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드릭이 안 보이게 된 후로도 루이먼드는 계속 걸었다.
루비아나가 이제 좀 내려 달라고 몇 번 말을 걸었으나, 루이먼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들고 다녀라, 다른 사람 눈에 띄지만 말고.’
다행히도 루이먼드에게 번쩍 들려 이동하는 내내, 사람을 마주치지 않았다.
‘황궁에 이런 곳도 있었나? 진짜 외지네.’
꽤 외진 곳에 다다라서야 루이먼드가 멈춰 섰다. 루비아나를 내려 주었다.
두 발이 바닥에 닿았다.
“이제 기분이 좀 풀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몸이 들렸다.
이번엔 절 드는 게 루이먼드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손날로 루이먼드의 목을 내리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의문에 빠졌다.
‘내가 이렇게 가벼웠나? 학자의 집 출신 비전투인에게 번쩍번쩍 들릴 정도로?’
약간 자존심 상할 정도로, 루이먼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무거워하거나 살짝이라도 휘청였다면 그것대로, 실망스러웠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손으로 루이먼드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렇게 루이먼드가 절 껴안는 걸 도우면 루이먼드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릴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더 안 좋아졌다.
“그 자식한테도, 이렇게 했습니까?”
“……?”
“펠트하르그 공작, 그자가 키스하려고 할 때도 이렇게 응했느냔 말입니다.”
루이먼드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루비아나는 그 목소리 말고, 그가 한 말에 기겁했다.
“키스라니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잠깐.”
말도 안 되는 오해라고, 카드릭이 짓궂게 장난친 거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방해받아 버렸다. 루이먼드가 대뜸 입술을 들이댔기 때문이었다.
“……비아?”
루비아나가 재빨리 그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졸지에 손바닥과 입술을 부딪친 루이먼드가 눈을 크게 떴다.
루비아나는 그대로 그 아름다운 얼굴을 쭉- 밀어낼 생각이었다. 루이먼드가 눈을 내리깔고 처연한 표정을 짓지만 않았어도, 분명 그리했을 것을.
“비아…….”
루이먼드의 목소리가 촉촉했다. 이게 결정타였다.
차라리 사연 많고 할 말 많아 보이는 눈빛으로 바라봤다면 바로 제압해버렸을 것을. 정반대로 나오니 오히려 마음이 약해졌다.
루비아나의 손이 느슨해졌다. 루이먼드가 그 손바닥에 살짝 입을 맞췄다. 루비아나가 간지러워하며 손가락을 움츠리자, 손톱 끝에 다시 입을 맞췄다.
“비아, 허락해줘요. 제발요.”
아련한 목소리가 심금을 울렸다.
방금 전까지 사납게 날뛰었던 주제에 이렇게 금방 본색을 숨기고 약한 척하다니.
‘그럼 들어줄 수 밖에 없잖아.’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팔을 잡아당겨 그가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 순진하게 내리깔고 있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조금 전 연약한 척 했던 모습을 단번에 벗어던지고는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럽고, 뜨겁고. 거칠고 격렬한.
입술 안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이 난폭했다.
루비아나는 야생마에게 물린 재갈을 움켜잡듯, 어깨를 잡은 손으로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를 벽과 자신의 사이에 꼭 가두고는, 깊게, 더 깊게 입 맞췄다.
입맞춤은 끝없이 이어졌다.
루비아나는 숨이 막혔다. 루이먼드가 간간이 입술을 떼고 숨 쉴 틈을 주는데, 그때 숨을 쉬어도 다시 숨이 막혔다. 결국엔 루이먼드에게 매달려 그가 불어 넣어 주는 숨에 의지해야 했다.
숨 막혀 죽을 것 같기라도 하면, 그걸 변명 삼아서 루이먼드를 밀어낼 텐데.
그런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루이먼드는 가차 없이 루비아나를 몰아세우고, 또 루비아나를 숨 쉬게 했다.
입안에서 신음이 샜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루이먼드는 제 어깨를 꽉 움켜쥔 루비아나의 손을 풀어, 제 목을 끌어안도록 했다.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어떻게 그렇게 능숙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건지, 신기한 일이었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잠깐이라도 정신이 들어 루이먼드를 밀어내려 하면, 아니 루이먼드의 목을 감싼 팔을 느슨하게 풀려고만 하면.
“비아. 쉬이, 비아.”
아이 달래듯 아랫입술을 핥고 때론 혀를 아프지 않게 깨물며 기어이 루비아나의 모든 감각을 자신에게로 집중시켰다.
루비아나가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 말고 무엇에도 눈 돌리게 놔두지 않았다.
