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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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먼드의 결혼식 의상 준비 역시, 일찌감치 마무리되었다. 루비아나에게 쫓겨난 시녀장이 터덜터덜 와서 도와드리겠다고 말했지만, 딱히 도울 건 없었다.

시녀장은 루이먼드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문 쪽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루비아나를 걱정하는 듯했다.

루이먼드는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일곱 번의 삶 속에서 자신의 옷도 숱하게 맞춰 입어 보았고, 남의 옷 맞추는 것도 실컷 보조해 봤기에. 옷만 만들지 못한다 뿐이지 준전문가나 다름없었다.

일찌감치 디자인 선택과 가봉을 마친 루이먼드는 이르게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목덜미의 멍이 많이 흐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만 빼면 루이먼드의 몸 상태는 완벽했다.

“정말 건강해지셨습니다. 다행입니다.”

의사는 진찰을 끝낸 뒤 루이먼드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루이먼드가 아쉴레앙 공작의 부군 될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뒤부터, 의사는 함부로 루이먼드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옛 아덴 왕국이 건재했을 때도, 그레이움 백작가에서도, 단 한 번도 이런 취급을 받지 못했건만. 루이먼드는 다시 한번 ‘아쉴레앙’이라는 이름의 위력을 확인했다.

루이먼드가 건강해졌으니 의사의 임무도 끝났다. 루이먼드가 다시 아프거나 다치지 않는 이상은 보기 힘들 터였다. 그래서일까?

“저기…….”

의사는 왕진 가방을 챙겨 들고도 떠나지 않고 머뭇거렸다.

“아.”

루이먼드는 잊고 있었던 걸 떠올렸다. 시녀장에게 부탁해 미리 준비해 둔 돈주머니. 그것을 꺼내 의사의 손에 쥐여 줬다.

왕진비야 이미 받았겠지만, 루이먼드는 이 고마운 의사에게 꼭 따로 답례하고 싶었다.

“그동안 고마웠네.”

루이먼드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의사는 받지 않으려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루이먼드가 기어이 쥐여 주자 돈주머니를 조심스럽게 왕진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는 왕진 가방에서 다른 무언가를 꺼냈다. 새끼손톱만 한 알약이 가득 든 약병이었다.

“저기, 이것을…….”

의사가 약병을 루이먼드에게 내밀었다. 사실, 그가 진료를 마친 즉시 돌아서지 않고 머뭇거린 건 이것 때문이었다.

그는 정력을 너무 과하게 소진하여 쓰러진 이 청년이 그 아쉴레앙 공작의 부군이 될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이것을 왕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젊은 사람이, 불쌍하게도…… 쯧쯧.’

루이먼드에게 주고 싶어 기회를 노렸으나 항상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주지 못했다. 언제고 건넬 기회가 있겠거니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오늘까지 건네지 못한 것이었다.

루이먼드 옆에는 그의 수발을 드는 하인이 서 있었다. 의사는 그 하인을 의식하며, 병 안이 안 보이게 손으로 가리려 했다. 그 수상한 행동이 병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짐작하게 했다.

루이먼드는 별생각 없이 약병을 건네받았다. 몸에 좋은 약이겠거니 했는데 정말 몸에 좋은 약이었다.

굳이 의사가 약효를 설명해 주지 않아도 어디에 좋은 건지 알 수 있었다. 의사가 말하는 뉘앙스로도 짐작이 가기도 했거니와, 지난 일곱 번의 삶 속에서 여러 번 봤기 때문이었다.

‘이걸 나한테 주다니. 딴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헛웃음이 났다. 좀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아니, 날 뭐로 보고?’

루이먼드는 이번까지 모두 여덟 번의 삶을 살며 단 한 번도 저 약을 먹지 않았다. 먹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거절해야 잘 거절했다고 소문이 나려나? 루이먼드는 약병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루이먼드의 촉촉한 눈을 보며 오해한 의사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눈으로 루이먼드를 그윽하게 한 번 바라보고는 허둥지둥 물러났다.

