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31)

***

시녀장은 깨끗이 청소된 손님방을 내주었다. 또한, 늦은 시간임에도 목욕 준비를 해 주었다.

다만 시중들 사람이 마땅치 않다며 양해를 구했다.

“루이먼드 님을 시중들 하인을 되도록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시녀장이 근심 어린 기색으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언뜻 듣기에도 루이먼드가 앞으로 이곳에 오래 머물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들렸다.

루이먼드는 혼자서 씻을 수 있다고 말하며 당장의 근심은 덜어 주었으나, 곧 시중들 하인을 고용하겠다는 말에 필요 없다고 답하진 않았다.

자신 또한 이곳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다고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리먼스 부인.”

“저야말로 감히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루이먼드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루이먼드는 공작저에 오자마자 자신의 편을 한 명 만든 것 같아 든든해졌다.

시녀장이 갈아입을 옷을 내주고 물러나자, 루이먼드는 훌훌 벗고 뜨거운 물에 퐁당 들어갔다.

“으음.”

절로 기분 좋은 신음이 났다.

“이제야 살 것 같네.”

욕조에 팔을 기대고 턱도 괴며 축 늘어졌다.

루이먼드는 느긋하게 손으로 뜨거운 물을 떠 쪼르륵 흘려보내며, 루비아나를 떠올렸다.

“……아무튼 이리로 들어오게 되긴 했는데. 뭔가, 뭔가, 불안하단 말이야.”

원래 계획대로라면, 밤중에 은밀히 루비아나를 찾아가 학자의 집 출신답게 똑똑한 모습을 보이며 계약 결혼에 대한 이점을 설파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몇 개 이야기하며 통찰력 있는 척하고.

그런데 그게 아니라 다른 여자 아래 깔려 있다가 도움을 받고 피신해 오듯 아쉴레앙 공작저에 들어오게 됐다.

그래도 남잔데. 결혼할 여자에게 너무 나약하고 연약한 모습만 보였다는 쪽팔림 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아쉴레앙 공작인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합리화 반.

생각이 둘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움이 붙었다.

“아우, 모르겠다. 뭐가 뭔지.”

루이먼드는 더 깊게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그냥 물속에 숨어 버렸다. 풍덩.

‘이대로 죽어 버릴까? 그럼 적어도 목을 잘리지는 않을 텐데.’

뽀르륵. 입에서 물거품이 나왔다.

‘아니, 지금 죽어 무덤에 묻혀도 나중에 도로 끌려 나와 시체 상태로도 목을 뎅겅 잘릴지도 몰라.’

숨이 막혔다. 물속에서 숨 안 쉬고 있다 죽는 건 취소, 취소.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뽀르르.

‘그럼 난 아홉 번째 삶을 살게 되는 걸까? 아니면, 목이 잘릴 때까지 시체 상태로 무덤 속에 누워 여덟 번째로 목 잘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걸까?’

푸하-.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다급히 숨을 내쉬며.

“고작 이것도 못 버티면서 죽기는 무슨.”

젖어서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문득, 벽면에 걸린 커다란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젖은 얼굴, 젖은 몸. 욕조에 나른하게 기대 있는 모습까지.

본인이 보기에도 참 잘생기고, 아무튼 끝내줬다.

멍하니 자기 자신을 바라보던 중.

“……!”

오늘, 자신이 여기 왜 오기로 했는지 생각나 버렸다.

생식 능력!

“그거야!”

이렇게 늘어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루이먼드는 몸을 박박 씻고 욕실을 나섰다. 찬 바람에 젖은 몸이 부르르 떨렸지만 추운 줄도 몰랐다.

그는 시녀장이 두고 간 옷가지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잠옷 대용으로 쓰기 충분한, 헐렁한 실크 셔츠와 바지. 두꺼운 가운.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다.

“으악.”

생각하자마자 부끄럽고 쪽팔려서 비명을 내질렀지만.

“확실히, 그 방법이라면 될지도.”

차마 그 생각을, 외면하진 못했다.

‘살길은 이것뿐이야.’

루이먼드는 마음을 굳히고 손을 뻗었다.