루비아나가 루이먼드에게 밀리고 밀려 벽에 머리를 기대자, 그것마저 질투하며 루비아나를 잡아당겼다. 벽에 기대지 말고, 온전히 제게 기대도록 하며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계속, 계속.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입맞춤이 끝난 건, 너무 좋아서, 이러다 정신이 어떻게 돼 버릴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든 루비아나가 루이먼드의 등을 퍽퍽 내리쳐서였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힘을 조절해 치긴 했다. 그래도 루이먼드의 상체가 흔들렸다.
꽤 아팠을 텐데, 루이먼드는 통증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입술을 떼긴 했지만.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루비아나만 바라보았다.
검은 눈이, 루비아나의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헉, 헉. 루비아나는 오랜만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북부 지역을 끝에서 끝까지 말달린 것처럼 피곤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기도 하고, 팔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기도 하고.
그런데도 절 바라보는 루이먼드의 검은 눈, 그 눈빛만큼은 또렷이 느껴졌다.
루비아나는 그 눈이, 위험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남편 될 사람보고 약간 맛이 간 것 같다고 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겠으나 다른 고상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루이.”
아까처럼 진정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의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어째서인지 진정되기는커녕 어깨 근육이 더 불끈, 부풀었다.
“루이?”
“……젠장.”
루이먼드가 더 돌아 버린 눈을 하고 다시 달려들었다. 루비아나는 다시 그의 품에, 그의 입술에 갇혔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에게 끝없이 입 맞추며, 옆을 더듬어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루비아나는 거기에 문이 있는 줄도 몰랐다.
달칵, 소리가 나고 주변이 어두워지고야 어딘가에 들어온 걸 알았다. 그 어딘가는 불도 켜 있지 않고, 커튼도 쳐 있는 곳이었다. 황궁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었다.
루비아나는 뒤로 밀리고 밀리다 무릎 뒤쪽에 닿은 턱에 걸려 뒤로 넘어졌다.
털썩.
다행히 침대처럼 푹신하긴 했는데.
‘그래도 그렇지, 황궁에서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정신없는 와중에도 위기감이 들었다. 이 황궁을 손에 콱 틀어 쥐고 있는 칼레나와 시종장이 무서워서였다.
루이먼드를 잘 다독여 진정시키고, 이 이후는 저택으로 돌아가서 하자고 달래자. 이렇게 마음 먹었는데, 루비아나가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걸 알아챈 루이먼드가 선수를 쳤다.
“양측은 결혼 기간 동안 상대방에게 충실해야 한다.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라 할지라도, 이성을 필요 이상 가까이할 시 상대방은 간섭할 수 있으며, 정신적 충격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결혼 계약서 제11 조항.
그건 루이먼드가 자신 몰래 피오니 로렌을 만날까 봐, 그때를 대비해 넣어 놓은 내용이었다. 루이먼드가 그걸, 제 무기로 삼은 것이었다.
‘그걸 왜 외우고 있어? 아니, 그보다 그게 왜?’
루이먼드가 정말 단단히 오해했구나 싶었다.
“합당한 보상. 비아, 당신은 제시할 생각이 없으신 거 같은데 내가 알아서 받아가겠습니다.”
“잠깐. 잠깐만, 루이…… 읍.”
오해를 풀고자 시도했지만 루이먼드에게 막혔다.
‘아니, 사람이 말할 기회는 줘야지.’
그냥 확 엎쳐서 제압하고 해명할까 고민하던 루비아나는, 제 어깨를 움켜잡은 루이먼드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그 떨림을 알게 되니, 차마 그를 밀쳐 낼 수 없었다.
루비아나가 몸에서 힘을 풀자, 그걸 느낀 루이먼드가 살짝 입술을 떼고 루비아나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보다 더 어두운 눈이 거칠게 빛났다.
보고 있자니, 처음 북부에 가 마수를 정면에서 마주쳤을 때 느꼈던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맞서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어쩌면, 아니, 반드시 이길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저것은 여지없이 내 목덜미에 이를 박고 날 물어뜯겠지.
긴장감이 들어 다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비아.”
루이먼드가 연달아 가볍게 입 맞추며 루비아나를 불렀다.
“괜찮아요.”
“……?”
‘뭐가?’
“거칠게는 안 하려고 노력할게요.”
“……?”
‘뭘?’
“제발, 허락해 줘요.”
하아, 루이먼드가 뜨거운 숨을 내쉬며 루비아나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안 돼, 절대 안 돼. 여기서 뭘 해!
당연히 이렇게 말하고 밀어내야 하는데.
어깨에 닿은 뜨거운 온기가 루비아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약한 열기와 떨림. 그가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절실한 눈빛에 이어 절박한 몸짓. 뜨거운 숨에 섞인 떨리는 목소리까지. 무엇 하나, 부담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항상, 절박하고 다급할까?’
부담스럽게.
