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31)

***

타닥타닥. 뭔가 타는 소리가 들렸다.

“……?”

루이먼드는 희미하게 눈을 떠 앞을 보았다.

화로 위에서 우쭐우쭐 춤추는 불꽃이 보였다.

‘저 불이 번지면 불타 죽는 걸까……?’

아련함에 젖어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뭐? 목이 잘려서 죽는 게 아니고 타 죽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만 뜨고 앞을 보니, 루비아나가 보였다. 한 손에는 종이를, 다른 손에는 와인 잔을 들고 있었는데. 와인을 홀짝이며 서류를 화로에 던졌다.

화르륵, 종이에 불이 붙었다. 루이먼드는 그 불빛에 놀라 눈을 뜬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난 분명…….’

루이먼드는 눈을 껌벅이며 기억을 더듬었다.

***

루비아나가 황궁으로 떠난 뒤. 루이먼드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은 밤새 사람이 머물지 않아 썰렁했다.

루이먼드는 차게 식은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아,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눈을 떠 대화를 나눴고 함께 목욕도 했다. 식사도 함께했고, 황궁으로 떠나는 걸 배웅도 했다.

루이먼드는 그 모든 순간에 루비아나의 표정이 어땠는지, 목소리는 또 어땠는지, 하나하나 기억해 보려 애썼다.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기억 속의 루비아나는 항상 무표정했다. 목소리 또한 담담했다. 설레거나 기쁘거나 즐거운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이상하다. 왜지?’

소설 속 주인공들이 계약 결혼을 제안하면서 북부 대공이나 북부 공작이나 황태자와 첫날밤을 보내면.

북부 대공이나 황태자나 슬픈 출생의 비밀을 가진 공작 등등은 단번에 주인공의 매력에 퐁당 빠져서 정신 못 차렸다.

그런데 루비아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밤새 무리해 허리와 다리를 움직이는 게 불편하다고 기분 나빠했다.

한 욕조에 들어가는 건 허락해 줬으면서, 아침 식사할 땐 무슨 말만 하면 빵을 입에 처넣었다.

목소리도 듣기 싫으니 입 닥치고 빵이나 씹으라는 뜻인 게 분명했다. 황궁으로 떠날 때도 별다른 말 없이 휙 가 버렸다.

침대 위에서, 욕조 안에서, 둘만 있을 때는 너그러웠으면서. 시녀장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선 데면데면하게 굴다니.

이건 절대 소설 속에 나오는 차가운 북부의 대공이나 상처 많은 황태자나 출생의 비밀을 가진 황제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이건 마치…… 마치…….’

루이먼드는 참담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내 몸만 노리는, 하룻밤만 즐기고 말 생각인 사람 같잖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왜?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어젯밤 나의 노력이 하룻밤 데리고 놀 정도밖에 안 되었던 건가?’

이런 생각으로까지 치달으려 할 때, 피오니가 찾아왔다.

시녀장이 직접 찾아와 피오니의 방문 소식을 알렸다. 만나 보시겠냐는 말에, 루이먼드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냉큼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피오니라면, 내게 답을 줄 수 있을 거야.’

피오니는 학자의 집에서 뭇 학자들의 인정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우등생이었다. 분명,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고 있으리라.

루이먼드는 급히 응접실로 달려갔다. 얼마나 다급해 보이던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비밀의 연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천천히 걸으며 뒤따르던 시녀장의 얼굴에 쓴 미소가 어렸다.

“피오니 로렌, 학자의 집 출신 황실 관리입니다. 아마 공작님께서도 곧 조사 명령을 내리실 테지요. 미리 조사해 놓으세요.”

그녀는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는 사뿐사뿐 걸어 루이먼드를 뒤따랐다.

앞서 걸어간 루이먼드는 응접실에 얌전히 앉아 차를 홀짝이는 피오니를 보았다.

피오니는 평상복이 아니라 황실 관리의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루이먼드는 반가운 마음을 참지 못하고 피오니에게 매달렸다.

“왜 이래? 저리 가.”

피오니는 질색하고 루이먼드를 밀어냈다.

‘그래, 이래야 피오니답지.’

루이먼드는 순순히 떨어져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루이먼드가 피오니에게 매달리자 당황해 얼어 버렸던 하녀는 어느새 응접실에 도착한 시녀장의 지시를 받고 루이먼드에게 차를 내줬다.

