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악, 가악.
밖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참새도 아니고, 아침부터 웬 까마귀?’
잠이 한순간에 달아났다.
눈을 뜨니,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천장이었다. 옆에서 색색- 거슬리는 소리도 들렸다.
몸은 천장을 보고 반듯이 누워 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만큼 고단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고 일어났는데 이렇게 피곤하다니.
루비아나는 눈만 데굴 굴려 창밖을 바라봤다.
환했다. 햇빛도 쨍쨍하고. 해가 뜨고도 시간이 꽤 지난 듯했다.
평소라면 씻고 식사까지 마친 후 서재에 앉아 황제가 떠맡긴 일을 처리하자고 마음만 먹고 펜을 빙빙 돌리고 있을 시간인 것 같은데.
그러다 잉크병을 엎질러 시녀장에게 한 소리 듣거나, 잉크병 엎지른 김에 일은 내일 하자고 마음먹고 연무장으로 가 몸을 풀거나.
일 안 하고 꾀부리고 있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황제가 호출해서 카드릭한테 잡혀 황궁으로 질질 끌려가거나 할 때인데.
침대에 누워서 막 눈을 떴다.
늦잠을 잔 것이다.
‘늦잠?’
자신도 놀랄 일이건만, 저택 일을 돌보는 고용인들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일일 것인가?
매일 해 뜨기 전 일어나, 주방장이 하품하며 부엌으로 굴러들어 오기 전에 빵 한 덩이와 포도주 한 병을 챙겨 들고 홀로 식당에 가 식사를 하던 루비아나였다.
그렇게 새벽잠 없는 고용주가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침실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데, 이 저택의 시녀장이라는 사람은 깨우러 오지도 않았다.
루비아나는 혹시 시녀장이 제가 밤중에 돌연사하길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닐지 의심했다.
어쩌면 지금쯤, 제 죽음을 확신하기도 전에 장의사에게 달려가 관을 짜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재 어딘가에 꽂아 놓은 유언장을 우연히 봤다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자식 없이 죽으면 이 저택을 시녀장에게 주겠다고 써 놨으니까.
펠트하르그 가문에서 운영하는 상단에 투자 겸 예금해 놓은 돈의 이자로 평생 연금을 지급해 주겠다고도 써 놨고.
‘유언장을 고쳐야겠다.’
일단 몸을 좀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루비아나는 시녀장에 대한 신임과 우정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맨살에 닿는 침대 시트의 감촉을 즐겼다. 낯설면서도 꽤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뒤늦게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맨몸?’
딱히 벗고 자는 버릇은 없는데?
몇 년간 전쟁터를 떠돌았다. 자다가도 적의 습격을 받아 검을 휘두르고 바닥을 구르는 게 일상이었다.
제대로 누워 잠드는 날보다 나무에라도 기대 선잠을 자는 날이 더 많았다. 북부로 가서는 더더욱 그랬다.
갑옷이나 벗고 자면 감지덕지한 삶을 살았건만.
‘다 벗고 자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니고서야, 그럴 수 있을 리가?
스스로 했다기엔 너무 이상한 기행이었다.
남이 벗겨 주지 않은 이상에야. 아니, 누가 옷 벗겨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잤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나 싶은데.
‘아.’
그제야 어젯밤 기억이 물밀듯 몰려들어 왔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기억났다.
덕분에 아까부터 귀에 거슬렸던, 옆에서 나는 숨소리도 이해했다.
‘확실히 내가 벗은 건 아니네.’
얘가 벗겨 줬지.
루비아나는 ‘얘가 벗겨 줬지’에서의 ‘얘’를 확인하기 위해, 힘겹게 몸을 돌렸다. 끙차.
으으. 허리가 알싸하게 아려 왔다. 푹 잤는데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곤했고.
‘이것도 체력을 꽤 소모하는 일이구나.’
허벅지 안쪽도 아프고, 아무튼 몸 상태가 안 좋았다.
땅속으로 숨은 마수를 찾으려 가시덤불을 기어 다니다 온몸에 타박상을 입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마수 주제에 용 비슷하게 생긴 놈의 꼬리에 허리를 감겨 이리 쿵 저리 퍽, 후려쳐질 때도 이렇게 몸이 쑤시진 않았던 것 같은데.
