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31)

***

마차가 아쉴레앙 공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루이먼드는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차가 멈춰 서고야 ‘아.’ 하고 깨어났다.

루비아나는 마중 나온 시녀장에게 의사를 불러와 루이먼드를 살펴보게 하라고 했다.

“예? 의사를요?”

조금 피곤해 보일 뿐, 딱히 어디 아파 보이지 않는 루이먼드를 보며 시녀장이 의아해했다.

‘당분간 밤일하지 말라고 했는데, 낮일을 하고 와 버려서 좀 걱정되네.’

차마 이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루비아나는 시녀장의 눈빛을 무시했다. 뒤쫓는 눈빛을 꿋꿋이 모르는 척하며 서쪽 계단을 올랐다.

루이먼드는 시녀장을 따라 중앙 계단으로 올라가며 여러 번, 서쪽 계단 쪽을 돌아보았다.

루비아나는 씻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 서재로 갔다.

북부에서 온 보고서를 좀 들춰 보다가, 의사가 다녀갔고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는 안심했다.

“다만, 목덜미의 멍이 꽤 오래갈 거라고 합니다. 어떻게 다치셨는지 의사가 물어봤는데, 루이먼드 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윽.”

안심하고 있다 혀를 깨물고 말았다.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아아.”

루비아나는 괜찮다고 손짓하며, 하인에게 시녀장과 루이먼드를 이쪽으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곧 루이먼드가 시녀장과 함께 서재로 들어왔다. 그의 눈은 가장 먼저 소설책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향했다.

루비아나와 시녀장은 그가 정말로 소설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서재 꾸밀 때, 알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둘은 루이먼드 몰래 눈빛을 교환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에게 책상 앞의 소파에 앉기를 권하고, 이리로 오라 한 목적을 바로 말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결혼식 준비를 하게 될 겁니다. 제가 일단은 황족이기 때문에 결혼식 날짜는 황궁에서 정해 줄 테고, 준비는 여기에 있는 시녀장이 알아서 해 줄 테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겁니다.”

시녀장이 둘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차를 따르며 방긋, 웃었다. 결혼식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듯했다.

“이곳 저택은 동쪽, 중앙, 서쪽, 이렇게 나뉘어 있는데 그동안 제가 서쪽과 중앙을 써 왔습니다. 당신은 앞으로 동쪽 계단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개인 공간으로 쓰면 될 겁니다. 당장은 힘들겠고…… 언제부터 가능하댔지?”

“2주 뒤부터 가능합니다. 늘 청소를 해 두었지만, 계속 쓰지 않던 곳이라 대대적으로 청소도 다시 하고, 가구와 책도 다시 들여놔야 하니까요, 공작님.”

“그렇다고 합니다, 루이. 혹시 필요하거나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이쪽에 말해 주세요.”

차후 중앙은 부부 침실과 공용 공간이 될 것이고, 동쪽은 루이먼드가 서쪽은 루비아나가 쓰게 될 거라는 말이 이어졌다.

루비아나는 그 외에도 아쉴레앙 공작가의 사람으로서 알고 있어야 하는 것들을 주르륵, 책 읽듯 말해 주었다.

루이먼드의 또렷하던 검은 눈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루이먼드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지며, 루비아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기현상을 경험했다.

‘뭔가 익숙한데, 이 느낌…….’

잠깐 잊고 있었지만, 예전에 숱하게 경험해 봤던 현상이었다. 뭘까, 뭘까? 고민하던 루이먼드는 늘어지는 정신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겨우 기억해 냈다.

‘아. 비아, 내 지도 교수님하고 너무…… 똑같…….’

평이한 어조. 책을 읽듯 줄줄, 쉼 없이 지식을 쏟아 내는 스타일. 딱 학자의 집 지도 교수님 스타일이었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버티려고 해도 눈이 사르륵 감기고, 어젯밤 스무 시간을 잤어도 오늘 다시 잠들게 만들어 버리는, 인간 수면제…….

루이먼드는 잠들지 않기 위해, 아니, 잠든다 해도 눈은 감지 않기 위해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했다. 몸이 뼈 없는 마수처럼 축축 늘어졌다.

“자,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확인하고 여기에 사인만 하면 됩니다.”

“네에…… 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펜을 들고 듣도 보도 못한 문서에 사인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루이먼드는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스읍.”

입가에 흐른 침을 옷소매로 문질러 닦고는 루비아나가 가리키는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사인하기 직전 정신을 차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내가 아무리 학자의 집 만년 낙제아여도, 뭔지 모르는 서류에 함부로 사인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

……멍청이가 되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었다, 서류에 쓰여 있는 금액은.

