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31)

5. 아무튼, 결혼식

루이먼드는 꼬박 사흘을 앓았다. 이후로도 며칠간 루비아나의 침실에 머물러야 했다.

그동안 밖에서는 소문이 눈덩이처럼 커져 사방팔방 퍼져 나가고 있었다.

루비아나나 시녀장, 누구도 루이먼드에게 밖의 소문을 전해 주지 않았으나, 매일 찾아오는 의사의 표정만 봐도 무슨 소문이 나돌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첫째 날. 의사는 루이먼드가 소문의 그 루이먼드라는 걸 알아채고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둘째 날. 의사는 안색이 아주 어두웠다. 딱하다는 표정으로 루이먼드를 바라보며, 괜히 셔츠를 들쳤다. 맞은 흔적이 있는지 살피는 게 분명했다.

셋째 날. 의사는 오묘한 눈빛으로 루이먼드를 바라봤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그 아쉴레앙 공작을 홀릴 수 있지. 제법이군.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다니.’

거기에 루비아나가 황궁에 가지 않고 저택에만 콕 박혀 있다는 소식이 더해지니, 루이먼드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와 결혼하는 게 확실히 부담스러운 일이긴 하지.’

그래서 그만한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아쉴레앙 공작을 선택했던 건데. 이제 와 루비아나에게 큰 부담을 지우는 게 미안해 속이 쓰렸다.

루비아나는 그날 이후, 종일 루이먼드 옆에 있어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의사가 다녀가고 난 다음에는 꼭 찾아와 괜찮으냐고 물어보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찾아오기만을 목 빠져라 기다리면서도, 막상 루비아나가 오면 별다른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차라리 루비아나가 탁 까놓고 ‘이런 어려움이 있다. 좀 곤란한 상황이다.’라고 말해 주면 좋겠는데.

루비아나는 도통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많이 나아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푹 쉬십시오.”

이렇게만 말하고 휙 가 버릴 뿐이었다.

“아, 입맛이 없어도 식사는 꼭 챙기십시오, 루이.”

꼬박꼬박 루이라고 불러 주었기에, 서로의 애칭을 나눴던 일이 열에 달떠 헛꿈을 꾼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할 따름이었다.

이런 루이먼드의 속내를 알았다면, 루비아나는 하하 웃으며 이렇게 말해 주었을 것이다.

“무슨 일은 무슨.”

루이먼드의 걱정과 달리, 루비아나는 잘 지냈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아주 잘 지내고 있는 건 아니긴 했다. 칼레나에게 원격으로 혹사당하고 있었으니까.

루이먼드를 자주 찾아오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밖에는 아쉴레앙 공작이 폭군의 사생아를 저택에 들여앉혀 놓고는 폭 빠져 사흘 밤낮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소문이 난 듯한데. 혹은 분노한 황제가 황궁 출입을 금지해 공작저에서 근신하고 있다거나.

괜한 뜬소문이었다.

사흘 밤낮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는 건 아픈 루이먼드 혼자였다.

루비아나는 그런 루이먼드가 걱정도 되고, 딱히 황궁에 입궁할 이유가 없어서 가만히 있는 중이었다.

남편 될 사람을 찾았으니 괜히 연회나 무도회를 나돌아 다닐 이유가 없어 더더욱 나가지 않았던 거고.

공작저 안에만 있다고 편히 쉬고 있는 건 아니었다. 서재에 틀어박혀서 칼레나가 떠넘긴 일거리를 해치우느라 바빴다.

다 끝낼 즈음이면, 어떻게 알았는지 새로운 일거리를 보내는 바람에 루이먼드를 만나러 갈 짬을 내는 것도 버거웠다.

딱 봐도 칼레나가 심술부리는 것이었다.

혼인 허가 칙령도 받아야 하고, 나중에 루이먼드도 죽이지 않고 살려야 하고. 이래저래 칼레나의 비위를 맞춰야 할 일투성이인 루비아나는 일단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한 거 아냐?’

열심히 일하자고 결심한 지 딱 사흘째 되던 날. 루비아나는 폭발했다.

‘내 남편감이 지금 좀 아프거든. 병간호해야 하니까 일 좀 그만 보낼래?’

유독 힘없어 보이는 루이먼드를 잠깐 보고 온 날. 딱 사흘째 되던 날.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 루비아나는 편지를 휘갈겨 써 황궁으로 보냈다.

그리고 루비아나의 편지는 황궁 입구를 통과하지도 못하고 반송당했다.

“어차피 일하기 싫다는 내용일 테니, 안 읽을래.”

칼레나가 직접 반송을 명령한 것이었다.

편지는 고스란히 공작저로 돌아왔다.

그걸 본 호사가들은 멋대로 떠들어 댔다. 루이먼드 납치 건으로 황제 폐하께서 단단히 화가 나신 거라고. 이번에야말로 황제와 공작, 두 사람 사이가 소원해질지도 모르겠다고.

“언제까지 이럴 거야? 난 펠트하르그 공작이 아니라고. 중요한 일은 그 자식한테 시켜. 나한테 시키지 말고!”

루비아나가 반송당한 편지를 움켜쥐고 울분을 토할 때.

세상 사람들은 남자에게 홀려 황제를 배신한 아쉴레앙 공작과, 그런 언니에게 길길이 화를 내는 황제 폐하로 온갖 소설을 지어 댔다.

그 소문에 누구보다 빠르게, 그리고 예민하게 반응한 건 그레이움 백작이었다.

루이먼드를 빼앗길 때 루비아나에게 들은 협박이 두려워 납작 엎드리고 있었건만.

“폐하와 공작의 사이가 틀어졌다면, 내가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지!”

그는 소문만 믿고는 후다닥, 황궁으로 달려갔다.

“억울하옵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그레이움 백작을, 황궁의 문지기는 막지 않았다.

루비아나의 편지가 가지 못한 길을 그레이움 백작이 통과한 것이었다. 그게 세상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는 뻔할 뻔 자였다.

사교계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귀족들뿐 아니라 수도에 사는 백성까지 귀 기울이기 시작했고, 루이먼드는 고작 사흘 만에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희대의 미인으로 등극했다.

“얼굴 하나로 황제 폐하와 아쉴레앙 공작 사이를 갈라놓다니.”

