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31)

***

그리고 사흘 뒤.

“역시 안 오네.”

루비아나는 홀로 서재에 앉아 길게 기지개 켰다.

문지기에게 웬 남자가 저를 찾아오거든 막지 말고 들여보내라고 말해 두었다.

시녀장에게도 말해 저택 내 사용인들을 일찍이 재웠고, 헤매지 말라고 서재에 불을 환히 밝혀 두었다.

그렇게 밤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끝내 놓고는, 기다리고 있었다. 겸사겸사 북부 장벽에서 보내온 보고서도 확인하고, 황궁에서 보내온 업무도 처리했고.

마지막 보고서를 확인하고 나니, 길었던 양초가 꽤 짧아져 있었다. 그만큼 밤이 깊었건만 손님은 오지 않았다.

오지 않으리라 예상했건만, 정말로 오지 않으니 괜히 서운했다.

“그렇게 절실해 보였는데, 아무래도 애를 둘 이상 낳아야 한다는 조건이 많이 셌나?”

놓친 고기가 더 아쉬워지는 법이라더니. 괜찮은 남편감을 놓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대로 루이먼드가 오지 않으면, 루비아나는 내일부터 또 시녀장이 골라 주는 사교계 모임을 돌아다녀야 한다.

“아으, 그건 싫은데.”

아이 둘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살살 구슬려 볼걸. 좀 상냥하게.

루비아나는 뒤늦게 후회했다.

그러다 잉크 묻은 손으로 턱을 문지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루비아나는 옷소매로 대충 턱을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는 영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난 사흘간, 루비아나는 계획과 달리 황제를 만나 이 일을 보고하지 못했다.

황제는 동부의 치수 사업에 몰두하느라 루비아나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의 알현 요청까지 뒤로 미루고 학자의 집 출신 관리들과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래도 황제의 언니이니, 찾아가면 만나 주긴 하겠지만 굳이 그러진 않았다.

‘온 김에 일이나 도우라고 할 게 분명해.’

으으. 루비아나는 괜히 등골이 시려 어깨를 떨었다.

드래곤 대신 와이번이라고, 칼레나 대신 다른 공작과 의논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 또한 딱히 끌리지 않았다.

‘요즘 폭군의 사생아한테 관심이 많다던데, 왜 갑자기 관심을 가지는 거지?’

어디서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카드릭이 먼저 꼬치꼬치 캐물어 왔기 때문이었다.

왠지 카드릭이 끼어들면 일이 더 귀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비아나는 귀찮은 게 정말 싫었다. 그래서 카드릭이 덤벼드는 걸 밀어내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뭐, 예쁘더라고. 그래서.”

“그런 얼굴이 취향인가?”

“취향을 뛰어넘는 외모던데? 그 얼굴이 취향이 아닐 수도 있나?”

“폐하께서는 딱히 안 끌리시던데.”

“아, 폐하라면 뭐.”

안 끌릴 수도 있지. 루비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는 좀 더 여리여리한 쪽이 취향일 것 같긴 한데. 아니면 정반대로 아주 크고 우락부락한 쪽.’

루이먼드는 더없는 미인이나 통뼈여서 여리여리하진 않았다. 그 훌륭한 신체 조건을 잘 갈고닦지 않았기 때문에 우락부락하지도 않았고.

‘아무튼 레나 취향은 아니네.’

그렇게 또 한 번, 황제에게 바쳐져야 할 급의 미인을 남편감으로 삼으려는 것에 대해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다.

“폐하와 자매 사이니, 너도 역시 그자가 취향이 아니겠지?”

카드릭이 딴생각 중인 루비아나에게 은근히 물었다.

“왜? 나랑 폐하는 엄연히 다르지.”

“뭐?”

“말했잖아, 취향을 뛰어넘는 외모더라고. 같은 남자가 봐도 그렇지 않아? 아닌가?”

“아니. 난 아니던데.”

카드릭은 이를 악다물고 대답했다. 꽤 기분 나빠 보였다.

“레나가 별로라고 했는데 그럼 됐지, 왜 계속 경계하고 그래?”

루비아나는 카드릭의 그런 모습이 이상할 따름이었다.

‘내가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는 왜 궁금해하는 거지?’

루비아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크흠흠. 카드릭은 루비아나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괜히 헛기침했다.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태도였다.

“설마…….”

하아? 루비아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내, 내가 뭘?”

“말 더듬는 거 봐라. 맞네, 맞아.”

아이고, 머리야. 루비아나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루단테, 그놈 날뛰는 거야 철없어서 그렇다 치고, 너까지 이러기야?”

“뭐?”

순간, 기대심이 어렸던 외눈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내가 설마 폭군의 사생아를 레나의 남편이나 정부로 밀어 올릴까 봐 걱정하는 거 아냐?”

“…….”

“안 그래. 안 그럴 거니까 걱정하지 마.”

“…….”

“네가 말했잖아? 레나 취향 아니라고.”

“도대체, 넌,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왜? 아냐?”

“……됐다.”

카드릭은 정곡을 찔리자 쪽팔렸는지 돌아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러워 보이긴 했지만.

루비아나는 속지 않았다.

“결혼하기 전부터 레나 주변의 남자들을 경계하다니. 독한 놈.”

오히려 혀를 내두르며 루단테보다 더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이후로도 예민하게 굴기에, 함께 의논하여 일을 떠맡기려 했던 계획을 단념하였다.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는 그냥 재수 없어서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상황을 혼자 헤쳐 나가야 했다.

‘그냥 포기할까? 아니면 구질구질하게 굴어볼까? 찾아오랬는데 왜 안 왔냐고 내가 찾아가 봐?’

이런 생각까지 할 즈음.

문이 열렸다.

“오.”

루비아나는 무턱대고 방문자를 반겼으나.

“아아.”

곧바로 실망했다.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딜 후작가에서 휘파람새가 울었습니다.”