셔츠와 바지를 지나치고, 가운을 잡았다. 손이 살짝 떨렸다.

‘……이제 와서, 순진한 척하지 말자. 너, 처음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잊은 거 아니지? 그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검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눈동자에 숨은 모멸감, 참담함은 금방 가라앉았다.

“가자. 난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루이먼드는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열어 밖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아, 물어보진 않으셨지만 그냥 말씀드릴게요. 이 복도 제일 끝 방이 공작님이 머무시는 곳이랍니다.”

시녀장이 방을 나서기 전 흘려 준 귀한 정보를,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나도, 한 기억력 하는 것 같은데. 왜 시험 때마다 점수가 그렇게 나왔던 걸까?’

루이먼드는 학자의 집 시절의 해묵은 상처를 떠올리며 어두운 복도를 내달렸다.

타박타박.

폭신한 슬리퍼가 두꺼운 양탄자 위를 지나쳤다.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그게 그의 부끄러움, 그리고 생존에 대한 집념이었다.

***

그 시각.

루비아나는 침대에 기대앉아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음주는 북부에 가서 생긴 버릇이었다.

북부는 추운 곳이었다. 때때로 그냥 춥다고 말하기 싫을 정도로 정말 추워졌다.

털옷을 스무 겹쯤 껴입으면 그럭저럭 버틸 만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마수가 쳐들어오는데 털옷을 스무 겹 입고 굴러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딱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입고 싸우러 다니다 보니, 자연히 술을 마시게 됐다. 몸을 덥히는 데는 술만 한 게 없었으니까.

루비아나는 따뜻한 수도, 폭신한 침대 위에서 질 좋은 술을 마시며, 북부에 남아 있는 부하들을 떠올렸다.

“다들, 고생하고 있겠지.”

거긴 여전히 끔찍하게 추울 테고, 술도 찌꺼기를 덜 거른 질 낮은 것뿐일 터.

눈밭에서 구르며 마수와 싸우고, 맛없는 술을 마시고 있을 부하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저택 안에 데려다 놓은 루이먼드의 존재 자체를 잊고 한 잔의 술을 즐기고 있건만.

똑똑.

노크 소리가 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방해했다.

꿈틀.

루비아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버릇처럼 침대맡에 놓아둔 검을 확인했다.

한밤중 노크하고 들어온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 달려들거나 독침을 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끽해 봤자 빈 잔을 치우러 온 시녀장이나 하녀겠지.

‘여긴 북부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검을 손 닿을 거리에 가져다 놓았다.

“들어와.”

말하기 무섭게 기름칠 잘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다. 터부덕, 터부덕.

방문자가 얼굴을 드러내자, 어둑한 침실이 환해졌다.

촉촉하게 젖은 은빛 머리. 역시나 젖어서 광택이 나는 매끄러운 피부.

실크 가운으로 감싼 길고 가느다란…… 아니, 가느다랗다고 말하기엔 어깨가 제법 벌어지고 가슴도 탄탄해 보이는 몸.

그리고 고작 촛불 빛을 받아도 은은히 빛나는 은발에 까만 눈.

끝내주는 미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왜 여기에?’

루비아나는 잠시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길을 잘못 들었나?’

잠깐 혼자 나왔다가 자기 방을 못 찾고 헤매다 얼결에 여기 들어온 걸지도. 만약 그런 거라면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손님에게 길 안내도 제대로 못 하고 말이야.’

시녀장을 혼낼 기회.

루비아나는 내일 해 뜨자마자 시녀장을 구박할 생각에 씩, 웃으며 루이먼드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 아니, 괜찮으십니까?”

왜 여기 왔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뭐라도 한 겹 더 걸칠 걸 건네주고자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았던 가운에 손을 뻗었다.

‘맞으려나?’

잠깐 눈대중으로 크기를 가늠하고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으로 건네주려 했는데.

“자, 잠시만요.”

“……?”

루이먼드의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다. 표정도 목소리만큼 굳어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 당황하거나 쑥스러워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뭔가, 단단히 각오한 느낌이랄까?

‘암살? 나를?’

