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31)

***

계단과 회랑을 거침없이 뚜벅뚜벅 걷던 루비아나가 발소리를 죽이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장 또한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었다.

루이먼드는 자신의 곁으로 누가 다가오는지도 모른 채 색색, 고른 숨만 내쉬었다.

“무슨 책이지?”

루비아나는 그의 발치에 놓인 책을 들어 표지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걸 읽는다고?”

시녀장은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다른 책들의 표지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나름의 생각으로 루이먼드를 대변했다.

“학자의 집에서 순수한 학문만 공부하셨던 분이니, 이런 게 재미있으셨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가?”

루비아나는 손에 든 <그 영애는 오늘도 도망칩니다>를 도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중에 내 부군의 서재를 꾸릴 때, 이런 책 위주로 넣어 줘. 취향인 것 같은데.”

“황궁에 가신 일이 잘 풀리셨나 보군요.”

시녀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조금 전 기죽어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뭐, 그럭저럭.”

저렇게 좋아하다니. 루비아나는 괜히 민망해 목덜미를 긁적였다.

“당장 결혼식 준비를……”

“어허, 앞서 나가지 말고.”

냉큼 돌아서는 시녀장의 옷깃을 잡고 대롱 들어 올리자,

“하지만 지금 당장 준비해도 늦습니다.”

시녀장이 허공에 뜬 채로 발을 동동 굴렀다.

“언제 할 생각인데 늦는대?”

“언제든 최대한 빨리요!”

“폐하의 칙령이 도착하면, 그때부터 준비해도 늦지 않아.”

“하지만!”

“그보다 먼저 도착할 게 있는데, 황궁에서 사람이 와서 뭘 전해 주면 이리로 가져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밖에서 히힝- 말 우는 소리가 들렸다.

“왔네, 일거리.”

루비아나는 창밖을 내다보기 전, 발밑부터 살펴보았다. 혹여 밖의 저 소리 때문에 발치의 미인이 깨기라도 할까 봐.

다행히도 루이먼드는 깨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깨닫고는 실없이 웃어 버렸다.

이 태평한 미인을 3년 뒤에 살려 주려면, 당분간 열심히 황제의 비위를 맞춰야겠지. 떠맡기는 일도 열심히 하고.

새삼, 가장의 책임이 두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다행히도 그 무게는 충분히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녀장이 다녀오는 동안 루비아나는 망토를 벗어 소파에 걸쳐 두고, 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어 팔을 걷었다. 그러고는 폭신한 소파와 안락한 마호가니 책상을 놔두고 굳이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역시 여기가 딱이네.”

잠든 루이먼드를 정면에서 볼 수 있는 명당이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느긋하게 잠든 루이먼드를 관람하고 있자니, 금세 시녀장이 돌아왔다

시녀장은 황실에서 온 서류 더미 외에도 담요와 포도주, 약간의 치즈와 주전부리를 알차게 챙겨 왔다. 그걸로도 모자라 벌건 숯이 가득 든 화로까지 가져왔다.

물론 화로는 하인 둘이 뒤뚱거리며 들고 들어왔다.

“아직 낮이잖아. 난 지금도 더운데.”

“공작님을 위해 가져온 게 아닙니다.”

“음…….”

루비아나는 당장 내다 놓으라고 명령하려다가 말았다.

시녀장은 여전히 바닥에 누워 자는 루이먼드와 덩달아 바닥에 자리 잡은 루비아나를 보고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여기 계속 계시려고요?”

“너무 곤히 자는데, 옮기다 잘못해서 깨면 아깝잖아.”

키가 커서 업어도 공주님 안듯 들어도 발이 바닥에 질질 끌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인들에게 옮기라 할 수도 없고.

‘뭐 문제 있나?’라는 표정으로 시녀장을 쳐다보자, 시녀장은 또 한 번 한숨을 쉬려다 말았다. 하인들이 보고 있는데, 혹여나 루비아나의 체신이 상할까 염려해서였다.

“그렇다고 공작님마저 바닥에 앉아 계실 필요가 있나요?”

‘냉큼 일어나시죠.’라는 말을 돌리고 돌려 부드럽게 말했건만.

루비아나는 알아듣지 못한 척했다. 대신 시녀장의 마음속 그늘을 단번에 걷히게 만들 수 있는 기특한 말 한마디를 던졌다.

“부부는 한 몸이라잖아.”

“……!”

시녀장의 얼굴이 대번 환해졌다.

“역시, 어서 결혼식 준비를……”

“앞서가지 말라니까. 폐하의 칙령이……”

“먼저죠. 예. 폐하의 명을 받자마자 당장 준비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겠습니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서로의 말을 끊어 먹었다.

시녀장은 서둘러 제가 가져온 것을 모두 내려놓고, 창가로 가 커튼을 쳤다. 혹여나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올라 꼼꼼하게 여미기까지 했다.

“그건 그냥 놔둬, 나 일해야 해.”