오딜 후작가에 심어 둔 부하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후작저에서 검은 마차가 뒷문으로 은밀히 빠져나와 그레이움 백작가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실망도 잠시, 루비아나는 부하의 말을 듣고는 귀가 번쩍 뜨였다.

“가 보자.”

“예? 직접, 가시렵니까?”

부하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지금 당장.”

루비아나는 저를 이상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부하를 못 본 척하며 검은 망토를 둘렀다.

‘오딜 후작과 그레이움 백작이 뭔가 일을 꾸미는 것 같은데. 지금 황궁과 펠트하르그 공작에게 연락했다간 늦을지도 몰라.’

괜히 너그럽게 굴다가 꽤 괜찮은 남편감을 놓친 게 아쉬워서가 아니었다. 괜히 찜찜하고 뒷골이 당기는 게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도 아니었고.

그저 반역 모의하는 자들이 오밤중에 은밀히 모여 무슨 일을 저지르려 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암암, 그렇고말고.’

루비아나는 말을 몰고 한달음에 그레이움 백작저 근처까지 갔다.

근처에 말을 숨기고 망토에 달린 후드를 깊게 눌러쓰니, 어두운 거리는 루비아나를 제 일부처럼 여겼다.

오랜만의 밤 외출에 슬슬 피가 끓었다. 루비아나는 씩 웃어 보였다.

근처에 숨어 있던 부하들이 따르겠다며 모습을 드러냈다.

“따르겠습니다.”

“쉿, 내가 신호할 때까지 조용히 대기해라.”

루비아나는 홀로 백작저의 높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저택을 지키는 호위병 수가 제법 많았으나, 누구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루비아나는 일단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는 검은 마차를 찾았다.

안은 비어 있었다. 마부는 고삐를 꼭 쥔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저택 쪽으로 눈을 돌렸다.

‘오딜 후작이 직접 움직였을까, 아니면 측근을 보냈을까?’

그녀는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이유를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루이먼드의 방이 어디쯤인지 눈으로 가늠해 봤다.

그때였다.

“이러지 마십시오. 싫다고 했습니다. 날 건드리지 마십시오!”

저택 안쪽에서 우렁찬 고함이 들렸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 소리를 듣는 게 벌써 세 번째네.’

이야. 감탄할 일은 아니지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다른 장소에서 세 번 우연히 만나면 인연이라던데. 각기 다른 장소에서 세 번, 같은 소릴 듣는 것도 인연인 걸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구해 주라는 건가?’

루비아나는 비명이 들린 쪽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비명이 들린 곳은 저택의 2층 응접실이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그곳만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루비아나는 베란다의 난간을 한 손으로 잡고 가볍게 뛰어올랐다.

커튼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중요한 인물이 여기 다 모여 있었다.

그레이움 백작과 루이먼드, 오딜 후작 영애 리사나. 덤으로 하인 하녀 몇 명까지.

무슨 상황인지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을 만들려고 루이먼드와 리사나를 합방시키려 했는데, 루이먼드가 반항해서 곤란한 상황이랄까.

응접실은 연극 무대의 한 장면 같았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 있는 그레이움 백작. 그의 바지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발밑에는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리사나, 이 고귀한 오딜 후작가 영애는 얇은 슬립만 입고 위에 가운을 걸친 채 문가에 서 있었다.

하녀 둘이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다.

‘검은 마차를 타고 온 게 후작 영애였군.’

루비아나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철퍼덕 엎어져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루이먼드였다.

그는 외출복을 입고 있었는데 안 입고 있느니만 못했다. 사흘 전처럼 찢기고 벗겨진 상태였으니까.

볼 때마다 저런 모습이니, 감기 걸리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루이먼드는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그레이움 백작에게 소리쳤다.

비극의 클라이맥스 장면처럼 처연하고 불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게, 왜 그걸 마시지 않은 게냐? 그거나 먹고 곯아떨어졌다 아침에 일어났으면 모든 게 다 끝나 있었을 텐데!”

그레이움 백작은 지지 않겠다는 듯 더 크게 소리쳤다.

“……역시 그 우유엔 꿀만 탄 게 아니었군요.”

“그 얼굴을 하고서 그리 숙맥같이 구니, 도와주려고 그랬던 거지!”

“도와준다고요? 약을 먹여 정신을 잃게 만들고 모르는 여자와 침실에 던져 놓는 것이요?”

“모르긴! 곧 결혼 사이 아니더냐. 스스로 안겨 드는 여인을 밀어내다니, 네가 그러고도 사내라고 할 수 있느냐, 이 못난 놈!”

“숙맥은 누가 숙맥이라는 겁니까! 그리고 그게 어째서 저를 도와주는 겁니까? 정말, 정말 저를 창부 취급하시려는 겁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할아버님께서? 저는, 저는…… 그동안, 저 영애가 개인적으로 제게 덤비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할아버님, 할아버님께서…….”

루이먼드는 배신당한 사람처럼 괴로워했다. 루비아나는 그런 루이먼드가 신기했다.

‘제 외조부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그레이움 백작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막내딸이든 손자든 얼마든지 갖다 바칠 수 있는 인간.

오랫동안 북부에 머물며 수도 사정에 어두웠던 루비아나도 알고 있는 것을.

루이먼드는 그래도 제 외할아버지라고,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듯했다. 이런 짓까지는 하지 않을 거라는 얄팍한 믿음을.

아닌 게 아니라, 루이먼드는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일곱 번 죽고 여덟 번째 살고 있어도 멍청한 건 달라지지 않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할아버지를 믿다니.’

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다시는, 다시는 이러지 않을 거야. 절대로. 더는 그레이움 백작가가 내 인생을 멋대로 휘두르게 두지 않을 거야.’

물기 어린 아름다운 눈이 독기를 품었다.

그레이움 백작은 루이먼드가 저에 대한 혈육의 정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저 어험 어험, 헛기침해 대며 루이먼드를 다시 침실에 밀어 넣을 생각뿐이었다.