“역시 잘생기고 볼 일이야.”

“아니, 얼마나 잘생겼기에 그 무시무시한 북부의 공작이 홀딱 빠졌대? 그 얼굴 한번 보고 싶네.”

루이먼드는 오랫동안 학자의 집 생활을 하는 바람에, 새로운 제국의 백성에게는 그리 인지도가 높지 않은 귀족이었다.

학자의 집에서 나온 뒤에도 귀족들 안에서나 그의 미모와 신분이 이야기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 일로 인해 제국 내 귀족과 백성에게 확실히,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게 되었다.

잘하면 제국의 역사책에도 기록될 수 있으리라. ‘희대의 미남, 초대 황제와 초대 아쉴레앙 공작을 갈라놓다.’

칼레나는 기꺼이 시간을 내어 그레이움 백작을 만나 주었다. 그의 눈물 콧물 섞인 항의를 따분한 표정으로 들어 주었고, 대충 아무 말로 그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자 그레이움 백작은 황제가 자신의 편을 든다고 믿게 되었고, 의기양양하게 황성을 나서서 아는 귀족들에게 떠들어 댔다.

“폐하께서 내 편을 들어 주신다고 했어!”

그 소식은 들은 루비아나는 영혼 없는 항의서를 황궁으로 보냈다.

항의서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자신은 그날 밤, 분명 그레이움 백작에게 통보란 이름의 허락을 구하고, 당당하게 루이먼드를 데리고 나온 것이며 그때 그레이움 백작이 반대했다면 자신이 어떻게 루이먼드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겠냐고. 그레이움 백작이 그때는 허락해 줬으면서 이제 와 말을 바꾸어 자신을 모욕하고 있는 거라고.

누가 들어도 개소리였다.

그레이움 백작이 어떻게 아쉴레앙 공작을 막아설 수 있단 말인가?

루비아나의 항의서 내용을 알음알음 전해 들은 귀족들은 하나같이 그레이움 백작을 동정했다.

눈과 귀가 있어 이번 소동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귀족, 백성 할 것 없이 황제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과연 황제는 누구 편을 들 것인가?

황제는 중립을 선언했다.

루비아나에게 루이먼드와의 혼인을 허락하는 칙서를 보내 주되, 그레이움 백작에게 그가 만족할 만한 보상을 해 주라고 명령했다.

이 칙령이 정말 중립이라고 믿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단, 누구의 편을 든 거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아쉴레앙 공작? 아니면 그레이움 백작?

“대충 좀 해결해 주지, 이런 것까지 나한테 하라고 그러냐?”

루비아나만이 귀찮다고 한숨 쉴 따름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쉴레앙 공작과 그레이움 백작의 살벌한 상견례가 진행되었다.

장소는 황궁이었다.

그레이움 백작가는 루비아나의 침입으로 크게 망가졌고, 아쉴레앙 공작저는 그레이움 백작가 사람들이 가고 싶지 않다고 했기에, 황제는 기꺼이 황궁 내 조용한 홀을 내주었다.

그레이움 백작 측에서는 네 남자가 나왔다. 그레이움 백작과 세 아들.

아쉴레앙 공작가는 단둘이 자리했다. 루비아나와 루이먼드.

그레이움 백작은 루비아나 옆에 앉는 루이먼드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어서 이리로 오지 못해?’

루이먼드는 애써 그 눈빛을 못 본 척했다.

“자, 협상을 시작해 볼까요?”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에게로 향해있는 그레이움 백작가 네 남자의 시선을 자신의 쪽으로 유도했다.

“협상은 무슨!”

“무조건 반대, 반대입니다.”

“이 혼사는 절대 인정할 수 없습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우리 작고 어린 루이를, 공작님께 보낼 수 없습니다!”

협상은 시작부터 난항을 겪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루비아나는 이 귀찮은 자리를 오래 이어 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고 저들의 뜻대로 루이먼드를 돌려줄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그래서 준비해 온 패를 그대로 깠다.

“아쉴레앙은 혼수를 후하게 준비합니다.”

초대 공작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앞으로 대대로 그러하리라.

“루이를 이렇게 훌륭히 키워 주신 그레이움 백작가에 감사의 의미로, 서부의 다이아몬드 광산과 남부의 소금 산을 드리지요.”

아쉴레앙 가문 소유의 서부 다이아몬드 광산은 제국 최고의 산출량을 자랑했다. 솜씨 좋은 장인들이 대를 이어 일하는 공방도 딸려 있었다.

남부의 소금 산 역시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규모로, 인근에 소금 캐는 걸로 먹고사는 마을이 여럿 형성되어 있어 관리도 쉬웠다.

모두 황제가 준 것이었다.

곧, 다시 황제에게 돌아갈 예정이고.

‘반란 세력을 소탕하면 반란 세력의 재산은 국고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그러니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다. 이게 부족하니 더 달라고 하면 다른 것도 기꺼이 더 얹어 줄 생각이었다.

“……그걸, 다…… 말씀입니까?”

“아, 아버지!”

“그 정도라면…… 합.”

“흠흠, 공작님께서는 정말로 우리 루이를 사랑하고 아껴 주시는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레이움 백작가 남자들의 배포는 그 정도로까지 크지 않은 듯했다.

더 많이 가지고 있어야 그걸 송두리째 뺏길 때 절망이 더 큰 법인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쉴레앙 공작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그레이움 백작가 남자들이 금세 조용해졌다. 그들은 쉼 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테이블 밑에서는 손가락 신호도 오갔다.

루비아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앉아 구경했다. 잠든 루이먼드를 보는 것만큼 재미있진 않았다.

“비아.”

루이먼드가 슬그머니 옷소매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안색이 창백했다.

“몸이, 다시 안 좋아졌습니까?”

그레이움 백작과 그 아들들. 저들의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 비위라도 상한 건가 싶어 물었건만.

“어째서, 저걸 다 저 사람들에게…… 말도 안 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냥 혼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괜찮습니다, 저 정도는 넘겨주어도.”

“하지만!”

루이먼드가 말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저 많은 재산이, 고스란히 반란에 이용될지도 모르는데…….’

차마 그레이움 백작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루비아나는 그의 마음을 대충 짐작하고는 웃었다. 자신의 마음 역시 그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며.