루비아나는 이상한 낌새에 침대맡에 놓은 검을 움켜잡았다.

‘토끼나 다람쥐만도 못한 가련한 미인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나를 속일 만큼 뛰어난 암살자였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런데.

루이먼드가 어딘가에 숨겨 둔 단검을 들고 달려드는 대신, 입고 있던 가운을 확 벗어젖혔다.

“……?”

루비아나는 눈앞에 드러난 살굿빛 향연에 놀라 손이 미끄러졌다. 덜그럭.

“오늘, 원래 하기로 한 일을 하러 왔습니다.”

“……뭘?”

뭐야, 얘? 이상해. 무섭잖아.

루비아나는 제 앞의 잘생긴 노출남을 보며 눈을 감지도 못한 채로 굳어 버렸다.

‘해? 뭘?’

루이먼드가 뭔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곧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아, 그거?’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하하, 소리 내 웃을 정도는 아니고 피식, 정도?

‘간이 큰 거야, 아니면 없는 거야?’

폭군의 사생아. 학자의 집 출신. 오늘 강제로 초야를 치를 뻔했던 미인. 감히 자신에게 사랑 없는, 그것도 유통 기한 있는 계약 결혼을 제안한 간 큰 놈 정도인 줄 알았더니.

꽤 당돌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루비아나가 지금 더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다는 데 있었다.

“아, 그건 됐습니다.”

루비아나는 깔끔하게 거절했다. 계속 보고 있으면 없던 욕심도 생길까 싶어 슬쩍 고개도 돌렸다.

남들 다 보는 데서 ‘내 남편’이라고 지껄였으면서 왜 이제 와서 몸을 사리느냐 물으면, 그래도 도망갈 구멍 하나는 남겨 놔야 할 것 같다고 말할 수밖에.

“날이 춥습니다.”

루비아나는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가리켰다.

‘좀 쪽팔리겠지. 하지만 이렇게 거절하면 알아서 물러나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루이먼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힐끗 보니, 거절당한 게 부끄러운지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그런데도 물러서지 않다니.

‘귀찮게 됐군.’

술을 마셔도 끄떡없던 몸이 새삼, 피로함을 느꼈다. 귀찮아질 것 같다고, 본능이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귀찮은 게 정말 싫은 루비아나는, 그럼에도 루이먼드에게 생식 능력을 확인하자고 먼저 제안했던 게 자신이라는 걸 잊지 않고, 좀 더 부드럽게 거절 의사를 전했다.

“오늘은 일단 쉬시고, 나중에 상황을 봐서……”

“아니요.”

루이먼드가 입술을 꽉 깨물고 루비아나의 말을 가로챘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습니다.”

“루이먼드 경.”

“루이. 루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오늘 밤이 지나면, 그렇게 불리고 싶습니다.”

루이먼드가 퍼렇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젠장, 이 방은 왜 이렇게 추운 거야?’

가운을 벗어젖힐 때만 하더라도 단번에 침대 속으로 뛰어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벌서듯 계속 서 있으니, 추웠다. 추워도 너무 추웠다.

‘그러니까 도로 입으라니까.’

루비아나는 퍼렇게 질린 입술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북부에선 추위에 이를 벅벅 갈며 치를 떨었건만. 수도로 돌아오니 따뜻한 날씨 때문에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래서 그녀의 침실은 다른 방보다 더 추운 편이었다.

‘그래도 화로 하나쯤은 들여놔야 하지 않을까요?’

‘안 쓸 건데 왜?’

‘혹시 모르잖아요. 쓸 일이 생길지.’

‘그럼 그때 가져다 놓으면 되지. 쓸데없이 지금 가져놔 뭐 해? 됐어.’

‘막상 나중에 필요할 때가 오면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후회? 하면 되지.’

루비아나는 얼마 전 시녀장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누가 알았나? 이런 미인이 침실에 뛰어들어 올 줄을.

“루이먼드 경.”

으음. 루비아나가 이마를 긁적이며 그를 불렀다.

루이먼드. 루이 말고, 루이먼드.

