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31)

***

어쨌거나 루비아나는 생각보다 쉽게 결혼 허락을 받았다. 황제의 인장이 박힌 공식 허가서는 며칠 뒤 받기로 했고.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냥 가게? 아침 먹고 가.”

“먹고 왔어.”

“그럼 점심이라 생각하고 먹어.”

“점심 먹을 시간이 아니잖아.”

“뭐 그리 융통성이 없어? 북부에서는 삼시 세끼, 제시간에 꼬박꼬박 챙겨 먹었나 보지? 마수들이, 밥때는 지켜 줬어?”

“내가 지키겠다고 하면 지키는 거지.”

이번엔 루비아나가 오만할 차례였다. 마수 주제에 내 식사 시간을 방해해? 내가 밥 먹겠다고 하면 지들이 어쩔 거야? 그녀의 얼굴은 대략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고, 마수들의 왕 납셨네요.”

“왕은 무슨. 제 백성 죽이는 왕도 있나?”

“있었잖아.”

“…….”

누구? 라고 묻지 않아도 됐다. 그게 누군지는 칼레나도, 루비아나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죽었잖아.”

루비아나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그래, 죽였지. 내가.”

칼레나의 목소리는 여전히 명랑했다.

“그래. 네가.”

“그러니까 나랑 아침 먹자.”

“…….”

“뭐야, 그 표정?”

“그게 왜 그렇게 이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사양할게. 진짜 배불러.”

루비아나는 같이 식사하자고 매달리는 황제를 버려두고 단호하게 돌아섰다.

황제와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만 있다면야 열두 번 아침을 먹었어도 배고파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이 신하 된 도리이건만.

황제의 신임을 듬뿍 받는 아쉴레앙 공작은 감히 황제의 식사 제안을 거절했다.

“내 총애가 언제까지나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배고픈 데다가 식사 제안을 퇴짜 맞은 황제는 난폭해졌다.

“아침 한 번 같이 안 먹어 줬다고 식을 총애는 아니지 않나?”

배부른 아쉴레앙 공작은 느긋했다.

“쳇. 혼자 먹기 싫다고.”

“미안. 다음엔 안 먹고 올게.”

“됐어, 미안하단 말은 누가 못 해? 그렇게 가고 싶으면 가 봐.”

칼레나는 조금 전의 루비아나처럼 뚱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루비아나는 칼레나에게 정중히 인사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저거 봐, 저거 봐. 집에 잘생긴 남자 하나 앉혀 놓으니 아주 동생은 안중에도 없어? 가란다고 휙 가는 것 좀 봐.”

칼레나는 루비아나의 뒤통수에 대고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시종장에게 ‘아직 결혼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남자한테 폭 빠져서는 동생이랑 아침밥도 같이 안 먹어 주는 언니를 과연 언니라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하소연하며 홀로 늦은 아침을 먹었다.

“두 분의 우애가 여전하시니, 저는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시종장은 스테이크를 써는 칼레나 옆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방금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날 버리고 그놈한테 갔다니까!”

칼레나는 스테이크를 씹으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

칼레나는 식사 후 드레스를 갈아입고 머리를 시녀들에게 맡기며, 어제 보다 만 서류를 팔랑팔랑 넘겼다.

빛나는 금빛 고수머리를 돌돌 말아 우아하게 틀어 올렸을 때였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시종장이 돌아와 슬쩍 말을 걸었다.

“폐하, 펠트하르그 공작님께서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그래.”

칼레나는 손을 까딱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물러나 있으라는 뜻이었다.

“폐하.”

하지만 시종장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게 그가 황제의 시종장일 수 있는 이유였다.

“아쉴레앙 공작님보다 훨씬 일찍 황궁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제3 알현실에 데려다 놓으라고 했잖아.”

칼레나가 성의 없이 대꾸했다.

고지식한 카드릭은 칼레나가 저를 따돌리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제3 알현실에서 묵묵히 대기하고 있었다.