‘내가 바라는 게 그겁니다.’

칼레나가 북부에서 고생 중인 제 언니에게 준 것이 고작 다이아몬드 광산과 소금 산뿐이겠는가?

그런데도 일부러 그 두 개를 고른 건, 그것들이 통째로 반란 세력에게 이용되길 바라서였다.

반란 세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공방과 마을 사람들까지 제 사람들로 바꿔 넣지는 못하리라. 그 안에 심어 놓은 첩자들도 거르지 못할 테고.

‘다 꿍꿍이가 있어서 저쪽에 주는 거니, 고작 이 정도에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러저러한 속셈 없이 순수한 혼수로 주는 거라 할지라도,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루비아나가 생각하기에 루이먼드는 이 정도 결혼 선물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저런 것들에게 시달리며 자랐으면서도 아름답고 참하고 실하게 자랐지 않은가?

루비아나는 루이먼드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그의 귀 가까이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고개를 들어요, 루이. 당신, 이제 그레이움 백작가 사람 아닙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감겼다.

루이먼드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고개를 들었다.

“허리는 펴고.”

“…….”

“똑바로 봐요. 지금 저들의 모습을.”

“…….”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말대로 절 비싸게 팔아먹게 되었다고 좋아하는 이들을 똑바로 봤다.

얼굴은 창백할망정 자세는 당당하고 꼿꼿했다. 아쉴레앙 공작의 부군다운 모습이었다.

루비아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습니다. 공작님께서 그토록 우리 루이를 사랑하신다면야……. 후우, 젊은이들의 사랑 앞에서 이 늙은이가 꼬장꼬장하게 버텨 무엇 하겠습니까? 지난 일은 다 잊고, 혼사를 통해 두 가문의 우애를 다지도록 합시다.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말입니다.”

계산을 끝냈는지, 그레이움 백작 역시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말했다.

혼수에 만족할뿐더러 이 혼사를 통해 아쉴레앙 공작가에 어떻게든 한 발 걸쳐 보고 싶다는 욕심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정말 탐욕스럽군.’

루비아나는 감탄하며,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손짓했다.

곧 칼레나가 준비해 준 합의서가 테이블 위에 올랐다.

그레이움 백작은 계약서에 다이아몬드 광산과 소금 산을 넘겨준다는 내용이 분명히 쓰여 있는지만 확인하고 후다닥 서명했다. 서명하고 펜을 내려놓는 그레이움 백작의 얼굴은 빛이 났다.

‘반란에 성공하면 나는 왕의 할아버지! 설사 반란에 실패하더라도, 루이를 이용해 아쉴레앙 공작가의 그늘에 숨으면 돼. 황제를 꼬시지 못한 건 아쉽지만, 아쉴레앙 공작도 나쁘진 않아. 혹시라도 황제가 후사 없이 죽는다면 루이의 피를 이은 아이가 황제가 될 수도 있을 테니. 그럼 나는 황제의 증조할아버지가 되겠지.’

콧노래가 절로 났다.

그레이움 백작은 자신이 콧노래를 부르는 줄도 몰랐다. 옆에 앉은 아들이 다리를 쿡 찌르자, 그제야 콧소리를 멈췄다.

루이먼드는 그런 그레이움 백작을 지켜보며 씁쓸히 웃었다.

‘날 팔아 재산을 모으고, 반란에 참여해 왕의 조부로 권력을 휘두르고.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거겠지.’

제 조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얼굴만 봐도 훤했다.

결혼 장사로 한몫 잡아 보려고 하는 그레이움 백작을 보면서도, 딱히 슬프거나 절망스럽지 않았다.

그레이움 백작에게 자신은 재물과 권력을 얻기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숱하게 경험했지 않은가? 더는 백작에게 가족애를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할 일도 없었다.

루이먼드는 아까부터 잡고 있었던 루비아나의 옷소매를 더 세게 움켜잡았다.

‘나한텐 이제 이 사람뿐이야.’

루비아나는 그레이움 백작에게 넘겨받은 합의서에 마저 서명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군.’

그레이움 백작과 그 아들들은 반란 세력의 꼬리. 몸통이 아니다.

반란 세력의 몸통은 지금쯤, 세간에 떠도는 황제와 아쉴레앙 공작의 불화 소문을 듣고 즐거워하고 있을 터였다.

반란 세력은 이 협상 테이블에서 어떤 결론이 나길 원할까? 분명 그레이움 백작은 몸통에서 뭔가 지시를 받고 나올 텐데.

루비아나는 두 가지 경우를 예상했다.

‘정말 루이를,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하고 충성할 생각이라면 반드시 나와의 혼사를 막으려 하겠지.’

하지만 아니라면. 그들의 목적이 그저 옛 왕국 건립에 있고, 루이먼드는 옛 왕국의 핏줄을 잇는 종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여기고 있다면.

‘적당한 보상을 받고 이번 혼사를 기꺼이 받아들이겠지.’

루이먼드를 이용해 황제와 아쉴레앙 공작의 사이를 가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차피 도구일 뿐인 루이먼드의 쓰임을 하나 더하는 건데. 당연히 그렇게도 써먹으려 할 것이다. 반란 직전에 회수해 가져가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루비아나는 이 협상 자리에서 그걸 확인해 보고 싶었다.

후자의 상황일 거라 예상했고, 그러길 바랐다. 그래야 나중에 가서 그냥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막상 그레이움 백작가 네 남자가 다이아몬드 광산과 소금 산 따위에 만족하며 루이먼드를 덥석 내놓으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씁쓸히 웃는 루이먼드를 보니 기분이 안 좋아졌다.

차라리, 전자의 상황이었다면 나았을까? 저들에게 루이먼드가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충성해야 할 존재였다면?

마음이 괜히 어지러워졌다.

그래도 합의서는 완성됐다.

합의서에 적진 않았지만, 루이먼드가 결혼식 전에도 아쉴레앙 공작저에 머무는 것 역시 양측이 합의했다.

그레이움 백작은 심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루비아나가 말없이 톡톡, 합의서에 적힌 다이아몬드 광산과 소금 산을 가리키자 표정을 풀었다.

합의서를 작성했으니 이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루비아나는 바로 일어섰다.

