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31)

***

루이먼드가 손에 붕대를 말았다. 루비아나는 그 소식을 듣고서야, 겨우 결혼식 준비 중인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다친 손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촐하게 하라니까, 조촐하게.”

속상한 마음에 투덜거린 건데 시녀장은 물론이거니와 루이먼드에게까지 공격당했다.

“조촐하게라니! 얼마나! 어떻게요!”

“루이먼드 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아쉴레앙의 이름이 있는데, 어떻게 조촐하게 할 수 있겠어요!”

“아, 아니. 이렇게 사람이 다쳐서까지 준비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다른 분들은 결혼식 준비로 하녀들이 열 명, 스무 명 실려 나갈 정도라는데. 은근 경쟁도 붙어서, 이쪽에서 스무 명이면 저쪽에서는 스물한 명, 그렇게 힘들게 준비한답니다, 공작님!”

“그게 좋은 게 아니잖아.”

“그렇게 하자는 게 아니라, 딴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한다고 말씀드리려는 거지요.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어떻게 그런!”

“뭐, 한 번일지 아닐지는 해 봐야……”

가볍게 농담을 던지려 했던 것뿐인데.

“비아,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공작님, 한 번일지 아닌지는, 그다음은 뭔가요?”

루이먼드와 시녀장이 방긋 웃으며 루비아나를 바라봤다.

두 쌍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살기는 천하의 아쉴레앙 공작을 뒷걸음치게 만들 만큼 강력했다.

“……해, 봐야 아는 게 아니라. 한 번뿐이니까 아주, 아주 중요하겠다고. 아, 폐하께서 급히 처리하라고 하신 일이 있어서 난 이만.”

“공작님!”

“비아!”

“아, 나도 바쁘다고. 바빠.”

루비아나는 마수에게 쫓길 때처럼 후다닥 도망갔다.

그렇게 루비아나를 조촐하게 물리친 루이먼드와 시녀장은 서로를 바라보며 힘없이 웃었다. 동지 의식이 좀 더 강해졌다.

***

물론, 루비아나가 아예 결혼식 준비에 관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루비아나도 나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결혼식 참석자 명단에.

“특히가 아니라 유일하게지요.”

시녀장은 이렇게 받아치겠지만.

“오딜 후작가엔 무조건 초대장을 보내야 해. 당연히 안 오겠지만, 펠트하르그 공작가와 도미넨트 공작가에도 보내고. 아, 동부에 계신 도미넨트 공작의 부친께도 꼭 보내고.”

루비아나는 수도의 귀족 중 중요 인사를 선별했고, 오지 못할 걸 알면서도 동부와 서부, 남부 각 지역의 유지들에게도 빠짐없이 초대장을 보냈다.

북부만 빼고.

“북부에는 연락하지 않으십니까?”

시녀장이 물었다. 루비아나는 슬슬 마수들의 공격이 늘어나고 있다는 북부의 보고서를 읽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그날 밤.

밤늦게까지 결혼식을 준비하던 루이먼드와 시녀장마저 잠들었을 때, 루비아나는 낡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담을 넘었다.

백성이 모여 사는 지역, 그중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은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는 뒷골목 주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싸구려 술을 홀짝였다.

여기서 제일 싸구려 술이라고 해 봤자, 북부에서 마시던 것보다는 맛이 좋았다.

로브를 뒤집어썼어도, 여자라는 걸 숨길 수 없었다. 체구도 그리 크지 않고. 하지만 누구도 함부로 다가와 시비를 걸지 않았다. 루비아나에게서 풍겨 나오는 으스스한 기운을 본능적으로 읽은 것이다.

백 가지 차향을 구분할 줄 안다는 귀족들도 맡지 못하는 위험한 냄새를, 가장 더러운 길바닥에서 고약한 냄새를 맡고 사는 밑바닥 인생들이 더 잘 맡았다.

루비아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잠깐 침묵. 루비아나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제일 독한 술을 주문할 때 또 한 번 침묵. 그렇게 싸늘해졌던 분위기는 금방 원래대로 돌아갔다.

주점의 단골들은 구석에 자리 잡고 앉은 음침한 여자 따위는 잊고, 안줏거리를 씹어 댔다.

싸구려 술이나 겨우 사 먹는 인생에 먹는 안주는 사치였다. 그들의 안줏거리는 수도에 떠도는 소문이었다. 때론 술김에 없는 소문도 만들어 냈다.

오늘의 안주는 그 유명한 아쉴레앙 공작의 결혼식이었다.

“자자, 있는 돈 다 털어서 걸라고. 어?”

주점 주인이 돌아다니며 내기 참여를 부추겼다. 과연, 이 결혼식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을 사람은 누구인가?

떠들어 대는 걸 들어 보니 이 주점만의 안줏거리는 아닌 듯했다.

백성은 물론, 귀족들까지 저들끼리 몰래 도박계를 만들어 꽤 큰돈을 배팅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귀족 나리네 마구간에서 일하는 한스라는 놈의 주장이 그러했다.

“자, 어서 걸어 보라니까.”

“어디다 걸면 되는데?”

“니 새끼 맘이지. 다리 사이에 그게 제대로 달려 있는지 의심은 가지만 아무튼 남자 새끼인, 여자보다 더 예쁘다는 폐왕의 사생아 놈인지, 아니면 북부에서 가서 마수랑 그 짓 하다가 이마에도 눈이 생겨 버린 아쉴레앙 공작인지!”

