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31)

***

피오니가 비틀거리며 떠났다. 루이먼드는 다시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얌전히 앉았다. 그리고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나가지 않고, 그 소설들을 다시 읽어 볼 수 있을까?’

피오니 가라사대, 길은 가까운 곳에 있다. 그건 곧, 자신에게 익숙한 학문 안에 진리가 있다는 뜻.

루이먼드는 제게 더없이 익숙하며,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주었던 소설들을 떠올렸다. 예를 들면,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그 영애는 오늘도 도망칩니다> 같은 책. 그 속에 담긴 진리가 필요했다.

문제는 그 책들을 어떻게 볼 수 있느냐였다.

이곳에 자리 잡을 때까지는 절대 제 발로 걸어 나갈 수 없다고 결심했다. 소설들은 저 밖 거리의 서점 선반에 꽂혀 있었고.

함부로 루비아나의 고용인들을 부려 밖에 나가 뭘 사 오라고 명령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 온 지 고작 하루. 굴러다니는 낙엽도 조심하며 몸을 사려야 할 시기였다. 벌써 이 집 사람이 된 것처럼 나대는 행동은 절대 금지.

‘그럼 어쩌지?’

길이 어디 있는지 아는데, 그 길을 찾아가는 게 문제였다.

루이먼드는 골똘히 고민하느라, 하녀가 방 청소를 하러 들어온 줄도 몰랐다.

하녀가 침구를 갈게 잠깐 일어나 달라고 부탁하고야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다. 루이먼드는 얼른 옆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계속 고민을 이어 나갔다.

그러다 문득, 베개를 팡팡 터는 하녀에게 시선이 닿았다.

‘혹시, 이 저택 하녀들이라면 한두 권 정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 영애는 오늘도 도망칩니다> 같은 소설들은 귀족 영애들뿐 아니라 평민 소녀들, 하인이나 하녀들도 즐겨 읽었다. 신분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두루 읽는 명작이랄까.

귀족과 평민이 함께 즐기는 대중문화라고 할 만했다. 이는 교양 학문 초대 학자로서의 소견이었다.

그러니까 저 하녀나 그녀의 동료들이 그 소설들을 가지고 있을 확률은 매우 높았다.

문제는 처음 보는 하녀에게 어떻게 말을 걸고 어떻게 책을 빌리느냐, 인데.

“음. 저기요, 아가씨.”

그건 루이먼드에게 매우, 매-우 쉬운 일이었다.

“네?”

힐끔힐끔 이쪽을 훔쳐보다가 제풀에 놀라 눈을 댕그랗게 뜨고 돌아서는 순진하고 귀여운 하녀님.

“고생이 많으시네요.”

루이먼드는 그녀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어 냈다.

의외였던 건, 평소 사람들의 접근이 금지된 루비아나의 서재에 그 소설들이 잔뜩 꽂혀 있다는 것이었다.

시녀장이 가끔, 하녀들의 신청을 받아 그 책들을 빼다 준다고 했다.

왜 냉혹한 북부의 악마인 아쉴레앙 공작의 서재에 연애 소설이 두 선반을 가득 채울 정도로 꽂혀 있는가?

추측하건대, 황제가 아쉴레앙 공작에게 이 저택을 선물할 때, 자기 언니가 저택 실내 장식 따위에 신경 쓸 리 없다고 생각하고는 미리 실내 장식까지 싹 해서 줬기 때문이리라.

그냥 저택만 주는 줄 알고 저택이나 사 놓았던 부하들은 갑자기 저택 안에 가구와 책까지 채워야 하는 현실에 절망했겠지.

커다란 서재를 급하게 채우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급한 김에 수도에서 가장 큰 책방 여러 곳의 책을 그냥 쓸어 왔으리라. 그 바람에 별의별 책이 다 꽂혀 있게 됐을 거고.

“하지만 시녀장님 말고 저희는 절대, 허락 없이 그곳으로 가면 안 돼요.”

그래서 재미있게 본 소설의 다음 편을 아직도 못 읽고 있다며, 하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루이먼드는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것 참 안됐네요. 그나저나 저도 절대, 실수로라도 서쪽 계단 쪽으로 가지 말아야겠네요.”

그러곤 유유히 서쪽 계단으로 갔다.

금지된 곳답게 근처에 다른 사람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들킬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이 서재에 도착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또한 당연한 말이지만 여덟 번째 삶을 사는 루이먼드에게 잠긴 문,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잠긴 문 따위, 옷핀 하나로도 열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가져와 봤지.”

아까 하녀의 허리춤에 꽂혀 있던 옷핀을 슬쩍한 것을 아주 유용하게 이용했다.