그러자 그레이움 백작이 얼른 테이블을 돌아 루비아나 앞에 섰다. 그러고는 하하하, 큰 소리로 웃으며 감히 먼저 악수를 청했다.

“다음에 뵐 때 우린 한 가족이 되겠군. 아, 물론 결혼식 전에도 얼마든지 만나서 이것저것 의논하게 되겠지만 말이야.”

먼저 손을 내밀지 않나, 은근히 말을 놓지 않나.

갑자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아니라면 간을 보는 게 분명했다. 루이먼드에게 푹 빠져 있을 테니, 루이먼드의 할아버지인 나를 홀대하지는 않겠지? 라는.

감히.

“…….”

루비아나는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았다.

“…….”

“…….”

“하하하…… 하하…… 하……이고오. 여기에 웬 벌레가.”

그레이움 백작은 슬그머니 손을 오므리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루비아나는 느긋이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할 수 있으면 다시 손을 내밀어 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제 허리춤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보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

그레이움 백작은 물론이거니와 세 아들의 얼굴까지 창백해졌다.

그레이움 백작은 루비아나의 옆에 선 루이먼드에게 필사적으로 눈짓했다.

‘뭐 하고 있는 게야? 어서 네 부인을 말리지 않고!’

루이먼드는 그 시선을 무시하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레이움 백작은 루비아나에 이어 루이먼드에게까지 외면당하고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래도 그레이움 백작은 그레이움 백작이었다. 그는 얼른 얼굴색을 가라앉히고는, 루비아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 잠깐 루이먼드와 저희끼리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공작님께서 워낙 저 아이를 싸고도시는 터라, 결혼식 전에도 데리고 있으시겠다니…… 아무래도 이 자리가 아니면 가족끼리 오붓이 이야기할 때가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루비아나는 당연히 안 된다고 거절하려다가 루이먼드를 보았다.

어떻게 할지 눈으로 물어보니, 루이먼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의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움 백작 말대로 해 주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그레이움 백작?”

루비아나와 그레이움 백작이 동시에 말했다.

‘예비부부끼리 말하는데 방해하지 마.’

루비아나가 흘깃, 돌아보자 그레이움 백작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저도, 이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단단히 결심한 듯했다. 이렇게나 굳게 마음먹은 루이먼드가 과연 저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기대됐다.

옆에 서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으나, 무리하게 부탁하진 않았다.

“근처에 있겠습니다. 언제든 필요하면 불러요, 루이.”

일부러 ‘루이’라고 부른 건 그레이움 백작보고 들으라고 그런 것이었다. 내가 이 사람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눈치채고 알아서 기라고.

“고마워요, 비아.”

정작 알아들으라는 놈은 못 알아듣고 루이먼드만 알아들어서, 조금 민망했다.

루비아나는 그레이움 백작과 세 아들한테는 말고, 루이먼드에게만 인사하고 홀을 나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데, 루이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제 그레이움이 아닙니다. 당신들하고 엮일 마음이 추호도 없고, 방금 내 이름을 빌려 받아 간 것들도 아까워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나를 찾지 마십시오. 아쉴레앙 공작가에도 오지 마시……”

탁.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혔지만, 더는 안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 그래야 내 남편답지.’

루비아나는 뿌듯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웃음 지었다.

“저 앞 회랑에 있을 테니, 내 부군이 나오면 그쪽으로 안내해 주게.”

문 앞을 지키고 선 시종에게 당부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회랑에 도착하자마자 카드릭을 발견했다.

카드릭은 회랑 건너편 입구에 서 있었는데, 멀리서 봐도 표정이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에 잔뜩 화난 것 같은데, 부닥치면 피곤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딱 왔다.

‘귀찮은 거 싫어.’

루비아나는 바로 돌아섰다. 이곳에 온 적 없다는 듯 사라지려고 했건만.

“아쉴레앙 공작.”

카드릭의 목소리가 회랑 전체에 울렸다. 우웅.

“윽.”

안 들키길 바란 게 애초부터 잘못이었다.

‘눈이 하나밖에 없어도 잘 보는구나.’

루비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돌아섰다.

카드릭이 빠른 걸음으로 루비아나에게 걸어왔다. 회랑의 벽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가득 걸려 있었지만, 무엇 하나 카드릭의 걸음을 늦추지 못했다.

“오랜만이야.”

보고도 안 본 척 도망치려 한 죄가 있으니 루비아나가 먼저 굽히고 들어갔다. 애써 밝게 인사하며 손을 들었는데, 카드릭이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

카드릭이 루비아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얼굴 가죽이 뚫릴 것 같았다.

‘뭐야, 왜 이래?’

루비아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들켰나? 뭘 또 들킨 거지?’

당장 생각나는 것만 열 개가 넘었다. 함부로 아무거나 말했다가 카드릭이 아직 모르는 죄를 자수하는 꼴이 될까 봐 함부로 묻지도 못했다. 그저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만 기다려야 했다.

“……이야기가 잘 끝났나 보군.”

카드릭이 슬그머니 제 눈치를 보는 루비아나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성난 기세가 살짝,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화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애써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참는 걸 보니, 나 때문에 그런 건 아닌가 보네.’

지은 죄가 많은 루비아나는 그것만으로도 안심했다.

마음이 놓이니, 이젠 카드릭이 너무 가깝게 서 있는 게 신경 쓰였다.

‘어릴 때부터 키가 커서 모르나 보지.’

루비아나는 카드릭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듯 밀어냈다.

카드릭은 그제야 뒤로 물러섰다.

“이야기 잘됐냐고? 설마 그거 신경 쓰여서 온 거 아니지?”

“…….”

“농담이야, 너 바쁜 거 잘 아니까 그렇게 인상 쓰지 마.”

“인상 쓴 거 아니야.”

“그래, 뭐 그렇다 치고. 잘 끝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끝났어.”

루비아나는 픽, 웃으며 다이아몬드 광산과 소금 산이 날아갔다고 말을 덧붙였다.

뭐 그런 걸 아까워하냐, 그동안 남편감 찾겠다고 힘들게 돌아다녔던 걸 생각해 봐라, 멀쩡한 놈이 너랑 결혼하겠다는데 더 주지는 못할망정 등등 이런 말이 돌아올 거라고 예상했건만.

