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31)

***

한참 비명을 지르고 울더니, 시간이 좀 지나자 알아서들 진정했다. 마담 루르와 직인들은 하나둘 울음을 그치더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섬주섬 옷짐을 풀기 시작했다.

‘실컷 울어서 마음이 풀린 건지, 내가 자신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된 건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소파에 앉아 그들이 언제나 울음을 그칠까 기다리며 천장의 무늬만 세고 있던 루비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이 계속 울기만 하고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내쫓은 시녀장이 다시 쳐들어올지도 몰랐으니까.

“히, 히익.”

“잘못했습니다. 화내지 말아 주세요.”

자신이 한숨만 내쉬어도 숨 쉬는 방법을 까먹어 버리는 의상실 직인들을 보며, 마음이 좀 답답해지긴 했다.

‘도대체 내 소문이 어떻게 났기에……?’

대충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하나도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귀족들 말고 백성 사이에서 소문이 어떻게 나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싶었다.

그래도 경력은 어디 가지 않는지, 마담 루르는 직인들보다 빨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루비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 오, 늘 날씨가 참…… 좋지요? 고, 공작님?”

우르릉- 쾅.

창밖에서 천둥 번개가 쳤다. 비도 우수수 내렸다.

하필 오늘 같은 날 부르냐고, 짜증 내면서 옷짐 위로 방수천을 두르라 했던 게 어디에 사는 누구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직인들은 옷짐 위에 씌웠던 방수천을 차곡차곡 접다가 움찔, 했다.

“이런 날씨를 좋아하는지 몰랐군.”

“예, 예?”

“이런 날은 옷이 눅눅해져서, 그대 같은 장인들은 이런 날씨를 안 좋아할 줄 알았거든.”

루비아나는 픽, 웃으며 창밖을 보았다.

입가에 머금은 약간의 미소, 우수에 젖은 눈빛. 눅눅한 공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붉은 머리카락.

다리에 달라붙는 검은 가죽 바지. 위의 단추를 몇 개 푼 헐렁한 흰색 리넨 셔츠. 복장까지 완벽했다.

나른하게 늘어지듯 소파에 앉아 있는 루비아나의 모습은 한 마리 배부른 맹수를 보는 듯했다. 그냥 맹수 말고, 엄청나게 멋있고 관능적인 맹수.

겁에 질려 울고불고할 때는 몰랐는데, 진정하고 보니 아쉴레앙 공작은 소문의 내용처럼 무섭고 끔찍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히려.

“어머?”

“나, 심장이 떨려. 갑자기.”

“나, 나도.”

마담 루르는 물론이거니와 한창 일하던 직인들까지, 숨을 멈추고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 눈만 마주쳐도 울고불고하던 사람들은 어디 갔는지, 훔쳐보지도 않고 대놓고 바라보았다.

루비아나는 그들의 시선을 대충 흘려 넘겼다. 언제나 연회나 무도회를 가면 따라붙는 시선들과 비슷해서, 딱히 의식하지도 않았다.

다만,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마담 루르의 주의만 환기했다.

“여, 여기 있습니다.”

그제야 마담 루르는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디자인 북을 건넸다.

직인들 역시 꿈에서 깬 듯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담 루르는 루비아나가 디자인 북을 뒤적이는 동안, 옆에서 열심히 말을 걸었다. 말을 하다 보니 긴장이 풀리는지, 어느새 말을 더듬지도 않게 되었다. 적당히 사담을 끼워 넣어 대화를 이어 가기도 했다.

덕분에 루비아나는 시녀장이 웨딩드레스 의뢰를 꽤 일찍부터 해 뒀다는 걸 알게 됐다.

황궁에서 결혼식 날짜를 정해 주기 한참 전부터. 정확히는 루이먼드가 공작저로 온 밤, 그다음 날. 둘이 함께 밤을 보내고 아침 식사 하는 걸 본 뒤 바로.

‘실행력 한번 끝내주네.’

루비아나는 혀를 내두르며, 응접실 한쪽 벽에 가득 찬 드레스들을 보았다.

시녀장이 그렇게 일찍 주문해 둔 덕에, 마담 루르는 다양한 디자인의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둘 수 있었다. 오직 루비아나를 위한 것이었다.

