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31)

***

“에취.”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루비아나는 재채기를 하고 또 했다.

평소 안 걸리던 감기에 갑자기 오늘 걸릴 리는 없고.

“누가 내 욕을 신나게 하고 있나?”

루비아나는 코를 훌쩍이다 또 한 번 재채기했다. 에취.

돌아가는 길은 황궁으로 갈 때보다 편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니 굳었던 몸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시큰하니 몸이 쑤시고 아픈 것도 좀 가시는 것 같고.

‘그나저나 역시 레나는 죽일 생각이구나.’

루비아나는 말을 천천히 몰며 칼레나와의 대화를 복기했다.

‘죽이기 전에 적당할 때 빼돌릴까?’

3년이 다 지나기 전에. 한 달이나 두 달쯤. 사랑하는 여자가 누군지 불게 하여 함께 도망치게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루비아나는 칼레나가 절 얼마나 총애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걸 적당히 이용할 줄도 알았다.

“설마 날 죽이기야 하겠어?”

아니, 그래도 언니인데 설마 죽이랴 하는 태평한 마음도 없잖았다. 그냥 좀 화나 내고 말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저택으로 돌아왔는데.

저택이 소란스러웠다. 저택 주인이 돌아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하인과 하녀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시녀장이 문 앞에 서 있지도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루비아나가 나고 들 땐 꼭꼭 나와 보는, 쓸데없이 성실한 시녀장 아니던가?

루비아나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무슨 일이지?”

루비아나는 지나가던 하인을 불러 세웠다.

하인은 루비아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 넙죽 허리를 굽혔다.

“도, 돌아오셨습니까.”

“…….”

“아, 무슨 일이냐면…….”

하인이 허둥지둥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루비아나의 눈썹이 꿈틀, 했다.

“뭐? 내 남편감이 없어져?”

황제에게 결혼 허락을 못 받을까 봐 걱정하면 했지, 하룻밤을 같이 보낸 남편감이 없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하?”

어이없네.

타고 온 말은 주인이 챙겨 주지 않자 알아서 마구간으로 걸어갔다. 루비아나는 말고삐가 손에서 스르륵, 사라지는 것도 모른 채 저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녹색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았지만 바람에 붉은 머리카락이 날려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열 받아 보였다.

‘이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그분을 찾으려고 했던 건데.’

하인은 내심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털퍼덕 엎어졌다.

“죄, 죄송합니다아아아앗!”

눈치 없는 고함이 저택에 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 바람에 다른 하인과 하녀들이 루비아나의 귀환을 알아차렸다.

“헉.”

“아, 안 돼.”

“……우린, 죽을 거야.”

모두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져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아무래도 한 달 남짓한 시간은, 냉혹한 북부 공작의 무시무시한 소문에 익숙한 고용인들의 인식을 바꾸기엔 너무 짧았던 듯했다.

소란스럽던 저택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겁에 질린 침묵을 깬 건 걸어 들어오는 루비아나의 발걸음 소리였다. 뚜벅, 뚜벅.

“공작님, 오셨습니까.”

뒤늦게 시녀장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지?”

루비아나는 장갑을 벗어 건네며 물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날카로워진 걸 시녀장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죄송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말을 듣고 싶다고 하진 않았는데.”

“잠깐 한눈판 사이에 그만…….”

시녀장이 보기 드물게 시무룩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건?”

루비아나가 계단을 오르며 물었다. 시녀장은 기운 없이 뒤따르며 대답했다.

“동료분께서 방문하셔서 응접실에서 티타임을 즐기셨습니다. 그런 뒤엔 방으로 돌아가셔서……”

“동료가 방문해?”

‘그가 여기에 있는 걸 동료가 어떻게 알고?’

순간 의문이 들었으나 곧, 자신이 어젯밤 얼마나 요란하게 루이먼드를 들고 왔는지를 떠올리곤 입을 꾹 다물었다.

