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31)

***

루이먼드를 찾아 겨우 조용해지나 싶었던 저택은 또 한 번 발칵 뒤집혔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에게 공주님 안기로 들린 채 옮겨졌다. 루비아나는 그를 자신의 침실로 데리고 가 눕혔다.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로, 화로를 있는 대로 가져와!”

루비아나의 목소리가 온 저택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힘 좀 쓴다고 하는 하인들이 숯에 불붙이는 데 동원되었다. 저택의 화로란 화로는 모두 다 루비아나의 침실로 이동했다.

저택에서 가장 싸늘했던 공간은 순식간에, 한여름처럼 무더운 곳이 되었다.

그 안에서 가장 뜨거운 건 루이먼드였다. 그는 침대에 눕자, 꾹 참고 있던 게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몸이 불덩이 같은데도 이를 딱딱 부딪치며 춥다고 바들바들 떨었다.

루비아나는 그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입을 꾹 다물고 문만 바라봤다.

하인, 하녀들은 숯과 화로를 가지고 들어오다가 루비아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놀라다 못해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조금 어린 하녀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공작님!”

보다 못한 시녀장이 루비아나를 불렀다.

“의사는, 언제 오는 거지?”

루비아나는 그녀를 돌아보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음산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는, 그녀의 침실에서 가장 싸늘한 것이었다.

루비아나가 저택 안 사람들을 눈빛으로 죽이기 전, 다행히 의사가 도착했다.

급히 연락을 받고 허둥지둥 달려온 의사는 일단 싸늘하게 굳은 루비아나의 얼굴을 보고 섬뜩함을 느꼈다. 그러고는 가구가 녹아내릴 듯 더운 방 안을 보고 한 번 더 섬뜩함을 느꼈다.

“지금, 뭣들 하시는 겁니까? 환자를 죽일 셈입니까!”

그 흉악한 아쉴레앙 공작을 앞에 두고서 환자를 살리고자 고함을 내지를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의사의 목숨을 살렸다.

‘자신의 기준으로’ 더없이 늦게 도착한 의사를 노려보고 있던 루비아나는 의사의 고함에 움찔했다.

방 안을 가득 메우던 살기가 사라졌다. 목 졸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녀와 하인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급히 방을 환기하고, 의사가 루이먼드 옆에 앉았다. 루비아나는 기꺼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뒤늦게 자신이 누구 앞에서 고함을 친 건지 깨달은 의사는, 정말 뒤늦게 루비아나의 눈치를 보며 루이먼드를 진찰했다.

의사가 루이먼드의 눈꺼풀을 뒤집어 까고 맥을 짚는 동안, 방 안은 숨 막히게 고요했다. 들리는 거라고는 루이먼드의 숨소리뿐이었다.

루이먼드를 살핀 의사는 다행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루이먼드가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닌 듯 보였다. 그래도 누구 하나 다행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과로, 피로, 쇠약입니다.”

의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비아나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움 백작 때문인가?’

그가 루이먼드를 구박하며 밥도 잘 안 주고 일만 잔뜩 시킨 것이리라. 그래서 몸이 부실해지다 못해 이렇게 아프게 된 거겠지.

루비아나는 분노했다. 이 분노를 어떻게 그레이움 백작에게 쏟아부어야 할까 고민하려는데, 의사가 말을 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정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것입니다. 젊다고 너무 무리했군요.”

“…….”

루비아나는 그레이움 백작에게 화낼 명분을 잃고 말았다.

흠흠.

뒤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시녀장이 헛기침했다.

“…….”

“그렇다고 합니다, 공작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심이……”

시녀장이 애써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려 하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하는 의사가 끼어들어 한마디를 더 했다.

“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분간 동침을 피하고, 몸을 보양하면 금방 회복할 겁니다. 물론 지금 열이 많이 올라 있어 이걸 먼저 잡아야 하겠지만요. 이 남자분의 부인은 어디 있습니까? 잠깐 이리로 불러 주시면, 제가 따끔히 훈계를 해 두겠습니다.”

의사는 누워 있는 남자분의 부인 되실 여자분이 눈앞에 있는 루비아나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

덕분에 방 안은 한동안 더 어색한 침묵에 눌려 있어야 했다.

***

의사가 떠난 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머리맡에 서서 잠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계속 바닥에서 자게 둬서 열이 심해진 거겠지?’

그냥 들어서 옮길걸. 발이 질질 끌리다 잠에서 깨는 게 이렇게 아픈 것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잘못은 그거 하나만이 아니었다. 루비아나는 지난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어젯밤, 루이먼드는 그레이움 백작가에서 일어났던 소동의 한가운데 있었다.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던 가련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많이 놀랐을 텐데,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그런 사람을 데리고 밤새 격렬하게 몸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침엔 목욕 수발까지 시켰지.’

