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31)

***

그 미뤄 두었던 생각이란 걸 하기엔 혼자 느긋이 말을 모는 지금이 딱 좋을 것 같은데.

“으으.”

말이 타닥타닥 걸을 때마다 몸이 들썩이며 여기가 쑤시고 저기가 저리니,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평소라면 허벅지로 말의 몸통을 꽉 조여 상체가 흔들리는 걸 막았을 텐데. 내내 혹사당한 고관절은 제 힘을 다하지 못했다.

“아으으.”

루비아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제 충성스러운 말의 갈기를 움켜쥐었다.

“너, 요즘 나한테 불만 있니? 좀 더 승차감 좋을 순 없어?”

괜히 말을 구박했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뜰 땐 그럭저럭 버틸 만했는데. 욕조에서 두 판 하고 나오니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루이먼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귀찮아하는 루비아나를 솜씨 좋게 씻겨 주었다.

소파에 늘어진 흐물거리는 루비아나를 껴안고,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탈탈 말려 주었다.

머리를 말려 주는 손길이 편해 깜빡 졸 뻔했는데, 시녀장이 문을 두드렸다.

모시는 주인의 식사를 거를 수 없다는 충성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은 아니었다. 황궁에서 사람이 와 루비아나의 입궁을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시녀장은 일단 간단한 식사거리를 가져왔고, 루비아나와 루이먼드가 트레이로 날라 온 음식에 막 손을 대려 할 때 본래의 용건을 말했다.

“공작님, 황궁에서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서둘러 입궁……”

쨍그랑.

루이먼드가 포크를 떨어뜨렸다.

루비아나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루이먼드의 입을 빵으로 막아 버렸다. 시녀장 앞에서 괜한 말을 할까 봐 막은 것이었다.

루비아나는 시녀장이 황제인 칼레나가 보내 준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시녀장의 재촉을 귓등으로 흘리며 아주 천천히 식사를 마쳤다. 평소 안 먹던 후식까지 가져오라 했다.

아이스크림이 은그릇에 담겨 나오자, 손도 안 대고 지켜보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아이스크림을 완전히 녹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를 연구하고자 했다.

물론 아이스크림이 반도 녹기 전에 시녀장에게 끌려 올라가야 했다.

눈 깜짝할 새 예복으로 갈아입고 말 위에 올라탄 뒤, 끝까지 사연 많아 보이는 눈빛으로 절 쳐다보는 루이먼드에게 배웅을 받으며 길을 나섰다.

뭔가 안심이 될 말을 해 주고는 싶은데, 칼레나를 만나기 전까진 아무것도 확실히 약속해 줄 수 없는지라, 말을 아꼈다.

오래도록 뒤통수가 따가웠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출발한 길. 루이먼드의 원한이라도 스몄는지 승마감이 영 좋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울적한 얼굴로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 번 말갈기를 움켜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어우. 으아.”

루비아나는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갈 때는 반드시 마차를 불러 타고 가자. 그런데 마차는 승차감이 더 낫나?’

이런 생각을 하며 알현실로 갔는데, 알현실이 텅 비어 있었다.

허리를 부여잡고 멍하니 서 있자니, 시종장이 다가왔다.

“폐하께선 아직 침실에 계십니다. 그쪽으로 가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아니, 난 꼭 여기서 폐하를 뵙고 싶은데.”

루비아나는 가지 않으려 버텼다.

혼날 게 있을 때는 공적인 장소에서 만나야 했다. 그래야 남들 눈과 격식을 의식해 혼날 것도 덜 혼나고, 싸울 것도 덜 싸우고 그러지.

“폐하께서는 아직 침실에 계십니다.”

“기다릴 수 있어.”

“폐하께서 이미 공작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만.”

“제국법에 따르면……”

“그 제국법 위에 계신 분이 폐하 아니셨던가요?”

“아아.”

루비아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뒤늦게 인사를 건넸다.

“건강히 잘 지내는 것 같군.”

“공작님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시종장이 허허, 웃었다. 안 그래도 주름진 얼굴이 더 쭈글쭈글해졌다.

“공작님께서도 평소와 다르지 않으신 듯하여 다행입니다.”

시종장이 루비아나의 허리를 보며 말했다. 루비아나는 슬그머니, 허리를 부여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시종장은 루비아나가 태어나기 전부터 룩센 백작저의 집사로 있던 사람이었다.

루비아나와 칼레나는 어릴 적, 그를 저택 복도에 죽 늘어선 초상화, 도자기 같은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늘 곁에 있어 주었으니까.