루비아나는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놈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자신이 이 지경이라면, 저놈은 당장 죽을 듯 얼굴이 시퍼레져서 헐떡이거나 이미 숨이 끊어져 있어야 마땅하거늘.
짜증 나게도 루이먼드는 멀쩡했다. 그냥 얼굴이 좀 해쓱해졌을 뿐이었다.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잘도 자고 있었다.
마주 보게 되니, 부어서 도톰해진 입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저 입술이 얼마나 자신을 물고 빨아댔던가? 언 호수에 사는 문어형 마수 빨판 같던 입술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살짝 부어만 있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문대 놓고도 이 정도라니.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내구성도 참 끝내주는 남편감이었다.
좋은 물건이었다. 오래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으으. 루비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허리를 주물렀다.
‘날 이렇게 만들고 저는 그냥 입술만 좀 붓고 말다니.’
울컥, 짜증이 나려는데 그 입술이 오물거리더니 후우, 숨을 뱉었다.
“으음.”
숨소리가 흐트러지기에 잠에서 깨려나 했건만, 루이먼드는 몸만 조금 뒤치락거리고 말았다.
눈을 뜨는 대신 손으로 침대 위를 훑었다. 더듬더듬, 무언가를 찾는 듯하더니 대뜸 루비아나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냥 움직이기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더니 겁 없이 허리를 쑥,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아픈 허리를 건드려?
저 감은 눈을 손가락으로 푹, 찍어 버릴까? 비무장 비전투인에게 가져선 안 될 나쁜 마음마저 들려는데.
“으음.”
루이먼드가 만족스러운 듯 옅게 웃으며 루비아나의 이마에 입 맞췄다.
“좀 더, 조금만 더 자요. 어제 너무 힘들었어…….”
투정 부리듯 웅얼대는 목소리가 달달한 숨과 섞였다.
루이먼드는 그렇게 루비아나를 꼭 끌어안은 채 다시 곤히 잠들었다.
잠결에 한 행동이었다. 나중에 깨어나면 본인은 기억도 못 할. 뭔가를 노리고 한 여우 짓이 아닌 게 분명한데.
효과가 끝내주게 좋았다. 루비아나는 순식간에 짜증이 녹아내리는 걸 실시간으로 경험했다.
‘이야. 이거 괜찮은데?’
루비아나는 잠시나마 허리의 통증마저 잊고, 루이먼드의 잠든 얼굴을 관람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그냥 눈 감고 숨만 쉬고 있는데. 그걸 보고만 있을 뿐인데.
재미있었다.
이대로 천년만년 계속 보고 있어도 안 질릴 것 같았다.
루비아나는 손을 들어, 부스스 흘러내린 은발을 쓸어 넘겨 주었다.
“으응. 응.”
루이먼드는 그 손에 제 뺨을 부볐다.
‘처음이라더니. 원래 남자라면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하는 건가?’
지난밤의 불같았던 정사도 그렇고, 잠결에도 철철 흘러넘치는 애교도 그렇고.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뺨에 손바닥을 찰싹 붙인 채로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헉 소리 나는 밤이었다. 동정 연하남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여러분. 동네방네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손이 덜덜 떨리기에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가만히 보고만 있었더니, 순간 눈빛이 바뀌고 사람이 돌변했다.
루비아나 쪽에서 지쳐 그만하라고 밀어내도, 자기는 아직 더 할 수 있다면서 계속 덤벼들고 또 덤벼들었다.
‘어? 해 뜬다.’
루이먼드에게 안긴 상태로 창밖에 희뿌옇게 번져 오는 새벽빛을 본 것도 같은데.
그때 지쳐 잠들었던 것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루이먼드가 흡혈 마수에게 피를 다 빨린 것처럼 해쓱해진 얼굴을 한 채로, 그녀의 몸을 닦아 주고 있었다.
“저, 최선을 다했습니다. 앞으로도 매일 밤, 더 최선을 다할 테니까…….”
뭔가 절박하고 비장한 맹세를 들은 것도 같은데,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이 몸에 닿는 게 기분 좋다는 느낌만 기억날 뿐.
“으음.”
루이먼드가 다시 한번 뒤척였다.
