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31)

***

그리고 다시 좌절하여 엎어졌다.

“왜 다 첫날밤에만 반하는 건데……?”

읽은 기억 없는 책을 내리 일곱 권 독파했건만. 희망은 철저히 배신당했다. 책에 또 다른 길 따윈 없었다.

그 일곱 권의 책들도 무조건 첫날밤, 첫날밤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사랑도, 아이도.

‘난 왜 지난밤에 좀 더 노력하지 않았던가?’

루이먼드는 후회하며 책에 코를 박았다.

눈을 감으니, 어젯밤과 오늘 아침의 일이 떠올랐다.

‘아냐, 난 분명 최선을 다했어.’

얼마나 최선을 다했던지, 이제 와 생각해도 남사스러워서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으으.”

루이먼드는 혼자 있는 김에, 혼자 부끄러워하며 몸을 푸드덕거렸다.

한참을 혼자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다 보니, 급 피곤해졌다. 바닥이 워낙 차갑기도 하거니와 그런데도 아쉴레앙 공작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차가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지쳐서일까? 생각은 계속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 아쉴레앙 공작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쩌면 내일이라도 당장 그레이움 백작저로 돌아가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대로 하룻밤만 보내고, 버려지는 건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다.

‘아냐, 아쉴레앙 공작이 그럴 리 없어.’

지금은 없지만, 그녀의 망토가 분명 자신의 어깨를 감아 주었더랬다.

‘……아쉴레앙 공작이 뭐라고? 그 사람 역시 여자야. 여자는 다 똑같아.’

지난 일곱 번의 삶 속에서 자신을 희롱했던 여자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누구도 루이먼드를 진짜로 사랑해 주지 않았다. 하룻밤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일망정 폭군과 첫째 왕자와 그레이움 백작을 피해 도망가자는 말 한마디 해 준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쉴레앙 공작은 뭐가 달라? 봐 봐, 어제 하룻밤을 보내니 끝이잖아.’

아침에 욕실에서 얼마나 화기애애했는지, 아침 식사 때 무뚝뚝하지만 나름 세심하게 챙겨 줬던 모습은 또 어땠는지, 그런 건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어젯밤에 시녀장에게 남편이 될 사람이라 소개해 주지 않은 것, 아침에 황궁으로 휙 가 버린 것만이 가슴에 사무칠 뿐이었다.

사교계의 얼음꽃이라 불리던, 차가운 미남의 눈가가 실연의 슬픔으로 촉촉이 젖어 들었다.

하지만 루이먼드는 울지 않았다. 혹여라도 눈물이 흘러내려 베고 있는 책을 적실까 봐.

별 도움은 안 됐지만, <세상을 멸망시킬 악당의 약혼녀가 되어 살고자 도망치렵니다>는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나중에 내용을 잊을 만할 때 또 한 번 보고 싶을 만큼.

그때 결말 부분이 눈물에 젖어 중요한 대사가 번져 있다면 참 슬프지 않겠는가?

‘……내가 지금, 책 젖는 걸 걱정할 땐가?’

잠깐 허탈해지기도 했으나, 어쨌든 루이먼드는 그렇게 책 걱정이나 하다가 깜빡, 잠들었다.

***

그리고 지금.

눈을 뜨니 루비아나가 보였다. 갑자기 눈가가 화끈하게 아려 왔다.

‘왜? 설마, 나 우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 왜? 울 일이 뭐 있다고? 아니, 울 일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이 울 타이밍은 아니지 않나? 루이먼드는 자신에게 말하며 거칠어지는 숨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혹시나 깬 걸 들킬까 봐 손을 들어 눈가를 만져 보지도 못했다. 그러고 가만히 있자니, 눈가의 열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몸이 나른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루이먼드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현실을 외면했다.

왜 저 여자가 저기 있는지도 모르겠고, 저 여자를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온통 모르겠는 것 천지라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다시 잠들어 버릴……

“깼으면, 잠깐 이리로 오시지요.”

수 있을 리 없지.

루비아나가 루이먼드가 깨어난 걸 알아채고 손짓했다.

“…….”