어휴. 루비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루이먼드가 해 주겠다고 나선 거긴 했으나, 말리지 않고 즐긴 건 루비아나였다.

만 하루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뭔 잘못을 그리 많이 저질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루이먼드를 학대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젯밤도, 오늘 아침도, 하다못해 서재에서도 루이먼드는 쌩쌩했다.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전혀 괜찮지 않았는데.

괜찮았을 리 없는데.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던 거겠지.’

루비아나는 손을 내리고 루이먼드를 바라보았다. 전혀 닮지 않은 누군가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처참하게 훼손된 부모의 시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우왕좌왕하는 어른들. 화가 미칠까 두렵다며 연락을 끊은 친구들. 도망가는 가신들.

그 속에서 어린 동생을 끌어안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속삭이며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소녀.

녹색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추, 추워…… 추워…….”

루이먼드가 허우적댔다. 루비아나는 얼른 시녀장을 바라보았다.

“춥다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그래도 그대로 두라고 하셨습니다. 더 체온이 올라가면 안 된다고요.”

시녀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루비아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루이먼드를 바라보았다.

땀에 흠뻑 젖어서는, 얇은 천만 두어 겹 두르고 있는 게 전부였다. 하나는 침대 시트, 또 하나는 서재에서부터 몸에 말고 있던 루비아나의 망토.

침대 아래에 두꺼운 담요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 원한다면 이 방, 이 저택 전부를 불 속보다 뜨겁게 만들어 줄 수도 있는데.

“추워…… 추워…… 너, 무…….”

춥다고 떠는 루이먼드를 가만히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루비아나는 오랜만에 무력감을 느꼈다.

의사는 열이 높긴 하지만 위험한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루비아나의 살벌한 눈빛에 겁먹어선 생명엔 지장이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게 아무것도 아니면, 생명에 지장이 있으려면 얼마나 더 뜨거워야 하는 거지?’

검을 목에 대고 묻고 싶었다. 다시 말해 보라고, 정말 생명에 지장 없는 걸 장담할 수 있느냐고.

손이 알아서 허리춤에 찬 검을 움켜잡았으나 의사를 협박하는 걸 끝내 생각으로만 그친 건, 자신이 억지 부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비아나도 모르지 않았다. 이 정도로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것쯤은.

북부에선 겨울마다 사람이 얼어 죽는다. 아이들은 이보다 더한 고열에 시달리다 약을 삼키지도 못하고 숨이 끊어진다. 한밤중 울려 퍼지는 아이를 잃은 어미의 울부짖음은, 잠시나마 마수들마저 침묵하게 만들 정도로 처절하다.

고작 이 정도로 앓아눕는 건, 북부에선 사치였다. 북부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인 루비아나마저도 그런 사치를 누리지 못했다. 어제 팔이 잘려도 내일 성벽에 올라 보초를 서는 게 일상인 곳이니까.

또한 북부에서는 아픈 걸 숨기는 사람도 없다. 사람보다 마수가 많은 북부에선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한 전력이다. 아픈 걸 숨기고 있다가 전투 중 제 몫을 다하지 못하면, 그 무리는 몰살당한다.

살기 위해선 다쳤으면 다쳤다고, 아프다면 아프다고, 즉각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받아야 한다. 그게 자신도 사는 길이고 다른 사람들도 사는 길이다.

그런 곳에서 수년간 살아왔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사실, 사람은 고작 어제 같은 일을 겪어도 앓아누울 정도로 약하고 여리다는 걸. 그런데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생글생글 웃으며 버틸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쯧, 루비아나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아픈 루이먼드를 더 보고 있으면 애써 잊고 살았던 것들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이 사람도 자길 아프게 만든 사람이 옆에 있는 걸 원치 않겠지.’

서재로 돌아가 칼레나가 준 일을 모두 끝마치자. 그 전에 결혼 계약서에서 11항을 삭제부터 해야지. 펜으로 직직 그어 놓자. 그리 마음먹으려는데.

덥석.

붙잡혔다.

손목이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루비아나는 고개를 돌려 루이먼드를 내려다보았다.

헉, 헉. 루이먼드는 힘겹게 숨을 뱉으며 눈을 살짝 떴다.

“정신이 듭니까?”

루비아나가 시녀장에게 이리 와 보라고 손짓했다.

“……흐으…… 제, 바…….”

루비아나는 고개를 숙이고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루이먼드의 말을 알아듣는 데 시녀장의 발소리가 거슬려, 손을 들어 시녀장이 다가오는 것도 제지했다.

“흐으…….”

루이먼드가 흐느끼며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희미하고, 아주 희미한 목소리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루비아나는 알아들었다.

살려,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목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이 이어졌는데, 그건 숨소리에 먹혀 뭉개졌다.