와하하-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루비아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술을 병째로 마시며 그 광경을 구경했다.

사람들이 동전을 짤랑이며 내기에 참여했다. 참여 안 하려고 몸을 빼던 사람들도, 어느새 분위기에 취해 동전을 꺼내 들었다.

한 바퀴를 빙 돌아 판돈을 모은 주인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이게 뭐야, 다 사생아 놈이 입는다에 걸면 어떡해! 이러면 내기가 안 되잖아!”

와하하, 주점이 뒤집어졌다. 사람들이 웃으며, 빈 술병을 주인에게 던졌다. 어서 아쉴레앙 공작이 웨딩드레스를 입는다는 쪽에 돈을 걸 얼간이를 데려오라는 뜻이었다.

“놀고들 있네.”

루비아나는 혀를 차며, 빈 술병을 들고 일어났다. 이거보다 좀 더 센 술이 있나 물어보려고 간 건데, 주인은 웬 호구가 왔나 하는 표정으로 루비아나를 반겼다.

“댁도 한번 걸어 볼라우? 지금 이쪽에 걸면, 무조건 100배인데. 응? 어때?”

주점 주인이 왼손에 든 맥주잔을 흔들었다. 그 잔은 텅 비어 있었다. 오른손에 든 맥주잔은 동전이 가득 차 넘치고 있었고.

딱 봐도 왼손에 든 잔이 그쪽이었다. ‘아쉴레앙 공작이 웨딩드레스를 입는다.’

‘내가 걸고, 싹 다 따 버려?’

루비아나는 술 한 병 더 사 먹으려고 꺼내 든 동전을 왼쪽 맥주잔에 넣어 버릴까 잠깐 고민했다.

루비아나가 고민하는 게 보이자, 호구를 물었다 싶은 주점 주인이 활짝 웃으며 왼손을 흔들었다.

“아, 오늘 같은 기회가 또 없다니까. 만약에 손님이 이겼어. 그런데 이쪽 돈이 손님이 건 돈의 100배가 안 된다? 그럼 내가 부족한 양만큼 무조건 채워 줄게. 이 가게를 팔아서라도. 어?”

주인의 목소리가 괄괄하여, 주변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술주정뱅이들은 과연 이 호구가 술집 주인의 말발에 넘어갈까 기대하며,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그 말, 장담할 수 있지?”

루비아나의 등 뒤에서 불쑥 팔이 튀어나와 동전을 튕겼다.

금빛 동전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왼쪽 잔에 쏘옥 들어갔다. 짤그랑.

“이 새끼가 어디서 봤다고 반말이야, 반말이…… 어?”

주점 주인이 화내다 말고 왼손에 든 잔을 들여다보았다.

“허억.”

그러고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뭐야, 뭐야?”

“뭔데?”

“그, 금! 금이다!”

“뭐? 진짜?”

주정뱅이들이 웅성거렸다. 금화 소리에 눈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소란의 한가운데 선 루비아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귀찮게, 뭐 하는 짓이야?”

“안 귀찮은 게 있긴 해?”

“어린놈의 새끼가 허락도 없이 나한테 말 놓을 때마다 귀찮은 게 사라진다. 왜?”

루비아나는 팔을 뒤로 돌려 그놈의 목을 꽉 조였다. 으아, 아아아. 요란한 비명이 들렸다.

금화를 건 놈이 저보다 한참 작은 여자에게 당하고 있다. 그게 금화에 눈 돌아간 놈들을 더 자극했다.

‘젠장.’

루비아나는 혀를 차며 팔을 풀었다. 그러고는 그를 끌고 서둘러 주점을 나섰다.

밖에 나와서 제대로 살펴보니, 더 가관이었다.

그는 루비아나와 마찬가지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얼굴은 가려져 안 보였지만, 얼굴을 드러내느니만 못했다.

쓰고 있는 로브는 어두운 데서 봐도 광택이 좔좔 흘렀다. 소매엔 금빛 자수가 촘촘했고, 밑단에는 보석까지 두 줄로 박혀 있었다.

부츠는 딱 봐도 고급 물소 가죽이었고, 무엇보다 손가락에 백금으로 된 굵은 반지를 세 개나 끼고 있었다.

“얼굴만 가리면 다냐? 이래서야 여기서 몰래 만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잖아.”

루비아나가 혀를 찼다. 금화가 아니어도, 주점 안에 있는 놈들의 눈이 돌아갈 만했다.

“왜? 얼굴 가리고 오라고 해서 가리고 온 건데.”

휘황찬란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목소리는 여전히 쾌활했다.

이 더러운 뒷골목에 가장 안 어울리는 건 고급 물소 가죽도, 값비싸 보이는 로브도 아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것처럼 들리는 저 목소리였다.

“쓸데없이 명랑한 놈 같으니라고.”

“볼 때마다 칭찬을 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

그는 두 손을 활짝 펴고 허리를 숙이며 과장해서 인사했다.

“칭찬 아니다.”

“알아, 그래서 칭찬으로 받아들이려고.”

“…….”

그는 루비아나를 말문 막히게 하는,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귀한 놈이기도 했다.

“아무튼, 어디 좀 조용한 곳으로 가서……”

“저것들은 그냥 놔두고?”