“아무튼, 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니 어서 돌아가 네 의무를 제대로 행하거라. 사내는 자고로 제 부인을 소중히 여기고 그녀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란다.”

“누가, 누가 내 아내란 말입니까!”

“네 뒤에 있는 오딜 후작 영애 말고 누가 있겠느냐?”

“아니요. 아닙니다. 그녀는 나의 아내가 아닙니다!”

“됐다, 언제까지 후작 영애를 부끄럽게 만들 셈이냐? 냉큼 침실로 돌아가 영애께 봉사하지 못할까!”

그레이움 백작은 문가에 멀뚱히 서 있던 하인들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거기, 네놈들은 뭣들 하는 게야, 어서 이 녀석을 데리고 가지 못할까!”

“할아버님!”

“예, 주인님.”

비탄에 젖은 비명과 공손한 대답이 어우러졌다.

하인 넷이 달려들어 루이먼드의 팔다리를 한 짝씩 잡았다.

“놔, 이거 안 놔? 놓으란 말이다!”

루이먼드는 나름 저항했으나 다부진 체격의 하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그레이움 백작은 몸을 돌려 리사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영애,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제 손자 놈이…… 부끄럽지만 이런 쪽으로는 완전히 숙맥이라, 과하게 부끄럼을 탄 것 같습니다.”

“숙맥? 숙맥이라고? 누가? 내가? 웃기지 마! 내가 이 수도의 여자들은 죄다 건드리고 다녔…… 으읍!”

눈치 빠른 하인이 재빨리 루이먼드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레이움 백작은 삐질삐질 흐르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저 녀석도 원. 경험도 없으면서 또 주제에 처음이라는 게 부끄러워 저런 허세를 부리는가 봅니다. 영애, 신께 맹세드리건대 제 손자 놈은 그런 쪽으로 순결합니다. 뭘 알기도 전에 학자의 집에 들어갔고, 줄곧 동정을……”

“그만, 그만하세요.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리사나가 손을 들어 그레이움 백작의 입을 봉했다.

얼굴은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했고, 가운을 움켜쥔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애써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과연, 한 나라의 왕비감이라 할 만했다.

‘드래곤의 자식은 드래곤이란 건가?’

루비아나는 황제 앞에서도 늘 꼿꼿하게 굴던 오딜 후작을 떠올리며, 내심 감탄했다.

리사나는 베란다 밖에 숨어 있는 침입자가 절 대견하게 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우아하게 몸을 틀었다.

“더는 아무 문제도 없었으면 좋겠군요.”

“물론 당연히 그럴 겁니다. 부디, 뜻깊은 밤이 되시길.”

그레이움 백작은 그 뒷모습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밖에서 지켜보는 루비아나에게만 그의 비열한 표정이 보였다.

리사나는 하인 넷에게 붙잡혀 끙끙대는 루이먼드에게 손을 뻗었다.

“더는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말아 줘요.”

가느다란 손이 루이먼드의 뺨을 쓸어내렸다.

오늘은 아무 손가락에도 반지를 끼지 않았다. 그런데도 루이먼드는 그 손을 거부하며 몸부림쳤다.

“날 만지지 마십시오. 당신은 내 아내가 아닙니다. 될 수 없을 겁니다. 누가, 누가 당신을 아내로 맞을까 보냐…… 읍.”

또 하인에게 입이 막혔다.

이번엔 루이먼드도 가만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그는 곧바로 하인의 손을 깨물었다.

“으악! 아이씨!”

하인이 비명을 지르며 손을 털었다.

“싫어! 살려 줘요.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제발 좀!”

다시 주둥이의 자유를 얻게 된 루이먼드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도와줘. 더는 싫어. 싫다고.’

이 저택에서 절 도와줄 사람 같은 게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감히 도움을 바랐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쳤다.

“울지 말아요. 루이. 다 잘될 거예요.”

리사나가 그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루이먼드는 그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손을 물린 하인이 단단히 화가 나서 루이먼드의 머리통을 억세게 눌러 잡았기 때문이었다.

‘싫어!’

루이먼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쩜 이렇게나 내 마음을 몰라줄까? 잔인한 사람.’

리사나는 루이먼드의 찬란한 은발을 바라보며 애달프게 한숨 쉬었다.

‘당신이 펠트하르그 공작과 아쉴레앙 공작의 눈에 든 이상 하루라도 빨리 우리 관계를 공식화하지 않으면 당신이 위험해질지 몰라요. 그래서 이러는 거라고요.’

그걸 몰라주다니.

‘당신에게 미움을 받게 되더라도 좋아. 당신을 빼앗기지 않고 지킬 수만 있다면 난 뭐든 할 거예요. 그게 당신의 아내이자 당신의 왕비인 내가 할 일이니까요.’

리사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눈시울을 붉혔다.

루비아나는 베란다 밖에서 그 모습을 모두 다 지켜보았다.

“…….”

방관하던 녹색 눈에 루이먼드의 모습이 비쳤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그 모습이.

“어쩔 수 없군.”

루비아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었다.

“남편이 살려 달라니, 살려 줘야지.”

와장창.

칼질 한 번에 베란다의 유리문이 박살 났다.

박살.

말 그대로 박살이었다.

철제 틀이 일그러지고 얇은 유리가 산산이 조각났다.

귀청을 찢는 소음과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안으로 쏟아졌다.

“누, 누구냐!”

“꺄아악!”

“배, 백작님을 지켜라.”

“아가씨를 모셔. 어서!”

응접실 안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난리를 피웠다.

하인, 하녀들은 자신들의 주인인 그레이움 백작과 귀한 손님인 리사나부터 챙겼다.

대단한 봉사 정신이라 할 만했으나, 루비아나는 그리 높게 평가해 주고 싶지 않았다.

함께 챙겨야 할 루이먼드를 본체만체하는 것도 모자라, 들고 있다가 내팽개치는 꼴을 봤으니까.

“으윽.”

루이먼드가 바닥을 뒹굴었다. 다행히 유리 파편이 거기까지 튀진 않았다.