여태 제3 알현실에 버티고 있는 카드릭은 불만 한마디 없이 대기하고 있건만, 아직도 카드릭이 거기 있나 보고 온 시종장이 더 애달파하며 자꾸 말을 꺼냈다.

“펠트하르그 공작님을 홀대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어쩌긴, 그러려니 하지. 그 헛소문을 믿고 나대는 멍청이들이 누군지 구경도 할 거야.”

“그 소문에 제가 얼마나 슬퍼할지는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으시는군요.”

“……들여보내.”

“예, 폐하.”

시종장은 제 일처럼 기뻐하며 펠트하르그 공작에게 달려갔다. 뒷모습이 어찌나 흥겨워 보이던지, 마치 손녀사위를 데리러 나가는 평범한 사람 같아 보였다.

시종장이 카드릭을 칼레나와 루비아나, 둘 중 누구에게 갖다 붙이고 싶어 하는지는 칼레나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나겠지?’

라고 생각하자마자.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당연히 카드릭이었다.

“어서 와, 경.”

칼레나는 웃는 낯으로 그를 반겼다.

“폐하.”

늘 과묵한 미남자의 입술 사이로, 으르렁대는 성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었다. 칼레나의 기분에 따라 황실 모욕죄, 반역죄로까지 몰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칼레나는 그의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치장을 돕는 시녀들을 물리고 단독으로 카드릭을 마주했다.

펠트하르그 공작, 카드릭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남자였다. 멀리서 보면 금발 녹안의 칼레나와 남매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유력한 황제의 부군 후보로 거론되고도 있었고. 놀랍게도 칼레나의 언니, 루비아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칼레나와 카드릭, 두 사람은 그저 그 소문을 끔찍해할 따름이었다.

‘도대체 몸가짐을 어떻게 하고 다니기에 그딴 소문이 도는 거야?’

‘폐하, 저야말로 참담한 심정입니다만.’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데? 아무리 봐도 경의 처신이 똑바르지 못한 탓이잖아?’

‘……젠장, 그 둔한 여자가.’

‘지금 내 앞에서 내 언니한테 욕하는 거야?’

‘…….’

세간의 소문과 달리 둘은 대략 이러한 사이였다.

“폐하.”

카드릭이 칼레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아니, 무릎을 바닥에 박았다. 쿵 소리가 크게 났다.

“그 정도로 궁이 부서지진 않을 거야. 황궁을 새로 지어 주고 싶다면 좀 더 힘을 내 봐.”

“폐하!”

하나뿐인 푸른 눈이 불이라도 뿜을 듯 이글이글 불타며 칼레나를 올려다보았다.

칼레나는 제 농담에 조금도 웃지 않는 이 충성스러운 신하를 너그러이 내려다보며, 예의상 말했다.

“오래 기다렸다면서? 미안.”

“허락, 해 주셨습니까?”

카드릭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뭘?”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정말 모르겠는걸. 난 그저 아침 일찍 언니를 만나서 가볍게 가족 일을 의논했을 뿐인데, 경이 그걸 어찌 알고 이렇게 나오는 건지 말이야.”

칼레나가 생긋, 웃어 보였다. 붉은 입술은 웃고 있었으나 두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카드릭은 그 차가운 눈을 보며 치를 떨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주먹 쥐고는 버럭 소리 질렀다.

“저는 안 된다고 했으면서!”

원망이 철철 흘러넘치는 외침이었다.

그 절절한 원망을 들은 칼레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응. 경은 안 돼.”

카드릭은 더욱 분노했다.

“저는 안 되고 폭군의 사생아 놈은 되는 이유가 뭡니까? 폐하께서 계획하는 일에도 방해되는 거 아닙니까?”

카드릭의 눈빛은, 한쪽밖에 없다는 걸 고려해 준다 해도 너무 불량했다. 충성을 맹세한 주인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차라리, 저 목을 베고 원한을 갚겠다고 이를 가는 눈빛이라 해야 마땅했다.

그래도 칼레나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죽여도 되니까. 하지만 경은 죽일 수 없잖아.”