칼레나가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왕의 시종장이 되었다. 그래도 되겠냐고 묻는 칼레나에게, 루비아나는 무조건 괜찮다고 말했다. 아니, 제발 데려가 달라고 말했던 것도 같았다.

“그나저나 식사는 제때 하고 계신 겁니까? 들어오시는 모습을 뵈니 걸음걸이가 부실하고, 상체가 휘청이는 것이 꼭 밤새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고 오시는 모양새십니다. 저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혹시 지난밤과 오늘 아침, 평소에 한 적 없고 굳이 할 필요성도 못 느끼던 격한 운동을 하시다 근육이 매우 놀란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이른 아침에 의사를 불러 진료를 받으셨다면 상태가 나아지셨을 텐데, 보아하니 의사에게 보이긴커녕 말을 타고 오며 상처 부위를 악화시키시진 않았나 걱정이 될 뿐입니다. 워낙 덜렁거리시고 털털한 성품이셔서, 그런 공작님을 잘 보살펴 드리라고 폐하께서 특별히 시녀장을 딸려 보내셨는데……”

이 잔소리꾼을 떠나보낼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시끄러워.”

“진심이 아니신 것을 잘 압니다, 만약 정말 제 잔소리가 듣기 싫으셨다면……”

“으아.”

루비아나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래도 종알종알 들려오는 잔소리를 아예 막지는 못했다.

시종장의 입술은 진정 강철로 만든 주둥이였다.

이제 마흔? 쉰쯤 됐을까? 젊었을 때도 말이 많았는데, 나이가 드니 말이 더 많아졌다.

‘레나는 이 잔소리를 어떻게 버티는지 모르겠네.’

루비아나는 그토록 가고 싶지 않던 황제의 침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칼레나를 침실에서 보는 것과 굳이 알현실에서 버티며 시종장의 잔소리를 듣는 것.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해야 했다. 그게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시종장을 보낸 게 분명해.’

어우, 이렇게 똑똑하니까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되지. 루비아나는 동생의 현명함에 감탄하며 이를 벅벅 갈았다.

빠른 발걸음에 어깨에 두른 망토가 펄럭였다. 검은 망토에 은실로 수놓은 아쉴레앙 공작가의 문장이 선명히 드러났다.

“아쉴레앙 공작이다.”

“그 피의 공작?”

“오늘도 역시나 무시무시하군.”

오가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은 망토를 휘날리며 걷는 루비아나를 바라보며 감히 말 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잔뜩 굳은 얼굴, 성난 기색은 사람들을 겁먹게 했다. 간간이 인상을 찡그리며 허리를 두드리는 모습이 사람들의 상상을 더욱 부추겼다.

“어젯밤도 분명, 밤의 어둠을 틈타 수십 명의 사람을 죽였겠지.”

“어쩌면 수도에 몰래 숨어든 마수의 왕을 잡은 걸지도 몰라. 거대한 소머리 같은 대가리를 쑥 뽑아내고, 피범벅이 되어서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대. 내 친구의 사돈의 팔촌의 아내의 육촌의 오촌이 봤댔어.”

“난 감히 폐하께 반기를 든 옛 왕국 복원 세력을 쓸어버렸다고 들었는데? 새벽에, 폐하께 보고할 게 있다면서 피투성이가 돼서 왔대. 이 황궁으로!”

“황궁에 폐하께서 하사하신 아쉴레앙 공작의 방, 거기 욕조는 아직도 핏물로 출렁인다던데?”

루비아나는 코너를 돌아 사람들이 안 보이자 옷에 코를 묻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나한테 피 냄새가 나나?”

“설마요. 그럼 제가 공작님을 폐하께 모시고 가겠습니까?”

“그렇지?”

시종장이 아니라면 아닌 게 맞으니, 루비아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황제의 침실로 들어갔다.

봐도 봐도 적응 안 되는 곳이었다. 화려하다 못해 웅장함까지 느껴지는 침실이라니. 여기도 황금, 저기도 황금. 천장까지 황금이었다.

‘이런 데서 잠이 오나?’

기가 질려 눈가가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제국의 단 셋뿐인 공작의 배포가 고작 이 정도인데.

“어서 와.”

이곳에서 매일 잠드는 황제, 칼레나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푹 잔 듯 개운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행이긴 한데.’

루비아나는 금가루 박힌 대리석을 밟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칼레나는 침대에 반쯤 누운 채로 시녀들의 안마를 받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침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존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둘뿐이니까 편하게 굴어, 언니.”

“제가 어찌 감히……”

“며칠 전엔 어찌 감히 그랬어?”

“음…….”