“루이!”

리사나가 하녀들을 뿌리치고 루이먼드에게 달려갔다. 그 역시 루비아나의 눈엔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다.

“비, 비켜. 나한테 손대지 마!”

정신없는 와중에도 리사나의 손길을 뿌리치는 루이먼드의 모습이 그나마 보기 좋았다.

바스락.

바닥에 깔린 파편들이 그녀의 발아래서 처참하게 으스러졌다.

“누, 누구냐!”

그레이움 백작이 하인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소리쳤다.

‘나를 몰라본다고?’

루비아나는 의아했다.

‘아.’

곧 제가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다는 걸 기억해 내고는 피식, 웃었다.

“궁금하시다면 알려 드려야지.”

후드를 젖히자, 횃불처럼 타오르는 붉은 머리와 선명한 녹색 눈이 드러났다.

“헉.”

그레이움 백작이 기겁하며 몸을 퍼덕였다.

“아, 아쉴레앙 공작? 왜, 왜…… 설마!”

리사나는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돌려 루이먼드를 바라보았다.

“……!”

쿨럭, 쿨럭. 잔기침을 뱉으며 겨우 고개를 든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를 발견하곤 쩍 입을 벌렸다.

눈을 깜빡이더니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루비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어,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 그런데도 일말의 희망을 바라고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

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전.

루비아나가 검을 쥐지 않은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구해 달라기에 왔습니다, 내 남편.”

“아…….”

루이먼드는 제게 내민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누가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사람인 적이 없었다. 권력을 얻기 위한 꼭두각시.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장식품. 하룻밤 쾌락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었다. 피가 섞인 가족이란 사람들에게마저도.

아무도 그를 구해 주거나 도와주지 않았다. 아니,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때문에 루이먼드는 일찍이 누구에게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누구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늘 혼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매번 실패했지만, 누구에게도 도와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에게, 루비아나가 손을 내밀어 줬다. 구해 주겠다고 말해 주었다.

처음이었다.

일곱 번 죽고, 여덟 번을 살고서야 처음 만나는 구원이었다.

구원은 횃불처럼 붉은 머리, 풀잎처럼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언제 어디서나 금방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녀를 찾는 건 언제나 쉬웠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자세히 보지 못했고, 자세히 기억나지도 않았다. 늘 희미했다.

대뜸 청혼했을 때도 다급하고 절박한 마음에 매달리기만 했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엄두를 못 냈건만.

이제야, 루이먼드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약간 그을린 얼굴은 무표정했다. 북부의 설원에서 그을린 것일 텐데, 무표정도 북부의 설원 때문일까?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잘생기고 단정한 얼굴.

생각만큼 차갑거나 냉혹해 보이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술은 붉었고, 턱선은 부드러운 듯 날카로웠다.

녹색 눈은 깊고 차분했다. 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빨려들 것만 같았다.

에메랄드? 페리도트? 아니, 그런 흔한 보석들과는 비할 수 없는 색이었다.

그린 다이아몬드.

루이먼드는 몇 번째 삶에선가 보았던, 외국의 귀부인이 목에 걸고 있었던 그린 다이아몬드를 떠올렸다.

그 보석을 닮은 녹색 눈에는 일말의 정욕도 탐욕도 없었다. 그저 무심히 루이먼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무심함에, 루이먼드는 퐁당 빠져 버리고 말았다.

댕댕댕-.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괜히 숨이 가빠지는 것도 같고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얼굴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뭐지? 그 우유는 한 방울도 안 마셨는데, 혹시 저녁 식사에도 약이 들어 있었던 건가?’

뒤늦게 약효가 도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부터 났다.

‘진정하자. 진정. 일단, 진정.’

루이먼드는 두 손으로 제 왼쪽 가슴을 꾹 눌렀다.

그런다고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목구멍을 타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갑자기 왕성해진 제 신체 활동에 당황해, 정작 루비아나가 내민 손을 잡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무시해 버린 것이었다.

무도회에서 춤을 청한 사람의 손을 무시하는 것도 큰 무례이건만. 구해 주러 온 사람이 내민 손을 잡지 않는 건 얼마나 큰 무례한 일일는지.

‘왜,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냐고!’

쿵쿵, 귓속까지 울리는 심장 소리에 당황한 루이먼드는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다.

“…….”

루비아나는 그런 그를 말없이 바라봤다. 기다려 준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손을 내민 채였다.

허공에 붕 떠 있는 손이 민망하진 않았다. 제 손의 존재 자체를 잊은 듯한 루이먼드를 구경하는 게 꽤 재미있었으니까.

루이먼드는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더니, 갑자기 물 밖으로 튀어나온 고기처럼 파닥거렸다.

금세 얼굴이 빨개져서는 어쩔 줄 모르더니, 손을 들었다. 이제야 손을 잡으려나 싶었건만, 대뜸 제 가슴을 꾹 누르고 후하, 후하- 심호흡했다.

‘데리고 살면 심심하진 않겠네.’

루비아나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모두 얼음 상태에서 땡- 하니 깨어났다.

가장 먼저 정신 차린 건 그레이움 백작이었다.

“이, 이, 이! 남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공작에게서 구혼장을 받은 적도 없고, 게, 게다가 이렇게 말도 없이 저택에 침범하다니! 이는 지엄한 국법에 따라 엄히 처벌될 일인 것을!”

“맞아요!”

리사나도 표독스럽게 루비아나를 노려보았다.

“아…….”

루이먼드는 그제야 제가 루비아나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안 돼!’

내적 비명을 지르며 뒤늦게라도 루비아나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레이움 백작의 호통이 앞섰다.

“이 저택은 나의 사유지요. 아쉴레앙 공작께서는 어째서 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침입하셨소? 나는 지금이라도 나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해 공작께 정중히 청하겠소, 어서 내 저택에서 나가 주시오. 당장!”

백작은 떵떵 소리치고는 루이먼드에게 눈을 부라렸다.

“루이, 넌 뭣 하고 있는 게냐!”