“고마워요.”

루이먼드가 하녀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하녀의 얼굴은 금세 홍당무가 되었다.

‘이번 생에서 내 얼굴이 안 통하는 것도 아닌데 왜……?’

루이먼드는 아침에 휭하니 황궁으로 떠나 버린 루비아나를 다시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그렇게 무뚝뚝하게 가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역시 어젯밤에, 내가 부족했던 걸까?’

앞에 누가 앉아 있는지도 잊고 우울해지려는데.

챙-.

맑은 소리가 울렸다. 피오니가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티스푼으로 찻잔을 살짝 내리친 것이었다.

루이먼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은발이 찰랑찰랑, 찬란한 빛을 뿌렸다.

피오니 뒤에 서 있던 하녀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피오니는 못마땅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넌 늘 내 시력에 너무 안 좋아.”

“응, 미안. 미안.”

늘 듣던 말이기에, 루이먼드는 아무렇지 않게 흘려들었다.

“시력? 심장이 아니라 시력?”

문 앞에 서 있던 시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여기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오늘 아침에 출근해서 알았지.”

“아, 맞다. 출근.”

루이먼드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일단, 네 결근 사유서는 내가 제출해 놨어. 집안에 일이 있다고 썼고.”

피오니가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며 말했다.

“고마워.”

루이먼드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전에도 여러 번 도움을 받았고 늘 고마웠지만, 이번에는 더욱 고마웠다.

곧 아쉴레앙 공작의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데, 아니 꼭 되어야 하는데 근태가 불성실한 사내로 낙인찍혀서야 쓰나?

이런 작은 것에서마저 황제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황제는 루비아나의 동생이니까.

‘너무 앞서 나가는 생각인가?’

루이먼드는 민망해 헛기침했다. 흠흠.

피오니는 루이먼드의 얼굴을 보고는 쯧쯧, 혀를 찼다.

‘나날이 상태가 심각해지는군.’

잘생기면 뭘 하나? 제정신이 아닌 것을.

“뭐, 그렇게 고마워할 건 없어. 고마워하다 말고 혼자만의 망상에 빠진 것 같지만. 오늘은 내가 굳이 주절주절 대신 변명해 주지 않아도 다들 그러려니 해 주는 분위기였거든.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말이야.”

지금 내가 하는 말, 듣고는 있니? 알아들을 수는 있겠고? 너 제정신이긴 하지? 피오니가 이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문?”

“어젯밤에, 아쉴레앙 공작님이 널 그레이움 백작가에서 납치해 왔다며?”

“뭐?”

“소문에 따르면, 네 미모에 반한 아쉴레앙 공작이 밤늦게 그레이움 백작가에 쳐들어가서, 다른 여자와 결혼시키려던 그레이움 백작에게 맞서 널 끌고 나와 무턱대고 자기 집에 들어앉혔다더라.”

묘하게 비슷한데, 묘하게 달랐다.

“그런 소문이, 벌써 퍼졌어?”

“응. 아침에 출근해 보니까 다들 네 얘기만 하고 있던데.”

“…….”

“대답하기 곤란해?”

피오니가 다시 물었다.

“……그런 거 아냐. 그냥 아쉴레앙 공작님께서 내 사정을 알고 도와주신 것뿐이야.”

루이먼드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여기로 피난 와 있는 거야?”

“비슷해.”

“네가 아쉴레앙 공작님과 친분이 있는 줄 몰랐어. 귀족들은, 아무튼 어떻게든 다 친분이 있구나.”

“뭐, 그런 거지. 그보다, 날 찾아온 용건이 뭐야. 그거나 말해 봐.”

“어? 이거 물어보려고 온 건데.”

“…….”

“겸사겸사, 국장님께서 네 상태를 보고 오라고도 하셨고. 내일은 출근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오라셨어.”

“그럼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궁금한 걸 먼저 물어본 것뿐이야. 소문이 너무 사실 같아서, 혹시나 싶었거든. 아무튼 헛소문이란 말이지?”

그럼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피오니는 애초부터 소문 따윈 믿지도 않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루이먼드는 그런 피오니를 떨떠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소문을 믿지 않는데 아쉴레앙 공작가로 날 만나러 왔어?”