루이먼드는 일단, 좀 더 자는 척을 해 봤다.

루비아나는 자는 척하는 루이먼드를 좀 더 구경할까 싶었지만, 눈을 꾹 감고는 숨까지 참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여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숨소리가 달라져서 알았습니다. 그만 일어나십시오.”

“……”

루이먼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루비아나는 들고 있던 종이로 얼굴을 가리고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음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러다 숨넘어가겠다 싶어서 말했을 뿐, 수치를 주고 비웃겠다는 마음 따위는 조금도 없었는데.

아무튼 저 잘생긴 얼굴이 문제였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게 만드니까.

크흠흠.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얼굴이 새빨개지다 못해 빵 터질까 걱정되어 헛기침으로 웃음을 숨겼다.

루비아나가 웃음을 참으려 노력하는 동안, 루이먼드는 수치심을 이겨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이대로 땅으로 푹 꺼져, 애초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사라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었고.

루이먼드는 한숨을 내쉬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몸 위에 몇 겹이나 덮여 있던 담요들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가까이에 큰 화로가 있는데도 으스스했다.

루비아나가 얇은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 혼자만 추위를 타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루이먼드는 그냥 막 잠에서 깨서 그런 거라 생각하며, 손에 잡히는 대로 몸을 감쌀 걸 움켜잡았다.

잡고 나서 보니 루비아나의 망토였다. 이번엔 아쉴레앙 공작가의 문장 - 은장 백합 - 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놓친 담요들은 모두 다 망토보다는 두껍고 따뜻해 보였다. 하지만 루이먼드는 그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망토를 두른 채로 루비아나에게 터덜터덜 다가갔다.

루비아나는 읽고 있던 종이를 화롯불에 비춰 보고 있었다. 그러다 머리 위로 루이먼드의 긴 그림자가 비치자 눈을 들었다. 루이먼드가 두르고 있는 제 망토를 흘깃 보고는, 제 앞에 앉기를 권했다.

‘뜨겁네.’

루이먼드를 마주한 루비아나의 감상은 짧고 굵었다.

루이먼드가 가까이 오자 열기가 훅 끼쳤다. 인간처럼 생긴 화로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이 정도로 뜨거워질 수 있는 건지 의아했으나, 곧 납득했다. 조금 전,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루이먼드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아직도 부끄러운 건가?’

쪽팔려서 몸이 후끈 달아올랐나 보지.

루비아나는 그리 가볍게 생각하고는, 아까 한 번 검토하고 옆에 밀어 놓았던 것을 들어 건넸다.

겉에는 아쉴레앙 공작가의 문장이 은박으로 찍혀 있었다.

루이먼드는 별생각 없이 받아 들었다가, 제일 상단에 쓰여 있는 글자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너무 놀라 종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어어, 어어어…….”

놓칠 뻔했던 걸 허둥지둥 겨우 들고 다시 윗부분을 읽어 보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떠도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결혼 계약서.

“……이게, 뭔가요?”

“결혼 계약서입니다.”

루비아나는 손으로 상단을 짚어 가며 읽어 주었다.

“아니, 이게 뭔지 물은 게 아니라, 그러니까 이게 뭔지 물은 게 맞긴 한데, 그게 정말 이게 뭔지 물은 게 아니라……”

“폐하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

두근. 심장이 뛰었다. 아니, 멈춘 건지도 몰랐다.

루이먼드는 기어이, 종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털썩.

다시 집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손이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흔들렸다.

“괜찮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부부 사이에 이 정도 돕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루비아나가 대신 종이를 들어 올렸다.

루이먼드는 이번에야말로, 심장이 멈춰 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예?”

멍청해 보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경은 내게 계약 결혼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지요.”

“…….”

순간적으로 루이먼드의 눈앞에 오늘 아침의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말없이 휭하니 황궁으로 떠났던 루비아나. 그게 대답이라고 생각했건만.

‘아니었어!’

루이먼드는 기대심으로 가득 찬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다 좋은데, 이 눈빛은 너무 과해.’

