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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을 앞두고 신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뭘까? 누구나 입을 모아 말할 것이다.
‘결혼식 예복, 웨딩드레스를 준비하는 일이요!’
그다음 해야 할 일은?
얼굴이 반반한 남편이 얼굴값 해서 속 좀 썩어 본 부인들은 호호호, 웃으며 이렇게 말하리라.
‘남편 놈 주변 정리? 자기가 못 한다면 내가 해 줘야지, 어째?’
그래서 루비아나는 그 빗속을 뚫고 황궁으로 갔다. 칼레나가 있는 정궁 말고, 황실 관리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행정관으로.
루비아나를 태운 마차가 행정관 입구에 섰을 땐, 황실 관리들의 퇴근 시간이 약간 지난 때였다.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이 퇴근해 버렸다면 온 보람이 없게 될 텐데도, 루비아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황실 관리 중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리고 오늘 루비아나가 만나려는 사람은 매우 유능한 데다가 승진 의욕도 높아, 절대 이 시간에 퇴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퇴근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행정관의 입구가 한적했다. 루비아나는 뚜벅뚜벅 걸어 안으로 들어갔다. 루비아나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나온 내무국장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휘청, 비척거리면서도 용케 걸어왔다.
“아쉴레앙 공작님, 오셨습니까아아아.”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동부 치수 사업 준비로 고생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들으셨다면 듣지만 마시고 저를 구출, 아니, 제가 방금 뭐라고 했지요? 절대 구출해 달라고 말씀드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냥 사직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을 거예요. 그렇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국장님의 정년 퇴임을 보장하셨습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내무국장이 절규했다.
루비아나는 제 또래이나 저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 내무국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물었다.
“피오니 로렌, 어딨습니까?”
“공작님께서 면담을 요청하셨다는 연락은 전해 두었습니다……. 급한 일만 마치고 바로 오기로 했습니다. 잠깐 이쪽으로 오시죠.”
내무국장이 루비아나를 국장실 옆에 딸린 응접실로 안내했다.
제국에 단 셋뿐인 공작 중 하나, 아쉴레앙 공작이 일개 관리를 만나러 왔는데, 일개 관리는 자기가 할 일을 다 끝마치고 온다고 했다.
국장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루비아나 역시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무국장은 루비아나를 응접실에 앉혀 놓고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각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우울한 눈을 들어 국장실을 바라보았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산더미 같은 서류들이 보였다. 루비아나의 서재에 쌓여 있는 것보다 대여섯 배는 높았다.
“사람을 좀 더 충원할 수 없습니까?”
“사람을 뽑는 것도 일이거든요.”
너 지금 나한테 일을 또 시킬 생각이니? 내무국장이 텅 빈 눈을 들어 루비아나를 바라봤다. 눈 밑이 퀭한 게 흡혈 마수를 마주 보는 기분이었다.
“하긴, 그건 그렇겠군요.”
루비아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네 말이 맞아, 내가 헛소리했어.
명색이 황실 관리인데 아무나 뽑을 순 없지 않은가? 쓸 만하면서도 믿을 만한 놈을 찾거나, 찾아오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 역시 일이었다.
그래서 칼레나가 학자의 집을 털었던 게 아닐까? 쓸 만하면서도 믿을 만한 놈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는.
“그래도 폐하께서 학자의 집을 부숴 버려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게라도 인원을 충원하지 않았더라면…….”
내무국장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진저리 쳤다.
루비아나는 칼레나가 학자의 집을 때려 부순 게 훗날 그녀의 치세에 오점으로 남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내무국장의 생각은 전혀 다른 듯했다.
“제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살려 달라고…… 사직 아니면 죽음을……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더니, 폐하께서 학자의 집을 때려 부숴 주셨답니다.”
아니, 생각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이 사람이 원흉일지도?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아무래도 정년 퇴임 나이가 예순인 건 너무 빠른 것 같다고, 일흔 정도는 되어야……”
“저는 그 전에 죽을 것입니다.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병에 걸리든 제가 낫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씀이 진짜인 걸 아니까, 진짜 더 싫네요…….”