또 그러다가 말겠지 싶었는데, 이번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깜빡, 깜빡, 긴 속눈썹이 움직일 때마다 흐릿하던 검은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이윽고.
“……공작님.”
자신을 알아보고는, 배시시 웃는 모습이라니.
이름 말고 공작님 소리를 듣는 게 새삼 아쉬웠다. 이 상황에서라면 그렇게 싫어하는 ‘루비’라는 애칭으로 불려도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매일 아침 이 얼굴을 보며 눈뜨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할머니 말씀이 맞는 거 같아요.’
남자는 밖에서든 침대 위에서든 잘생기고 봐야 한다더니. 그 말이 참 진리였다.
어른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흰 빵이 나온다더니.
가악, 가악.
아침 까마귀의 울음이 을씨년스럽게 울렸다.
괜히 등골이 쭈뼛한 건, 역시나 저기 우뚝 서 있는 화려한 황성이 보여서겠지.
루비아나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울적해지려는데 루이먼드가 살짝 쉰 목소리로 인사하며, 뺨에 입을 맞췄다. 쪽.
“잘 잤어요?”
그러자 바로 등 뒤까지 성큼 다가왔던 두려움이 단번에 멀어졌다. 황제의 분노는 멀고, 침대 위 미인의 온기는 가까운 법이니.
혼날 땐 혼나더라도, 미인과의 여유로운 아침을 조금 더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럭저럭.”
루비아나는 제 목소리 역시 꽤 쉬어 있다는 걸 뒤늦게 확인하며, 제게 치대 오는 커다란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윽.”
침대에서 일어나다 말고 도로 쓰러졌다. 순간, 허리가 삐끗한 느낌이 들었다.
루이먼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당연하게 루비아나를 부축했다. 루비아나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어깨를 감싸 안고 천천히 욕실까지 걸어갔다.
‘부축이 꽤 익숙한데?’
루비아나는 의혹 어린 시선으로 루이먼드를 바라봤으나,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루이먼드의 서비스는 계속됐다.
그는 찬물과 뜨거운 물을 섞어 욕조를 채우고는 벽에 늘어선 서랍장 쪽으로 갔다.
그는 또 ‘익숙하게’ 서랍을 뒤져 향유와 입욕제를 찾아냈다.
“그래, 보통은 여기다 두더라.”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혼잣말 수준이었으나 루비아나에겐 똑똑히 들렸다.
‘이놈 봐라?’
벽에 기대서 있던 루비아나의 한쪽 입꼬리가 비쭉, 올라갔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계속 서랍을 열어 향을 확인하고는 나름 만족스러운 조합을 찾아냈다.
말린 꽃잎을 한 움큼 쥐어 욕조에 흩뿌렸다.
손을 욕조에 담그고 흔드는 모습이 어찌나 성스러워 보이는지. 욕조 물이 성수로 변하는 것 같았다.
손수 성수를 만들어 내는 루이먼드는 천사 같아 보였다.
‘그럼 난 천사와 침대 위에서 씨름한 위인이 되는 건가?’
어쩌면 역사책이 아니라 성서 쪽에 제 이름이 기록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루비아나가 실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목욕 준비를 마친 루이먼드는 양해를 구하고 루비아나를 부축했다.
루비아나는 뭔 짓을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자는 심정 반, 몸이 뻐근해 움직이기 싫은 마음 반, 그런 마음으로 루이먼드에게 몸을 내맡겼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를 욕조에 담갔다. 풍덩 집어넣는 게 아니라 살살, 조심조심.
아주 예의 바르고 ‘익숙한’ 손길이었다.
“으음.”
루비아나는 욕조에 몸을 담그자마자 만족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조금 전까지의 떨떠름했던 기분이 화악 풀렸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아, 좋다.’
루비아나는 그대로 물속에 늘어져 욕조에 머리를 기댔다.
물은 적당히 따뜻했다. 물에 섞인 향유와 말린 꽃잎이 몸을 휘감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향도 은은하니 신경을 거스르지 않았다.
아무튼, 모든 게 완벽했다.
첨벙.
루이먼드가 슬그머니 욕조에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루비아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루이먼드에게 웃어 주었다. 긴장 풀린 상태에서 나른하게 번지는 미소였다.
