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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루비아나는 식사하러 식당에 내려왔다가 시녀장을 맞닥뜨렸다. 시녀장은 뭔가 단단히 각오한 사람처럼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치더라도 웨딩드레스 준비만은 직접 하셔야 합니다. 이것만은 절대 루이먼드 님이 준비해 주실 수 없는 일입니다.”
시녀장은 루비아나의 등 뒤를 살피며 말했다. 루이먼드가 내려오기 전에 이 대화를 끝내고 싶은 듯했다.
“아, 드레스.”
루비아나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그나저나 이번 결혼식 때, 내가 드레스를 입는 건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시녀장이 세상에서 제일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난 이미 그쪽에 석 달 치 봉급을 걸었다고.”
“나도 그런데.”
“나 거는 거 보고 딴 녀석들이 다 따라서 걸었잖아.”
하인, 하녀들의 수군거림이 두 사람의 귀를 간지럽혔다.
시녀장이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인, 하녀들이 깨갱, 어깨를 움츠리며 급히 주변으로 흩어졌다.
“혹시 밖에 나도는 무슨 소문 같은 걸 들으시고…… 이상한 생각 같은 걸 하신다거나, 하는 건 아니시지요?”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도 이미 수도에 파다한 내기와 도박의 주제를 알고 있는 듯했다.
“글쎄.”
루비아나는 씩, 웃어 보였다.
“비아, 잘 잤어요?”
타이밍 좋게 루비아나의 등 뒤에서 부드러운 발소리가 타박타박 들렸다.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도.
루비아나와 시녀장은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루이한텐 아무 말도 하지 마.’
‘공작님께서나 말씀을 조심해 주시지요.’
루비아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서서 루이먼드를 맞이했다.
“네. 저는 쪽잠을 좀 잤습니다. 루이는요?”
“저도…… 잘 잤습니다.”
루이먼드가 루비아나 옆에 와서 섰다. 딱 봐도 잠을 설친 얼굴이었다.
그래도 어젯밤에 봤던, 휘황찬란한 루단테보다 훨씬 잘생겨 보이긴 했다.
‘혹시 내가 같이 안 자서 그런가?’
루비아나는 괜한 생각을 하며 루이먼드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지난밤,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 서재에서 일하다 그 옆에 붙어 있는 쪽방 침실에서 자겠다고 말하고 루단테와 만나고 왔다.
거짓말할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루이먼드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찔렸다.
“어젠 무슨 일이 그렇게 급하셨나요?”
“잠은 좀 주무셨나요? 계속 바빠 보이셔서 걱정됩니다.”
“식사 후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건 어떠십니까?”
“늦게라도 오셔서 편히 주무시지……. 딱히 제가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저 잠귀도 어두워서, 자는 중에 누가 옆에 와서 누워도 전혀 모르거든요. 혹시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루이먼드는 사람 속도 모르고 계속 루비아나의 양심을 콕콕 찔러 댔다.
“아무래도 동부 치수 사업이 좀 급하게 이루어지다 보니까, 저한테까지 일이 밀려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 서류를 좀 보다 보니까 날이 샜네요. 안 기다리셨다니 다행입니다.”
루비아나는 거짓말한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게 루이먼드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거라고 생각했다.
‘고, 공작님? 그거…… 아닌 거 같은데. 정말 안 기다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죠?’
뒤에서 문을 닫던 하녀가 당황하는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녀장은 이미 세상에 다시없는 등신 보듯 루비아나를 보고 있었다.
식탁엔 이미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들었다.
잠을 거의 못 잔 루비아나는 입맛이 없어 빵을 연달아 세 덩이 씹어 먹었고. 밤늦게까지 침실로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지 않고 푹 잤다던 루이먼드는 수프에만 손을 댔다.
“오늘 오후엔 마담 루르가 와서 두 분의 결혼식 예복을 가봉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꼭 시간을 비워 두시길 부탁드립니다. 절대 말없이 사라지신다거나, 급한 일이 생긴다든가, 다른 약속이 갑자기 생기면 아니 되십니다.”
시녀장이 소화가 잘되는 부드러운 음식을 루이먼드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루이먼드야 결혼식 준비 외에 다른 약속이 있을 리 없고, 루비아나를 겨냥한 공격이었다.
“아아,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대답은 루이먼드만 했다. 시녀장은 불안해하며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꽤 간절했다.
‘설마 루이먼드 님 앞에서 저보고 알아서 준비하라거나 하시지는 않겠지요?’
‘글쎄.’
루비아나는 간절한 눈빛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구든 자신을 저렇게 간절하게 바라보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곤 했다.
어젯밤 일만 아니면 오늘도 반드시 그렇게 했을 텐데.
“기다리고 있을 테니, 사람이 오면 바로 올려 보내.”
루비아나는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고기를 썰며, 시녀장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마담 루르가 도착하자 루비아나는 그녀를 서쪽 계단 너머 개인 응접실로 불렀다. 루비아나는 사라지지 않았고, 급한 일이 있다고 어딜 가지도 않았다. 다른 약속을 만들지도 않았다.
대신 시녀장을 내쫓았다. 시녀장을 쫓아 우르르 들어온 다른 하녀들도 죄다 내몰았다.
“가서 루이나 도와. 내 예복은 내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루이먼드 님은 알아서 잘하실 겁니다. 그분보다는 공작님께서 제 도움이 더 필요하실……”
“신부의 의상이 뭔지 결혼 전에 신랑에게 알려지면, 그 결혼이 불행해진다며?”
“갑자기 그 말씀을 왜……?”
“리먼스 부인은 루이랑 너무 가까우니까, 내가 경계할 수밖에 없어서 말이야.”
“그게 무슨 말쓰……”
“그럼, 이만.”
루비아나는 시녀장을 복도에 버려 두고 문을 굳게 닫았다. 쾅.
속이 다 시원했다.
루비아나는 빙글, 돌아서 마담 루르를 마주했다. 아니, 마주하려고 했다.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할 마담 루르가 없어지지만 않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 텐데.
마담 루르와 직인들이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옷짐은 소파 근처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딱 사람만 없어졌다.
“……?”
루비아나는 의아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불쌍한 어린 양들, 아니, 마담 루르와 그녀의 직인들을 금방 찾아냈다. 그들은 응접실 구석에 몰려서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저, 저기…….”
“저희는, 어, 어, 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가장 어려 보이는 직인 둘이 눈물을 찔끔거리며 물었다. 읍. 읍. 마담 루르가 얼른 두 사람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앞으로 나섰다.
“사, 살려 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뭐, 뭐든 하겠습니다.”
역시나 겁에 질려 있었으나, 그럼에도 제 아랫사람들을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려서 내보내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루비아나의 마음에 꼭 드는 모습이었다.
“뭐든? 좋아, 좋은 마음가짐이야.”
루비아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히, 히이익!”
“살려 주세요!”
“드, 드레스를 얼마든지 찢으셔도 좋아요…… 제 몸만 찢지 말아 주세요.”
칭찬에 감격한 마담 루르와 직인들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뭐, 울 것까지야. 루비아나는 그들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며 양손을 넓게 폈다.
“자, 그럼 가봉을 시작해 볼까?”
꺄아아아악-.
마담 루르와 직인들이 행복에 찬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