“예. 학자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신 황실 관리분이셨습니다.”

“이름은?”

“피오니 로렌. 이번에 준남작 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

여자 이름이었다. 루비아나가 계단 중간에서 멈칫, 했다.

“여자?”

“예. 여성분이셨습니다.”

“…….”

“친한 친구 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분명 그러했습니다.”

시녀장이 급히 말을 덧붙였으나 루비아나의 귀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 여자가 그 상대인 건가?’

냉혹하고 잔인한 북부의 공작과 사랑 없는 결혼을 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랑.

아무리 뒷조사를 해 봐도 진하게 엮인 여성을 발견하지 못해 의아했건만.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설마 그 학자의 집에서 연애했을 줄이야.’

정말 얼굴값 한번 제대로 하는 남자였다. 그 공부벌레 소굴에서, 오로지 공부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에서 연애의 꽃을 피우다니.

‘그런데 왜 도망간 거지?’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보니 새삼, 사랑 없는 계약 결혼이 못 할 짓이다 싶었을까? 그래서 모든 걸 다 내던지고 사랑의 도피를 했다?

‘설마.’

아무리 학자의 집 낙제생이어도 그런 멍청한 선택을 했을 리가. 그랬다간 그레이움 백작의 추격뿐 아니라 황제와 아쉴레앙 공작의 추격까지 받게 될 텐데?

차라리 그레이움 백작이 사람을 보내 납치했다는 쪽이 더 신빙성 있었다.

“그레이움 백작이 오진 않았나?”

“공작님께서 나가신 후 몰려오긴 했습니다만 안으로 들이진 않았습니다.”

문전박대했다는 건데.

“경비도 철저히 했습니다.”

시녀장이 힘주어 말했다. 아무래도 그레이움 백작이 감히 아쉴레앙 공작저의 높은 담을 넘어 몰래 침입하려다가 걸린 듯했다.

그레이움 백작이 밖에서 소란스럽게 굴었다 해도, 시녀장이 잘 막아 낸 걸 보면 안심했을 텐데.

‘도망갔다고?’

아무래도 말이 안 됐다.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방을 청소하는 하녀입니다.”

시녀장이 부르자 구석에 서 있던 하녀가 벌벌 떨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루비아나가 내려다보자, 하녀는 경기를 일으키듯 벌벌 떨었다. 당장 숨넘어가 기절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상태가 어땠지?”

“저, 저기……. 그, 그, 그, 그러니까…… 허억.”

기어이 호흡 곤란이 오는 듯했다. 루비아나는 쯧, 혀를 찼다.

“침구를 갈던 중이었는데 옆의 테이블에 앉아 기다려 주셨다고 합니다. 이상한 점은 없었고, 저택을 한번 둘러봐도 되냐고 묻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을 확인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비아나가 집무실을 겸해 쓰는 서재가 있는 서쪽 계단 너머로만 가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고, 침구 정리가 끝난 후 안내해 드리겠다고 했다고.

하지만 착하디착한 루이먼드는 하녀가 바쁜데 그런 폐를 끼칠 순 없다며 혼자 저택을 둘러보겠다고 방을 나섰다고 했다.

그렇게 아름답고 기품 있는 남자를 처음 봐 넋을 잃었단다. 루이먼드가 방을 나선 뒤에도 한참 뒤까지 멍하니 있었다는데.

‘그럴 수 있지.’

루비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미모가 어디 보통 미모인가? 면역력 없는 사람은 넋을 잃을 만했다. 칼레나와 카드릭, 루단테에게 익숙해진 자신마저도 순간순간 정신을 놓지 않았던가?

아무튼. 하녀는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리고는 시녀장에게 가서 보고했고, 시녀장은 급히 루이먼드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이상이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신 건 아닙니다.”

“확실해?”

“분명합니다.”

“그래? 저택을 어디까지 찾아봤지?”