건국 공신, 제국을 지탱하는 세 기둥 중 하나. 더없이 충성스럽고 능력 있는 신하. 그를 죽이는 건 막 건국한 제국에 큰 손해였다.

그에 비하면 폭군의 사생아, 학자의 집 만년 낙제자, 얼굴 말고는 볼 것 없는 미남 따위는 이용하고 버릴 패로 쓰기 딱 좋았다.

“설마,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칼레나는 오히려 카드릭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그리고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경은 우리 언니랑 결혼 못 해. 제국에 단 세 명뿐인 공작 중 두 명이 혼인한다니, 뭐야? 나한테 반역이라도 저지르겠다는 거야?”

칼레나는 화장대에 팔을 기대 턱을 괴고는 사르르, 웃어 보였다. 더없이 아름답고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신을 보좌하는 천사가 저런 모습이 아닐까? 감히 신에게 대적하는 악마가 정말 존재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칼레나의 모습은 양가의 감정을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카드릭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몸이 들썩이며 허리춤에 찬 검이 덜그럭, 소리를 냈다.

칼레나의 눈이 그 검에 닿았다.

“……!”

카드릭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황제는 세 공작을 지극히 신임하사, 황궁 어디에서도 검을 차고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세 공작은 황제를 지극히 존경하는 의미로, 시종에게 칼자루를 풀어 맡긴 뒤에야 황제를 알현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정신없이 달려온 카드릭은 검을 패용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칼레나는, 얇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주변에는 시녀도, 호위병도 한 명 없었다.

잠깐이면, 이 상태에서 손만 뻗으면 눈 깜짝할 새 검을 휘둘러 칼레나의 목을 벨 수 있었다. 그걸 칼레나도, 카드릭도 잘 알았다.

카드릭이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 또한.

카드릭은 분을 참으며 주먹을 움켜쥐고 퍽, 소리 나게 바닥을 쳤다. 손끝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뚝, 뚝, 흘러내렸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저는 폐하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내내 먼 친척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아, 찾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못 찾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찾았네. 친척이 남아 있었어.”

“먼 친척입니다.”

“그래도 친척은 친척이니까 찾아온 거 아냐?”

“예. 그 친척에게 작위를 넘길 계획이었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맨몸으로 아쉴레앙 공작에게 구혼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런. 그런 생각을 했었어?”

“하지만 그조차 허락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그랬나?”

“예. 그러셨습니다.”

“아아, 경처럼 능력 있는 신하를 놓치고 싶지 않았나 보지.”

칼레나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말했다.

“…….”

카드릭은 그런 칼레나를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쪽 눈으로도 ‘그건 비겁한 거짓말입니다.’라고 쏘아붙일 수 있었다.

칼레나는 그런 카드릭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잘생긴 외모, 검술로 탄탄히 다진 역삼각형의 몸매, 길게 뻗은 다리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도,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위압감은, 보통 사람은 버티기 힘들 정도로 강했다.

그의 몸속엔 몇백 년 동안 아이너스 왕가에 충성을 다하며 서쪽 변경을 지켜 온 변경백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부모와 어린 동생들이 폭군에게 죽임을 당했어도, 가문과 영지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국경을 지키며 싸웠던 젊은 변경백.

그는 반란의 깃발을 든 룩센 백작 칼레나에게도 굽히지 않았다. 루비아나에게 한쪽 눈을 잃고서도 끝까지 고개 숙이지 않았다.

칼레나를 직접 보고서야, 그녀가 진정 폭군을 무찌르고 왕국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진정한 반역자’임을 확신하고서야 항복했다.

‘약속해 주십시오. 백성을 지켜 주겠다고. 절대 폭군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그는 끝까지 제가 거느린 백성을 걱정했다.

자신이 반란군에 합류했는데 만약 칼레나가 폭군과 어정쩡하게 평화 협정을 맺는다면, 반란이 새 왕조 건립으로 끝나지 않게 된다면, 언제고 서부 백성이 피의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걱정했다.

올곧은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가 더 이상 서부의 변경백이 아님에도 옛 아덴 왕국 서부 지역의 백성은 아직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게 칼레나가 그를 서부에 봉작하지 않은 이유였다.