“다이아몬드 광산에 소금 산? 아주 푹 빠졌군. 그렇게까지 넘겨주다니.”

냉소 어린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게, 더 퍼 주고 싶은데 그러지 말라더라.”

“누가? 그 자식이?”

“그래, 내 재정 상황을 많이 걱정하더라고.”

내 남편이 이렇게 경제관념도 밝고, 알뜰살뜰하다. 알겠냐? 루비아나가 자랑하듯 말했다.

“…….”

카드릭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루비아나는 그 소리에 놀라 카드릭을 다시 봤다.

‘뭐야, 밑의 누가 횡령이라도 했나? 왜 이렇게 돈 얘기에 예민해?’

카드릭은 제국에 단 셋뿐인 공작이며, 제국에서 손꼽히는 거부였다.

제국에서 가장 큰 상단 열 개 중 네 개가 펠트하르그 공작가의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고작 다이아몬드 광산 하나, 소금 산 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다니.

‘가신 하나가 크게 해 먹고 도망이라도 쳤나?’

펠트하르그 공작가는 다른 두 공작가보다 가신단이 튼튼했다. 충성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서부 변경백 시절부터 대대로 이어져 왔던 관계인지라, 칼레나도 감히 손댈 수 없었다. 은근히 견제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배신, 횡령이 일어났다?

‘설마.’

제국이 여덟 개로 쪼개지면 쪼개지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무슨 문제 있어?”

“빨리도 물어보는군.”

너. 네가 문제야. 네가 결혼하는 게 무슨 문제라고. 카드릭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말했으나 루비아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물어라도 본 게 어디야?”

“그것 참 고맙군.”

카드릭이 허탈함을 참지 못하고 하, 숨을 뱉었다.

‘저런 무딘 여자를 내가 왜……?’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켰다.

“있어, 무슨 일.”

“무슨 일?”

“속 터져 죽을 것 같은 일.”

“설마 나랑 관련한 건 아니지? 그렇다면 미리 미안하다고 말해 둘게. 화 풀어.”

“……네 일은 아냐.”

카드릭은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누가 봐도 ‘너 때문인 거 같은데.’라고 말할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루비아나는 카드릭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루단테와 카드릭은 황제의 부군 후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너무 선명히 박혀 있는 게 문제였다.

이 세상에 자매의 남편을 탐하는 정신머리 나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있다 해도 루비아나는 아니었다.

“그럼 누구 때문에 그러는 건데? 내가 대신 손 좀 봐 줘? 나야 뭐, 수틀리면 북부로 튀면 되니까.”

‘나 아니면 레나나 루단테, 그놈 때문이겠지.’

칼레나를 손봐 줄 순 없겠지만 루단테라면 대환영이었다. 한 번이 아니라 열 번도 손봐 줄 수 있었다.

“그렇게 손봐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적어도 날 봐 주기만 해도 참 좋겠는데.”

“뭐?”

루단테를 손봐 주는 즐거운 상상을 하다 카드릭의 말을 듣지 못했다.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더군.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서,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도 전혀 못 알아먹더니. 엉뚱한 곳에서 생기다 만 걸 들고 와서는!”

말을 하다 보니 다시 화가 나는지, 카드릭이 이를 악물었다.

‘꼭 해야 하는 일? 엉뚱한 곳에서 생기다만 걸?’

루비아나는 어리둥절했다.

카드릭의 말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엉뚱한 곳은 뭐며, 생기다만 건 또 뭐란 말인가?

카드릭은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늘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원하는 것은 더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아, 아니야.”

생각났다. 천하에 무서울 것 없는 카드릭이 저렇게 돌려 말하는 경우를.

‘레나인가?’

대개는 칼레나와 관련한 일이었다.

‘설마, 그것 때문인가?’

루비아나는 요즘 칼레나가 한참 몰두하고 있는 동부 치수 사업을 떠올렸다.

딱 봐도 돈이 많이 들 것 같은 사업이었다.

시행 기간도 길었다. 못 해도 10년. 최소 10년 동안, 제국의 국고를 되는 한 최대로 쏟아붓겠다고 했다고 들었다.

그 일에 카드릭의 말을 끼워 맞춰 보았다.

꼭 해야 하는 일은 동부의 치수 사업.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는 건, 동부 치수 사업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했다는 뜻.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도 전혀 못 알아먹었다는 건 칼레나가 카드릭은 제쳐 놓았다는 것.

엉뚱한 곳은 학자의 집.

생기다 만 건 비리비리한 학자의 집 출신 황실 관리들.

모든 게 딱 맞아떨어졌다.

루비아나는 잠깐, 퍼즐을 다 끼워 맞출 때 느낄 수 있는 짜릿함을 느꼈다. 카드릭의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 때문에 금방 식었지만.

‘그런데 왜 레나가 펠트하르그 공작을 그 사업에서 배제한 거지? 본인이 이렇게 관심있어 하는데.’

루비아나는 며칠 전 황궁에서 보내왔던 일거리 중 하나를 떠올렸다.

‘서부에 새 변경백을 세우는 게 어떨까, 하는 내용이었지. ……레나가 펠트하르그 공작을 견제하는 건가?’

카드릭, 펠트하르그 공작은 제국의 세 공작 중 가장 세력이 컸다.

국무에 가장 깊이 관여하고 있고, 충성스러운 가신단이 탄탄하고, 서부 지역 백성의 지지도 받고 있으니까. 상단 운영도 날이 갈수록 번창하고 있고.

이렇게 따지면 황제가 펠트하르그 공작을 견제할 이유는 충분했지만, 그 황제가 다른 누구도 아닌 칼레나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레나가 고작, 그런 걸 두려워해서 펠트하르그 공작을 견제한다고? 말도 안 돼.’

차라리 카드릭과 결혼해 카드릭의 세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게 더 칼레나다웠다.

“왜? 네가 보기엔, 그 생기다 만 걸로 하면 안 될 거 같아?”

루비아나가 진지하게 물었다.

카드릭의 의견을 대신 칼레나에게 말하고, 그를 동부 치수 사업에 쓰라고 건의해 볼 생각이었다.

“그깟 게, 감히?”