미안한 마음과는 별개로, 그가 잘한다는 그 일을 지금 당장 그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일 아침, 황궁에 가서 뭐라 말할 거리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 끝까지 안 갔어. 네가 정말 안 된다고 하면 무를 수 있어. 무를 수 있다니까!’

난감한 건 루이먼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왜 이래? 아까는 나보고 내 남편이라며?’

왠지 불안해졌다. 이대로 물러나면 루비아나의 남편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번 생 역시 목 뎅강으로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안 돼!’

루이먼드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반드시 오늘 밤, 모든 걸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려야 해.’

생식 능력. 그 빌어먹을 생식 능력을 증명해 보이면 될 일 아닌가!

“공작님!”

루이먼드는 앞뒤 가리지 않고 침대로 뛰어들었다.

“어딜.”

그리고 바로 제압당했다.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헉.”

루이먼드는 빈 침대에 몸이 처박히며 한 번, 비명을 질렀다.

루비아나가 그의 등을 무릎으로 찍어 누르자, 두 번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컥!”

루비아나는 그의 두 팔을 등 뒤로 엇갈려 꾹 누르고, 몸 위에 올라탔다.

그의 몸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말랑하거나 흐물흐물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의외인데?’

루비아나는 놀랐으나, 티를 내지 않고 루이먼드의 팔을 비틀었다.

“아악!”

세 번째 비명이 들렸다.

“놔, 놔주십시오. 놔주세요. 아픕, 니다.”

루이먼드가 버둥거렸다. 몸이 들썩들썩했다.

‘정말 힘은 좋군.’

리사나에게 반항하는 걸 구경할 때도 느꼈지만, 실제로 겪어 보니 남달랐다.

‘훈련을 안 해도 이 정도인데 제대로 훈련하면 제법 괜찮은 기사가 되지 않을까?’

늘 실력 좋은 기사가 부족한 북부의 지배자로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학자의 집으로 갔다니. 차라리 북부로 오지.’

루비아나는 아깝다고 생각하며 루이먼드의 손가락을 꺾었다.

뼈가 부러지거나 빠질 정도는 아니고, 딱 그 직전까지만. 뚜둑.

“아악! 하, 항복. 항복!”

루이먼드는 곧바로 반항을 포기했다. 깔린 몸이 축 늘어졌다.

흐윽.

아파서, 비참해서, 또 울음이 끓었다.

루이먼드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으나 울음이 새는 것까진 숨기지 못했다.

아까 그건 북부에서 날고 기는 놈들도 못 참고 살려 달라 빌었던 기술이라고, 위로해 줄까? 루비아나는 잠깐 고민하다 말았다.

그리고 루이먼드가 흑흑 우는 모습을 실컷 구경했다.

이 정도로 잘 생겼으면 우는 것도 예술의 경지였다.

‘위험한데.’

입술을 꾹 깨물고 섧게 우는데, 그걸 지켜보고 있자니 갑자기 위험한 취향이 생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아, 이런 생각 하면 안 된다니까.’

냉혹한 북부 공작 소릴 듣는 것도 모자라 변태 공작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싶진 않았다.

“왜 이러십니까?”

루비아나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어보았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저쪽 역시 뒤늦게라도 정신 차린 것 같으면 놔주려고 했는데.

“원래 이러기로 했잖습니까.”

놔주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그러자고 하긴 했는데,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닌데…… 완전 빈말은 아니긴 했는데…….’

생식 능력을 확인해 본 뒤 그것까지 괜찮으면, 황제에게 말 좀 잘해서 그냥 남편으로 삼을까 싶은 마음 반.

사흘간 시간을 벌고 그동안 이놈이 내 피의 맹세를 어떻게 알았는지 뒷조사할 마음 반.

딱 이런 마음이었긴 한데.

“공작님, 놔주십시오.”

“놓아드리면 방으로 돌아갈 겁니까?”

“아니요.”

“그럼 놓아드릴 수 없겠군요.”

“하지만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저의 생식 능력을……”

“보여 줄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

루이먼드는 목을 한껏 뒤로 돌려 루비아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이었다.

그간 사교계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루비아나의 뒤통수를 따갑게 만들었던 눈빛. 나 절실하다고, 말 못 할 사연이 있다고 말하는 눈빛.