루비아나와 결혼한다면, 카드릭은 평생 루비아나에게 충실할 것이다.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지도 않을 것이고, 잡스러운 일로 루비아나를 피곤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몸이 튼튼하니 아이를 여럿 낳아 한 아이는 루비아나의 맹세대로 신께 바치고, 남은 아이들로 적당히 아쉴레앙 공작가와 펠트하르그 공작가를 잇게 해도 될 테지.

아니면 펠트하르그 공작가를 아쉴레앙 공작가에 흡수시켜도 좋고.

제국의 기둥이 셋이었다 둘이 되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아쉽다면 적당한 가문을 하나 승작시켜도 될 일이고.

그 승작을 미끼로 귀족들의 충성을 갈취하는 일은 또 얼마나 보람차고 즐거울까?

칼레나는 제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이 충성스럽고 성실한, 미혼의 공작을 가만 바라보았다.

이리저리 계산해 봐도, 루비아나의 남편감으로 손색없는 사내였다.

하지만.

그래도 안 됐다.

“진짜,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했잖아? 경은 내게 무척이나 소중한 신하이고……”

“폐하.”

“…….”

“…….”

하아. 칼레나는 한숨을 내쉬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우리 언니가 있었다면, 공은 진짜 혼났을 거야. 어디 감히, 황제에게 진짜 이유를 운운해?”

“폐하!”

“애꾸잖아.”

“……예?”

“경은, 눈이 하나 없잖아.”

“그게, 그게 무슨……?”

이글이글 불타오르던 카드릭이 단번에 푸시식, 식었다. 너무 어이없고 황당해 말까지 더듬었다.

“농담, 이시지요?”

“왜 농담이라고 생각해?”

“…….”

“경이 애꾸라서 싫어. 내 형부가 눈이 하나 없다니. 그게 뭐야!”

칼레나는 정말 싫다고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

카드릭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곧바로 벌컥, 화를 냈다. 아까보다 더 많이, 더 격렬하게.

“제가 왜 한쪽 눈이 없는지 모르십니까?”

“우리 언니 화살에 맞아서?”

“그걸 아시는 분이,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차라리 화살을 사타구니에 맞아 성불구자가 됐다면, 그래서 고자 남편을 언니에게 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차라리 이해했을 것이다. 카드릭 또한 감히, 고자 된 몸으로 루비아나의 남편이 되겠다고 욕심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고작 눈 하나, 그것도 루비아나가 직접 해 먹은 눈 때문에 루비아나의 남편이 될 수 없다니. 억지였다.

적어도 카드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앞서 말한, 두 공작가의 결합이 정치적으로 부담된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릴 따름이었다.

“절, 모욕하시는 겁니까?”

“절대 아냐.”

“그럼 도대체…….”

“흐음, 영 못 알아듣네.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해 줄까?”

칼레나가 들고 있던 서류를 돌돌 말아 툭, 카드릭의 어깨를 쳤다.

“여기, 다치고 나서. 우리 언니가 어떻게 싸웠는지 알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이미 반해 있었지만, 그 모습에 더더욱 반하게 되었는데.

“있잖아, 우리 언니가 정말 게으른데 그러면서 더러워지는 건 더 싫어하거든. 손에 피 같은 거 묻히는 거 정말 싫어하는 사람인데 여기, 여길 다쳐서.”

툭. 다시 툭. 칼레나가 카드릭의 어깨를 두 번 더 내리쳤다.

“한 손으론 활을 쏠 수 없으니까, 검을 들고 그 위험한 전쟁터를 뛰어다녔어.”

“저도, 그때 함께했습니다.”

“맞아. 기억나네. 우리 언니가 그렇게 열심히 고생하고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옆에서 우리 언니 보고 헤벌쭉 웃고 있었지?”

“헤벌쭉까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무튼.”

“…….”

“그러다 기어이 활로 쏴 죽여야 하는 놈이 보이면, 이에 골무를 끼고 활시위를 당겼어. 그거 때문에 언니 이가 많이 상했거든.”