로브 속에 숨겨져 있던 붉은 눈이 번쩍 빛났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점 뒷문 쪽에서 한 무리의 주정뱅이들이 몰려나왔다.

손에 몽둥이나 녹슨 검 따위를 들고 있는 걸 보면, 소변보러 나온 건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이쪽을 보고는 반가워하며 킬킬댔다.

“야야, 아직 안 갔냐아, 도망 좀 가 있지.”

“오늘 웬일이냐? 땡잡았네.”

“여기 주인이 제대로 손봐 주라더라.”

“그놈도 참, 더러운 놈이야. 금화를 꿀꺽하려고 그러는 거지.”

“뭐, 한몫 잡고 술도 공짜로 얻어먹고, 좋은 게 좋은 거지.”

이쪽이 아주 만만해 보이는 듯했다.

‘다 얘 때문이지, 뭐.’

루비아나는 착잡한 눈으로 제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청년을 노려보았다.

루비아나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냄새도 단번에 희석하는 휘황찬란함이라니. 덕분에 이런 것들한테까지 만만하게 보이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어이, 거기. 죽이지는 않을게.”

“그래, 우리가 막 사람 함부로 죽이고 그러는 사람들 아냐.”

“그러니까 우리가 거기 걸어갈 때까지 몸에 걸치고 있는 것만 다 벗어 놓고 가. 알겠지?”

주정뱅이들이 바닥에 몽둥이와 녹슨 검을 찍찍 끌며 껄렁껄렁하게 걸어왔다.

워낙 느리게 걸어와서 기다리려면 지루할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올 때까지 굳이 기다려서 뭐 하나 싶기도 하고.

“그냥 가자.”

루비아나가 청년의 어깨를 툭, 쳤다.

“왜?”

“귀찮잖아.”

“난 안 귀찮은데?”

“내가 귀찮아.”

“그럼 누나는 가만히 있어.”

목소리에도 색을 입힐 수 있다면, 지금 이 목소리는 무지개색으로 반짝반짝 빛날 터였다.

천진난만한 목소리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루비아나가 듣기엔 그냥 철없는 목소리였다.

“넌 드래곤도 때려잡은 놈이…….”

왜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들을 봐주지 않고, 시비 걸리면 시비 걸리는 대로 족족 혼내 주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놈을 세상에 안 내놓고 황궁에 매어 놓은 칼레나의 지혜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네 멋대로 살라고 세상에 풀어놨다가는 제국 인구를 반으로 줄여 놓을 게 분명했다.

“왜? 맨날 빵만 먹고 살 수는 없잖아. 가끔, 썩은 고기도 한번 먹어 줘야지.”

“썩은 고기는 무슨. 썩은 거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놈이.”

그가 외동아들로 태어나 얼마나 귀하게 자랐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러니까 별미라는 거야, 누나.”

그가 씩 웃었다.

어릴 때 불량 식품을 한 번쯤 먹어 보는 게 인성 발달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그의 아버지는 몰랐으리라.

그저 좋은 것, 더 좋은 것만 주고 싶었겠지. 몸에 나쁜 길거리 음식, 썩은 음식은 입에도 대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몸은 튼튼하게 자랐을지언정, 인성이 저따위가 되어 버렸다.

말을 해서 들을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말 좀 들으라고 쥐어 팰 수도 없고.

“그래, 네가 알아서 해라. 난 모르겠다.”

루비아나는 벽에 기대서 팔짱을 꼈다.

“금방 끝나, 조금만 기다려.”

그가 앞으로 나서며, 검을 빼 들려고 했다. 풍성한 로브 자락이 펄럭였다.

“피 보지 마.”

루비아나가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왜?”

“…….”

왜 함부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냐고? 그저 시비 붙었을 뿐인데 왜 굳이 열댓 명이나 되는 주정뱅이를 죽이려 하는가? 저들 또한 제국에 세금을 내는 귀한 백성인데.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어떤 것도 그에게 안 통할 게 분명했기 때문에 괜히 입에 담지 않았다.

“나 결혼 앞뒀다. 결혼 생활 망하라고 저주하냐?”

“아. 그러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해한 건지 로브 머리 부분이 끄덕끄덕 흔들렸다. 얼굴을 안 봐서 그런가, 뒤통수가 조금 귀여워 보였다.

‘귀엽긴, 저게?’

루비아나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저게 귀여우면 북부는 귀여운 것투성이겠다.’

귀엽다는 말의 뜻을 명확히 정리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귀엽다는 건 루이먼드처럼 생긴 걸 말하는 거지, 저런 건 절대 귀여운 게 아니었다.

“알았어. 죽이진 않을게.”

“고오맙다.”

“그럼, 고마워해야지. 내가 누구 때문에 참는 건데?”

누나 때문에 한 번은 참아 준다. 그런 말투로 말하는 게, 하필이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주정뱅이들 귀에 들렸다.

“뭐야, 인마?”

“이것들이 놀고들 있네.”

“기어이 우리가 벗겨 줘야겠어?”

술 취해서 그런 건지, 원래 성질이 급한 건지 주정뱅이들이 다 같이 벌컥 화를 내며 덤벼들었다.

‘한 번에 덤볐으니 금방 끝나겠구나.’

루비아나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밤하늘이 참 아름다웠다. 달도 떠 있고, 별도 떠 있고.

“으악!”

저렇게 아름다운 빛이 머리 위에 있는데.