흑흑. 내무국장은 두꺼운 안경을 벗고, 눈가를 슥슥 문질렀다. 잉크로 얼룩덜룩해진 옷소매가 루비아나의 눈앞에서 흔들흔들했다.
“남편분은 잘 계십니까?”
“죽었다는 소식을 못 들었으니까 살아는 있겠죠? 아니, 아니지. 사흘 전 회계국에서 온 서류를 아직 못 열어 봤는데, 거기에 제 남편이 과로사했다는 부고가 들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사하게 혼자 도망가지는 않았겠지요.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해. 지금 회계국장이 죽으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해?
중얼거리는 말을 들어 보니, 회계국장인 남편이 죽으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다시 살려 내 올 것 같았다.
‘여전히 사이가 좋군.’
루비아나는 남의 부부가 여전히 알콩달콩 잘 살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만족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목마르면 거기 있는 차를 따라 드시면 되고요…… 피오니 사무관이 오는 대로 들여보내겠습니다아아.”
내무국장은 다시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비틀비틀 돌아섰다.
‘벌써 3분이 지났나?’
루비아나는 닫히는 문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손님 응대 시간 3분.
이는 루비아나가 수도에 돌아왔을 즈음, 칼레나가 행정국에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안 그래도 황실 관리들이 너무 일만 하느라 사교성이 떨어져 문제였는데, 여기에 학자의 집 출신 학자들까지 더하니, 행정관은 제국 제일의 사교성 제로 영역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회의 때마다 건실한 대화가 오가는 대신 악 받친 고성과 욕설이 합창하듯 터져 나오게 됐다. 함께 협력해서 진행해야 하는 업무는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고.
그걸 보다 못한 칼레나가 엄명을 내린 것이었다.
- 손님이 방문하면 아무리 바빠도 3분은 사담을 나누며 응대할 것.
‘그냥 일을 덜 시키고 집에 보내 줘서 가족이나 옆집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게 해 주면 안 되겠나?’
‘병 주고 또 병 주네.’
‘제발 사직 신청을 받아 달라고요.’
황실 관리들은 앓는 소리를 내며 반발했으나, 막상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고서부터는 3분 응대를 꼭꼭 지켰다.
이 3분 응대법을 황제에게 제안한 게 도미넨트 공작이라는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나마 도미넨트 공작을 원망할 따름이었다. 제국 제일의 범생이 집단다웠다.
그 범생이 집단의 심장부에 루비아나가 홀로 앉아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바로 옆방에 앉아 있을 내무국장마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지만, 루비아나는 서운하지 않았다. 여기는 원래 이런 곳이었으니까.
내무국장이 간간이 고개를 들이밀고 안부를 물었다면 오히려 루비아나가 기겁했을 것이다. 아니, 아직 정년 퇴임 날이 저렇게 멀었는데 벌써 미치면 곤란하지.
루비아나는 그저 응접실에 멀뚱히 앉아 다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기를 한참. 또 한참.
루비아나는 앉아 있던 소파의 길이를 가늠하며 한번 누워 볼까 고민할 정도로 심심해졌다. 살짝 졸리기도 했다.
‘한숨 잘까?’
벽면에 꽉 들어찬 책장에 빽빽이 꽂혀 있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운다는 선택지는 머릿속에 없었다.
편히 누워 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힐 즈음, 문이 열렸다.
“그래, 그 안에 계시니까 들어가 봐요오오오오.”
“네에!”
내무국장의 힘 빠진 목소리와 달리 힘찬 목소리였다. 루비아나가 귀를 쫑긋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피오니 로렌 경?”
“네. 행정관 내무국 소속 사무관, 피오니 로렌입니다.”
피오니가 루비아나 앞에 서서 깍듯이 인사했다.