마치 이 상황이 다 루이먼드 탓이라는 듯 노려보고는 하인들의 등을 떠밀었다.

“너희는 얼른 루이를 방으로 데리고 가라. 어서, 어서! 지금 당장!”

루비아나가 루이먼드를 채어 가기 전에 얼른 챙겨 리사나와 합방을 시키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루이먼드 생각에 몸이 달아 혼자 여기까지 어떻게 온 모양인데, 그래 봤자지. 제가 혼자 열다섯 명을 어떻게 감당하겠어?’

그레이움 백작은 이 상황의 주도권이 제게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과거, 그는 새벽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항복하고 몸을 피했다.

정복 전쟁 때는 후방에서 물자 보급을 담당했고, 루비아나가 북부에서 마수들을 정리할 때엔 황제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단 한 번도, 루비아나의 무력을 제대로 본 적도 경험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감히, 세간에 떠도는 루비아나의 흉흉한 소문을 우습게 여기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전형적인 주둥이 기사다운 태도였다.

주둥이 기사란 가문을 등에 업고 기사 작위를 받았으나 소규모 전투조차 한 번 참여해 본 적 없는, 무늬만 기사인 귀족을 이르는 말이었다.

‘전략을 좀 공부했을 뿐이겠지. 황제의 언니라고 대우받고 있을 뿐이잖아?’

그레이움 백작의 속내는 이러했다.

루비아나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그레이움 백작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수도로 온 지 고작 한 달.

사교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고 뒤에서 수군대는 수도의 귀족들을 숱하게 봐 왔다만.

이렇게 대놓고 자신에게 뻗대는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유쾌하기까지 했다. 이제 북부에는 이 정도로 그녀에게 개길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루비아나는 그가 어디까지 나댈까 궁금하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그레이움 백작은 끝없이 나대 주었다.

“어서 가지 못해!”

“저, 저기…….”

“도, 도련님.”

하인들은 주춤주춤, 루비아나와 루이먼드에게 다가갔다.

‘다, 닿기만 해도 피가 빨려 죽는다는데?’

‘맨손으로 마수들을 찢어 죽인다고 했어.’

‘북부에 사는 사람들을 성벽 너머로 던져 마수들에게 먹이로 준다던데?’

하인들은 겁먹은 눈빛으로 루비아나를 보면서, 맹수를 몰듯 루비아나 주위를 빙 감쌌다.

‘어떻게 해야 하나?’

루비아나는 살짝 난감했다.

그녀는 싸울 줄 모르는 일반인을 상대로 어느 정도까지 힘을 써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최근에는 마수만 상대해 왔던지라 평범한 인간을 상대로 어느 정도까지 힘을 써야 하는지도 긴가민가했다.

‘살짝만 건드리면, 죽지는 않겠지.’

어쨌든 상대해 주긴 해야 하니, 돌아서려는데.

‘아, 안 돼!’

루이먼드는 제게 등을 보이는 루비아나를 보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아닙니다!”

루이먼드는 뒤늦게, 하지만 절박하게 외치며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

루비아나는 살짝 당황했다.

‘하인들을 죽이지 말라고? 딱히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누굴 피에 미친 폭군으로 보나? 살짝 어이없어질 뻔했는데.

“안 잡으려고 했던 거 아니었습니다. 잡으려고,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가지 마십시오.”

이어진 루이먼드의 말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쯧.

루이먼드는 그 소리를 듣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손끝이 떨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동안 얼마나 구박했으면 이래?’

또 한 번 혀를 찰 뻔했으나. 루이먼드가 놀랄까 봐 참았다.

대신 긴 숨을 내쉬고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루이먼드 경.”

그를 부르며,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할 수 있는 한 상냥하게 말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잘 안 됐다.

“……예.”

“나는 경이 잡지 않았다고 해서 경에게 내민 손을 거두거나 하지 않을 겁니다.”

“…….”

“말했잖습니까? 구해 주러 왔다고.”

루비아나는 망토를 풀어 루이먼드에게 둘러 주었다.

까만 망토엔 아쉴레앙의 문장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그게 좀 아쉽다고 생각했다.

루이먼드는 머뭇거리다 망토를 꼭 움켜잡았다.

고작 망토 하날 둘러쓴 것뿐인데, 차게 식은 몸에 훈기가 돌았다.

그 훈기는 망토에 배어 있던 루비아나의 온기였다.

왈칵, 눈물이 났다.

루이먼드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울 만하지. 지금까지 안 울고 버틴 게 용하지.’

“울고 싶은 만큼 실컷 우십시오.”

루비아나는 격려 차원에서 루이먼드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러자 루이먼드는 본격적으로 눈물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어흐흑, 가, 감사…… 감사하…….”

루이먼드가 꺽꺽대며 루비아나에게 매달렸다.

‘아니, 이 정도로 울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루비아나는 얼결에 루이먼드를 끌어안고는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렸다.

난감하네.

의연하게 눈물을 꾹 참으며 괜찮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루비아나는 슬그머니, 루이먼드의 어깨 위에 얹었던 손을 뗐다.

‘우는 사람을 달래면 더 크게 우는 법인데.’

내가 원흉이구나 싶다가도.

‘난 달랜 거 아닌데? 그냥 마음껏 울라고 격려한 것뿐인데.’

억울했다.

울지 말라고 하면 더 우는 게 사람의 마음이니, 울라고 격려해 주면 오히려 울음을 그쳐야 하는 거 아닌가?

우는 루이먼드만으로도 난감하고 당황스럽건만.

“저희 도, 련님을…… 놔주십시오, 제발.”

“도련님, 저,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레이움 백작의 하인들이 주제를 모르고 덤벼들었다.

감히 냉혹한 북부의 공작이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다니.

좀 많이 짜증 난 냉혹한 북부의 공작은 하인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서늘하게 경고했다.

“내 약혼자에게 손대는 자는 그 손을 베어 마수의 먹이로 삼을 것이다.”