“사, 살려 줘!”

굳이 땅 위의,

“커흑!”

더러운 광경을,

“으아악!”

눈에 담을 필요가 있나?

“…….”

역시나 금방 끝났다.

술주정뱅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덩치 좀 있는 사내들이 열다섯 겹. 누구 하나 피 흘리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으나, 죽어 가고 있었다.

열다섯 겹으로 쌓인 주정뱅이의 탑 위에, 검은 로브를 쓴 그가 올라서 있었다. 로브 속에서 번들거리는 눈을 보니 역시나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맨 밑에 깔린 놈은, 가만 놔둬도 숨 막혀 죽겠네.’

저 상태에서 이렇게 말했다가는 ‘그럼 공평하게 죽일까?’라고 말하며 제일 위에서부터 검을 푹 내리찍어 주정뱅이들을 꼬치로 만들 게 분명했다.

“고생했다.”

피 안 보느라, 안 죽이느라.

“별말씀을.”

그는 연극배우가 관객에게 하듯 정중히 인사한 다음 사뿐히 뛰어내렸다.

안전하게 착지했으나 후드가 벗겨지는 건 막지 못했다.

은은한 달빛 아래, 쾌활하게 생긴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루단테.”

“응, 누나.”

도미넨트 공작, 루단테.

제국을 지탱하는 세 공작 중 최연소. 하지만 개인적인 무력은 가장 센, 제국 최고의 기사가 마법사들도 안 입고 다닐 요란한 로브 자락을 팔랑이며 루비아나의 앞에 서 있었다.

“아, 맞다. 누나. 결혼식 때 웨딩드레스 입어라. 나 돈 좀 벌게.”

루단테가 두 팔을 머리 뒤로 넘겨 잡고, 달빛에 산책 나온 듯 가볍게 말하며 웃었다.

껍데기가 상큼하면 뭘 하나? 알맹이는 피 볼 생각뿐인데.

저렇게 무해한 얼굴을 하고 있지마는, 속으로는 그 금화 하나를 빌미로 저 술집과 술집 주인을 어떻게 박살 낼까 하는 생각만 가득할 터였다.

“입어도 너 때문엔 안 입어.”

“어? 입을 생각이 있긴 있나 보네?”

“글쎄.”

루비아나는 몸을 돌려 골목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긴 더 더러운데.”

등 뒤에서 난감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루비아나는 일부러 더 더러운 골목, 오물이 채는 쪽으로 들어가려다, 말았다.

‘쟤 구두를 닦을 하인이 뭔 죄가 있다고.’

저 성미에 저 구두를 두 번 신을 리 없고 버릴 게 분명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걷는 중 술집이 몇 개 더 보였지만, 루단테를 데리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골목 끝에 멈춰 섰다.

루비아나는 벽에 기대 루단테를 마주 보았다.

루단테는 벽의 상태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기대기는커녕 스치지도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깔끔한 체하는 모습을 보니 한숨만 나왔다.

“왜 자꾸 한숨을 쉬어, 곧 결혼할 새 신부가? 그나저나 진짜 웨딩드레스 입을 생각이야?”

“내가 드레스를 입을지 내 남편이 입을지 궁금해서, 그거 물어보러 왔어?”

도박에서 이겨야 하니 알아 오라고 너희 아버지가 시키더냐?

“그건 아니고. 그냥, 주변에서 난리들 치기에 궁금해져서.”

루단테가 한발 물러서서 씩 웃으며 눈웃음을 보였다.

잘생긴 연하남이 싹싹하게 굴며 눈웃음까지 쳐 대니 마음이 누그러질 법도 하겠으나, 루이먼드를 매일 보고 사는 루비아나에겐 턱도 없는 일이었다.

루비아나가 멀뚱히 서 있자, 루단테가 혀를 찼다.

“너무 그러지 말아. 결혼식 못 가는 게 미안해서, 나름대로 결혼 선물 챙겨 주려고 만나자고 한 건데.”

“결혼 선물?”

“응. 어때,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지?”

“어, 정말 기분이 좋아지네.”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루단테가 남들 눈을 피해 만나자고 할 때부터 불안하긴 했는데. 저렇게 빙글빙글 웃으며, 저 혼자 좋아하는 걸 보니 더더욱 불안해졌다.

그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나 보다.

“음, 좀 더 좋아하는 표정을 지어 줄 수는 없어?”

“어떻게, 이렇게?”

루비아나가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웃는 얼굴이긴 한데, 섬뜩해 보이기만 했다.

“……누나는 웃지 마라. 특히 남편 될 사람 앞에서는 절대.”

루단테가 진심으로 충고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선물이 뭔데?”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누나가 꼭 알고 있어야 할 정보?”

“아아, 말로 때우시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곤란하지. 이거, 진짜 귀한 정보거든!”

루단테가 투덜대듯 말하며, 루비아나에게 한 발 다가왔다.

“……!”

루비아나는 긴장감에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렸다. 안 그러려고 해도 본능의 영역이라 어쩔 수 없었다.

눈 없는 칼이 쑥 밀고 들어오는 느낌. 목에 검 끝이 스치는 것 같은 섬뜩함. 루단테가 가까이 오면 늘 이런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한 번 카드릭에게 농담하듯 말했더니, 그는 얼굴을 굳히고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기사라서가 아니야. 그 느낌은…….’

