를 알고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결혼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 결혼은 맹세를 이루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생각했다.

‘내 피의 맹세가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까지는 모르는 게 확실하군. 어디서 어떻게 주워들었을까?’

그리고 그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나는 아이가 필요합니다. 둘 이상.”

‘첫 아이를 신께 바친다.’가 맹세의 내용이었으나 그런 디테일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딱히 말해 줘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말을 길게 하는 게 귀찮기도 하고.

“그러니까 경은 3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내가 적어도 두 명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합니다.”

“아이? 그것도 둘이나 말입니까?”

“그게 내 결혼 조건입니다. 그러니 나와의 결혼 생활이 경이 생각하는 결혼 생활과는 좀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나와 결혼해서 애를 둘이나 낳는 게 꺼려질 수도 있지.’

루비아나는 나름 루이먼드를 배려해서 말해 준 것이었다. 사흘 말미를 준 것도 고민할 시간을 준 것이었고.

‘나 역시 좀 알아볼 것이 있고.’

남편감의 조건을 모두 만족한다 하더라도, 폭군의 사생아와의 결혼을 덥석 받아들이는 건 매우 경솔한 일이었다.

적어도 그를 가지고 뭔가 꾸미려는 황제에겐 미리 말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반란 세력 일망타진하려는 건 알겠는데, 좀 불쌍해서 말이야. 딱 3년만 데리고 살면 안 될까?’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그레이움 백작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그러다 못해 제게 감히 계약 결혼을 제안하는 그 배포와 용기를 높게 사는바, 이런 수고로움을 감수해 주는 것이었다.

‘와, 내가 이렇게 능동적인 인간이었던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진행하려 하다니. 루비아나는 스스로 감탄했다.

황제나 펠트하르그 공작 카드릭도 못 해낸 것을 이 눈앞의 미인이 해낸 것이었다. 역시 남자는 잘생기고 볼 일이었다.

“그럼 사흘 뒤, 뵙지요.”

루비아나는 검을 검집에 밀어 넣으며 돌아섰다.

하필이면 그때.

찬 바람이 불어와 루이먼드를 나풀나풀 흔들었다.

“에취.”

루이먼드는 크게 기침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찬 바람이 스미는 정원. 옷차림이 엉망이 되어 처연하게 서 있는 미인.

루비아나는 무심코 어깨에 손을 댔다. 망토라도 둘러 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망토를 벗기 전, 손이 멈췄다.

‘곤란해.’

지금 그녀의 망토에는 아쉴레앙 가문의 문장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루이먼드가 이 망토를 두르고 돌아다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킨다면, 둘의 관계가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터였다.

‘그건 곤란하지.’

루비아나는 깔끔하게 물러섰다.

“시종을 이쪽으로 보내겠습니다.”

“자, 잠깐만……”

등 뒤에서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렸으나 다시 돌아보진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