카드릭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루비아나가 봐 왔던 카드릭의 모습 중 가장 빈정 상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관계가 금 간 건 나랑 레나가 아니라, 레나랑 이 자식 같은데.’

딴 사람도 아니고 황제와 펠트하르그 공작의 사이가 벌어지다니. 위험한 일이었다.

혹시라도 둘 사이가 더 많이 틀어지면, 황제는 펠트하르그 공작에게 차마 시키지 못한 일을 다른 공작에게 떠맡길 것이다.

예를 들면 펠트하르그 공작보다는 덜 성실하고 덜 유능하지만, 그래도 자매지간이라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제국의 천년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됐다.

“그럼 네 생각은 어때?”

루비아나가 다급히 카드릭의 옷깃을 붙들었다. 그 바람에 카드릭의 허리가 쑥 구부러졌다. 조금 전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던 게 허사가 됐다.

두 사람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가까워졌다.

“……내 생각? 지금 내 생각을 물었어?”

하나뿐인 눈이, 루비아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 네 생각이 궁금해.”

루비아나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레나에게 잘 전달해 줄게.’

루비아나는 단단히 마음먹고 카드릭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보기 드물게 진지한 모습이었다.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잘 기억했다가 고대로 칼레나에게 말해 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녀를 잠깐, 성실하게 만들었다.

“…….”

카드릭은 그만큼 자신에게 집중한 루비아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두 손은 루비아나를 끌어안지 않기 위해 주먹을 쥔 지 오래였다. 손톱이 굳은살 박인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

순간, 카드릭의 눈이 루비아나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카드릭은 그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속삭였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말해 주지.”

카드릭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 말해 봐.”

루비아나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내 생각은 이래.”

카드릭의 고개가 꺾이고, 입술이 다가왔다.

‘……어?’

루비아나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의 손이 두 사람의 얼굴 사이로 불쑥 들어왔다.

“헉.”

“젠장.”

루비아나와 카드릭은 놀라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놀란 건 루비아나뿐이었다.

카드릭은 회랑 끝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봤다. 누가 오는지 알면서도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까 놀랄 이유가 없었다.

루비아나가 카드릭이 다가왔을 때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 건 잠깐뿐.

그마저도 제 등 뒤에 서서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을 보고는 까맣게 잊었다. 눈앞에 루이먼드가 있는데 다른 게 무어 중요할까?

“아, 이야기는 다 끝났나요?”

그가 반가워 미소 지었건만. 그의 상태가 어쩐지 이상했다.

저쪽 끝에서 이쪽까지 급히 뛰어온 사람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고, 얼굴은 터질 것 같이 벌겠다.

‘다시 열이 오르는 건가? 의사가 무리하지 말랬는데. 역시 그레이움 백작을 만나게 하는 게 아니었어.’

루비아나는 후회하며 손을 들었다. 열이 얼마나 나는지 확인하려고 한 건데, 루이먼드가 중간에 손목을 잡아챘다.

루이먼드는 그대로 잡아당겨 루비아나를 자신의 등 뒤로 세웠다.

팔을 잡힌다는 건 제압당했다는 의미. 상대에게 팔목을 내주면 무기를 휘두를 수 없게 되니 위험하다.

그런 상황이 닥치기 전 팔을 비틀어 빼거나 상대의 급소를 노려 틈을 만드는 건, 루비아나에게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루비아나는 루이먼드 한정으로, 순순히 팔을 내주었다. 왜 루이먼드만 특별 취급하는 건지, 스스로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저번에 아플 때 내내 잡고 있어서 그런 건가?’

그저 이렇게 추측할 따름이었다.

아무튼, 그렇다 해도 남의 등 뒤에 숨듯 서 있는 건 열다섯 살 이후 처음이었다.

“뭐 하는 짓이지?”

카드릭이 비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러게 말이야.’

루비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펠트하르그 공작.”

루이먼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건지, 루비아나가 카드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 안 듯했다.

“…….”

“…….”

두 남자는 더는 말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한쪽은 눈이 하나밖에 없지만, 변경백 출신의 노련한 기사.

다른 한쪽은 의외로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몸이 좋긴 하지만, 그래도 운동이라고는 공부에 도움이 될 정도로만 해 봤을 학자의 집 학자.

한쪽이 철저히 밀릴 수밖에 없는 구도인데, 의외로 루이먼드가 잘 버텼다.

보통은 카드릭의 서슬 퍼런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거나, 심하면 오줌을 지리기도 하는데.

잘 버티다 뿐인가? 오히려 카드릭을 압박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펠트하르그 공작.’이라니.

“오.”

루비아나는,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감탄하고 말았다.

‘내 남자에게 이런 면이?’

그러고 보면, 처음 봤을 때도 그는 이런 모습이었다.

리사나를 싸늘하게 쳐 내지 않았던가. 그 뒤로 상황이 이러저러하여 약하고 가녀린 모습만 봤을 뿐.

문득, 북부에서 몰래 마수를 키웠던 대머리 부하 놈이 생각났다.

‘강아지인 줄 알고 데려왔는데 사실, 다이어울프였더라고요. 나한텐 애교도 부리고 착한데, 돌아서서 딴 사람만 보면 으르렁거리고 물려고 하네요.’

사람 머리쯤은 한입에 부숴 버리는 마수를 남몰래 창고에서 키워 온 주제에, 그 마수가 창고에 숨어든 도둑을 물어 죽이자, 우리 복슬이는 잘못한 게 없으니 죽이면 안 된다고 엉엉 울었더랬다.

마수 사냥이 끝나면 매일같이, 사람이 먹지도 못하는 마수 대가리를 신나게 들고 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땐 한참 왕눈이랑 우정을 쌓아 나가던 때라, 마음이 기울어 버렸다.

주변에선 겨울이라 먹을 것도 없는데 잡아먹자, 사람 피 맛 본 걸 어떻게 키우느냐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루비아나는 다이어 울프를 죽이지 않았다.

대신 대머리 부하 놈의 10년 치 월급을 미리 빼앗아 목줄을 매 줬더랬다.

‘사나우면 어때? 아무튼 주인에게만 충성하면 되는 거 아냐? 너, 쟤보고 사람 먹지 말라고 해. 또 한 번 사람 머리통 깨물면 네 머리통을 깨 버리겠다고. 복슬이 쟤 말고 너. 복슬이가 무슨 죄가 있냐? 잘못 키운 네놈 죄지.’

