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31)

***

루이먼드는 밤을 꼬박 앓고, 새벽녘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파, 더워…… 여기 어디야? 나 왜 이러고 있는 거지?’

가물가물한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서재에서…… 결혼 계약서를…… 그랬는데…….’

지금 그는 전혀 다른 곳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아쉴레앙 공작?’

그녀가 있었다.

기억이 끊기기 전 서재에서도 함께였으나, 루이먼드는 새삼 놀랐다.

‘왜 눈을 뜰 때마다 아쉴레앙 공작이 내 눈앞에 있는 거지?’

루비아나가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졸고 있었다. 고개가 끄덕끄덕 흔들렸다.

한 손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루이먼드는 그녀와 자신이 서로 손을 깍지 끼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기함했다. 덕분에 눈이 번쩍 뜨였다.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아직은 낯설지만, 어딘지는 알 수 있는 공간이었다. 루비아나의 침실.

다른 사람은 없었다. 오직 둘뿐이었다.

어젯밤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침실에서 단둘뿐.

하지만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루이먼드는 침대 위 협탁을 보았다.

어젯밤, 장검이 놓여 있던 곳에 은대야와 젖은 물수건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걸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드니, 이마에 올려져 있던 게 툭, 떨어졌다. 물수건이었다.

살짝 뺨을 가져다 대 보니, 올려놓은 지 얼마 안 된 듯 차가웠다. 루이먼드는 다시, 잠든 루비아나를 보았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사람은 밤새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밤새 이렇게 손을 잡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도 자신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 주었을 것이다.

‘계속, 내 옆에 있어 준 건가?’

왜? 당연한 의문이 뒤따랐다. 공작저에 남아도는 게 하인, 하녀들인데. 일손이 모자라서 아쉴레앙 공작이 아픈 사람 병간호를 떠맡은 건 아닐 테고.

누군가 시켜서 억지로 한 건 더더욱 아닐 터였다. 이 저택의 실세가 시녀장이라는 건, 저택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으나.

그래도 시녀장은 시녀장이었다. 감히 주인에게 아픈 사람을 병간호하라고 억지를 부리진 못했으리라.

그러니까 하고 싶어서 자신을 돌봐 준 것이리라. 밤새. 옆에서.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졸며.

‘왜……?’

아까와는 다른 의문이 눈가에 눈물로 맺혔다.

또 이 사람이었다.

이 사람뿐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주려 하지 않는 걸 아무렇지 않게 주는 건. 언젠가의 자긍심, 어젯밤의 구원. 그리고 오늘.

비 오는 날 길 가다 발견한 길고양이에게 주는 것만큼의 동정심이라 해도 상관없다.

그것조차 받아 본 적 없는 사람에게는 심장이 흠뻑 젖어 들 만큼 충분하니까.

눈앞이 다시 흐려졌다. 루이먼드는 눈을 깜빡여 눈물을 흘려보냈다.

소리 없이 베갯잇을 적시며, 밤새 절 돌봐 준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샌가부터 끄떡끄떡 흔들리지 않던 그 사람이 말을 걸었다.

“다 봤습니까?”

우두둑.

굳은 목을 꺾으면서.

“……!”

눈물이 뚝 그쳤다. 벅차올랐던 마음도 그 상태로 얼어 버렸다.

루이먼드는 숨 쉬는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왠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서재에서 이와 똑같은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루이먼드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일 힘이 있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루비아나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부끄러워하는 루이먼드를 구경했다.

이번이 두 번째. 이쯤 되니 잠든 척하는 방법을 알려 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저렇게 무턱대고 숨만 안 쉰다고 될 일이 아닌데.

“그래서 들키는 겁니다. 숨소리가 갑자기 변하면, 의심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루이.”

“……!”

루이먼드가 눈을 번쩍 떴다. 푸하.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안 자는데도 자는 것처럼 위장하고 싶다면, 그 방법을 알려 줄 수 있는……”

“아니, 아니요. 그게 아니라, 잠시만!”

루이먼드가 맞잡고 있는 손을 흔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란 말이야.