“일단 여기 와 보고 없으면, 그레이움 백작저에 가 보려고 했어.”

비겁한 거짓말이었다.

“아무튼, 여기 있어서 만날 수 있었으니까 된 거지. 내가 만약 소문 속의 한 가닥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그레이움 백작가부터 찾아갔으면 어떻게 됐겠어?”

하지만 현명한 선택이기도 했다.

“……곤란해졌겠지.”

루이먼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레이움 백작은 지금 날 아쉴레앙 공작에게 뺏기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일 테니까, 나랑 친한 피오니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걸 보고 그냥 돌려보냈을 리 없어.’

어쩌면 피오니를 인질로 잡고 루이먼드를 협박했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안전하길 원한다면 어서 그레이움 백작저로 돌아오라고.

상상만 했을 뿐인데, 몸이 다 떨렸다.

“잘했어, 잘했어.”

친구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도, 자신의 발로 그레이움 백작저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루이먼드는 영특한 친구의 선택을 칭찬했다.

“출근은, 당분간 힘들 것 같아. 이번 주는 아예 못 할 것 같고, 상황 봐서 다음 주도 그렇게 될 것 같아. 국장님께 대신 죄송하다는 말씀 좀 전해 줘.”

“이번 주랑 다음 주까지?”

“응.”

루이먼드는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절대 내 발로, 이 저택에서 걸어 나가지 않을 거야.’

성실한 근태 기록으로 황제에게 잘 보이겠다는 결심 따위는 바로 뒷전으로 밀렸다.

아쉴레앙 공작과의 결혼이 확실해질 때까지 이 저택에 꼭 붙어 있으리라.

‘버텨야지. 어떻게든 버텨서, 살아남아야지.’

루이먼드는 습관처럼, 제 목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알았어. 그렇게 전할게.”

피오니는 루이먼드가 장기 결근을 선언해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레이움 백작과 기 싸움을 하겠다며 한 달 가까이 무단결근했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상습 결근자였다.

그래서 여태 ‘시보’였다.

직급으로만 따지면, 피오니는 이미 루이먼드보다 세 단계나 높았다.

그리고 직급이 세 단계나 높은 피오니는, 해야 할 업무양도 세 배 이상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그녀는 용건이 끝나자마자 일어섰다. 루이먼드가 잡고 말고 할 틈도 주지 않았다.

“아, 그리고.”

척척 걸어 나가던 그녀가 빙글, 돌아 루이먼드를 바라봤다.

“응?”

“음, 괜한 오지랖일수도 있는데 네가 너무 기운 없어 보여서 말이야.”

결근계도 대신 써줘야 하고, 쓸데없이 잘생겨서 시력에 좋은 영향을 주지도 않는 친구지만. 그래도 친구는 친구였다.

피오니는 오늘 따라 기운 없어 보이는 루이먼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쉴레앙 공작가로 도망 올 정도면, 그레이움 백작과 정말 싸운 거겠지?’

피오니는 그저, 가족과 심한 갈등을 겪어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로해주고자 입을 열었다.

“너무 먼 곳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는 마. 진리는 하나지만, 도달하는 길은 여러 가지잖아? 네가 알고 있는 지식 속에 분명 길이 있을 거야.”

피오니는 제가 제2 전공을 공부하며 힘들어할 때, 지도 교수님께서 해 주셨던 말을 읊어 주었다.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생각하라고. 평소에 그랬듯 그레이움 백작 욕이나 실컷 하고 훌훌 털어내버리라는 의미에서 말한 거였는데.

“……!”

‘그래, 그거야.’

루이먼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루이먼드는 피오니의 손을 덥석 쥐고 붕붕 흔들었다.

“고마워!”

“어어? 어?”

“역시, 피오니. 넌 최고의 학자야.”

“아니, 뭐. 그건 당연한 말이긴 한데…… 고마우면 나중에 공작 부군이 돼서 나한테 산더미 같은 책을…… 그만 흔들어, 어지러워!”

피오니가 붕붕 흔들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넌 정말 최고야! 엄청나게 똑똑해! 어떻게 이렇게 똑똑할 수 있는 거야? 그래, 바로 그거라고! 내가 너무 멀리 보고 있었어! 진리는 항상 내 옆에 있었는데!”

“윽…… 으,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오늘 읽은 책 내용이, 머리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아. 그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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