“공작님.”

까치걸음으로 다가온 시녀장이 루이먼드의 팔을 잡았다. 루비아나에게서 그를 떼어 내려 하는데, 도통 떨어지지 않았다. 철을 녹여 접붙인 것처럼 딱 달라붙어 있었다.

시녀장이 잡아당길수록 더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아픈 사람에게 이런 힘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가만 놔둬.”

“하지만 공작님, 옮는 병은 아니라고 하지만 혹시 모르니……”

“쉿.”

“…….”

“난 괜찮으니까, 놔줘. 아픈 사람 괴롭히는 거 아냐.”

“……예, 공작님.”

시녀장이 끝까지 머뭇거리다가 겨우 루이먼드의 팔을 놓았다.

이 뜨거운 팔을 뿌리치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굳이 시녀장을 고생시킬 것도 없었다. 그냥, 팔을 꺾고 비틀어 빼면 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의사에게 내주었던 의자에 도로 앉았다.

“황궁에서 온 서류들, 서재에 있을 건데 봐서 처리한 건 놔두고, 아닌 것들만 추려서 가져와.”

“여기 계속 계시려고요?”

시녀장이 물었다. 루비아나는 입술로만 웃으며 시녀장을 보았다.

“너무 곤히 자는데, 팔을 빼다 잘못해서 깨면 아깝잖아.”

“이번에도 그러시는군요.”

시녀장이 한숨지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러니 기억해 둬.”

“예, 공작님. 명을 따르겠습니다.”

시녀장은 손짓으로 하녀들을 물리고, 자신도 서류를 가지러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루비아나는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물수건을 짜서 루이먼드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평생 전쟁터만 떠돌았던 사람치곤, 제법 세심했다. 마냥 서투르지 않았다. 한 손으로 하는 바람에 좀 어설퍼 보이는 건 있지만.

루비아나 본인도 잊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도 이런 게 당연한 시절이 있었다.

동생이 아프거나 친구가 아프면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 주고 얼굴을 닦아 주었고. 옆에서 책을 읽어 주고 수프를 떠먹여 주기도 했던.

짧았던 유년 시절.

그때는 아직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 날로 미친 짓을 더해 가는 폭군 때문에 나라 안팎이 흉흉하긴 했지만, 어쨌든 룩센 백작가는 그럭저럭 평화로웠다.

룩센 백작 부부의 어린 두 딸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라났다, 자매끼리 하루에 열두 번씩 서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싸우다 화해하다, 또 싸우다 울다 잠들고. 그렇게.

물수건을 짜낼 때마다 그 시절이 선명해졌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는데 왜……?’

루비아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흔…… 여…… 시, 실…….”

루이먼드가 또 흐느꼈다. 눈가에서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흘렀다.

루비아나는 과거의 잔상을 흩트리고, 현재의 루이먼드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절대 죽게 놔두지 않아.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그를 불렀다.

“루이.”

그러자 루이먼드의 손이 느슨해졌다. 루이먼드는 그래도 그녀의 손을 놓치지는 않았다. 루비아나는 그냥 계속 잡혀 주었다.

곧 시녀장이 서류와 마실 걸 가져왔다.

아픈 사람 옆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건 시녀장이 생각해도 아닌지 차를 들고 왔다. 묻지도 않고 멋대로 뜨거운 차를 가져온 주제에, 루비아나 옆에 내려놓으며 슬쩍 눈치를 봤다.

루비아나는 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시녀장은 공손히 인사하고 다시 방을 나섰다.

향긋한 차향이 코끝이 닿았다.

“달리아인가?”

심신 안정에 좋다는 차였다.

아까 의사를 죽일 뻔한 걸 눈치채고는, 마음 좀 가라앉히라고 준 거겠지 싶었다.

시녀장은 알까?

‘내가 이 꽃차의 이름을 안다는 걸.’

그뿐이랴? 향기만으로 여러 차의 향을 구분해 낼 수도 있었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 철저하게 교육받았으니까. 향이 독특한 달리아 차를 알아맞히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름지기 교양 있는 귀족이라면, 다양한 차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손님이 오면 그 손님의 취향에 맞는 차를 대접해야 할 줄 알아야 하며, 찻잎에 대한 지식을 나누며 대화를 이어 나갈 수도 있어야 한다고.

‘지금은 싫지? 커서 어른이 되면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란다. 그러니까 다시 입을 헹구고 차를 마셔 봐. 그 차 이름이 무엇일까?’

이젠 어머니에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 이만큼 컸는데도 가르쳐 주신 게 그다지 쓸모가 없네요.’

차향 대신 피비린내.

은으로 된 티스푼 대신 강철로 벼린 검.