“우리 언니가 새삼 왜 이러실까? 새삼 혈육의 정보다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더 커졌을 리는 없고.”

“위에서부터 제국의 예법을 철저히 지켜야지 제국의 기강이 바로 산다는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아니, 그건 답이 아닌 거 같은데.”

칼레나가 생긋, 웃었다.

막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도 예뻤다. 작게 웃는 것만으로도 주변이 환해졌고.

칼레나의 머리카락을 빗고, 어깨와 손발을 주무르던 시녀들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칼레나의 눈치를 살피던 루비아나는 작게 혀를 찼다.

‘수틀렸네.’

루비아나는 칼레나의 웃음을 보는 순간, 칼레나가 화났다고 확신했다.

“언니, 나한테 뭐 잘못했지?”

“음…….”

화난 칼레나에게 정곡을 찔리기까지 했다.

루비아나는 변명 대신 침묵을 택했다. 칼레나는 그런 루비아나를 보며 또 생긋, 웃어 보였다.

“할 말이 많은가 보네. 다들 잠깐 나가 있으렴.”

칼레나가 시종장과 시녀들을 내보냈다.

둘만 남게 되자, 루비아나는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어제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굳이 객관적인 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칼레나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테니까. 지금 루비아나에게 필요한 건, 자기 자신에 대한 변론이었다.

칼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아, 그랬단 말이지. 그래서 언니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는 거고.”

“뭐,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알았어. 결혼해. 승인해 줄게.”

“그러니까 나는 절대…… 뭐?”

“결혼하라고. 결혼하겠다는 거잖아?”

“어? 어. 그렇긴 한데.”

루비아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정말로? 괜찮아?”

“응. 해. 하라고.”

너무도 완벽한 승인이었다.

‘폭군의 사생아를 이용해 반란 세력을 일거에 소탕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한 건가?’

“아, 대신 나랑 다른 두 공작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거야.”

그건 아닌 듯했다.

‘이런.’

그제야 루비아나는 칼레나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칼레나는 계획을 포기하지도, 바꾸지도 않았다. 여전히 루이먼드를 미끼로 이용해 반란군 세력을 일거에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루비아나와 루이먼드의 결혼을 그 계획에 이용하려는 듯했다.

‘루이먼드가 내게 청혼하도록 일을 꾸미거나 한 건 아니겠지?’

칼레나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애써 부인했지만, 기다렸다는 듯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칼레나가 영 의심스러웠다.

“너, 설마……”

“설마?”

“아니지?”

“뭐가?”

“…….”

“언니? 뭐가?”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루비아나는 고개를 흔들며 어지러운 생각을 털어 냈다. 칼레나는 그런 루비아나를 보며 비죽, 웃었다.

“미리 말했으니까, 섭섭해하지 마.”

“그래.”

루비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와 두 공작이 참석하지 않은 자신의 결혼식을 상상해 보았다.

결혼식을 시작할 때부터 귀족들이 수군댈 것이고, 결혼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런 소문이 퍼지리라.

아쉴레앙 공작이 폭군의 사생아에게 홀려 결혼을 강행했다. 폭군의 사생아 때문에 황제와 아쉴레앙 공작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막 세워진 제국의 기둥 하나에 금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금이, 적들을 속이기 위한 가짜 금이라는 걸 알아차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부디 그 안에 그레이움 백작과 오딜 후작이 없어야 할 텐데.

‘나한테 3년의 계약 결혼을 제안했지. 이혼한 뒤엔 사랑하는 여인과 멀리 떠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그런 걸 텐데.’

루이먼드도 좀 걱정됐다.

이대로라면 그는 3년 후 계약 결혼 생활이 끝나자마자 반란 세력의 핵심으로 지목돼 죽임당할 것이다.

그건 막고 싶었다. 어젯밤 쌓은 정도 있고, 앞으로 3년간 함께 살며 쌓을 정도 있는데.

“레나, 네 계획 중간에 끼어들어 사고 친 건 미안한데……”

네 계획이 뭔지는 알겠는데, 이왕 내가 건드린 사람인데 어떻게 좀 안 될까? 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니야, 안 미안해도 돼. 언니는 미남한테 약하니까.”

칼레나가 선수 쳐 말했다. 응. 안 돼.

“……아니거든.”

“아니긴. 펠트하르그 공작도 그래서 살려 준 거잖아.”

“살려 준 거 아니야. 자기가 알아서 산 거지.”

“그전에도 싹 다 죽었고 그 이후에도 싹 다 죽었는데, 펠트하르그 공작만 용케 살아남았다?”