정면에서 보니 외면하기 쉽지 않았다.

‘왜 이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착잡해하기 무섭게, 루이먼드가 뒤집기를 시도했다.

‘이놈 봐라?’

루비아나는 그의 파닥거림이 가소로웠다.

하지만 루이먼드가 너무 필사적이어서, 딱히 몸을 뒤집는다고 뭐가 달라질 게 있나 싶어서. 또 뒤돌아보느라 목이 아프겠다 싶어서.

그냥 뒤집게 놔뒀다.

역시나 못생긴 남자들에겐 절대 베푼 적 없는 아량이었다.

물론 루이먼드가 몸을 뒤집자마자 다시 두 손을 붙잡아 머리 위로 꾹 눌렸다.

“으윽.”

루이먼드는 다시 손을 잡히자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꿈틀댔다.

루비아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다. 루비아나는 그의 아랫배를 깔고 앉게 되었는데, 남이 보기에는 루비아나가 루이먼드를 덮치려 하는 모습처럼 보일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루비아나는 몸을 뒤집게 놔둔 게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침대 옆 협탁에서 촛불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그 불빛에 비친 루이먼드는, 그야말로 물오른 미모를 선보였다.

얼굴에 달라붙은 젖은 은발, 촉촉하게 젖은 검은 눈. 불빛을 가르는 오뚝한 콧날. 아직도 추워서 파르라니 떨리는 입술. 긴 목 아래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몸.

엎치락뒤치락하느라 몸이 시트에 둘둘 감겨 다행스럽기도 했고 섭섭하기도 했다.

원래 보일 듯 안 보이는 게 사람의 상상력을 더 자극하지 않던가?

와.

속으로 감탄하기 무섭게, 마음속 저울이 한쪽으로 확 기울었다.

이걸 그냥 확, 응?

이놈, 수상쩍은 놈이고 지금 건드려서 좋을 거 하나 없는데. 그걸 알면서도 마음이 확 기울었다.

미인, 미녀에게 빠져 나라를 말아먹었다던 역사책 속 왕들의 심정을 이제야 이해했다.

하룻밤쯤은 괜찮지 않을까? 스스로 찾아왔는데 안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나?

‘……이래서 미인계가 무서운 거구나.’

루비아나가 얼른 정신을 다잡고, 고개라도 뒤로 젖혀 루이먼드의 눈부신 외모에서 멀어지려 하는데.

“공작님…….”

루이먼드가 촉촉한 목소리로 루비아나를 불렀다.

크으.

그게 또 한 번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루비아나는 절 부르는 입술, 어느새 혈색이 돌아와 붉어진 그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딱히 식인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닌데, 북부에서 보급이 끊겨 하마터면 굶어 죽을 뻔했을 때도 인육 먹을 생각은 안 했는데.

저 통통한 입술이 왜 맛있어 보이는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루비아나가 저도 모르게 루이먼드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새.

‘됐다.’

루이먼드는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루이먼드는 제 입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루비아나에게 살랑살랑 웃어 보였다.

루비아나의 눈빛이 생각 이상으로 흉흉해서 살짝 무섭긴 했지만, 피하진 않았다.

저 눈빛, 자신을 잡아먹고 싶어 하는 저 눈빛을 바라고 스스로 찾아온 거였으니까.

비록 지금 몸으로는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난 생에서 쌓은 경험치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일단 이 손만 놓아준다면, 그러니까 루비아나가 마음이 동해 저를 하룻밤만이라도 품어 보고자 한다면.

루이먼드는 이 하룻밤을 단지 하룻밤만으로 끝나지 않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이거, 놓아주시겠습니까?”

루이먼드가 손목을 까딱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루비아나는 뭐에 홀린 듯 “네.”라고 대답할 뻔했다.

“언니, 뭐 해?”

갑작스러운 환청만 아니었다면, 잡고 있던 손도 놔줬으리라.

“……!”

정신이 번쩍 들었다.

루비아나는 아차 싶어 루이먼드에게서 눈을 뗐다.