인상부터 찡그리는 카드릭을 보면서, 자신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더랬다.

그다음 이어진 대화가 좀 답답하게 흘러가서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그러니까 루단테랑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내가, 걔랑?’

‘요즘 같이 붙어 다니던데.’

‘눈이 하나뿐이어도 세상을 똑바로 봐야지. 같이 붙어 다닌다고? 걔가 나한테 들러붙는 거지.’

‘왜? 어째서 루단테가 너한테 들러붙는 거지?’

‘당연히 내가 폐하의 하나뿐인 언니이고, 그러니 폐하의 혼사 문제에 제일 큰 영향을 미칠 수 있…… 됐다. 길게 말하기 귀찮아. 아무튼, 너도 좀 노력해.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나? 내가 뭘……?’

‘그렇게 앉아만 있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루비아나는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며 루단테를 봤다.

루단테는 루비아나의 손이 어디 가 있는지 흘낏, 확인하고는 또 곱게 눈웃음 지었다.

루비아나가 저 때문에 긴장하는 걸 만족스러워 하는 것이었다. 하긴, 이런 걸 즐기는 놈이니까 이런 위험한 기운을 폴폴 풍기고 다니는 거겠지.

‘역시 반란 후에 바로 또 전쟁을 하는 게 아니었어.’

그 바람에 괜찮은 사내들이 다 죽어 버려 남은 것 중 고르고 고르려니, 이런 게…….

“누나?”

“어, 왜?”

루단테는 절 앞에 두고 딴생각하는 루비아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빛냈다. 침대 위에서 루이먼드가 루비아나에게 가졌던 마음과는 백만 년쯤 멀리 떨어져 있는 심술이었다.

어떻게 나같이 실력 끝내주는 기사가 바짝 다가서 있는데, 경계를 안 하고 딴생각해? 여차하면 내가 푹 찌를지도 몰라, 긴장해.

아무튼 재수 없는 놈이었다.

루비아나가 다시 집중하자, 루단테는 그제야 만족하며 속삭였다. 아무도 알아선 안 되는 비밀을 말하듯이.

“반란 세력이 누나의 결혼식을 노리고 있어.”

예상 밖의 말이었다.

“…….”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나 말고 반란 세력이 그럴 거라고. 내가 결혼식을 망치려는 게 아니라니까. 왜 날 노려봐?”

루단테가 뒤로 폴짝 물러서며 두 손을 들었다. 그러더니 바로 신음했다. 으으. 실수로 오물이라도 밟은 듯했다.

‘쌤통이다.’

루비아나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지금 내가 똥 밟은 거 보고 쌤통이라고 생각했지?”

“……아니, 누가?”

“치사하게 이러기야?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가져다줬는데.”

“진심으로 고마워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런데 확실한 정보야?”

루비아나가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흠.

“노리고 있다고? 꽃을 뿌려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누나가 방심할까 봐 내가 일부러 말해 주는 거잖아. 분명, 움직임이 있었어.”

“그럴 리가…….”

‘결혼식을 망치고, 루이먼드를 되찾아가겠다는 건가?’

무려 아쉴레앙 공작의 결혼식이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일 것이다, 황제와 나머지 두 공작은 안 오겠지만. 그럼에도 모든 관심이 집중될 텐데. 그 결혼식을 망친다?

‘반란 세력의 힘이 벌써 그 정도로 커졌다는 건가? 내 생일에 맞춰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낼 만큼?’

칼레나가 3년을 말하기에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건만. 생각 외로 반란 세력이 제법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더불어 신경 쓰이는 건, 반란 세력이 루이먼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귀중히 여겨질수록, 반란이 실패한 뒤 루이먼드의 목숨은 위태로워진다.

루비아나는 반란이 성공할 경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리 없으니까.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우리가 노리고 있는 그 반란 세력에서 과격파가 떨어져 나왔나 보지.”

루단테의 목소리는 세상 태평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딜 후작이 거기에 있어. 오딜 후작이 자기 세력을 그렇게 분열되도록 놔둘 리가……”

루비아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단테가 손가락을 들어 흔들었다.

“아니면, 전혀 다른 세력이 튀어나오려나 보지. 옛 아덴 왕국의 재건을 꿈꾸는 두 번째 반란 세력! 아니, 세 번째, 네 번째? 한 열 번째쯤 되려나?”

“……반란 세력이, 또 있을 수 있다?”

루비아나가 눈을 번쩍 떴다.

“반란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게 어디 그들만이겠어?”

“…….”

맞는 말이었다. 루단테가 생각할 수 있는 걸 자신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신기하지 않아?”

아하하, 루단테가 방정맞게 웃었다.

“반란 세력 말이야. 이미 망해 버린 걸 왜 되살리고 싶어 하는 건지 모르겠어. 딱히 좋은 상태에서 망한 것도 아니었잖아. 누나는 이해가 가?”

“글쎄.”

루비아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안 봤다고 아는 사람의 얼굴도 잊어버린다. 소문에 휩쓸려 그 사람의 얼굴에 눈이 여섯 개 달려 있다고 진심으로 믿기까지 하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몇 년보다 더 오래전에 망해 버린 왕국을 잊지 않는다. 그 왕국을 되살리기 위해 기꺼이 제 목숨을 내놓는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까지.

그녀는 그게 루단테의 말처럼 아주 신기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소문에 쉽게 휩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것뿐이니까.