루비아나가 손에 든 서류를 팔랑이며 항의했으나 시녀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커튼을 친다고 해서 서류를 못 볼 정도로 어두워지는 건 아니었기에, 루비아나는 살짝 인상만 쓰고 말았다.

“부디 오붓한 시간 보내십시오.”

시녀장은 하인들을 데리고 잽싸게 서재를 나섰다. 문이 닫히기 전, 하인들을 단속하는 시녀장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공작님께서 직접 문을 열고 나오시기 전까지, 이 근처엔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해요.”

‘자는 사람하고 오붓한 시간은 무슨.’

루비아나는 닫힌 문을 지그시 한 번 노려봐 주고는, 시녀장에게 오염된 눈과 귀를 정화하고자 루이먼드를 보았다.

부인이 일하러 나갔다 돌아 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라니.

루비아나는 심히 만족스러웠다. 이곳을 안전하다 믿기에 저렇게 무방비하게 잠들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지난밤 그레이움 백작가에서 봤던 루이먼드의 모습이 떠올랐기에 지금의 모습이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왕눈이가 날 제 등 위에 태워 줬을 때가 생각나는군.’

루비아나는 북부에 두고 온 자신의 애완 와이번, 왕눈이를 떠올리며 우수에 젖었다.

북부에 바글바글한 마수 중 제일 상대하기 곤란한 마수가 와이번이었다. 하늘을 날며 괴성을 지르고 다니는데, 그 괴성은 아래 있는 인간들의 고막을 찢기에 충분했다. 날갯짓 때문에 생긴 바람은 폭풍우처럼 몰아쳐 주변을 초토화했고.

발톱은 또 얼마나 크고 단단한지, 하강하여 푹 찍으면, 인간이든 말이든 한 방에 몸을 관통했다.

왕눈이는 와이번 떼의 왕이라 불리는 녀석이었는데, 루비아나는 어느 날, 마음먹고 그놈을 때려잡아 산 채로 붙잡았다.

처음엔 길들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얼결에 산 채로 잡은 거라 일단 우리에 가둬 놨는데 어찌나 사납게 날뛰고 꼿꼿하게 굴던지, 산 채로 잡아 온 루비아나는 확 빈정이 상해 버렸다.

그래서 그냥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반대에 부딪혔다. 아랫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다. 죽여도 겨울에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때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는데, 창고에 아직 식량이 좀 남아 있었다. 그러니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살려서 기르다가, 식량이 부족한 겨울에 잡아 고기를 먹자는 게 부하들의 의견이었다.

아주 합리적인 의견이었기에 루비아나는 받아들였다.

왕눈이는 제 생명이 잠깐 연장된 줄 모르고 험하게 날뛰다가 계속 루비아나에게 얻어맞았다. 아무래도 밤중에 괴성을 질러 성안 사람들의 고막을 손상하는 게 가장 큰 죄였다.

그때마다 루비아나는 졸린 눈을 비비고 우리로 가 왕눈이를 철저하게 두들겨 팼다.

와이번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루비아나가 와이번을 산 채로 끌고 와 꼬박꼬박 밥을 주고 기른다는 말에 분노해 찾아왔다가 그 참상을 보고는 말없이 돌아섰다.

개중 마음이 약한 이는 루비아나에게 차라리 왕눈이를 고통 없이 죽여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흘러 가을이 끝날 즈음.

왕눈이가 결국 꼬랑지를 내렸다. 순순히 루비아나를 자신의 등에 태우고는 하늘을 훨훨 날며 항복을 선언했다. 와이번의 왕이 북부의 아쉴레앙 공작에게 굴복한 것이었다.

이후 왕눈이는 루비아나가 절 타고 다니며 다른 와이번들을 때려잡아도 그러려니 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아예 자신이 나서서 와이번들을 물어 죽이고 다녔다.

“동족들이 자신처럼 되는 걸 지켜보느니 차라리 내가 깔끔하게 죽여 주겠다, 뭐 이런 결사의 의지 같은 거 아닐까?”

“불쌍하군. 내가 살다 살다 와이번을 불쌍하게 여기는 날이 올 줄이야.”

북부인들은 혀를 끌끌 차며 왕눈이를 불쌍히 여겼다.

그러든지 말든지, 루비아나는 이 기특한 와이번을 겨울이 끝나도록 죽이지 않았다.

죽이긴커녕 왕눈이라는 이름까지 주고 직접 먹이를 챙겨 주었다. 이름을 왕눈이라고 지은 건, 눈이 다른 와이번에 비해 툭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좀 더 성의 있는 이름을 지어 주심이…….”

“발톱이 특히 날카로우니까 번뜩이? 아니면, 몸이 검은색이니 까망이?”

“……왕눈이가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좋아, 앞으로 네 이름은 왕눈이다. 왕눈아, 마음에 들지?”

키이이익-.

왕눈이는 애처롭게 낑낑댔다.

왕눈이는 더 이상 예전처럼 흉포하게 울지 않았다. 루비아나의 귀청을 날려 먹었다간 제 귀가 날아간다는 걸 숱하게 학습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왕눈이는, 루비아나가 “왕눈아.” 하고 부르면 한숨을 푹 내쉬고 느릿느릿하게 날아왔다.