내일 아침에 황궁에 들어가 칼레나를 만날 생각만 해도, 천 년의 욕망도 파스슷 식어 버렸다.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리자.’

후우. 루비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안 돼!’

안 되기는 루이먼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영영, 다시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공작님.”

루이먼드는 지난 삶의 기억을 더듬으며 최대한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갑자기 들린 환청 덕에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루비아나는 그런 그를 보며 기분이 나빠졌다.

‘어디서 이런 걸 배워 온 거지?’

너무 익숙하달까?

보고서로 받아 본 그의 과거는 더없이 깨끗했다.

- 성인식을 치르기 전부터 화사한 외모로 사교계에서 유명세를 떨쳤으나, 직접적인 이성 교제는 없었음.

- 그레이움 백작이 그를 왕으로 만들 욕심에 철저하게 관리했음. 어느 가문과 연을 맺어야 이로울까 재느라 약혼도 늦어짐.

- 학자의 집으로 도망.

- 학자의 집 파괴 후 그레이움 백작에게 인계. 이후 저택에서 두문불출. 따로 만난 여자 없음.

- 결론 : 이성 교제 전무.

고로, 이놈은 지금 동정이라는 건데.

왜 이렇게 여자를 꼬시는 게 익숙해 보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것처럼.

루비아나는 자신 말고 딴 여자 밑에 깔려서, 그 여자를 유혹하려 웃는 루이먼드를 상상해 봤다.

괜히 짜증 났다. 울컥.

“많이, 익숙한 것 같습니다?”

말이 퉁명스럽게 나와 버렸다.

“네?”

방금, 요염하게 웃으며 유혹하던 건 어디의 누구인지, 루이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깜짝 놀란 토끼 같았다.

토끼.

한번 토끼 같다고 생각하니, 정말 모든 게 토끼 같았다. 홀딱 벗고 새하얀 몸을 내보이고 있는 것조차도.

‘토끼, 맛있지.’

입맛이 돌았다.

‘그러고 보니 토끼가 정력에 좋다고 하지 않았나?’

북부에서 사냥하다 토끼를 잡으면, 부하들이 낄낄거리며 가장 최근에 결혼한 놈한테 한 대접씩 먹였다. 밤에 힘내라고.

루비아나에겐 남편도 없는데 밤에 어디 가서 힘쓰시려고 이걸 드시냐고, 목뼈 하나 주지 않았다.

감히 윗대가리를 앞에 두고 좋은 걸 지들끼리 먹다니. 확 다 상관 모욕죄로 잡아다 족치려다 너른 마음으로 참아 주곤 했는데.

이렇게 요염한 왕토끼가 그녀에게 제 발로 굴러들어 왔다. 역시 수도는, 북부보다 풍족하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겨우겨우 산토끼나 한두 마리 잡아 끓여 먹던 북부의 부하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졌다.

봤냐? 니들 토끼랑은 비교도 안 되지? 니들 안 줘. 나 혼자 먹을 거야.

그러니까 자신보다 먼저 이 토끼에게 입 댄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매우, 마음에 안 들었다.

“많이 익숙하신 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일, 익숙합니까?”

대놓고 말했다.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성격에 안 맞았으니까.

“…….”

능숙하게 받아칠 줄 알았던 루이먼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검은 눈에 스치는 건, 섭섭함? 아니, 서러움? 야속함?

꾹 다문 입술에 힘이 들어가고,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닌 게 아니라 루이먼드는 서러웠다.

‘누군 익숙해지고 싶었는 줄 아나!’

늘 평범한 삶, 평범한 행복을 꿈꿨다.

우연히 누군가 흘린 손수건을 주웠는데 그 은은한 향에 취해 주변을 돌아보니 어떤 영애의 뒷모습이 보였다든가.

가면무도회에서 가면을 쓴 영애와 춤을 추다 반해, 이름을 물었더니 수줍어하며 도망쳤다든가.

첫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그 영애를 찾아 헤매다 겨우 마주치게 되고,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이름을 알게 되고.

마상 대회에 나갈 때 영애의 손수건을 창에 매달고 멋지게 우승한 뒤 영애에게 우승자의 화관을 바치고.