“히, 힘내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자, 잠깐! 잠깐만!”

루이먼드는 급히 의사를 불렀으나, 의사는 돌아보지 않았다.

“잡아 올까요?”

옆에 서 있던 하인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감히 우리 공작님 남편 되실 분께서 부르시는데 무시해?

루비아나와 루이먼드에 대한 충성심뿐 아니라, 저 귀한 약을 자신에겐 한 알도 안 주고 루이먼드만 줬다는 원한도 살짝 더한 것 같았다.

“아니, 됐네. 급한 일이 있나 보지.”

루이먼드는 하인을 만류하며, 한숨만 내쉬었다.

‘이번에 아팠던 것도, 그냥 내가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랬던 거라고.’

갑자기 의사에게 준 돈주머니가 아까워졌다.

‘정성껏 돌봐 줘서 고맙긴 한데, 이건 아니지.’

루이먼드는 손에 든 약병을 돌멩이 보듯 봤다.

의사는 약병을 뭔가 비밀스럽고 남들에게 들키지 말아야 하는 것인 양 줬지만 루이먼드는 별생각 없이 약병을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옆에 서 있는 하인의 눈이 약병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났다. 거기에 삐끗해 약병을 놓쳤다.

“으악!”

약병을 놓친 사람 대신, 구경하던 사람 입에서 고함이 터졌다. 하인이 기겁하며 두 손을 뻗어 약병을 받아 냈다.

“어이쿠우!”

그러고는 바로 바닥에 엎어졌다. 몸은 쓰러질지언정, 약병은 깨지지 않도록 지켜 냈다.

루이먼드는 손만 높이 들어 약병을 받치고 있는 하인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필요하면 가지든지.”

“예예, 제가 잘 받아, 예에?”

하인이 벌떡 일어났다. 부리부리한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 정말로 제가 가져도 됩니까?”

“그래, 가져가서 버리든 먹든 마음대로 해.”

“버, 버리긴 왜 버립니까? 이 귀한 걸!”

하인은 버럭 소리 지르며, 약병을 든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보다 약병을 먼저 숨기다니. 얼마나 저 약이 절실한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루이먼드는 대충 괜찮다고 대꾸해 주고는 밖으로 내보냈다.

약병을 소중히 품에 안고 나가는 하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였다.

‘남자가 말이야, 약 같은 걸 의지하다니.’

쯔쯔, 루이먼드는 하인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세서 쓸 만하다 싶었는데 의외로 하체가 부실한 듯싶었다. 부디 저 약이라도 도움이 돼야 할 텐데.

하인에 대한 감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루이먼드는 더 중요한 생각에 몰두했다.

‘아이를, 아이를 가져야 하는데 아무거나 함부로 먹으면 안 되지.’

벌써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설레발일지도 모르나.

‘아니, 3년 안에 아이를 둘이나 가져야 하는데 설레발은 아니지. 지금부터 준비해도 늦은 걸지도 몰라.’

루이먼드는 얼마 전부터 틈만 나면 루비아나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를 상상해 보곤 했다.

결혼식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아이 생각만 하면 힘이 불끈불끈 났다.

루비아나가 아이를 원치 않는다면 루이먼드 역시 처음부터 아이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모를까, 힘들게 아이를 낳아야 하는 건 루비아나였으니까.

아이는 전적으로 그녀의 의사에 따라야 했다. 만일 루비아나가 결혼 생활 동안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했으면, 곧바로 마법사를 찾아가 아랫도리를 처치 받았으리라.

하지만 루비아나가 아이를 원한다고 했으니까. 아이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으니까.

‘얼마나 예쁠까?’

루이먼드는 감히, 루비아나와 자신의 아이를 꿈꿨다.

‘첫 아이는 딸이었으면 좋겠다. 비아를 똑 닮았으면 좋겠어. 머리는 붉은색이고, 눈은 예쁜 녹색이었으면 좋겠는데. 코도 비아를 닮아 오뚝했으면 좋겠고, 입술도 비아를 닮아 딱 적당한 크기였으면 좋겠어. 손도, 발도 얼마나 자그마할까?’