카드릭의 얼굴이 굳었다.

“내 언니 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주제에, 우리 언니랑 결혼하겠다고 덤벼?”

톡. 칼레나가 돌돌 만 종이 끝으로 카드릭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니까 경은 안 돼.”

“……그건 정당한 결투였습니다.”

카드릭은 바로 반박했다. 하지만 말을 하는 본인도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랬지.”

“그리고 저 역시 그에 준하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한쪽 눈을 잃지 않았습니까!”

“응. 그랬지.”

“그때 제가 반격하지 않았다면, 아쉴레앙 공작은 분명 제게 다시 활을 쏘거나 단검을 날렸을 테고 저는 필히 죽었을 겁니다.”

“당연히 그랬겠지.”

이번엔 자부심이 뿜뿜 들어가 있었다. 우리 언니가 뭐, 그 정도는 기본으로 하지.

“그건 정당방…….”

카드릭은 말을 하다 멈췄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매우, 그럴 법하게 느껴졌다.

“……제가 그때 죽었기를 바라시는 겁, 니까?”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아니겠지. 이런 심정으로 칼레나를 올려다보았건만.

“설마. 이렇게 유능하고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경을 내가 왜?”

칼레나는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 뭘 하나? 표정은 그게 아닌 것을.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그때, 제가 그렇게 해서라도 맞서지 않았다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알아. 안다니까.”

“그런데 그것 때문에 제가, 아쉴레앙 공작의 남편이 되는 걸 허락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응.”

“그럼 그때, 제가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죽었어야지.”

그것도 몰랐냐는 듯, 칼레나가 상냥하게 말해 주었다.

“…….”

“알겠지? 그러니까 안 돼.”

칼레나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했다.

카드릭은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계속 칼레나와 대화하다 보니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고 말았다.

“그럼, 폭군의 사생아 놈은요?”

경쟁자를 물고 늘어지는 것. 딱히 폭군의 사생아 따위를 라이벌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경,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아니면 오늘만 이해력이 떨어지는 건가? 아까 말했잖아.”

“지금, 제가 제정신일 것 같습니까?”

“제정신이지 않을 건 또 뭐 있어?”

칼레나는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하?”

카드릭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식이 정말로, 아쉴레앙 공작을 사랑해서 구혼하는 것 같습니까? 그놈이야말로 아쉴레앙 공작에게 달려드는 날파리 중 제일 질 나쁘고 하찮은 놈입니다. 그저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감히 아쉴레앙 공작을 이용하려고 하는……”

“음, 그런 것 같더라고.”

칼레나가 카드릭의 말을 싹둑 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따분해 보였다. 이미 알고 있는 걸 왜 구구절절 설명하느냐는 듯이.

카드릭은 그제야 자신이 흥분하여 깜빡 잊고 있던 걸 다시 떠올렸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자신이 알고 있는 걸 그녀가 모를 리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그놈을 아쉴레앙 공작에게……?”

“언니는 잘생긴 걸 좋아해.”

“…….”

카드릭은 또 한 번 울컥했다.

‘내가 눈 하나만 더 멀쩡했어도 그놈쯤은.’

카드릭의 마음을 알아챈 건지, 칼레나가 피식 웃으며 말을 더했다.

“그리고 약한데, 약하면서 아등바등하는 거에 약해. 귀찮다고 하면서도 자꾸 눈에 담고 도와주려고 하거든.”

“…….”

“언니가 좀, 그래.”

룩센 백작가의 장녀일 때부터 그랬다. 그녀는 저택의 고용인들을 엄히 단속하고 관리하는 후계자였으나 고용인들의 사정을 살펴 약이니 돈이니, 필요한 것들을 몰래 쥐여 주는 헤픈 고용주이기도 했다.

북부로 떠났을 때마저도 그러했다.

‘어차피 범죄자들이야. 지배받기 싫다고 도망간 야인들이고. 마수랑 다를 거 없어. 거치적거리면 함께 쓸어버려.’

칼레나는 루비아나에게 북부에 숨어든 범죄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주었다.