“안 궁금합니까?”

루비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두 번이나 들켰으면 이제 슬슬 궁금할 법한데?

“뒤, 그 뒤의 말이요.”

“말?”

“절,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현실감이 없어서 오히려 더 쉽게 물어볼 수 있었다. 부끄러워하거나 얼떨떨해할 틈도 없었다.

“아, 루이.”

루비아나가 툭, 무심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

루이먼드의 입이 턱, 벌어졌다.

“이런. 턱 빠지겠습니다.”

루비아나가 손가락으로 루이먼드의 턱을 들어 올렸다. 합. 입이 다시 다물렸다. 그러자 이번엔 루이먼드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설마 이 방 안에 루이라는 이름을 가진 암살자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또 있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의심까지 할 뻔했는데.

“당신을 부른 게 맞습니다, 루이.”

루비아나가 분명히 말해 주었다. 널 부른 거라고.

“우린 이제 곧 결혼할 사이 아닙니까? 당신도 날 편히 불러 줬으면 좋겠는데. 으음, 보통은 루비라고……”

“비, 비아.”

“……?”

“비아요. 비아.”

루이먼드가 다급히 말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저도 모르게 루비아나의 손을 꽉 잡았다.

밤새 아프다 막 눈을 뜬 사람이 꽉 잡아 봤자였다. 아프긴커녕 간지럽지도 않은 수준이었지만, 루비아나는 그가 얼마나 절박한지 알아챘다.

‘이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절박한 거지?’

루비아나는 의아했다.

“비아?”

“네. 그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애칭을 허락받은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변태 공작의 저택을 활활 불태우며 ‘나의 루비’를 운운하는 펠트하르그 공작이었다. 목이 댕강 잘렸던 그 끔찍한 감각보다 그게 더 선명했다.

나의 루비?

뱃속에서 확 불길이 일었다. 다시 열이 올라 온몸이 새까맣게 타 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어.’

루비아나가 그의 루비만 아닐 수 있다면야, 기꺼이 타 죽으리라.

‘아냐. 이 사람은 내 거야. 나의 비아.’

그걸 허락받고 싶었다. 당사자에게.

루이먼드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루비아나를 올려다보았다.

“비아라…….”

루비아나는 새로운 애칭을 혀 위에 굴려 보았다. 늘상 듣던 루비에 비하면 너무 낯설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좋습니다. 사실, 루비라는 애칭 별로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이참에 남편이 지어 주는 새로운 애칭 하나 생기는 것도 나쁘진 않지. 루비아나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루이먼드를 바라보며 씩, 웃어 보였다.

“……비아.”

“예, 루이.”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한 번씩 불러 보았다.

“이거 의외로 쑥스럽네요.”

루비아나는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을 어쩌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루이먼드는 까만 눈을 한 번 깜빡이지도 않고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혹여나 단 한순간이라도 놓칠까 싶어서.

‘나의 비아.’

아직 열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인 걸까? 눈가도 시큰하게 아려 왔다. 코끝도.

“…….”

이를 악물지 않으면,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저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른 울음 같은 것.

‘이 사람을 가지고 싶어.’

정말로, 정말로 가지고 싶었다. 3년 말고, 더 오래. 더 길게. 어쩌면 영원히.

그러기 위해서라면, 또 목을 잘려 죽어도 상관없었다. 그만큼 그녀를 원했다.

“조금 더 자요. 푹 자야 열이 빨리 내릴 거라고 의사가 말해 주고 갔습니다.”

루비아나는 절 열렬히 바라보는 루이먼드의 눈이 살짝 부담스럽기도 하고, 루이먼드가 또 열이 오를까 걱정되기도 해서, 손으로 루이먼드의 눈을 덮어 버렸다.

비아의 손. 루비가 아니라 비아. 나의 비아의 손.

루이먼드는 그녀의 손길 아래에서 순순히 잠들었다. 루비아나는 그가 잠들 때까지 손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둘 중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열기로 덮인 까만 눈이, 여덟 번의 삶 만에 처음으로 탐욕을 꿈꾸기 시작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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