“대금은 이미 다 치르셨으니까, 마음에 드시는 걸 선택하시면 나머지는 모두 파기할 예정입니다. 절대, 공작님만을 위한 디자인을 다른 곳에 재활용하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셔요!”

“…….”

‘어? 왜 재활용하지 않는 거지?’

루비아나는 당황했다. 아니, 저 아까운 걸 왜? 북부에선 한 벌로 한 마을에서 10년을 돌려쓰던데?

재활용해도 된다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으나 꾹 참았다. 나중에 시녀장에게 따로 말을 해 둬야겠다 싶었다.

드레스들은 하나같이 하얬다. 보석과 레이스도 잔뜩 달려 있었다. 마담 루르가 옆에 서서 드레스 한 벌 한 벌마다 어떤 보석과 레이스를 썼고, 어떻게 체형을 보완해 주는지 등을 말해 주었으나. 솔직히 반도 못 알아들었다.

저건 어깨가 드러나네, 저건 치맛단이 볼록하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게 됐다.

‘그사이 유행이 많이 바뀌었구나.’

세월의 흐름만 실감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한 열다섯 살 때까지는 드레스와 보석, 레이스 등에 꽤 관심 있었던 것 같은데. 지식도 제법 쌓았고.

과거의 기억과 지식은 지금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행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제국이 건립된 이래 여러 용어가 바뀌기도 했고.

마담 루르가 열심히 설명하는 내용을 가만히 듣고 있던 루비아나는 디자인 북을 덮었다. 털썩. 마담 루르의 심장도 덩달아 내려앉았다. 덜컥.

“왜, 왜 그러시는지……?”

마담 루르가 다시 말을 더듬었다. 루비아나는 디자인 북을 덮는 자신의 행동이 그 정도로 과격하게 보였는지 반성했다.

“솔직히 내 눈에는 다 똑같아 보여.”

“그, 그러시군요.”

“아, 다 예뻐 보인다는 말이네. 오해는 말고.”

“……가,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어차피 다 예쁘니까 이 중에 치마폭을 최대로 부풀려도 남들 눈에 이상해 보이지 않는 걸 고르고 싶은데. 어떤 거지?”

“예?”

“치마를 크게 부풀린 디자인. 이렇게?”

왜 못 알아듣지? 루비아나는 의아하여 이번엔 손짓을 곁들였다. 눈사람을 그리듯 손으로 동그랗게 동그랗게.

“아…….”

그 손짓을 ‘한 번만 더 내 말을 못 알아들으면 널 두 쪽으로 찢어 버린다.’로 알아들은 마담 루르는 돌처럼 굳어 버렸다.

“……?”

두 손으로 열심히 부푼 치마를 둥글게 둥글게 그려 보이던 루비아나는 얼어버린 마담 루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 여기요!”

“이거예요!”

다행히도 마담 루르에게 구원자가 나타났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아까 마담 루르가 자신들의 입을 막아 준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믿어 의심치 않는, 어린 직인 두 명이 쪼르르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 둘은 드레스 하나를 양쪽에서 들고 있었다.

목 끝에서부터 손끝까지 실크와 레이스로 덮어 노출이 거의 없는 드레스였다. 상체는 딱 달라붙는데, 허리 아래부터 화악 퍼졌다. 루비아나가 손짓으로 설명했던 것처럼 둥글게 둥글게.

“으음.”

루비아나가 턱을 긁적였다. 어떤 형태의 디자인인지는 알겠는데, 이게 자신이 원하는 만큼 퍼질지 모르겠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호,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번 입어 볼까요?”

“아니면 공작님과 키가 비슷한 언니한테 입혀 볼게요.”

“그래 주겠니? 고맙구나.”

“네, 네!”

“언니, 언니 얼른 이쪽으로 와 보세요!”

앞으로 나선 직인 둘은 열다섯이나 되었을 법한 소녀들이었다.

그 어린 소녀들이 꼬물꼬물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루비아나의 입가에 절로 웃음이 어렸다.

소녀들의 뺨이 포동하고, 별다른 상처가 없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비록 손은 바늘에 찔린 자국, 굳은살로 거칠어져 있었지만 맞거나 굶거나 학대당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루비아나는 새삼 마담 루르를 보았다. 그녀는 금방 루비아나의 손짓에 대한 오해를 풀고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린 직인 둘이 다른 직인에게 드레스 입히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주름진 눈가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 자신이 거느린 사람들에 대한 정이 묻어났다.