루비아나는 스멀스멀 기어올라 오는 부담감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가, 애써 미간을 폈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3년 후 이혼을 전제로 결혼합시다. 이 계약서에는 우리 거래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루이먼드가 자는 동안, 칼레나가 보내온 국무를 처리하던 중 문득 생각나 작성한 것이었다.

‘3년 뒤에 레나 몰래 빼돌려 살려 보긴 할 건데,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다른 방법을 하나쯤 더 준비해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루비아나는 결혼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이혼 후에도 루이먼드는 아쉴레앙 공작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아쉴레앙 공작이 그 신분과 지위를 보장한다. 재혼하더라도 그 신분과 지위는 변하지 않는다.

이혼 시 아쉴레앙 공작가에서 상당량의 연금을 위자료로 지급한다.

여차하면 루이먼드는 이미 아쉴레앙 공작가의 사람이니 죽이지 말아 달라고 우겨 볼 생각이었다.

물론 루비아나가 원하는 요구 사항도 담겨 있었다.

루이먼드는 결혼 중 성실하게 성생활에 임해야 한다. 주 3회를 기본으로 삼으나, 건강 상태에 따라 줄여 줄 용의가 아쉴레앙 공작에게 있으며.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었다.

‘루이먼드 폰 아쉴레앙은 결혼 기간 중 낳은 아이의 친권, 양육권 중 무엇도 요구할 수 없다.’

3년 뒤, 루이먼드가 괜히 아이들이 밟혀 떠날 수 없다느니,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아이를 택하겠다느니 하지 못하도록 미리 선을 그어 놓은 것이었다.

“추가하고 싶다거나 조정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없습니다.”

루이먼드는 계약서를 읽어 보지도 않고 서명하려 했다.

“잠깐. 좀 더 찬찬히 읽어 보고 해도 늦지 않을 텐데요.”

“읽어 볼 필요가 무어 있나요?”

“당신의 신체를 제한하는 조건이 들어간 계약서입니다.”

“공작님께서 제게 해로운 내용을 계약서에 적으셨을 리 없잖습니까?”

루이먼드가 의심 따윈 조금도 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루비아나를 보았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그도 아니면 상대방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기술이 뛰어난 건지, 아무튼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저는 공작님을 믿습니다.”

언제 봤다고, 얼마나 봤다고 믿음을 운운하는 걸까?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굳이 호구를 자처하겠다는데 말릴 필요 없겠지.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사인하도록 놔두었다.

루이먼드는 하단의 빈 곳에 멋들어지게 사인하고는,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고, 기분이 아주 좋았다.

‘책에 나온 대로야!’

심장이 쿵쾅쿵쾅 날뛰었다.

역시 아쉴레앙 공작은 공작 중의 공작이었다. 세 공작 중 제일 훌륭하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한번 뱉은 말은 끝까지 책임지고, 하룻밤 같이 보낸 사람도 꼭꼭 책임지고.’

이런 사람이 내 아내라니. 내가 이런 사람의 남편이 되다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번엔 진짜, 목을 잘려 죽지 않게 될 거야.’

아쉴레앙 공작이 있으니까. 그 아쉴레앙 공작이 내 편이니까. 내 부인이니까. 날 지켜 줄 테니까.

기분이 끝내주게 좋았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어질어질할 정도로.

“아…….”

긴장이 풀린 걸까? 루이먼드의 몸이 휘청였다.

“아까부터 뭔가 이상해 보이…… 루이!”

루비아나가 무너지듯 쓰러지는 루이먼드의 몸을 받아 들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몸을 껴안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뜨거워.’

‘날, 루이라고 부른 건가?’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품에 안겨 웃음 지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게,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렇게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품에서 축 늘어졌다.

“이 상태로 웃어?”

루비아나는 불덩이 같은 루이먼드의 몸을 끌어안은 채 황당해했다.

두 사람 앞에, 방금 루이먼드가 서명한 결혼 계약서가 팔랑 내려앉았다.

- 제11항 : 양측은 결혼 기간 동안 상대방에게 충실해야 한다.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라 할지라도, 이성을 필요 이상 가까이할 시 상대방은 간섭할 수 있으며, 정신적 충격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딱히 피오니 때문에 추가한 조항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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