루이먼드가 안다면 섭섭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부담스러운 걸 부담스럽지 않다고 할 순 없는 노릇.
루비아나는 확실히 루이먼드가 부담스러웠다.
부담스럽다는 건 버겁다는 말과 닮아 있다. 적어도 루비아나에겐 그랬다.
앞뒤 생각 않고 전력을 다해 부딪쳐 오는 건, 늘 버겁다. 사랑스럽고 안쓰러우니까.
사랑스럽다고, 안쓰럽다고 함부로 곁에 두면 어, 하는 사이에 빠져들게 된다. 빠져들면 뜨거워지고, 그 열기는 눈과 귀를 막는다.
열기는 치명적인 독이다.
열정은 방심의 다른 말.
하나에 몰입하면 다른 건 보이지 않게 된다. 루비아나가 살아온 삶은, 단 한순간도 그런 순간을 용서하지 않았다.
잠깐의 방심은 죽음이고 전멸이고 몰살이고, 실패였다.
느긋하게.
이성적으로.
흥분하면 안 돼.
냉정하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늘 주변을 살펴.
하나에만 몰두하지 마.
그렇게 살았다.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했다.
제국은 아직 기반이 약하고, 칼레나에겐 믿을 만한 사람이 부족하니까. 북부엔 여전히 마수들이 득실거리고, 자신은 아직 신께 바칠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이 삶에 그의 열기는 너무 위험했다.
‘역시 이 사람은 너무 부담스러워.’
괜찮지 않아. 거칠게 하지 않아도, 안 돼. 역시 넌 아닌 것 같아. 머릿속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했다. 루비아나는 그 말대로 하자고 마음먹었다.
말로 안 들으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밀어내리라.
그런데.
“지금 당장, 당신을 만지고 당신이 내 것이라는 걸 확인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거 같아요.”
루이먼드가 떨리는 목소리가 선수를 쳤다.
“그러니까 허락해 줘요.”
어깨에 닿은 열기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독이었다.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밀어내야 하는데.
“제발.”
진짜, 밀어내야 하는데.
“비아. 나의 비아.”
루이먼드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검은 눈이 아까보다 더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싫으면 죽여요.”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손을 들어 제 목을 움켜잡게 했다.
손끝에, 아까 붙잡았던 목덜미 부분이 닿았다. 다른 곳보다 뜨거웠다. 부어서 피멍이 번지고 있는 듯했다.
루비아나는 손끝으로 그 부분을 살살 문질렀다.
그러니 좀 더 실감 났다. 그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강하게 움켜잡고 꺾으면, 어떻게 될지.
반드시 이 목은 꺾일 것이다. 제 위에 올라탄 사내의 생명 역시 한순간에 꺾이리라.
‘……죽여?’
사람 하나 죽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밤중에 숨어들어 온 암살자를 잠결에 죽인 적도 있는데. 죽여 달라고 제 목을 내미는 사람쯤이야.
그런데.
손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죽이긴 뭘 죽여?’
피식, 웃음이 났다.
저렇게 절박하면서, 자신이 허락해 줄 때만 기다리고 있는 사내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자신이 안 죽일 거라는 걸 알면서, 도발하듯 싫으면 절 죽이라고 말하는 루이먼드가 가소롭고, 귀여웠다.
‘어차피 3년이잖아.’
이런 생각을 할 만큼.
3년은 길고, 또 짧다. 칼레나의 말처럼 2년 정도 지나면 질릴지 모른다.
설령 질리지 않는다고 해도, 3년 정도만 빠져서 허우적대다 빠져나오면 될 일이다. 3년은 짧으니까. 그 정도는 괜찮겠지.
‘너무 깊게 정들면 안 되는데…….’
더없이 이성적인 머리는 잠깐 쉬게 하자. 그동안 계속 고생했으니까.
‘아직은 괜찮아. 이 정도는 누려도 돼.’
루이먼드가 퍼트린 열기에 물든 심장이 루비아나가 원하는 하찮은 거짓말, 같잖은 변명을 대신 해 줬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정도니까. 잠깐, 아주 잠깐만 경험해 보는 거야.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뜨거우니까.
이토록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그냥 놔줄 수 있겠어?
“비아.”
루이먼드가 더는 참기 힘들다는 듯 재촉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목을 움켜잡고 있던 손을 내려,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루이먼드는 거절을 예상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루비아나는 그런 루이먼드를 잡아 내려, 입 맞췄다.
“흡.”
루이먼드가 눈을 번쩍 떴다. 루비아나는 그걸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게 허락한다는 말보다 더한 허락이라는 걸, 루이먼드가 모를 리 없었다.
“비아.”
루이먼드가 목울대를 울리며, 마수의 울음소리 같은 신음을 흘리며 루비아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