‘좋은 사람이군.’

시녀장이 모처럼 좋은 사람을 구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문전박대한 건 너무했나, 살짝 미안해지기도 했다.

‘역시 유언장은 고치지 말아야겠어.’

부디 시녀장이 자신보다 오래 살아, 이 저택을 물려받길 바랄 따름이었다.

곧 루비아나와 키가 비슷한 직인이 그 드레스를 입고 루비아나 앞에 섰다. 확실히 루비아나가 원하는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루비아나는 두 어린 직인들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꺅! 두 직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아랫사람들을 잘 두었군.”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치마를 좀 더 부풀릴 순 없나?”

루비아나가 드레스의 디자인에 관해 묻자, 마담 루르의 눈빛이 돌변했다. 조금 전까지 루비아나를 두려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얼른 디자인 북을 촤르르 펼쳐, 루비아나에게 내밀었다.

“어느 정도까지 부풀리길 원하시나요?”

“음, 이 정도까지?”

루비아나는 드레스의 디자인 그림 위에, 손가락으로 선을 그었다.

“아, 그런데 안에 뼈대를 넣고 싶진 않아. 거추장스러우니까.”

“크리놀린 없이, 이 정도로…… 말인가요?”

“속치마를 겹겹이 입는 건 무거워서 싫고.”

“흐으음…….”

마담 루르의 고민이 깊어졌다.

“어려우려나?”

“으으음…….”

마담 루르는 디자인 북에 빠져들 듯 코를 박고 고민하더니, 곧 방법을 찾아내곤 고개를 들었다.

“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주게. 저 드레스로 하겠어.”

가능하다는 말에, 루비아나는 두말없이 드레스 선택을 끝냈다. 마담 루르는 잔뜩 설명할 준비를 했다가 어리둥절해져서는 눈만 깜빡였다.

‘전문가가 알아서 잘하겠지.’

루비아나는 설명 안 해 줘도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도 마담 루르는 머뭇거리며 물러나지 않았다.

“저, 그런데…… 괜찮으실까요?”

“뭔가 문제가 있나?”

“방법이 있긴 한데, 고귀한 분께서 마음에 드실 방법일지는 알 수 없어서 말입니다.”

마담 루르가 루비아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연필로 디자인 북의 빈 여백에 뭔가를 스케치했다. 전문가답게 거침이 없었다.

루비아나는 선 하나하나가 모여 사람의 형상이 되고, 드레스가 되는 걸 신기하게 지켜봤다.

“이렇게, 평민들 사이에서는 안에 두꺼운 종이를 넣어 치맛단을 부풀리기도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종잇값이 무척 저렴해져서 가능한 일이지요. 효과는 반나절 남짓이지만, 아주 가볍고……”

“좋아.”

“네?”

“아주 좋아. 내가 원했던 거야.”

“……정, 말로 괜찮으신가요?”

“이렇게 해주게. 아, 그리고 안에 받쳐 입는 속치마를 이렇게 해 주고, 이런 걸 달아 줄 수도 있겠나?”

루비아나가 연필을 건네받아 마담 루르의 스케치 위에 자신의 원하는 걸 그렸다. 마담 루르의 솜씨에 비하면 발로 그린 것과 다름없었으나, 무얼 원하는지는 분명히 드러났다.

“가능은 합니다만…….”

왜? 이런 걸 왜? 마담 루르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백만 개 떠올랐다.

루비아나는 답하는 대신 씩 웃었다.

“잘 부탁하네. 아, 리먼스 부인에게는 꼭 비밀로 해 주고. 신부의 결혼식 의상이 식을 치르기 전에 알려지면, 결혼 생활이 불행해진다지?”

시녀장에게 들키면 쏟아질 잔소리가 듣기 싫어 당부의 말 몇 마디 했을 뿐인데.

“……!”

마담 루르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사, 살려 주세요, 공작님. 비, 비밀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

‘아니, 무덤까지 가지고 갈 필요는 없는데.’

뭐라고 말해야 ‘난 널 절대로 죽이지 않겠다.’라는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걸까? 루비아나의 고민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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