신이 있다면 천국도 존재할 테니, 하늘 높은 곳에 있다는 그곳에 계신 어머니께선 분명히 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계실 텐데. 보고 뭐라고 하실까?

‘그게 뭐, 무슨 상관이야?’

루비아나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냈다. 이미 지나간, 다시 오지 않을 과거를 추억해 무엇할까? 마음만 아픈 것을.

아픈 루이먼드는 자꾸만 잊고 있던 걸 떠오르게 해서 몸에 해로웠다.

‘앞으로, 적어도 3년간은 아프지 않게 잘 관리해야겠어.’

루비아나는 억지로 고개를 돌려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비록 아픈 루이먼드 옆에 앉아 있고, 아픈 루이먼드의 손을 잡고는 있지만, 루이먼드는 신경 쓰지 말고 서류에 집중하자 마음먹었다.

“레나가 내일까지는 검토해야 한다고 했던 황실 정예군 육성 건이……”

“흐으…….”

“……아니, 이거 먼저 보자. 동부 치수 작업을 기어이 나한테도 분담시키려나 본데. 수로 건설에 동부 유지들의 병력을 이용하는 건이……”

“흑…… 흐윽…….”

“……서부에 형식상으로라도 새로운 변경백을 세우고 싶다고? 도미넨트 공작과 의논해 변경주를 따로 설정하겠다니. 음, 이건 펠트하르그 공작이 알면 서운해하지 않으려나 싶……”

“흑…….”

집중될 리 없었다.

“하아.”

루비아나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루이먼드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집중이 안 되는 거였다.

집중이 안 될 땐 하지 말아야지. 루비아나는 서류를 던져 버리고, 의자에 삐뚜름하게 앉았다.

그러고는 의자 등받이에 팔을 기대고 턱을 괴고는, 자신이 지금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하기 시작했다.

루이먼드를 바라보는 것.

루이먼드에게 잡힌 손에 땀이 배어 끈적했다.

“흐으…….”

루이먼드가 열에 달떠 뒤척일 때마다 잡힌 손이 조금씩 미끄러졌다.

‘이렇다 놓치겠네.’

싶을 때면 여지없이 루이먼드의 손이 움찔, 떨렸다. 더 꼭 쥐려고 손가락을 꼬물댔다.

괜히 짠했다.

‘이래서야 편히 잘 수 있겠나?’

푹 자야 금방 나을 수 있을 텐데.

루비아나는 혀를 차며 루이먼드의 손에 깍지를 꼈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 루이먼드의 빠른 쾌유를 빌며 숙면에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었다.

손가락이 맞물리고 잡힌 손이 잡은 손이 되었다. 그러자 루이먼드가, 아파서 정신도 못 차리는 이 미인이 살풋, 웃었다.

착각이겠지만, 상태가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얼굴이 한결 편안해지고, 거친 숨도 잔잔해졌다. 열도 좀 가라앉은 것 같고.

루비아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루이먼드만 보며, 이마에 얹은 물수건을 뒤집어 주었다.

“하아…….”

루이먼드는 이마에 찬 게 닿으니 기분 좋은지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루비아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손을 루이먼드의 뺨에 가져다 대 봤다.

손등이 닿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손등을 덮었다. 루비아나는 화끈한 열기를, 루이먼드는 서늘한 온기를 느꼈다.

“으음……”

루이먼드가 루비아나의 손등에 뺨을 부볐다. 시원한 것을 찾아가는 열병 환자의 본능적인 행동이겠으나, 손등의 주인은 이 열병 환자가 절 알아보는 것 같아 괜히 뿌듯해졌다.

덤으로 이 열병 환자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너무 정들면 곤란한데.”

루비아나는 손을 떼어 내며 중얼거렸다.

“으, 으…….”

루이먼드는 뺨에 닿았던 게 사라지자, 그걸 찾는 듯 베개에 얼굴을 부볐다. 그 바람에 이마에 얹은 물수건이 떨어졌다.

루비아나는 물수건을 다시 찬물에 담갔다 짜서, 루이먼드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하아…….”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결혼 기한을 3년으로 명시한 결혼 계약서가 벌써 아쉬워지려고 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뭐, 내가 정든들 무슨 소용이야?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다던데.”

이 열병 환자는 3년 기한을 채우자마자 훨훨 날아가 버릴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이렇게 깍지 껴 꽉 잡고서는.

루비아나는 괜히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피오니 로렌.

한 번 들었을 뿐인데, 뼛속에 새겨진 것처럼 아주 선명하게 생각났다. 아마 죽는 날까지 못 잊지 않을까?

“이런 미남을 꼬시다니, 제법이야. 나도 처음엔 이걸 레나한테 안 주고 내가 가져도 될지 고민했는데.”

일개 학자의 집 출신 황실 관리 따위.

루비아나는 자신이 얼마나 차갑게 웃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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