슥. 루이먼드의 손이 알아서 움직였다.

“완료했습니다.”

루이먼드는 빠릿빠릿하게 서류와 펜을 루비아나에게 제출했다. 루비아나는 서류를 다시 시녀장에게 건넸다.

“이대로 처리하도록 해. 특히 루이의 개인 예산은 오늘이라도 당장 쓸 수 있도록 해 주고.”

“네. 지난번에 말씀하셔서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루비아나와 시녀장이 나누는 대화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금, 내가 본 게…… 진짜인가?’

혹시 잠결에 0이 몇 개인지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저걸 진짜, 제가……?”

루이먼드는 두 사람의 대화가 끊길 즈음, 조심히 물어보았다.

“왜, 부족할 것 같습니까?”

저 봐. 내가 그건 너무 적다고 했잖아. 루비아나는 괜히 시녀장을 한 번 노려보고는 다시 서류를 받아 들어 폈다.

“그러면 조금 더 조정을……”

“아니요. 아닙니다.”

루이먼드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보세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니까요. 시녀장이 은은하게 웃으며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쳇, 루비아나는 혀를 차며 서류를 다시 루이먼드에게 보여 줬다.

“일단 올해는 이 정도 배정했고, 내년에는 두 배 정도 늘어날 겁니다.”

“네?”

루이먼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류에 쓰여 있는 금액만 해도 그레이움 백작가 1년 예산의 절반이 넘었다. 그만한 금액이 개인 예산으로 배정된 것이었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다이아몬드 광산과 소금 산을 아무렇지 않게 그레이움 백작에게 넘겨준 이유를 이제야 이해했다.

‘……아쉴레앙 공작가가 이 정도라면, 펠트하르그 공작가의 규모는 어느 정도라는 거지?’

루이먼드는 살짝 멍해진 상태로 루비아나와의 대화를 마쳤다. 시녀장의 안내를 받아 자신의 임시 침실로 돌아온 뒤, 침대에 앉아 한참을 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마침 잘됐어. 그 정도 예산이면 내가 생각해 왔던 걸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거야.”

루이먼드는 책상으로 가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러고는 펜에 잉크를 듬뿍 묻혀 상단에 크게, 힘차게, 꾹꾹 눌러 썼다.

- 펠트하르그 공작 타도 계획

“아니, 아니지. 이 자식이 뭐라도 된다고 내가 왜, 신경을 써?”

루이먼드는 방금 쓴 글씨 위에 직직 선을 긋고는 그 아래에 다시 글을 썼다. 이번엔 아주 정성스럽게 썼다.

- 성공한 공작 부군이 되기 위한 몇 가지 미래 계획

열이 내린 후부터 조금씩 생각했던 바였다. 미래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뭐가 유행할지 누가 유명할지 정도는 대략 알고 있으니까.

그 지식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루비아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은 루비아나가 카드릭에게 결혼 선물을 달라고 말할 때, 다른 방향으로 확고해졌다.

‘반드시, 어떻게 해서든 저 자식을 쫄딱 망하게 만들어 버리겠어.’

결혼 선물을 보내긴커녕, 죽는 날까지 루비 반지 하나 살 수 없는 빈털터리로.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이 생각을 하느라 루비아나가 절 쳐다보는 줄도 몰랐던 것이었다.

펠트하르그 공작 카드릭은 제국에서 셋째 가라면 서러워할 갑부 중 갑부였다. 게다가 카드릭은 그 부를 더욱 크게 키우면 키웠지, 갉아먹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를 망하게 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 불가능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리고 루이먼드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지난 일곱 번의 삶에서 카드릭의 상단은 승승장구했다. 저 먼 곳에 사는 변태 귀족의 하인으로 일할 때조차, 좋은 물건을 사려면 카드릭의 상단에서 운영하는 상점을 찾아가는 게 당연했다.

이번에 어떤 직물을 펠트하르그 공작의 상단에서 독점적으로 유통해서 대박을 냈다더라. 펠트하르그 공작이 어떤 예술가를 후원했는데, 그 예술가의 작품을 본 황제 폐하께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다더라.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알음알음 들은 말들을, 루이먼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앞으로 유행할 것들을 미리 사들이고, 앞으로 대성할 예정인 예술가들을 후원하자.”

루이먼드는 카드릭의 상단이 축적할 부, 성공을 가로챌 생각이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 광산과 소금 산을 되찾아 오고,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이 세상 모든 루비를 사들여서 비아에게 줘야지.”

루이먼드는 종이에 죽죽 써 내려간 내용을 확인하며,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일곱 번 살고 죽은 보람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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