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후.
황궁에서 아쉴레앙 공작의 결혼식 날짜를 공표했다.
루비아나나 시녀장이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지만, 황궁에서 점지해 준 날짜는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황궁에서 결혼식 날짜를 들고 왔을 때, 루비아나는 서재에 새로 들인 장의자에 누워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이날이 당신의 결혼식을 열어야 하는 날입니다, 하고 시종이 날짜를 공개했다.
“아아, 알았네. 그만 가 봐.”
루비아나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궁에서 온 시종을 돌려보냈다.
루비아나가 놀라거나 화내는 걸 볼 수 있을까 두근두근 설렜던 황실 시종은 시무룩해져서 돌아갔다.
시종이 떠나자마자, 루비아나 말고 다른 사람이 시종의 기대대로 반응했다.
“고작 3주? 3주 후에 결혼식이라고요?”
시녀장은 비명을 질렀다.
루비아나는 손에 든 포도주 잔을 빙빙 돌리며, 그 진귀한 광경을 즐겁게 구경했다.
“이럴 순 없어요. 이럴 순 없다고요!”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어?”
방방 뛰는 시녀장과 태평하기 이를 데 없는 루비아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번 결혼식의 신부가 시녀장이라고 착각할 만한 광경이었다. 시녀장 역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세모눈을 뜨고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공작님! 지금 남의 결혼식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황궁에서 결혼식 날짜를 정해 줄 만한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아, 폐하는 제외하고.”
“그런데 어떻게!”
“그러니까 조촐하게 하자고 했잖아, 조촐하게.”
그냥 저택 후원에 제단이나 하나 세우고 사제를 한 명 불러 서약하고 반지만 나누면 될 일을.
루비아나는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시녀장이 이미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디자이너에게 드레스와 턱시도를 의뢰했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아니, 그런데 나는 그렇다 치고 루이의 치수는 어떻게 알고 맡겼던 거야?”
“다 아는 수가 있지요. 그나저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공작님. 3주! 3주라니요!”
“3주가 3주지 뭐. 21일.”
“3주 만에 결혼식 준비를 다 끝내야 한다니…….”
“미리 준비하고 있었잖아.”
“그거라도 없었다면 정말로, 공작님 말씀처럼 식을 치렀을지도 모른다고요!”
“그것 참 아쉽게 됐네.”
“……공작니임?”
시녀장은 어느새 퀭해진 눈을 들어 루비아나에게 비척비척 다가왔다.
“지금이라도 폐하께 가서 날짜를 다시 잡아 달라고 하시면……”
“안 될 거야.”
“한번 해 보지도 않고 왜 안 될 거라고만 말씀하세요?”
“안 될 테니까.”
“그래도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모르는 일 아냐. 아는 일이야.”
“공작니임!”
“포기해, 포기하고 준비할 수 있을 만큼만 준비하라니까.”
루비아나는 매달리는 시녀장을 떨쳐 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럴 순 없어……. 이게 뭐야……?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패닉에 빠져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시녀장에게 한 잔 더 달라는 말을 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았다. 루비아나는 직접 포도주를 한 잔 더 따르고는, 마호가니 책상 끝에 엉덩이를 대고 걸터앉았다.
루비아나는 3주 후 결혼하라고 날짜를 잡아 준 동생의 속내를 짐작해 봤다.
아무리 봐도 심술이었다. 아니면 루이먼드와 결혼하는 게 아무래도 싫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이건 진짜 결혼식이 아니고 소꿉놀이 장난 같은 거니까 대충 해치우라는 뜻이거나.’
루비아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창문 밖 저편에 황궁의 지붕이 보였다.
저 아래 그 화려한 침실에 누워 있을 동생은 언니가 이 결혼에 꽤 진심이라는 걸 아직 모르는 듯했다. 아니면 모르는 척하거나.
‘뭐, 어느 쪽이든 어쩔 수 없지.’
날짜는 정해졌고, 식은 치르면 된다. 그것이 조촐한 결혼이든 졸속 결혼이든, 그건 하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나름 아닌가?
루비아나는 포도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이번 건 신맛도 덜하고 좋네. 이거 좀 더 구해 놔.”
“공작님? 3주 뒤에 결혼식인데, 제 앞에서 포도주를 드시는 거예요, 지금?”