짜증 나서 괜히 해 본 말이었는데.

효과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여,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오 신이시여. 왜 저를 악마의 아가리에 처넣으려 하십니까!”

하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자기들끼리 이리 쿵 저리 쿵 부딪쳐 엎어지고. 아주 난리가 났다.

“……!”

정면에서 루비아나의 협박을 들은 루이먼드 역시 눈물을 뚝 그쳤다. 딱 봐도 겁먹은 얼굴이었다.

우는 사람을 겁주다니. 귀찮아도 그냥 돌아서서 하인들 보며 짜증 낼걸. 루비아나는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

“딸꾹.”

갑작스러운 딸꾹질 소리가 죄책감을 부채질했다.

“아, 죄소…… 딸꾹.”

“…….”

“아니, 이게 아니, 딸꾹.”

“…….”

“읍.”

루이먼드는 그냥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히끅. 그런다고 딸꾹질을 숨길 순 없었지만.

루비아나는 일단 그가 울음을 그친 것에 만족하자고 마음먹었다.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일어서서 루이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이먼드는 얼른 그 손부터 붙잡았다.

“네, 히끕.”

“천천히 일어나십시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부축해 일으켰다. 루이먼드는 일어나다 망토를 잘못 밟아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위험합니다.”

루비아나는 여유롭게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아 주려고 했는데.

“어?”

하마터면 덩달아 휘청일 뻔했다.

순간의 판단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기에, 볼썽사나운 모습 보이는 걸 피할 수 있었다.

여유가 사라진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이 훅 가깝게 붙었다. 하마터면 입술이 닿을 뻔……할 정도까지는 아니고. 코가 살짝 스쳤다.

루이먼드는 의외로 무겁고, 의외로 컸다.

‘눈대중으로 훑을 땐 몰랐는데, 몸이 제법 좋네.’

루비아나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저도 모르게 루이먼드의 입술을 보았다. 아주 빨갛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이…….

“아, 죄송합니다.”

사과를 아주 잘했다.

루이먼드가 서둘러 몸을 세우고는 뒤로 물러섰다.

“……괜찮습니다.”

루비아나는 아직 묵직한 느낌이 남아 있는 손을 주먹 쥐었다 펴 보았다.

어쩐지 약간,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아쉽기는.’

루비아나는 싱겁게 웃었다.

“루이먼드 경, 어느 쪽으로 나가야 합니까?”

“예?”

“나가려면 말입니다.”

“예?”

들어올 때는 창문을 깨고 들어왔으나 나갈 때는 제대로 정문을 통해 나가야지. 혼자 몸도 아닌데. 그런 마음으로 물었건만.

루이먼드가 영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누구 마음대로! 루이먼드는 내 허락 없이는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소. 당장 내 손자를 놓지 못할까!”

대신 말귀를 알아들은 그레이움 백작이 앞을 막아섰다.

“허락? 성인식을 치른 남자가 제 발로 집을 나가는데, 허락이 필요한가?”

“그렇소. 저 아이는 그레이움 가문에, 그리고 내게 속한 내 것이니까!”

그레이움 백작의 말에 루이먼드의 얼굴에서 싸악- 핏기가 가셨다. 망토를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눈앞에서 대놓고 물건 취급당하는 건 충격적인 일이었으니까.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루비아나의 등에 바짝 기댔다.

“당신에게 당신 손자는 당신 재산인 건가?”

루비아나는 그레이움 백작의 사고방식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의 사고방식대로 되물었다.

“루이먼드 경은 황실의 관리이니, 엄밀히 따지자면 황제 폐하의 것일 텐데?”

제국은 땅이든 사람이든, 황제의 것이다. 귀족은 황제의 것을 일부 빌려 대신 관리하는 것일 뿐이고.

엄밀히 따진다면, 루이먼드는 그레이움 백작의 것이 아니라 황제의 것이었다. 그레이움 백작 또한 황제의 것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갖다 붙이는 거요!”

정론을 말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말을 들었다. 마음에 스크래치가 난 루비아나는 그 슬픔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건 그쪽인 것 같은데. 그레이움 백작, 감히 폐하의 것을 탐내는가?”

황제의 언니, 제국의 셋뿐인 공작 중 하나인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말이 안 돼?

“그, 그렇게 따지면 화, 황제 폐하의 것을 탐하는 건 오히려 공작이지 않소!”

“그러니까 내가 루이먼드 경을 데려가는 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 아니겠소, 백작?”

그레이움 백작이 저택을 세운 이 땅도 황제의 것. 황제의 관리인 루이먼드도 황제의 것.

그러니까 황제의 언니가 저택을 깨부수고 루이먼드를 멋대로 데려가려는 것은 무죄.

루비아나는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그레이움 백작을 꾹꾹 찍어 눌렀다.

‘그러고 보니 오딜 후작가의 영애가 조용하네.’

루비아나는 리사나가 있던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상황이 소란스러워지니 조용히 자리를 피한 것이리라.

루비아나는 그녀의 판단력에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레이움 백작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현명한 여인이었다. 이왕 반역을 저지를 거면 좀 믿을 만한 사람이랑 결탁하지. 왜 하필 그레이움 백작과…….

‘아, 폭군의 핏줄.’

루비아나는 새삼, 제 등 뒤에 바짝 붙어 있는 미인의 가치를 실감했다.

루이먼드는 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폭군의 핏줄이었다. 옛 아덴 왕국의 재건을 꿈꾸는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키.

루이먼드는 그레이움 백작의 말마따나 그가 가진 것 중 가장 값진 것이었다.

‘그래도 손자인데, 재산 취급은 너무하지 않나?’

루비아나는 서늘한 눈으로 그레이움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그레이움 백작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분하고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제법 과녁으로 쓸 만해 보였다.

그레이움 백작이 루이먼드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으니 루비아나 역시 그를 사람으로 볼 이유가 없었다.

루비아나는 무심코 제 어깨 뒤로 손을 뻗었다.

‘아, 없지.’