“이젠 하다 하다, 저 마녀가 와이번을 타고 다니면서 와이번을 사냥하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사람이 와이번을 타고 다니는 걸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말해 뭐 해? 저번에 보니까 저 와이번한테 다른 와이번들 물어뜯고 오라고 명령까지 내리던데.”

“가지가지 하네, 진짜. 어제는 트롤을 구워 먹어 보자더니. 우웩.”

“제국의 황제라는 작자는 뭐 하는 놈이기에 저런 걸 북부로 보낸 거지?”

“자매 사이라잖냐.”

“그럼 거기 황제도 와이번 타고 다녀?”

“난들 아나? 본 적이 있어야지.”

대부분의 북부인은 와이번을 타고 날아다니는 루비아나를 뜨악하게 올려다보곤 했다.

모두 흉악한 범죄자들이었으나 루비아나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개과천선한 자들이었다.

북부에 숨어 살았기에 마수들이 앞마당 멍멍이만큼이나 익숙한 그들에게도, 와이번을 타고 날아다니는 루비아나의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는 듯했다.

북부인들의 경악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루비아나와 왕눈이는 오래도록 우정을 나누었다. 얼마나 사이가 깊어졌는지, 루비아나가 황제의 명을 받고 북부를 떠나게 되자 왕눈이는 하늘을 빙글빙글 돌며 그녀를 배웅하기까지 했다.

“그래, 나도 섭섭해.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폐하가 계시는 곳에 널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니.”

루비아나는 찡한 코끝을 문지르며 왕눈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대장, 아니, 공작님아. 쟤 저러는 거, 대장이 떠나는 게 기뻐서 그러는 거 같은디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딱 봐도 슬퍼하고 있잖아. 저 눈물 흘리는 눈이 안 보여?”

“그러니까 기뻐서 우는 거라고요.”

“내가 웬만하면 데려갔을 텐데…… 아쉽군.”

“여보세요? 대장? 제 말 듣고 계십니까?”

“왕눈아, 잘 있으렴. 곧 돌아오마.”

“쟨 대장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는다니까.”

“왕눈아, 식사 잘하고 건강해야 한다.”

그리 서글프게 헤어지고 수도로 왔건만, 수도에 왕눈이를 생각나게 하는 존재가 벌써 생겨 버렸다.

‘나중에 왕눈이가 보고 질투하지 말아야 할 텐데.’

루비아나는 걱정하면서도 슬그머니 번져 오는 미소를 누르지 못했다. 왕눈이와 루이먼드가 함께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괜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 한번 시간을 내서 같이 북부에나 다녀와 볼까?’

칼레나에게 말했던 것처럼 털옷을 칭칭 감으면, 루이먼드도 북부의 추위를 그럭저럭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은 건가? 벌써 가정을 꾸리는 게? 이 남자를 지킬 수 있겠어?’

문득, 섬뜩한 감각이 왼쪽 가슴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은은히 웃고 있던 루비아나의 얼굴이 단번에 싸늘해졌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는 꾸깃하게 구겨졌다.

“…….”

루비아나는 왕눈이처럼 강하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단지 아름답고 연약할 뿐인 루이먼드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부모를 한순간에 잃었던 기억. 오직 동생과 둘이서 살아남고자 버텼던 어린 시절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정말 이걸, 옆에 두어도 괜찮은 걸까?’

기분이 착 가라앉으며 착잡해지려는데 엎드려 팔을 괸 자세로 잠들어 있던 루이먼드가 몸을 뒤척였다. 아무래도 팔이 저린 듯했다.

“으응…….”

편한 자세를 찾고자 몸을 틀더니, 옆으로 누워 버렸다. 얼굴이 루비아나 쪽을 향했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헤헤 웃었다.

그 태평한 모습을 보노라니, 긴장이 풀렸다.

루비아나의 입가에 다시금 웃음이 어렸다.

“이제…… 남편 하나쯤은, 가져도 되겠지.”

지난밤, 딸꾹질하며 오들오들 떨던 사람이 이렇게 바뀌었지 않은가? 아쉴레앙 공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지금의 그녀는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엔 지킬 수 있으리라. 그때처럼 어리고 약하지 않으니까.

3년 후엔 끝날 관계라는 것도 부담감을 더는 데 도움이 됐다. 평생은 너무 멀고 버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3년은 아니었다.

3년이니까. 고작 3년.

불안과 부담에서 벗어나니, 금세 다른 게 신경 쓰였다.

‘3년 뒤엔 그 여자와 함께 떠나려나?’

피오니 로렌. 이른 아침부터 자신이 자리를 비운 틈에 용케 찾아와 루이먼드를 만나고 갔다는 학자의 집 여인.

“…….”

와그작. 조금 전보다 더 세게, 손에 든 종이가 구겨졌다.

감히 왕눈이가 자신 말고, 다른 놈이 준 사료 통에 고개를 처박았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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