모두의 축복 속에 결혼해 알콩달콩 살며 애도 낳고 함께 늙어 가는 평범한 삶.

루이먼드가 두 번째 삶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그 영애는 오늘도 도망칩니다>의 줄거리이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는 영애가 자꾸만 도망쳐서 남주인공이 점점 집착하며 영애를 가둬 두려고만 하지만. 아무튼, 초반은 저렇게 풋풋하고 알콩달콩했다.

그게 좋아서 초반 부분만 100번 넘게 읽었더랬다. 그리고 그런 삶을 꿈꿨다. 곧 산산이 부서져 버렸지만.

그래도 그 파편을 끌어안고,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곱 번 죽고 여덟 번째 삶을 살면서도 계속.

목을 잘려 죽지 않고 이 빌어먹을 곳에서 무사히 도망칠 수만 있다면, 날 좋아해 주고 내가 좋아하는 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소박한 꿈을 아직도 가지고 있건만. ‘너 아무 여자랑 자고 뒹굴고 유혹하는 게 익숙하더라.’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여자한테까지 이런 말을 듣고 싶진 않아.’

루비아나가 절 그렇게 봤다는 게, 서러웠다.

루이먼드는 고개를 들고 루비아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처음입니다, 저, 그렇게 헤픈 남자 아닙니다. 공작님이라서, 그래서 이러는 겁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번 삶에서는 정말 처음이니까.

“아. 이런.”

루비아나는 난감해졌다.

순간 울컥해 말하긴 했는데, 말하고 나니 좀 과했나 싶었는데.

‘처음이라고?’

루이먼드의 대답이 마음에 들어 버렸다.

그래서 루이먼드의 손을 잡고 있던 손힘이 느슨해졌다.

“……!”

루이먼드는 섭섭한 마음과는 별개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손목을 비틀어 팔을 빼내고는 그 팔로 루비아나의 목을 감쌌다.

“어?”

루비아나가 놀라기도 전에, 그녀의 목을 잡아당기며 쪽, 맞췄다. 가벼운, 아주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우리, 같이 아이 만듭시다.”

속삭였다.

이 말을 하는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건지.

‘이건 내가 잘 모르는 영역이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밤일에 자신 있는 것과 달리 생식 능력은 미지의 영역이었으니까.

‘그래도 매일매일 열심히 하다 보면 애 둘쯤은 금방 만들 수 있겠지.’

열심히 잘할 자신은 있었다.

불안감, 그리고 기대감. 루이먼드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 떨림이, 루비아나에게도 전해졌다.

아찔했다.

“언니이이?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고.”

이성을 붙잡아 주고 있던 동생의 목소리, 환청이 한없이 멀어지고 아득해졌다.

어느새 내일의 황제보단 오늘 밤의 미인이 더 가까워져 버린 건지.

아무튼, 촉촉하게 젖은 까만 눈, 저 눈빛이 문제였다.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무책임한 생각이 들었다.

황제의 총애에 대한 자신감으로?

아니.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이 토끼 같은 연하남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 때문에.

어쩌면, 그레이움 백작저에서 도와 달라고 우는 루이먼드를 보았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루비아나는 맥이 탁 풀려, 루이먼드를 밀어내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자신을 밀치지 않자, 좀 더 용기 내 몸을 일으켰다.

풀썩.

위아래가 바뀌었다.

이번엔 루비아나의 등이 침대에 닿았다.

루이먼드가 루비아나의 위에 올라탔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루이먼드가 루비아나의 입술을 손끝으로 훑었다.

바짝 말라 있고 차가운 입술. 루비아나는 그 입술을 움직여 하, 웃었다.

‘내가 황제가 아니라 다행이야.’

한 번도 황제 자리를 탐낸 적이 없었지만, 더더욱 황제의 권좌가 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만약 자신이 황제였다면, 이 아름다운 사람에게 홀려, 그 자리마저 기꺼이 내주고 싶어졌을지도 모르니까.

루비아나는 더는, 제게 달려드는 루이먼드를 거절하지 않았다.

촛대의 촛불이 흔들리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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