“대신 눈 하나 날아갔잖아.”

“아하? 죽는 것보다 눈알 하나 잃는 게 더 어렵다?”

“황제씩이나 돼서 눈알이 뭐냐, 눈알이? 그리고 너 언니 말하는데 자꾸 말꼬리 잡고 늘어질래?”

“왜? 황제는 눈알을 눈알이라고 하면 안 돼?”

칼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정말 모르겠다는 듯 가식적인 표정이 아주 일품이었다.

루비아나는 그 눈빛을 피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종장 어디 갔어?’

예법에 빠삭한 시종장이라면 분명 황제가 눈알을 눈알이라고 말하면 안 될 이유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잔소리를 쏟아부어 줄 것이고.

하지만 시종장은 눈에 띄지 않았다. 조금 전, 자매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며 훈훈한 미소를 짓고 나갔으니까.

‘나가랬다고 정말 다 나가 버리면 어떡해?’

루비아나는 허술한 황궁 경비에 분통을 터뜨렸다. 겉으로 말고 속으로만.

‘누구든, 특히 시종장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 옆에 붙어 있어야지. 황제가 말꼬리 붙잡고 늘어지면서 충성스러운 공작 하나를 말려 죽이려고 드는데, 이걸 가만 놔둬?’

루비아나는 자신을 이런 위험 속에 놔두고 유유히 사라진 시종장을 원망하며, 굳게 닫힌 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칼레나는 그런 루비아나의 뒤통수에 대고 노래하듯 말했다.

“아아, 펠트하르그 공작은 실력이 너-어무 뛰어나서 언니의 화살을 다 피한 거구나. 그 전에, 그 후에 죽은 사람들은 다 펠트하르그 공작만 못해서 죽은 거고.”

“……아마?”

루비아나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칼레나의 구박을 피하려다 졸지에 카드릭을 대단한 놈이라 칭찬하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아졌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때 살짝 졸렸던 거 같아. 배고파서 힘이 없었던 것도 같고.’

이렇게 다시 말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흐응.”

칼레나의 눈이 루비아나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역시, 내가 그때……”

“3년, 3년이면 충분하지?”

칼레나가 루비아나의 어깨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 배고파서 힘이 없…… 어? 3년?”

“왜? 모자라?”

“아니, 그건 아닌데…….”

“그게 아니면 뭐? 너무 길어?”

“아니, 그것도 아니긴 한데.”

“그럼 뭐?”

“콕 집어 3년이라기에 놀라서.”

아닌 게 아니라 루비아나는 정말로 놀랐다.

‘요즘 수도에서는 뭐만 하면 3년이라고 말하는 게 유행인 건가?’

분명 요 몇 년 사이 수도에 이상한 전염병이 돈 게 분명했다. 고작 몇 년 북부에 가 있었다고 사람 얼굴 못 알아보는 귀족들. 무조건 3년 약정부터 거는 황제와 폭군의 사생아라니.

“예쁜 얼굴도 2년이면 질린대. 그건 특히 더 예쁘니까, 시간이 좀 더 필요할지 몰라서 3년을 부른 거야.”

칼레나는 루비아나의 의심쩍다는 눈빛을 보며 변명하듯 말했다.

‘누가 보면 나한테 사람 붙여 놓은 걸 지레 찔려 저러는 줄 알겠네.’

루비아나는 그런 칼레나를 멀뚱히 바라보았고, 칼레나는 그 눈빛을 오래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3년이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음, 싫은 건 아닌데…….”

루비아나는 턱을 문지르며 잠깐 고민했다.

‘그 얼굴을 고작 3년 봤다고 질릴까?’

웬만해선 안 질릴 것 같은데.

“아무튼, 언니는 외할머니랑 똑같아. 외모만 밝혀.”

루비아나의 표정을 읽은 칼레나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래? 아니거든!”

“맞아. 그러니까 내가 뭘 하려는지 알면서도 건드린 거잖아. 얼굴 보고는. 어?”

“…….”

“그럴 줄 알았어.”

칼레나가 대놓고 루비아나를 비웃었다.

“아니거든. 그리고 그렇게 웃지 마.”

“그럼 울까?”

“그냥, 황제처럼 좀 위엄 있게 웃어.”

“언니, 가끔 시종장보다 언니가 더 깐깐하게 구는 거 알아?”

“깐깐한 게 아니라…….”

루비아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칼레나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파란 눈이 오싹하리만큼 매섭게 빛났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말을 하다 까먹어서.”

“까먹은 말, 내가 맞혀 볼까?”