갑자기 그때 일이 떠오른 건, 루이먼드가 그때 그 복슬이랑 비슷해 보여서였다.

내 남편 될 사람, 엄청 순하고 약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달라졌지? 님, 다이어 울프세요?

“오는 무슨 오입니까!”

다이어 울프, 아니, 곧 남편 될 사람이 버럭, 소리치며 루비아나를 돌아보았다.

‘아니, 안 돌아보고 계속 카드릭이랑 눈싸움해도 난 상관없는데.’

카드릭과 맞서도 지지 않는 강한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루이먼드는 복슬이처럼 제 주인, 아니, 부인 될 사람에게는 자신의 원래 모습을 보였다.

원망이 뚝뚝 묻어나긴 하지만, 아무튼 울먹울먹한 눈빛이 그렇게 서러워 보일 수 없었다.

“음…….”

뭔가,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멀쩡한 남편을 놔두고 딴 남자랑 놀아난 걸 들켜서 혼나는 것 같달까?

그래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느낌은 알 수 없으나 대략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참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람피운 적도 없는데 바람피운 사람처럼 혼나야 한다니.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루비아나는 해명하고자 말을 꺼냈다. 말을 꺼내고 보니, 어감이 이상해 멈칫한 사이, 루이먼드가 먼저 분노를 터뜨렸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아니, 뭘.”

“이래서 한눈팔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그러니까 뭘……”

“비아,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루이먼드가 상처 입어 촉촉한 눈으로 루비아나를 째려보고는, 몸을 돌려 다시 카드릭을 노려보았다. 루비아나가 봤던 울먹울먹한, 혹은, 상처 입어 촉촉한 눈빛 따위는 온데간데없었다. 검은 눈엔 오직 싸늘함만 묻어났다.

‘나의 루비.’

카드릭의 목소리가 귓가에 천둥처럼 울렸다.

‘아니, 내 비아야. 내 비아를 건들면 죽여 버릴 거야.’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처음으로 느껴 봤다.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온몸이 벌벌 떨렸다.

그런데도 카드릭에게 달려들지 않은 건, 일단 루비아나를 제 품으로 돌려놓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었다.

숨차도록 달려 루비아나를 끌어당겼다. 아니, 달리는 동안 숨을 쉬기는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저 끝에서부터 여기까지 달려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 루이먼드는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무력으로 카드릭을 당해 낼 수 없다. 덤벼들었다간 역으로 당해 목을 잘려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루비아나를 빼앗길 순 없었다.

‘이 새끼, 뭐야?’

카드릭은 그런 루이먼드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버티는 건 그렇다 쳐도. 눈빛이 이상했다. 일개 학자의 집 출신 말단 관리가 가질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인생에서 가장 큰 굴곡이라 해 봐야 학자의 집이 부서진 것 외엔 없을 비실이 주제에 이런 눈빛을 가지고 있다니.

‘폭군의 피를 이어받아 광증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루비아나의 곁에 오래 두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거슬리는 건 또 있었다. 아니, 수상쩍은 눈빛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거슬렸다.

“비아? 설마, 애칭인가?”

의도적으로 루이먼드를 무시하고 루비아나에게 물었다. 루비아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 아니었어?”

확인하는 척하며 루비아나의 애칭을 불러 보았다.

루이먼드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는 그런데……”

“그렇게 부르지 마!”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루이!”

“비아!”

그러더니 아예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애칭을 부르고 앉았다.

‘이 새끼가 지금 내 앞에서!’

카드릭은 하나뿐인 눈을 부릅떴다.

“진정해요, 루이. 무슨 오해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오해니까…….”

루비아나는 일단, 미쳐 날뛰는 루이먼드부터 진정시키자는 생각에 그에게 집중했다.

“저딴 놈한테 대답해 주지 말아요. 아니, 아예 저놈이랑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왜 날 두고 저 자식이랑 같이 있었어요?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웃어 주기도 했어요? 그랬어요?”

“진정, 진정하라니까. 내 말 안 들려요?”

워워, 루비아나는 손을 들어 루이먼드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이래도 말을 안 들으면 어쩔 수 없이 좀 더 아픈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후두부를 가격하여 정신을 잃게 만든다든가, 명치를 쳐서 순간 기절시킨다든가.

‘제발 내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 예쁜 몸, 얼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때린단 말인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귀중한 예술품을 부숴 버리는 것보다 끔찍한 경험이 될 터였다.

“비아…….”

다행히 루이먼드는 더 날뛰지 않았다. 대신 울먹한 눈으로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나예요, 루이.”

루비아나는 곧바로 루이먼드의 목을 잡아당겨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 주니, 루이먼드는 기다렸다는 듯 루비아나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하아…….”

루이먼드가 깊은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겨우 진정한 듯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어깨를 토닥이며, 카드릭을 마주했다.

“그런 가소로운 강아지가 취향이었나?”

“내 남편 될 사람이야. 예의를 갖춰 줬으면 좋겠는데.”

우리 루이, 네 허튼짓 때문에 많이 놀랐거든!

‘칼레나한테 화났으면 그쪽에 가서 풀어야지, 내 남편한테 왜 그래?’

루비아나는 카드릭이 일부러 장난친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카드릭이 제 남편 될 사람 보는 앞에서 그런 허튼짓을 했을 리가 없으니까.

폭군의 사생아인 루이먼드가 곱게 보이지 않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폭군에게 가족을 잃고도 충성해야 했던 시절의 기억이 그리 좋은 감정으로 남아 있지는 않을 테니.

‘그래도 그렇지, 어디서 화풀이야?’

폭군은 이미 죽었다. 그의 왕국은 사라졌고, 그의 핏줄은 모두 죽었다. 단 하나를 빼면.

그 하나도, 폭군을 피해 학자의 집으로 도망간 사생아일 뿐이었다.

화풀이의 대상이 잘못됐다.

“남편?”

“그래. 폐하께서 허락하셨고, 방금 그레이움 백작과도 합의를 끝냈으니까.”