그들을 모두 끌어안고 있는 제국은 건국된 지 채 10년도 안 되는 신생국이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소문에 휩쓸리고 옛 기억에 매달려 익숙한 것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보듬어 주거나 제거해 나가면 된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아는데. 그걸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는데.

마음은 섬뜩함을 느꼈다.

‘이 상황에서 레나와 내가 남자 하나 때문에 사이가 안 좋아진 척하는 게 옳은 건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칼레나가 워낙 자신 있게 밀어붙이니 별생각 없이 따랐지만. 이 일이 칼레나의 안전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막 세워진 제국은 똑똑한 황제 칼레나와 그녀에게 절대 충성하는 세 공작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었다.

황실 친위대와 정보기관을 맡은 루단테.

국정 업무 전반을 보조하며 수도 경비를 담당하는 카드릭.

북부에서 마수와 인간의 경계를 사수하는 루비아나.

그리고 그들을 거느린 칼레나.

넷이 틈 없이 견고하게 서로를 믿고 의지하기에, 누구도 감히 이 제국을 흔들지 못하는 것이다.

제국 최고의 기사를 꺾고 황제를 암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설령 있다 한들, 그래서 황제 암살이 성공한들, 암살자와 그의 세력은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수도를 벗어나기 전 카드릭이 반드시 죽여 버릴 테니까.

설사 동부와 서부, 남부, 모든 지방 세력이 힘을 합해 수도를 공격하고 카드릭마저 꺾는다고 해도 그 반란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루비아나는 제국 수호를 포기할 텐데.

루비아나가 없는 북부는 제국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북부가 열리면 마수들은 단번에 제국 전역으로 밀려 내려올 것이다.

마수를 통제하는 드래곤도, 대륙을 거의 통일했던 황제도, 홀로 북부로 가서 인간과 마수의 경계선을 그었던 괴물 공작도 없는 세상에서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게 될까?

어깨 위에 달고 있는 머리가 장식이 아니라면, 누구든 짐작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반란 세력도 감히 기지개 켜지 못하고 바짝 엎드려만 있는 것일 터.

하지만 칼레나는 그들이 엎드려 있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들을 한 번에 뿌리 뽑아 소탕하길 원했다.

칼레나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루비아나와 갈등을 겪는 척하겠다고 했다. 루비아나는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루이먼드와 엮이는 바람에 칼레나의 원래 계획을 망친 게 미안해서.

하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장 소탕해야 하는 반란 세력이 하나뿐이라면, 칼레나의 안전에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작 반란 세력 하나 정도로 칼레나가 위험해질 리 없으니까.

하지만 반란 세력이 여럿이라면. 그중 가장 멍청한 것이 아이너스 왕가 복권을 외치며 아쉴레앙 공작의 결혼식을 망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신경 써야 할 게 여럿이면 감시할 힘이 분산된다. 그러면 반드시 틈이 생긴다. 그 틈은, 결국 황제 암살 시도로 이어질 것이다.

황제 암살 시도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건 나중 일이었다. 시도한다는 것 자체를 루비아나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누가 누굴 단순하다고 하는 건지. 내가 루단테보다 생각이 짧았어.’

수도의 평화로운 공기에 긴장이 느슨해진 걸까? 아니면 루이먼드의 열정에 물들어 눈이 어두워진 걸까?

루비아나는 자책하면서 고개를 돌려 저편을 바라보았다. 칼레나가 머무는 황궁은 이 더러운 뒷골목에서도 보였다. 고작해야 황금색의 둥그런 지붕밖에 안 보이긴 했지만.

‘루단테가 생각하는 걸 레나가 생각하지 못할 리 없어. 그리고 내가 걱정하는 걸, 레나라고 미리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고.’

칼레나는 그 정도 위험쯤이야 가소롭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위험해질지 모를 상황을 각오해서라도 반란 세력을 뿌리 뽑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가서 칼레나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거, 혹시라도 네가 위험할 수 있으니까 그만두자고.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앞으로 북부에 머물다 틈틈이 내려와 반란 세력을 찾아내고 다 쓸어버리겠다고.

그러면 칼레나는 뭐라고 할까?

“…….”

루비아나는 칼레나의 대답을 짐작하며 머리를 싸맸다.

오랜만에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표정이 왜 그래?”

루단테가 촐랑거리며 옆으로 와 섰다. 절대 벽에는 기대지 않았다.

“왜? 결혼 앞두니까 이게 아닐지도 모른다 싶어?”

“…….”

“아니면 그건가? 새삼 날 보니까, 폭군의 사생아 따위를 남편 삼는 게 역시 마음에 안 든다든지.”

“……좀 닥치고 있어 줄래?”

“무슨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대략 짐작은 갈 것 같아서 그래. 또 쓸데없는 생각 하는 거잖아.”

“네가 내 생각을 알아?”

“누나가 이렇게 심각해지는 거, 폐하에 관련한 일밖에 더 있어?”

루단테가 방긋방긋 웃으며 답했다.

“우리 셋 중 내가 폐하와 가장 가까운 사이잖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 하는 걱정 다 쓸모없는 걸 거야. 그러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말고 누나 결혼식 걱정만 해.”