“아니, 굳이……”

“황제답게 굴랍시고, 내가 귀찮고 피곤해졌으면 싶은 거잖아.”

정답. 완벽한 정답이었다.

“…….”

루비아나는 침묵을 택했다.

“언니, 언니가 말하는 황제다운 게 뭐야?”

니가 그러고도 언니냐고 섭섭해하거나 짜증 낼 줄 알았건만. 칼레나는 오히려 생긋, 웃어 보였다.

“내 행동이 곧 황제다운 거야, 언니.”

칼레나의 말투가 더없이 오만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오만이었다.

루비아나는 잠깐, 먼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대를 이어 계속, 계속…… 제국의 황제가 될 칼레나의 후손들의 모습을.

다들 그럭저럭 칼레나를 닮았을 것이다. 하나같이 초대 황제를 존경한다며 칼레나의 행동, 말투 따위를 그대로 따라 하고자 노력할 테고. 그게 황제다운 걸 테니까.

……굳이 오래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 꼴을 보느니 죽고 말지.

루비아나는 얼굴을 구겼다.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

“뭘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칼레나가 깔깔 웃으며 루비아나를 상상에서 건져 주었다. 루비아나는 현실로 돌아오며 뒤늦게 어깨를 떨었다.

‘내 후손들에게 미안해지네.’

대대로 황제에게 충성해야 할 미래의 아쉴레앙 공작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는 바였다.

“아, 언니. 애는 얼마든지 낳아도 돼. 언니와 그거 사이에 낳은 아이라면 예쁘기는 하겠다.”

칼레나가 짝,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덕분에 루비아나는 미래의 아쉴레앙 공작들에게 가졌던 죄책감을 금방 털어 낼 수 있었다.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닮은 아이를 상상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된 거지?”

“뭐, 대충은.”

“그럼, 이번엔 내 말 좀 들어 봐. 언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

“어? 갑자기 급한 일이……”

루비아나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다 어정쩡하게 일어선 상태로 칼레나에게 붙잡혔다.

“온 김에 일이나 좀 하고 가라는 건데, 왜 정색하고 그래? 언니, 내가 싫어졌어?”

“지금, 일 떠맡기면 싫어질 것 같아. 저번에 맡긴 것도 아직 다 못 했단 말이야.”

“그럼 이거랑 그거랑 같이 해치우면 되겠네. 언닌 적이 몰릴수록 강해지잖아.”

“……다시 북부로 가도 될까? 슬슬, 마수들이 날뛸 것 같아. 그런 예감이 들어.”

“어머? 그 예쁜이를 데리고? 가자마자 얼어 죽을 텐데?”

“털옷을 칭칭 감으면 돼.”

“아하?”

칼레나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루비아나를 째려보았다.

“왜?”

“안 데리고 간단 말은 안 하네. 그새 푹 빠졌나 봐?”

“아…….”

이런 식으로 유도 신문을 하다니. 치사하게.

“어디 한번 데려가 봐. 아쉴레앙 공작이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북부를 제국에서 독립시키려고 폐왕의 유일한 핏줄을 들고 날랐다는 소문이 퍼질 테니까.”

칼레나는 살벌한 예언을 서슴지 않았다. 만약 운 좋게 그런 소문이 생기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 소문이 온 제국에 퍼지도록 만들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돋보였다.

“내가 네 앞에서 뭔 말을 하겠냐?”

어휴. 루비아나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알면 말조심해.”

“네에, 네에. 폐하.”

“말조심하는 김에 일도 열심히 하고.”

“여기서 더?”

“응. 더.”

“북부가 그리워질 날이 올 줄이야.”

어휴. 루비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했다.

눈앞에서, 널 모함해 반역자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루비아나는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칼레나 역시 루비아나의 반역 따위는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 태연했다.

그렇게 자매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어느 것 하나 진지할 것 없는, 농담 따먹기 수준의 대화였다.

3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루이먼드는 어떻게 될지, 그때 루이먼드와 루비아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정말 살아남을 수 있는 건지 등등,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오가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

‘결국, 루이먼드는 안 되지만, 루이먼드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살려 주겠다는 건가? 몰래 도망칠 구멍을 만들어 줘야겠네.’

귀찮은 일이 자꾸 생기는구나. 루비아나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난감해했다.

‘이제 언니는 그걸, 몰래 빼돌릴 궁리를 하겠지?’

칼레나는 그런 루비아나를 따사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건 이득인 걸까, 해로운 걸까?

루비아나는 서른이 다 되어서도 답을 알지 못했다. 그저, 원래 자매란 게 이런 거겠지 싶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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