루이먼드는 손쉽게 문을 따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는 정말 컸다. 책장은 천장에 닿을 듯 높았고, 칸마다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루이먼드는 창가 근처의 책장에서 원하던 것을 발견했다. <그 영애는 오늘도 도망칩니다>는 물론이거니와 <늑대 공작의 아이를 품고>, <7년의 밤, 붙잡힌 백작 영애>, <냉혈한 황제와 도망친 남작 영애는>, <백 번의 도망, 백한 번의 청혼>, <집착하는 황제의 아이를 가지고 튀었습니다>까지. 루이먼드가 원했던 모든 책이 거기 다 있었다.

소설을 읽고 싶은가?

보고 싶다면 보게 해 주지.

와 봐라.

이 세상 모든 소설이 이곳에 있다.

아쉴레앙 공작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역시 아쉴레앙 공작.’

루이먼드는 감격하며, 두 선반에 빽빽하게 꽂힌 책들을 전부 뺐다. 그러고는 앉을 자리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가 앞에 훌륭한 마호가니 책상과 안락한 의자가 보였다. 서류가 더미째로 놓여 있는 걸 보니, 아쉴레앙 공작이 일하는 곳인 듯했다.

근처엔 보드라운 리넨으로 덮인 소파도 있었다. 폭신해 보이는 발받침도 있었고. 역시나 아쉴레앙 공작의 자리인 듯했다.

남의 서재에 몰래 들어온 것도 모자라 남의 자리까지 함부로 쓸 수는 없는 노릇.

루이먼드는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피해, 소파 뒤쪽 바닥에 자리 잡았다. 꺼내 온 책들을 주변에 잔뜩 쌓아 놓고는, 한 권 한 권 펼쳤다.

처음부터 한 장씩 다시 읽지 않아도 됐다. 어디쯤 어떤 내용이 있는지 훤했으니까.

피오니의 머릿속에 제국 법전이 통째로 들어 있다면, 루이먼드의 머릿속에는 <그 영애는 오늘도 도망칩니다>의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었다.

<그 영애는 오늘도 도망칩니다>.

“여기도.”

<늑대 공작의 아이를 품고>.

“그래, 여긴 첫 장에서 바로 나왔어.”

<7년의 밤, 붙잡힌 백작 영애>.

“여기도네.”

<냉혈한 황제와 도망친 남작 영애는>.

“여긴 좀 뒤에서 나왔어. 그래, 여기.”

<백 번의 도망, 백한 번의 청혼>.

“여기선 할 때마다 그랬는데…….”

<집착하는 황제의 아이를 가지고 튀었습니다>.

“여기도 앞부분에서 바로 그랬네.”

혹시나 싶어 살펴봤건만, 역시나 기억하고 있는 대로였다.

차가운 북부 대공도, 저주받은 늑대 공작도, 겉과 속이 다른 황태자도, 냉혈한 황제도, 황제의 사생아 대공도, 집착하는 황제도.

모두 다 여주인공과 첫날밤을 보낸 이후, 여주인공에게 본격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백 번의 도망, 백한 번의 청혼>은 한 권 동안 무려 백 번 동침하며, 하룻밤 잘 때마다 집착을 1단계에서부터 100단계까지 차근차근 보여 주었다.

“왜! 왜! 아쉴레앙 공작은, 안 그러는 건데!”

루이먼드는 <백 번의 도망, 백한 번의 청혼>의 백 번째 동침 부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바닥이 차가웠으나 마음이 더 시려 몸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왜, 나만…… 나만, 좋아하게 된 건데?”

억울했다.

책에선 주인공과 북부 공작이 서로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 분명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책에 묘사하기로, 북부 공작이든 황제든 황태자든 좋아하는 마음을 차마 표현하지는 못하고 귓불만 붉혔다. 주인공을 말없이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했다.

그래서 루이먼드는 혹여 자신도 책 속 주인공처럼 삽질을 할까 봐, 아침 식사 시간 내내 루비아나를 주의 깊게 살폈다.

혹시나 루비아나의 귓불이 붉어지지는 않는지, 루비아나가 식사하고 있는 자신을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는지.

결론은 아니요. 절대 아니요. 완전 아니요.

네, 정말입니다. 아쉴레앙 공작은 밤을 지새우다 못해 아침에 목욕까지 함께한 루이먼드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귓불을 붉히기는커녕 빵에 입을 처넣었답니다.

루이먼드는 슬퍼하며 고개를 떨궜으나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냐, 아직 포기하긴 일러.”

무엇 때문에 아쉴레앙 공작의 서재까지 숨어들어 왔단 말인가? 이렇게 낙담하고 절망하기 위해서는 아니지 않은가?

“내가, 아직 덜 봐서 그런 걸 거야.”

분명 책 속에 길이 있다.

도망도 연애도 결혼도 책으로 배운 학자의 집 출신 만년 낙제아, 회귀 8회 차, 폭군의 사생아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손을 뻗어 이전에 읽은 기억이 없는 제목의 소설을 붙잡았다.

<폭군의 사생아의 품속에 갇히다>.

제목이 아주 심금을 울렸다.

루이먼드는 힘차게 책을 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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