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31)

***

가악- 가악-.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황궁에도 까마귀가 있네.’

어쩌면 공작저에서 우짖던 까마귀가 황궁까지 따라온 걸지도.

‘뭔 소리야?’

제 생각이 우스워 피식 웃던 루비아나는 곧,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망했다. 딴 데도 아니고 황궁에서…….’

드디어, 잠깐 퇴출당했던 이성이 돌아왔다. 할 거 다 한 뒤에 뒤늦게 후회해서 무엇 하겠느냐마는.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나니 비로소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쓰지 않는 방인 듯 가구에 흰 천이 덮여 있었다. 그래도 청소는 꼬박꼬박하는지 먼지가 쌓여 있지는 않았다.

루비아나는 천을 걷지도 않은 침대에서 루이먼드와 영차영차 사랑을 나눴다. 지금은 침대맡에 기대앉은 루이먼드의 품에 안겨 있었고.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혹시 침대 위에서 영차영차 할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놀라 도망가진 않았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열다섯 살 이후로 이렇게까지 주변 신경 안 쓰고 뭔가에 몰두했던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 없었다는 건데.

‘원래 이렇게 격렬하고, 주변의 다른 건 아무것도 안 보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겠고. 그런 건가?’

멍하니 앉아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는데, 얼굴에 열이 확확 올랐다.

‘누가 봤을까 봐 무섭다, 진짜.’

이런 기억들을 차곡차곡 잘 쌓아 놓으면, 나중에 북부에 가서 추위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추울 때마다 한 번씩 떠올리면 되니까.

“비아, 무슨 생각 해요?”

딴생각하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루이먼드가 귀를 깨물었다.

“으.”

어깨를 움츠리자, 루이먼드가 어깨에 뺨을 부볐다.

“딴생각하지 마요.”

“…….”

사람이 어떻게 한 생각만 하고 살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런 말을 하는 너는 딴생각 안 하고 사는가?

반박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으나, 말을 하려다 말았다. 기운도 없는데, 무려 학자의 집 출신 학자와 말싸움하고 싶지 않았다.

안 들린다, 안 들려. 못 들은 척 무시하자, 루이먼드가 어깨와 등에 쉼 없이 입 맞추며 속삭였다.

“바람피우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예요.”

“……?”

용서 안 하면 어쩔 건데, 싶었는데 속마음을 알아챈 듯 바로 대답해 줬다.

“그 새끼, 반드시 죽여 버릴 겁니다.”

살벌한 목소리와 쪽쪽, 달달한 소리가 같이 들렸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손가락을 맞물려 틈 없이 깍지 끼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뭐지?’

루비아나는 괜히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뭔가, 잘못 걸린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 복슬이, 하나도 안 나쁘거든요! 복슬이한테 제 머리를 디민 그놈이 잘못한 거라고요. 아무튼, 그놈이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복슬이를 왜 건드려!’

창고에 꽉 찰 정도로 크고, 박치기 한 번으로 단번에 창고 지붕을 날려 버릴 정도로 사나운 다이어 울프 앞을 막아서며 울먹이던 대머리 부하 놈이 또 생각났다.

‘그래, 루이 잘못이 아니지. 그러니까 얌전히 있는 사람을 왜 건드려? 그런 어처구니없는 장난을 하다니.’

새삼 카드릭에 대한 원망이 솟구쳤다. 반드시, 어떤 방법으로든 복수하리라. 루비아나는 결의를 다졌다.

“또 딴생각.”

이번에도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붉은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내쉬었다.

‘내 머리카락이 마음에 드나?’

쪽쪽대질 않나, 땀 냄새 날 텐데 코를 파묻고 있질 않나. 입에 물고 잡아당기며 장난치질 않나.

저렇게 좋아하니, 원래도 잘 감고 다녔지만, 더 잘 감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비아나는 몸에 힘을 풀고 루이먼드에게 기댔다. 편해서 좋은 건 루비아나인데, 루이먼드가 좋아하며 웃었다. 그가 좋아하는 게 맞닿은 몸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게 몸의 대화란 건가?’

반대의 경우도 가능한가 싶어,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 보았다. 자신의 기분도 전해지나?

“비아.”

입술 위로 입술이 내렸다. 눈을 뜨지 않아도 루이먼드가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입술이 웃고 있었다.

‘전해지나 보네.’

루비아나도 씩, 웃어 보였다.

***

후끈한 방 안의 공기가 미지근해질 즈음.

루비아나는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고 매달리는 루이먼드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대충 옷을 주워 입고, 구겨진 부분을 툭툭 털었다. 손으로 몇 번 턴다고 심하게 구겨진 게 말끔해지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남의 눈을 피해 조심조심 궁을 빠져나왔다.

마차가 움직여도 루비아나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마차가 멈춰 서고, 문이 활짝 열릴 것 같은 불안감에 심장이 다 떨렸다.

‘언니, 왜 이제 가?’

방긋방긋 웃는 칼레나.

‘공작님, 제가 전해 듣기로는 그레이움 백작가와의 협상이 이미 오래전에 마무리되었다고 들었는데……’로 시작되는 길고 긴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네가 아까 거기서 물 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인자하게 웃는 시종장.

어느 쪽이든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마차가 무사히 황궁을 벗어나고서야, 루비아나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저택에 도착하기 전에 루이먼드에게 카드릭하고 있었던 일을 제대로 설명하자 마음먹었지만 이번엔 루이먼드가 대화를 나눌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는 건지, 뚫어져라 쳐다봐도 이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황궁에서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던 것 같은데.’

루비아나가 어디에 있을지 모를 칼레나의 눈과 시종장의 귀를 의식하며 걷는 내내, 루이먼드는 조용히 뒤따라오기만 했다. 왜 그렇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냐고 한 번 물어보지도 않았다.

한번 몸의 대화를 나누었으니, 몸이 떨어져 있어도 상대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뭔가 열심히 고민하고 생각하느라 그런 것이었다.

‘무슨 고민을 저렇게 깊게 하지?’

궁금했으나 굳이 말을 걸어 방해하지는 않았다.

대신, 언제나 그랬듯 루이먼드의 모습을 감상했다.

생각에 잠긴 미인. 예술에 좀 재능이 있으면 저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남겨 놨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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