언니 앞에서 너보다 네 동생에 대해 더 잘 안다고 뻐기는 연하남이라니. 루비아나는 걱정과 근심에 짓눌린 와중에도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어이쿠, 무서워라. 루단테는 엄살을 부리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내가 그동안 지켜봤는데, 누나가 폐하랑 관련해서 걱정했던 건 다 쓸모없었어. 이번 것도 그럴 것 같으니까 괜히 심각해지지 마. 재미없어 보여.”

걱정할 게 뭐 있어? 우리 황제 폐하가 하시는 일인데. 다 잘될 거야. 우린 그냥 폐하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무식해 보일 정도로 강한 믿음이었다.

신념처럼 칼레나를 믿고 있는 루단테를 보자니, 루비아나 역시 자신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닐까 싶긴 했다.

그렇다 해도 걱정을 완전히 털어 낼 순 없었다. 불안은 마음 한구석에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 이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 숨 쉴 때마다 따끔따끔하게 신호를 보낼 터였다.

“아무튼 결혼식이나 신경 써. 겨우겨우 결혼하는 건데 괜히 망치지 말고.”

“……걱정해 줘서 고맙다.”

“고맙긴, 어차피 안 갈 건데. 누나 말대로 말로 때우는 건 누가 못 해?”

“…….”

아무튼, 애 앞에선 말도 함부로 못 했다.

“그나저나 우리 셋 중 내가 제일 먼저 갈 줄 알았는데. 누나가 제일 늦게 가고. 그런데 누나가 먼저 가네.”

쳇, 루단테가 혀를 차며 얼굴에 불만을 드러냈다.

‘결혼을 일찍 하고 싶었다니. 저 망나니가? 맨날 피 칠갑하고 집에 들어갈 텐데, 그걸 좋아할 여자가 있으려나?’

루비아나는 루단테가 유력한 황제 부군 후보라는 걸 잠시 잊고 고개를 갸웃했다.

“나이를 따져 봐도 너보단 나랑 펠트하르그 공작이 더 급한데 뭔 소리야?”

“나이가 뭔 상관이야? 얼마나 급하냐가 더 중요하지. 제국이 안정되려면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 얼른 부군을 맞이해 아이를 낳고 후계를 탄탄히 하는 게 중요하잖아? 그래선 난 내가 제국이 세워지자마자 결혼할 줄 알았어.”

칼레나의 혼인 상대가 당연히 자신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저 자신감을 보라. 루비아나는 저 자신감을 꼭 꺾어 주고 싶어졌다.

“왜? 펠트하르그 공작이 먼저 갈 수도 있지. 네 말대로 제국의 안정을 위해.”

딱히 카드릭이라고 칼레나에게 어울리는 상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루단테만 만나면 카드릭 쪽으로 마음이 기울곤 했다. 그래도 저놈보다는 펠트하르그 공작이 낫지 않을까?

“카드릭 형이?”

아하하. 루단테는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말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내 말이 우스워?”

역시 아까 순순히 풀어 주는 게 아니었다. 루비아나는 다시 루단테의 목을 팔로 걸어 조이려고 손을 뻗었다.

“웃으라고 웃기는 말한 거 아니었어?”

“아주 진지했단다. 그리고 방금 네가 웃는 걸 보는 순간 내 마음이 확실해졌어. 난 앞으로 카드릭을 밀 거야.”

“헐, 그건 아니지. 내가 누나 결혼식을 위해 이렇게까지 했는데. 카드릭 형은 뭐 해 준 거 있어? 없잖아.”

“그래서 뭐? 결혼 선물을 준 대가로 널 황제 폐하의 부군으로 밀어 올려 달라고? 그럼 그건 대가를 바라는 뇌물이지, 결혼 선물이 아니잖아.”

“…….”

순간, 루단테가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랜만에 루비아나 승. 루비아나는 승리를 기뻐하며 아까처럼 웃어 보였다.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루단테는 질색하며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다시 루비아나 옆으로 살랑살랑 다가왔다.

“그러지 말고 나 좀 팍팍 밀어주지? 내가 누나한테 진짜 잘할게. 나중에 폐하가 누나 숙청하고 싶어 해도, 하나뿐인 자매인데 죽이진 말아 달라고 간청도 해 주고.”

“……원래도 널 밀지 않았는데 더더욱 널 밀고 싶지 않아진다?”

“그럼, 이건 어때? 내가 누나 남편을 누나 없을 때 지켜 줄게.”

루단테가 거래를 제안했다. 루비아나는 코웃음을 치고 튕겼다.

“네가 내 남편을 왜 지켜? 내가 지키면 되지.”

“누나가 수도에 없을 때도 있을 거 아냐.”

“그게 왜?”

‘내가 없으면 루이도 없는 거지.’

루비아나가 고개를 갸웃 젓자 루단테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학자의 집 출신 그 비실이를 북부까지 데리고 갈 생각?”

“…….”

야, 밤에, 아니 낮에도 침대 위에서 까 봤더니 그렇게 비실이는 아니더라.

진실이 입안을 간지럽혔으나 루비아나는 잘 참았다. 애 앞에서 함부로 말하면 큰일 난다는 걸 조금 전에 경험했으니까.

“털옷으로 꽁꽁 싸매면 되지 않을까?”

“이야, 진짜 데리고 갈 생각인가 보네.”

“…….”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그렇게 소중한 남편이……”

“호칭 똑바로 해라.”

“그래 봤자 폭군의 사생아 놈일 뿐이……지 않지. 그렇지. 누나의 부군이지.”

“그래, 잘 생각했어.”