손에 잡히는 게 없자 아쉬워하며 손을 내렸다.

북부에선 늘 활을 지고 다녔던 터라, 그 버릇이 아직 남아 있어 헛손질한 것이었다.

대신 루비아나는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그 소리가 허공에 흩어지기 무섭게, 깨진 베란다 창문에서 화살 비가 쏟아졌다.

화살들은 정확히 일어선 하인들의 발 앞에 주르륵 박혔다. 화살 한 대가 그레이움 백작의 다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히이익. 으악. 혹은 끄억. 하인들은 다양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억!”

그레이움 백작이 가장 크게 비명 질렀다.

털썩,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그를 고자로 만들 뻔했던 화살이 그의 다리 사이 바닥에 박혀 부르르 흔들렸다.

루비아나가 발을 들어 그 화살을 밟았다.

콰직.

화살이 꺾였다.

백작은 루비아나가 제 몸이 밟은 것처럼 파닥거렸다.

“당신 손자는 내가 데려가겠다, 그레이움 백작. 말했다시피 당신 손자는 이제 내 남편이니까, 그렇게 알고 허튼짓 말도록.”

루비아나가 씩, 웃으며 통보했다.

‘아, 너무 도적 같은가?’

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불만이 있다면 펠트하르그 공작저로 항의를 하든지.”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그레이움 백작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동시에 바짓가랑이가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루비아나는 그 축축한 물기가 흘러내려 제 신발에 닿기 전, 발을 뗐다.

그러고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루이먼드를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그레이움 백작과 그의 하인들에게 등을 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군가가 칼을 들고 달려들든 독을 뿌리든 상관없었다. 피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누구도 감히 용기를 내지 않았다. 설사 시도했다 해도 주변에 깔린 그녀의 부하들이 그걸 두고 보지 않았을 테고.

루비아나는 뒤통수에 쏟아지는 히끅히끅 딸꾹질 소리를 들으며 저택을 나섰다.

타고 왔던 마차 문을 열고 루이먼드에게 손짓했다. 젠틀맨 퍼스트.

루이먼드는 머뭇거리며 마차에 오르지 않았다.

“저, 저, 딸꾹. 괜찮으, 히끅. 십니까?”

여태 순순히 따라왔으면서 이제 와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외할아버님, 끕. 아니, 흡. 그레이움 백작이 폐하께 고발이라도 하면…… 딸꾹.”

루이먼드가 계속 딸꾹질하며 뒷말을 흐렸다.

학자의 집에서 제국 신법(新法) 수업을 들은 게 왜 하필 지금 기억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정작 시험 볼 때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서 낙제점을 받았건만.

‘그레이움 백작이 당신을 고발할 수도 있습니다. 아까 당신의 말이 맞는 말이긴 한데, 제국법은 귀족들의 관습적인 세습과 재산 상속, 사유 재산을 보호받을 권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다른 귀족의 재산권을 침해했다는 죄목으로 처벌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날 두고 가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딸꾹.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했다가 혹시라도 루비아나가 ‘아, 그런가?’라면서 자신을 놓고 갈까 봐 무서웠다.

그런 주제에 아예 모르는 척하고 루비아나의 마차에 올라탈 뻔뻔함도 갖추지 못했다.

이도 저도 못 한 채,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었다.

“정말, 히끅, 괜찮은 겁니까?”

“괜찮습니다.”

“하지만…… 딸꾹.”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오르시면 됩니다.”

루비아나가 마차 안을 가리켰다.

루이먼드는 한 번 더 물어볼까 하다가, 히끅. 루비아나가 저에게 싫증 낼까 싶어 그냥 마차에 올랐다.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딸꾹.

루비아나도 마차에 올라 루이먼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차는 천천히 그레이움 백작저를 등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각다각. 말이 달리는 속도에 맞춰 덜컹덜컹 마차가 흔들렸다.

딸꾹, 딸꾹. 루이먼드의 딸꾹질도 계속됐다.

“도와드릴까요?”

루비아나가 물었다.

“뭘, 힐끅. 말입니까?”

“딸꾹질 멈추는 것 말입니다.”

“히끅.”

루이먼드가 대답 대신 딸꾹질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코를 막고 물을 마시는 건데 마차엔 물병이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서로를 부둥켜안고 찌인-하게 키스하는 것.

루이먼드가 알고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지금, 여, 여기서 첫 키스를?’

지난 일곱 번의 삶에서, 특히나 첫 번째 삶에서 수없이 해 봤으니 첫 키스라 말해도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번 여덟 번째 삶에서는 처음이었다.

루이먼드는 지난 삶의 기억이 있음에도 당황하고 말았다.

“저, 저기…… 히끅.”

“아, 싫으시다면 강요하는 건 아니고.”

“아, 아니, 딸꾹! 시, 싫은……”

게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루비아나가 기다려 주지 않고 대뜸 발로 벽을 찼다.

세게.

무척, 세게.

쾅!

소리가 나며 마차가 흔들렸다.

“……!”

루이먼드는 마차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

‘뭐야, 뭐야!’

저도 모르게 마차 문에 바짝 붙어서는, 루비아나와 최대한 멀어지려 몸을 꾸겼다.

루비아나는 괜찮으냐는 말 한마디 없었다. 제가 언제 마차를 발로 깠냐는 듯 태연했다.

밖의 마부석도 조용했다. 결국, 놀란 건 오직 루이먼드뿐이었다.

그리고.

“멈췄군요.”

“네? 뭐가……?”

“딸꾹질 말입니다.”

“어…….”

딸꾹질이 멈췄다.

“설마 딸꾹질을 멈추게 하려고 그러신 겁니까?”

“네. 싫지 않다고 하셨잖습니까? 한번 놀라면 대개 멈추더군요.”

“…….”

이렇게 무식한 방법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루이먼드는 할 말을 잃었다.

“멈춰서 다행입니다. 예전에 북부에서 일 잘하던 부하 하나가 딸꾹질 때문에 마수에게 잡아먹혔던 적이 있어서, 그 뒤로 딸꾹질 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네…… 그, 그렇군요.”