루비아나는 다시 계단을 오르며 물었다.

시녀장이 저렇게 자신하니, 일단 저택 밖으로 도망치거나 납치된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저택 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건데.

‘왜? 왜 그런 의미 없는 짓을?’

“서쪽 계단을 제외한 모든 곳을 다 찾아봤습니다.”

“……뭐?”

계단 몇 개만 더 오르면 2층에 도착인데. 루비아나가 또 멈춰 서 버렸다. 뒤따르던 시녀장도 덩달아 멈춰 섰다.

“공작님?”

“서쪽 계단 너머는 왜 안 찾아봤어?”

루비아나는 어이가 없어 시녀장을 돌아보았다.

“저 아이가 그곳은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하니까요.”

“그래서 거긴 안 찾아봤다고?”

“저 아이가 분명히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안 찾아봤냐고?”

“웃으며 알았다고 그쪽으로는 실수로라도 안 가겠다고 대답하셨다고 했으니까요.”

시녀장이 밑에 서 있는 하녀를 내려다보았다. 하녀는 목이 부서져라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보십시오. 그렇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거긴 절대 안 갔을 거라고?”

“그렇게 우아하고 품위 있는 분께서 한번 안 그러겠다고 말씀하신 걸 어기실 리 없지 않습니까?”

“…….”

그 우아하고 품위 있는 분이 지난밤, 내 침대에 맨몸으로 뛰어들었단다, 이 사람아.

“두 번 우아하고 품위 있으면 내 침대 다 부서졌겠다.”

“예?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다 알아들었으면서 못 알아들은 척하지 마.”

하녀야 그렇다 치고 시녀장마저 그 미모에 홀려 이성을 잃다니.

“서재로 가 보지.”

루비아나는 망토를 벗지도 않고 서쪽 계단으로 몸을 틀었다.

“예? 공작님, 루이먼드 님을 찾으셔야지요.”

“그래서 찾으러 가잖아.”

“그런데 서재엔 왜……?”

루비아나를 말리려던 시녀장이 우뚝, 멈춰 섰다.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앞으로 두고두고 놀려 먹어야지.’

드디어 시녀장에게 트집 걸 거리를 얻었다. 루비아나는 일단 그것에 만족하며 서쪽 회랑을 큰 보폭으로 걸었다. 급히 뒤따라오는 시녀장의 기척을 느끼면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녀의 서재엔 중요한 서류가 쌓여 있었다. 북부에 대한 것은 물론, 황제가 강제로 떠맡긴 제국 운영에 관한 것들까지.

그곳에 루이먼드가 숨어들어 중요한 서류를 읽어 보았다거나 빼돌렸다면, 일이 곤란해진다. 3년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이 저택에 묶여 있어야 될지도 모르는데.

“…….”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잠깐 마음이 솔깃해졌다.

‘그건 곤란해. 내가 북부로 가면 따라가야 하는데. 저택에 혼자 남겨 둘 순 없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평생 제 옆에 묶어 두려 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루비아나는 제 생각이 어디가 잘못된 건지 눈치채지 못했다.

서재 앞에 도착한 루비아나는 시녀장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고는 픽, 웃었다.

“허억, 허억. 공, 작님?”

겨우 도착한 시녀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까치발을 들어 루비아나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서재 안.

조용히 사라져 저택을 발칵 뒤집어 놓은 당사자가 거기에 있었다.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볕을 피하려 커다란 소파 뒤에 자리 잡고는 바닥에 얇은 담요 하나만 깐 채 엎드려 곤히 잠들어 있었다.

주변에는 온갖 책들이 쌓여 있고, 더러는 펼쳐져 있었다.

“……정말 여기 계셨군요.”

안도와 허무함이 뒤섞인 탄식.

“그래, 여기 있네. 내 남편감이.”

잠깐 잊어버린 줄 알았던 걸 되찾은 루비아나의 목소리는 꽤 부드럽게 누그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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