멋대로 욕조에 들어온 주제에 내외하듯 몸을 움츠리던 루이먼드는 그 미소가 허락의 표시라 생각하고는 좀 더 용기를 냈다.
손에 쥔 부드러운 스펀지로 루비아나의 어깨와 팔을 문질렀다.
“뭐 이렇게까지…….”
루비아나는 말을 하다 말았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완벽하고 ‘익숙한’ 시중이었다.
루비아나는 유서 깊은 룩센 백작가의 장녀로 태어나 자랐다. 태어나기 전부터 전담 유모와 하녀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수도원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목욕은 물론이거니와 옷 입는 것도 제 손으로 해 본 적이 드물었다.
하지만 이후의 삶은 꽤 팍팍해서, 혼자 씻는 걸 당연하게 만들었다.
이젠 시중받는 게 어색할 지경이었다. 수도에 올라와서도 목욕 시중 전담 하녀를 따로 두지 않았다.
그렇게 영영 목욕 시중 따위 받지 못하는 몸으로 살게 될 줄 알았건만. 루이먼드의 손길은 그녀의 어색한 몸뚱이를 단번에 함락했다.
루비아나는 편안하게 루이먼드의 손길을 즐기다가, 제 어깨를 문지르는 그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어어!”
무방비한 상태의 루이먼드가 루비아나 쪽으로 휘청였다. 루이먼드는 얼른 손으로 욕조 가장자리를 잡았다. 루비아나와 완전히 몸이 겹쳐지는 접촉 사고는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몸이 바짝 밀착하게 되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물이 출렁이며 촤악, 욕조 밖으로 넘쳤다.
루비아나는 욕조에 기대 느긋이 누웠다.
루이먼드는 그런 그녀를 덮치려는 듯 몸을 굽힌 자세로 굳었다. 욕조 가장자리를 잡은 손으로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루이먼드의 상체가 물 밖으로 드러났다.
뚝, 뚝.
젖은 셔츠에서 물방울이 떨어져내렸다. 루비아나의 눈이 그 물방울을 따라 움직였다.
루비아나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내린 루이먼드는 얼굴을 확 붉혔다.
“……!”
그의 명예를 위해 단언컨대, 자기 가슴을 보고 부끄러워한 것은 아니었다.
색이 옅은 입욕제를 써서 목욕물 색은 여전히 투명했다. 그 물속에 잠긴 루비아나의 몸이 고스란히 보여서 얼굴을 붉힌 것이었다.
오늘 아침 해가 뜰 때까지만 해도,
‘이대로 죽어도 좋아. 난 최선을 다했어.’
모든 힘을 다 쏟아붓고 하얗게 빛바래서는 파스스 재가 될 것처럼 굴었으면서.
그의 몸은 이미 기운을 되찾은지 오래였다. 누구보다 루이먼드 본인이 그걸 절실하게 실감했다.
‘정신 차려, 루이먼드. 고개 돌려. 넌 어제 충분히 수고했어. 면접은 끝났다고. 끈질기고 질척이는 남자만큼 꼴불견인 게 또 없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계속 자신을 타일렀지만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밤새 닿아 있었건만, 물속에서 보니 새삼 낯설고 부끄러웠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바라보는 루비아나의 태연한 얼굴마저도 자극적이었다.
지난밤엔 어두워서 잘 보지 못했다. 그저 손과 입술에 닿는 감촉으로만 느낄 뿐이었는데, 밝은 욕실에서 보니 루비아나의 몸엔 크고 작은 상처가 많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어깨의 상처였다.
날카로운 것에 관통당한 듯했는데, 손바닥 반만 한 상처에 사방으로 뻗친 듯 새살이 돋아 있었다.
반대쪽 어깨엔 대각선으로 그어 배꼽을 지나는 상처가 어깨띠처럼 둘러 있었다.
허리엔 도끼에 찍힌 것 같은 상처가 있었고, 가슴과 배에는 뭔가에 긁히고 찔린 듯한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허벅지에도, 무릎에도, 발목에까지 상처가 가득했다. 한쪽 허벅지엔 쇠로 달군 채찍에 감긴 듯한 상흔이 있었다.