루이먼드는 더더욱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더는 딸꾹질을 하지 않자, 등받이에 기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딱히 루이먼드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어 보여 루이먼드는 감히 먼저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루이먼드는 문에 머리를 기대고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았다.

루비아나가 창문을 깨고 등장!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나를 구해 주러 온 거라고 했지.’

남편, 이라고 말해 주면서.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남편이라니.’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 열기는 마차 안에 감도는 어색함에 금방 식어 버렸다.

루이먼드는 힐끔,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같은 자세였다.

내 남편, 이라고 말해 줬으면서. 구해 줬으면서. 딸꾹질을 멈춘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그게 야속하게 느껴지는 한편, 살짝 불안해졌다.

‘날, 구해 준 걸 후회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생각만으로도 피가 식었다. 루이먼드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런 거면 애초부터 날 구해 주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 그레이움 백작저 밖으로 데리고 나와 주지도 않았을 거고. 또, 내 딸꾹질을 멈춰 주지도 않았을 거야.’

루이먼드는 어깨에 두른, 제 몸을 감싼 망토를 꼭 쥐었다.

그렇게 루이먼드가 애써 루비아나에 대한 믿음을 다지고 있을 때.

‘아, 망했다.’

루비아나는 슬슬, 후회하고 있었다.

‘원래는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레나한테 뭐라고 하지?’

이 정도 소동을 벌였으니, 내일 황궁에 제 발로 찾아가 자백하기 전에 황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터.

그레이움 백작 앞에서 황제의 총애를 뽐낸 것과는 별개로, 루비아나는 내일 아침 해가 뜨는 게 무서워졌다.

‘언니, 뭐 하는 짓이야?’

라고 말하며 환히 웃을 동생을 생각하니, 숨이 다 막혔다.

‘난 죽었다.’

이번엔 또 얼마나 들들 볶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루이먼드와 눈이 마주쳤다.

“…….”

“…….”

딱히 할 말은 없고, 그렇다고 고개를 홱 돌리기에는 또 좀 그렇고.

두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일단 루비아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일단, 제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상황을 봐서 머물 곳을 따로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루이먼드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뭔가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루비아나가 고개를 까딱이자, 루이먼드가 말을 이었다.

“제가, 공작저에 머물러도 괜찮은 겁니까?”

목소리가 차분했다. 루비아나는 좀 의외다 싶어 루이먼드를 다시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살짝 눈웃음을 보이는 게, 바들바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하여간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수도 남자들은 다 이런가?’

루비아나는 수도 남자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리 상황이 그래도 그렇지, 무슨 추태를 보인 거야?’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그의 두 귀는 민망함에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건만.

루비아나는 그것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까?”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루이먼드는 잽싸게 말했다.

“그러면 돌아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은 성인이니, 스스로 자신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레이움 백작은 당신을 끌고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공작님께서 불편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레이움 백작, 제 할아버지가 가만히 있진 않을 텐데요. 절대로.’

루이먼드는 뒷말을 또 꿀꺽 삼켰다.

“설마, 그레이움 백작이 내 저택에 와서 경을 끌고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루비아나가 픽, 웃으며 물었다. 그레이움 백작을 얼마나 같잖아 하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쉴레앙 공작에게 그레이움 백작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실감이 났다. 루이먼드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왜 진작 이 방법을 생각 못 한 걸까?’

진작 루비아나의 남편이 되었다면, 삶이 여덟 번째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더더욱 루비아나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절실함이 불타올랐다.

‘반드시 오늘 밤, 결혼 이야기를 확정 짓자.’

루이먼드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바라봐?’

루비아나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마차가 공작저에 도착했다.

저택은 고요했다. 불도 다 꺼져 있었다.

‘음, 다 자고 있겠군.’

루비아나는 안심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윽.”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시녀장이 등불을 들고 반듯이 서서 루비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너냐? 시녀장한테 연락한 게? 그런 눈빛으로 마부를 노려보았다.

마부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마구 고개를 내저었다.

“엄한 사람 의심하지 마세요. 나가시는 것을 보고 줄곧 돌아오시길 기다렸을 뿐이랍니다. 그나저나 손님이 계신 것 같은데요.”

시녀장이 마부를 구해 주었다. 루비아나는 영 석연치 않다는 눈빛으로 마부를 지그시 한 번 봐 주고는, 억지로 고개를 돌려 시녀장을 마주했다.

“아, 한 명 있지. 음, 적당히 쉴 곳을 내주고 알아서 수발을 들어 줘, 내 남…….”

루비아나가 말을 하다 말고 멈칫, 했다. 루이먼드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남편? 방금 남편이라고 말하려고 했던 거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이라니.

“귀한 손님이니 소홀함이 없도록.”

루비아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

루이먼드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시녀장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러시군요. 귀한 손님. 그저 귀한 손님.”

시녀장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루이먼드를 훑어보았다.

그간 저택에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남자 손님은 더더욱 없었고.

그나마 저택에 잠깐 방문한 적 있는 사람은 펠트하르그 공작 카드릭 정도? 그마저도 초대를 받은 게 아니라 제 발로 찾아온 것이었다.

황궁에 입궁하는 길에 같이 가자고 온 것이었고, 루비아나가 채비를 마칠 때까지 문밖에 서 있었다.

그런데 손님이, 그것도 아주 잘생긴 남자 손님이 저택에 왔다?

루비아나는 그냥 손님이라고 말했지만 시녀장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아직 그런 거 아냐.”

루비아나가 엄히 말했지만.

“아아, ‘아직’이군요.”

시녀장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루비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녀장과 루이먼드를 놔둔 채 성큼성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걸음이 매우 빨랐다.

루이먼드는 그제야 그레이움 백작저를 벗어날 때, 그녀가 저를 배려해 걸어 준 것을 깨달았다.

“손님께서는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시녀장은 제 주인이 성질부리며 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