식은 아직 안 올렸지만, 이 정도 진행했으면, 결혼한 사이나 다름없었다. 한쪽이 갑자기 회까닥 돌아 버려서 진정한 사랑을 찾겠다며 도망가 버리지 않는 이상, 반드시 결혼하게 되리라.

“지금 내 앞에서, 결혼을 운운……”

“비아, 가요.”

카드릭이 이를 갈며 말할 때였다. 갑자기 루이먼드가 루비아나를 번쩍 들었다.

‘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루비아나는 저도 모르게 루이먼드의 목덜미를 콱 움켜잡았다. 그대로 비틀어 꺾으면 목이 직각으로 꺾일 터였다.

카드릭이 그 모습을 보곤 하나뿐인 눈을 빛냈다. 루비아나가 제 눈앞에서 루이먼드의 목을 꺾어 버리기를 기대한 것이었다.

“……!”

루이먼드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숨을 쉬려고 해도 쉴 수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목을 잡힌 것에 대한 공포도 상당했다. 몸은 단번에 돌처럼 굳었다.

그래도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

루비아나를 놓치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그녀에게 목이 꺾여 죽는 게 나았다.

그래 봤자 또 되살아나기밖에 더하겠나? 아홉 번째 삶.

그러면 또 루비아나를 찾아오리라. 그때엔 이번에 했던 실수 따위 하지 않고, 좀 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청혼하리라.

목 잘려 죽기 싫어 루비아나와 결혼하고자 했던 루이먼드는, 어느새 자신의 목적과 수단이 바뀌어 버렸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아차.’

다행히 루비아나가 금방 정신 차렸다.

절 번쩍 든 게 마수나 적이 아니라, 남편 될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바로 손의 힘을 풀었다.

루비아나는 손을 풀었지만,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발이 쑥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루비아나는 그제야, 루이먼드가 제게 안겼을 때 고개만 숙인 게 아니라 무릎 역시 꽤 구부렸다는 걸 알아챘다.

‘키 차이가 이렇게 났었나?’

루이먼드가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루이? 루이, 잠깐만요.”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니요, 더는 잠깐만 없습니다.”

루이먼드는 단호했다. 절 내려 주거나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기분이 많이 상했나 보네.’

이쪽은 지금 말이 안 통하는 상태. 그럼, 말이 통하는 쪽부터 해치워야지.

루비아나는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카드릭을 바라보았다. 그는 황당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카드릭에게 할 말이 뭐 있겠는가?

“먼저 가 볼게.”

작별 인사를 하는 수밖에.

“하?”

카드릭이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루비아나!”

이어 회랑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쳤다.

칼레나가 일부러 이쪽 홀과 회랑에 사람들 출입을 막아 놓은 것 같던데. 믿을 만한 시종 한 사람 정도만 두고.

카드릭의 고함 때문에 온 황궁 사람들이 다 이쪽으로 몰려올 것 같았다.

‘진짜 열 받았네.’

자매가 쌍으로 사람 화나게 만든다고 하려나?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게 누가 그런 장난 치래?’

루비아나는 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번에 또 하자고. 오늘은 일단 먼저 가 볼게.”

루비아나는 카드릭에게 다음번을 기약했다.

그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허리를 감싼 팔이 불끈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등을 계속 만져 주었다.

“진정해요.”

이러다 또 열 올라서 아플라.

그렇게 루이먼드를 달래 주는 루비아나의 입가에 설풋, 웃음이 어렸다.

‘제법인데?’

저 카드릭과 당당히 맞서다니.

루비아나도 루이먼드가 카드릭의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럼에도 카드릭에게 밀리지 않았던 루이먼드의 모습이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혹시나 카드릭이 정신 못 차리고, 루이먼드를 공격하려 한다면? 그때는 자신이 나서서 상대해 주면 될 일이다.

카드릭이랑 싸워 이기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감히 카드릭과 싸울 생각을 했다는 게 중요했다.

‘이게 질투, 그런 거 맞지?’

질투하는 루이먼드가 아주 귀엽고, 썩 마음에 들었다.

오해 풀어 주지 말고 좀 더 지켜볼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물론, 오해는 바로 풀어야 하겠지만.

“결혼식에 초대는 할 건데 안 올 거지? 그래도 선물은 몰래 뒷문으로 보내. 받아 줄게.”

“그딴 거 필요 없습니다.”

루이먼드가 목울대를 울리며 으르렁거렸다.

다이아몬드 광산하고 소금 산 아깝다고 할 땐 언제고, 제국에서 셋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의 결혼 선물을 퇴짜 놓다니.

‘진짜 귀엽네.’

루비아나는 그 귀여운 것한테 번쩍 들려 가고 있으면서,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 큭큭, 웃었다.

그러다 루이먼드의 목덜미에 난 시뻘건 손자국을 발견했다.

웃음이 뚝 그쳤다.

가만 놔두면 시뻘겋게 피멍이 들 듯했다.

‘이런.’

루비아나는 착잡해졌다.

그렇게 루이먼드의 목덜미에 난 상처에 집중하느라, 미동도 하지 않고 절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카드릭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루비아나를 대신해 카드릭을 기억해 준 건 칼레나였다.

몇 주 뒤.

카드릭은 칼레나의 밀서를 받았다.

보드라운 크림색 종이에 적힌 황제의 필체는 아름답고 힘찼다. 내용도 아름다웠다.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를 걱정하고, 그의 충성에 늘 고마워한다는 문구가 가득했으니까.

요약한다면 이러했다.

‘동부 치수 사업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 몰랐어. 언니가 간곡히 부탁하더라고, 경을 절대 빼놓고 일하지 말라고. 뒤늦게라도 알았으니까, 동부 치수 사업의 총책임자로 임명할게. 아, 수로 개설은 펠트하르그 공작가의 기부로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게. 대신 수로에 펠트하르그라고 이름 붙여 줄게.’

밀서에 따라온 마차 한 대분의 서류를 보며, 카드릭은 잠시 황제에 대한 충성심도 잊은 채 황제가 내려 주신 밀서를 와그작 구겼다.

“루비아나, 이 여자가 정말!”

크아악. 펠트하르그 공작저에 괴성이 울려 퍼졌다.

펠트하르그 공작이 저택에서 남몰래 새끼 드래곤을 기르고 있다는 뜬소문이 퍼지게 된 계기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