“아무튼, 아쉴레앙 공작 부군님을 누나가 종일 지키고 있을 수는 없잖아. 이 수도에 있는 한, 카드릭 형보다 내가 아쉴레앙 공작 부군님을 잘 지켜 줄 수 있을 텐데. 어때?”

루단테가 다시 제안했다.

확실히 제국 전역에 깔린 정보기관의 수장이자 황실 친위대를 거느린 루단테의 도움을 받는다면, 루이먼드를 지키는 게 쉬울 것이다.

루이먼드를 노리는 반란 세력이 하나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더더욱.

“아니, 거절하겠어.”

그래도 루비아나는 거절했다.

“왜에?”

“폐하의 옆자리는 내가 거래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남자가 카드릭과 루단테니까, 둘 중 하나가 칼레나의 옆자리에 서겠구나, 예상할 따름이다.

칼레나가 갑자기 세기의 사랑에 빠져 황궁의 문지기나 정원사를 끌고 와 결혼한다고 해도 기꺼이 지지할 것이다.

칼레나가 마냥 지키고 보호해 줘야 하는 동생이라면, ‘그깟 놈이랑 결혼이라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돼!’라고 반대했겠지만 루비아나는 칼레나의 안목을 믿었다.

설사 정말 눈에 사랑의 콩깍지가 껴서, 이상한 놈을 데리고 온 거라면 칼레나 모르게 손봐 주면 될 일이다. 뼈와 근육이 노곤해질 정도로 만져 주면 비뚤어진 정신도 바로 서겠지.

“정말 폐하의 부군이 되고 싶다면 좀 더 노력해.”

“이 이상 어떻게 더?”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루비아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 뭐야. 오늘 괜히 알려 줬네.”

루단테는 수틀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휙 돌아섰다. 용건이 끝났으니 더는 이런 더러운 곳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루비아나 앞에서 등을 보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루비아나가 뒤에서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기보다는, 루비아나가 공격한다 해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루비아나는 루단테의 등을 보며, 역시나 그가 아직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봤자 고작 몇 살 차이이긴 한데, 철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정말로 칼레나를 좋아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수도로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무도회에서 계속 연달아 루단테와 마주쳤던 적이 있었다. 다섯 번이던가, 여섯 번이던가?

“누나, 요즘 왜 이렇게 싸돌아다녀? 공작저에 가만히 좀 있어. 자꾸 마주치니까 불편하잖아.”

“나 남편감 찾는 거 안 보이냐? 불편하면 네가 나오지 말든가.”

“열심히 일하는 중이거든! 그나저나 남편감이라니? 오, 드디어 찾기 시작한 건가?”

“그래. 그러니까 네 정보망에 걸리는 참한 사람 있으면 알아서 소개 좀 해 주렴.”

“맨입으로? 그건 곤란하고, 날 폐하의 부군으로 팍팍 밀어주면……”

“됐다. 안녕. 일 열심히 하든지 말든지.”

“어어, 그렇다고 그냥 가면 쓰나? 나 때문에 눈 높아져서 괜찮은 남자 찾기도 쉽지 않을 텐데, 정 못 찾겠으면 나한테 와. 내가 해 줄게.”

“뭘?”

“결혼?”

황제 부군이 되고 싶다고 노래 부르는 놈이 무슨?

“네가?”

“응. 누나가 황제가 되면.”

그러면 그렇지. 루비아나는 어이가 없어 하하, 웃고 말았다.

“난 최고가 아니면 싫은걸. 내가 최고니까 내 짝도 최고여야 해.”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최고의 여자, 최고의 자리. 그게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너 때문에라도 내가 최고는 안 될 거 같다.”

“못 되는 거겠지. 게을러서.”

“…….”

“아무튼,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도 인연인데, 폐하를 알현하면 내 칭찬 좀 많이 해 주고 그래. 카드릭 형을 욕해 주면 더 좋고.”

그때 개구지게 웃던 얼굴이 문득 기억났다.

“자꾸 그렇게 나와 봐, 재미없을 줄 알아.”

루단테는 협박을 남기고는, 깨끗한 바닥만 골라 폴짝폴짝 뛰며 멀어졌다. 루비아나는 그 발소리를 듣고 얼른 과거의 기억을 털어 냈다.

루단테가 저편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

“잠깐만.”

그를 불러 세웠다.

“왜? 마음이 바뀌었어?”

“아니, 물어볼 게 있어서.”

“뭐?”

“이거,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건가?”

칼레나가 시켜서 날 만나러 온 거냐는 물음이었다. 루단테는 피식 웃었다.

“우애 깊은 자매 사이잖아? 마음이 통하는 거 아냐? 알아서 맞혀 봐.”

그러고는 훌쩍,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화려하게 입고도 뒷골목 어둠 속에 무난히 스며들었다.

혼자 남은 루비아나는 혀를 찼다.

“짜식, 삐지기는.”

다시 저편 하늘을 돌아보았다.

황궁은 이 깊은 밤에도 등대처럼 환히 빛나고 있었다. 저 불빛을 보고 찾아드는 게 길 잃은 시대의 낙오자일지 한낱 날파리일지는 닥쳐 봐야 알겠지.

만일을 대비해 무기 날을 열심히 갈아 두는 것, 그게 등대지기의 최선일 터였다.

늘 그랬듯이.

그걸 아는데도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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