그 상처들 위에, 루이먼드가 남긴 자국이 잔뜩 꽃피어 있었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온갖 상처로 가득한 몸. 어떤 지옥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걸 증명하는 생명력 가득한 강인한 몸을 자신의 흔적으로 덮었다는 게 이상하리만치 짜릿했다.
짜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기어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나지막한 한숨으로 완성되었는데.
흩어진 한숨 뒤에 남는 건, 허기였다.
미처 자국을 남기지 못한 상처 위를 마저 깨물고 자국을 남기고 싶었다.
욕심이었다. 아니, 욕심을 넘어선 욕망이었다.
루이먼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근처에 떨어뜨렸을 스펀지를 찾아 욕조 밖으로 손을 뻗었다.
“어, 어디 갔지?”
“다 구경했습니까?”
루비아나가 물었다.
“으왓.”
루이먼드가 몸을 뒤로 젖혔다. 출렁, 물이 또 한 번 흘러넘쳤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 어, 아니, 아니요. 여기서 하고 싶다는 건 아니었고, 음, 저 진짜 잘하고 회복도 빠르다고 어필하고 싶은, 그런 파렴치한 생각은 절대 안 했습니다.”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을 더듬더듬 쏟아 내고는 곧바로 후회했다.
‘미친.’
루이먼드는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뭘 한다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루이먼드에게는 다시없을 기회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깜짝 놀란 척 되물었다.
“네? 제가 뭐라고 했나요?”
“…….”
루비아나는 ‘난 네가 방금 한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줄줄 읊어 주려다가 말았다.
못 알아들은 것과 아예 듣지 못한 것은 다른 의미인데, 그걸 분간치 못하는 놈을 남편으로 삼아도 될까 싶었다.
‘그래, 그 정도 멍청한 것은 괜찮단다. 잘생겼잖니.’라고 말하는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요, 할머니. 너무 수상쩍게 ‘익숙한’ 건 좀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루비아나는 기억 속 할머니에게 말하고는, 루이먼드에게 나른히 웃어 보였다.
“뭐, 내가 잘못 들었나 봅니다.”
“예, 예. 그러실 겁니다. 저는 절대 어젯밤에 했던 것을 지금 여기서 또 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이대로 가볍게 넘어가려나? 루이먼드가 안도하려는 찰나.
“물 온도가 적절해서 마음에 드는데, 잘도 맞추는군요.”
루비아나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이 정도가 몸의 피로를 풀기에 딱 좋은, 온도인 거 같아서…….”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이 똑, 떨어져 내렸다.
“아까 벽장을 열어 본 건?”
“보통 집마다 입욕제와 향유를 두는 곳이 비슷하더군요. 그래서 열어 봤는데 이 댁 역시 다른 집들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안마도 아주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좀 잘합니다. 결혼하고 나면 언제든지 또 해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로 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물론이지요. 처음엔 너무 세게 잡는다, 너무 살살이라 간지럽기만 하다, 많이 핀잔 듣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하다 보니 금방 늘더라고요.”
루이먼드는 순순히 대답했다. 제 말이 남에게 어떻게 들릴지 따위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얼굴로 헤실헤실 웃기까지 했다. 참 해맑았다.
루비아나는 점점 더 ‘이놈 봐라?’ 싶어졌다
집마다 두는 곳이 비슷한 걸 알려면 얼마나 많은 집을 돌아다녀야 했을까?
딱 기분 좋을 정도로 팔다리를 주무르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자의 팔다리를 주물럭거렸을까?
어차피 자신을 만나기 전 과거의 일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기면 될 일이긴 한데.
짜증이 났다.
나른하게 풀어져 있던 녹색 눈이 싸늘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풀어졌다. 그 냉기를 단번에 풀어 버린 건, 그녀의 기분을 그렇게 만들었던 당사자였다.
“저, 공작님. 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어젯밤 일을 지금 마저 이어 가도 될까요?”
그저 가깝기만 했던 두 얼굴이 좀 더 밀착했다. 서로의 숨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루이먼드의 얼굴이 어쩐지 다급해 보였다.
“침대에서 하는 것과는 또 다릅니다. 색다를 거예요.”
얼굴만큼이나 급해 보이는 손이 루비아나의 허리를 휘감았다.
“아아.”
루비아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잡아 내렸다.
그러고 보면,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은 진지하게 생각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짜증 나는 생각은 나중에.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