상상만 해도 손끝이 저렸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손안에 아이가 있는 것처럼 꽉 움켜쥐다가 놀라 손을 쫙 펴기를 여러 번.

웃지 않으면 얼음처럼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 헤픈 웃음이 어렸다.

‘한시도 헤어지지 말아야지. 절대 품에서 놓지 않을 거야.’

일단 루비아나가 낳아만 주면, 매일매일 안고 다닐 생각이었다. 한순간도 떼어 놓고 싶지 않았다.

‘아기는 몇 시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우유를 먹어야 한다는데, 아예 아기 침실에서 같이 자면서 배고프다고 하면 챙겨 줘야지. 아, 그러다 둘째를 낳으면 내가 양팔로 들고 다녀도 될까? 아니, 한 명은 업고 한 명은 앞으로 안아서 데리고 다니면 될 것 같은데.’

유모 따윈 필요 없었다. 사지 멀쩡하고 건강한 아버지가 있는데, 왜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긴단 말인가?

루이먼드는 귀족들의 일반적인 육아 방식을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둘째도 비아를 닮았으면 좋겠다. 첫째만 딸이면 둘째는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어.’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가족. 가족이 생긴다. 아내, 그리고 아이까지.

끝까지 제 자식을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라고 한 번 불러 보지도 못하게 만든 사람 말고. 자신을 돈과 권력을 위한 도구,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지 않았던 사람들 말고. 진짜 가족.

죽고 또 죽어 왔던 지난 삶에서 감히 바라지 못했던, 엄청난 행복이 손안에 들어왔다.

요즘 루이먼드는 너무 행복해서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지경이었다. 정신이 어질어질해지다 못해, 때론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어머니, 보고 계신가요? 제가 결혼을 합니다. 결혼해서 아내가 생기고, 아이까지 생길지 모릅니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천국도 있을 테니, 불쌍한 어머니는 분명히 천국에 계실 터였다.

만약 어머니가 천국에서 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면, 루이먼드는 신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빌고 싶었다.

‘제발, 제게서 이 행복을 뺏어가지 말아 주십시오.’

감히 꿈꿔 본 적도 없는 행운이 저절로 손안으로 굴러들어 왔다. 너무 쉽게 얻어서, 너무 쉽게 잃을까 봐 무서웠다.

루이먼드는 그 행운에 유통 기한이 있다는 걸 까먹고 행복해했다. 그러다가 섬뜩하게 3년 기한을 생각해 내면,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믿을 건 책밖에 없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했으니까.

루이먼드는 책상 위에 엎드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책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톡톡.

그 책은 루비아나의 서재에서 빌려온 <그 영애는 오늘도 도망칩니다>였다.

‘이 소설들 속에 나오는 것처럼 될 수 있을까?’

소설 속 주인공들은 냉혹하고 차갑고 무서운 공작을 만나 당당하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고, 결혼에 성공한다. 절대 서로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함께 지내며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첫날밤이 달콤해서. 주인공의 당찬 모습에 반해서. 어려운 일을 척척 해결하고, 상단을 키워 돈을 버는 멋진 모습에 호감을 느껴서.

‘나도 앞으로 좋은 모습만 보여 주면, 그러면 될까? 그러면 비아도, 나를 좋아해 줄까? ……3년 뒤에, 계약 결혼 따윈 없다고 계약서를 쫙쫙 찢고 나한테 집착해 줄까?’

루이먼드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다.

“비아는, 아직도 많이 바쁜가? 언제 오는 거지?”

오늘은 서재에서 자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견딜 수 없이 추웠던 어젯밤의 침실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조금 전만 해도 감당할 수 없는 행복에 잠겨 더웠는데, 이제는 다시 추워졌다.

이 추위를 몰아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홀로 견뎌야 하는 추위가 더욱 가혹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모르면 모르고 살까, 한 번 온기를 맛봤으니 이제 그 온기 없이는 한시도 견디지 못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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