“……어? 안 되나?”
“공작니이이이임!”
***
결혼식 준비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루비아나에게 큰 상처를 입은 시녀장은, 결혼식의 또 다른 주인공에게 가서야 위안을 얻었다.
“3주? 3주라니! 고작 3주 만에 결혼식 준비를 하라 이겁니까?”
루이먼드가 기겁했다.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루이먼드 님.”
시녀장의 눈가에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혔다.
루이먼드는 위안만 준 게 아니었다. 그는 유능한 결혼식 전문가였다. 결혼 한 번 안 해 본 미혼 남자라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보자, 일단 꽃이…… 어떤 꽃으로 식장을 꾸밀 예정입니까? 이곳 후원을 이용할 예정이겠지요? 이 저택은 큰 홀이 없는 대신 후원이 훌륭하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가문의 상징인 백합이어야 할 텐데.”
어어, 어어. 루이먼드는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더니, 금방 답을 찾아냈다.
“지금 시점에서 싱싱한 백합을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는 건, 내가 잘 아는…… 건 아니고 어디서 주워들어서 잘 아는 곳이 있는데 그곳의 연락처를 알려 드리죠. 참, 그레이움 백작가의 상징은 단 하나도 두지 마십시오.”
“루이먼드 님.”
시녀장은 두 손을 꼭 움켜쥐고, 마치 신을 우러르듯 루이먼드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진심으로 루이먼드 님을 존경하고 있다는 말씀을 올린 적이 있던가요?”
“그 무슨 말씀을. 저야말로 이 저택을 이렇게 완벽하게 관리하는 리먼스 부인을 늘 존경하고 있었답니다.”
루이먼드가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호호, 하하. 두 사람은 행복하게 웃으며 서로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공작님 때문에, 앞으로 마음고생이 많으실 거예요. 좀 무디셔서 그렇지 나쁜 분은 아니시긴 한데…….’
‘보아하니, 비아는 이런 쪽으론 전혀 관심이 없었겠군요. 그간 아쉴레앙 공작저의 손 많이 가는 일은 다 리먼스 부인의 일이었겠어요.’
두 사람은 뜻밖의 동지 의식으로 하나가 됐다.
루이먼드는 결혼식 준비를 돕다 못해, 어느새 결혼식 준비를 주도하게 되었다.
여덟 번째 삶을 살고 있지만, 단 한 번도 결혼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남들의 결혼식은 숱하게 봐 왔다.
혼주를 대신해 결혼식을 대신 준비해 준 적도 많았다. 그러니 결혼식 준비는 루이먼드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간의 경험을 통틀어 봐도 3주 만에 결혼식을 준비했던 적은 없었다.
‘내 결혼식이라니…….’
루이먼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준비 기간에도 이따금 감상에 젖었다.
항상 남의 결혼식 준비만 도와주고 남의 결혼식만 구경했는데. 이렇게 자신의 결혼식을 준비하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서 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감이 없잖았다.
여덟 번째 삶 만에 처음 경험해 보는 결혼식이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루비아나와의 결혼식이니까.
‘결혼식만 올리면, 비아는 정말로 내 사람이 되는 거야. 나는 비아의 사람이 되는 거고.’
표본으로 가져온 백합이 테이블 위에 소담스럽게 놓여 있었다. 줄기에는 은실로 짠 리본이 매여 있었다.
루이먼드는 그 백합을 바라보다가, 가장 탐스러운 꽃송이를 움켜쥐었다.
이렇게 루비아나를 손에 넣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루, 루이먼드 님, 소, 손이!”
지나가다 그 광경을 본 하녀가 꺅, 비명을 질렀다.
“아. 이런.”
정신이 든 루이먼드가 한 발짝 물러섰다. 백합꽃은 여전히 움켜쥔 채였다.
뚝, 뚝. 손바닥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걸 보고야 따끔함을 느꼈다.
리본을 고정하려고 꽂아 놓은 핀에 손이 찔린 것이었다.
“…….”
루이먼드는 피에 젖은, 구겨진 백합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 제가 약을 가지고 올게요. 잠시만요!”
하녀가 후다닥 달려 나갔다.
혼자가 된 루이먼드는 조심스럽게, 백합꽃을 다시 움켜쥐었다. 꽃잎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