자신에게 일일이 보고하고 허락받지 말고 마음껏 날뛰라고 내려 준 것인데. 루비아나는 굳이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범죄자들을 두들겨 패 갱생시켰다.

그런 루비아나에게 예쁘고 가련한 폭군의 사생아라니. 칼레나가 보기엔 이보다 더 훌륭한 조합이 또 없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야. 언니한테 제일 중요한 건 나니까.’

칼레나는 어깨에 걸친 숄을, 정확히는 그 숄에 덧붙인 낡은 레이스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경, 이게 뭔지 알아?”

“숄입니다.”

“언니가 열다섯 번째 생일 선물로 받은 거야.”

“……?”

성의 없이 대꾸하던 카드릭이 눈을 치켜떴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낡은 레이스에 닿았다. 칼레나는 자랑하듯 레이스를 쓸어내렸다.

“언니는 이걸 아껴서 잘 입는 드레스에도 달지 않고 비밀 서랍에 넣어 두었어. 가끔 꺼내서 만져 보기만 하고 다시 넣어 두고, 그러더라고.”

“그게 왜……?”

카드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래전이긴 하나 그 역시 한때는 형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형제들과 장난감 하나를 두고 치고받고 싸웠던 게 기억났다.

“뺏으셨군요.”

“언니가 줬어.”

“네. 그게 뺏었다는 겁니다.”

흥, 칼레나는 코웃음을 쳤다.

“언니 눈에 예뻐 보이는 게 내 눈에는 안 예뻐 보이겠어? 그래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빼내서 두르고 다녔지. 언니한테 달라고 엄청 졸랐고.”

“네. 그렇게 뺏으셨군요.”

“언니가 준 거라니까.”

“…….”

“계속 안 된다고 거절하고, 만지지 말라고 화내긴 했는데, 그래도 결국 나중에 나한테 줬어.”

칼레나가 보란 듯이 숄을 여몄다.

“폭군의 사생아가 그 레이스라는 말씀이십니까?”

칼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게 언니를 이용하려고 한다고? 그게 뭐 어때서? 그게 예쁘고 요사스럽게 구는 것도 모자라 불쌍한 척까지 하며 언니의 마음을 뺏어도 괜찮아. 상관없어.”

녹색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래도 결국, 내가 죽여 달라고 하면 죽여 줄 테니까.”

개미가 인간의 발등에 올라가서 ‘이 인간은 내 탈것이다.’라고 말해도, 인간은 화내지 않는다. 아니, 개미가 자신을 탈것으로 이용하려 하는지도 모르고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발등에서 주르륵 미끄러진 개미를, 아무 감흥 없이 밟아 죽이겠지.

칼레나에게 루이먼드는 개미만도 못한 존재였다. 그가 루비아나를 이용한다느니, 좋아하는 척 구혼을 한다느니 어쩌니 하는 말은 그녀의 기분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카드릭은 납득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늘, 제가 그녀에게 구혼하거나 제 마음을 고백하는 걸 막으셨지요. 하지만 제가 감히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들을 치워 버리는 건 늘 지켜만 보셨습니다.”

“그랬지.”

“이번에도 지켜만 보시겠지요?”

그는 매사에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개미 한 마리라 할지라도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전쟁터에서 상대편을 몰살했던 것 또한 언제나 그였다.

‘내가 그녀의 남편이 될 수 없다면, 누구도 그녀의 남편이 될 수 없지.’

서부인 특유의 냉정하고 거친 성미가 푸른 눈에 스쳤다.

“멋진 눈이네. 하나뿐이라 아쉬울 정도야. 언니도 너무하지. 어쩜 저 예쁜 걸 그렇게 단번에 맞혀 버릴 수 있대?”

칼레나는 그의 눈빛이 돌변한 걸 보며 생긋, 웃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루비아나에게 꼬인 날파리를 놔두라는 경고나 권고나 조언이나 당부 따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개미를 같잖게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결혼 승낙을 해 준 것과는 별개로.

“흥, 그러니까 누가 아침 같이 안 먹고 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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