피오니 로렌은 적당한 키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여성이었다.
옷차림은 사무국장보다 훨씬 단정했다. 소매가 살짝 구겨지긴 했으나 잉크 자국은 없었다.
무엇보다 안경이 아주 깨끗했다. 작은 먼지도 흠집도 없었다.
‘행정관 관리가 이렇게 멀쩡하기 쉽지 않은데, 무척 깔끔한 성격인가 보군.’
루비아나는 내심 감탄하다가 아차, 싶어 다시 마음을 확 조였다.
남편 될 남자가 진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왔는데, 첫인상이 좋다고 느껴 버리다니, 이건 아니지.
“피오니 로렌 경, 앉으세요.”
루비아나가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피오니 사무관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로렌 사무관이라고 부르셔도 상관없지만, 내무국 안에 로렌 성을 쓰는 사무관이 일곱 명 있어서 헷갈릴 염려가 있으니 되도록 이름을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루비아나는 똑 부러지게 말하는 피오니가 마음에 들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차를 마시자고 먼저 권할 만큼.
“차 한잔 하겠습니까?”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피오니가 후다닥 엎어져 있던 잔을 두 개 들어 내밀었다. 그 빠릿한 모습마저 마음에 들었다.
‘역시, 레나가 하는 일은 다 옳아. 이런 보석이 학자의 집에 숨겨져 있었다니. 당연히 학자의 집을 때려 부숴서라도 여기다 데려다 놔야지.’
루비아나는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또 아차 싶었다.
‘아니, 이러면 안 되는데. 정신 차려야지.’
루비아나는 굳이 여기까지 행차한 이유를 되새겼다.
루이먼드와 어련히 알아서 잘 말했겠냐만, 그래도 결혼 전에 한 번 만나는 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고, 루이먼드를 이쪽에 3년 결혼살이 보낸 걸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면, 당분간 멀리 - 날씨 좋고 풍경 좋은 남부에 - 파견 형식으로 다녀오겠느냐고 물어보고 보내 줄 용의도 있었다. 내 남자가 딴 여자랑 결혼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는 것 같으면, 반드시 3년 뒤 루이먼드를 살려서 둘이 떠나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해서 안심시켜 주자, 싶기도 했고.
그런 마음에 찾아온 건데, 당차고 똑 부러진 피오니의 태도에 말려 대화가 전혀 다른 쪽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멀쩡한 거지, 날 보고도?’
실시간으로 경험하고 있는 피오니 로렌의 태도가 너무 예상 밖이었다.
‘설마 너무 충격을 받아서 회피하는 건가?’
사람이 너무 충격을 심하게 받으면 현실을 외면하게 된다지 않나? 보고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그런 거라면 내가 괜히 찾아온 걸 수도?’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 걸까? 루비아나는 난감해졌다.
“…….”
“…….”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바쁜 사람을 불러다 앉혀 놓고 무게 잡고 있는 꼴이 되었다.
“저, 공작님?”
루비아나가 도통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피오니가 눈을 데굴 굴리며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꺼냈다.
‘드디어, 시작인가?’
루비아나는 다시 긴장했다.
“말씀하세요.”
“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건, 공작님 아니신가요?”
말씀하셔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님이신데요. 피오니가 그런 눈빛으로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렇죠.”
루비아나는 바로 납득했다.
‘맞는 말이네. 맞는 말이긴 한데…….’
피오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피곤해 보였지만, 그 빛나는 눈 때문에 오히려 생기 있어 보였다.
뺨이 발그레한 게 살짝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나쁜 쪽으로 말고 좋은 쪽, 좋은 감정으로.
도무지 사랑하는 남자를 어떤 불행한 이유로 남에게 보내야 하는 비련의 여주인공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높은 자리에 있는 까마득한 상사가, 콕 집어 절 부른 것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을 숨기지 못하는 젊고 패기 넘치는 야망가형 신입 관리 같달까?
거기에 대고 차마, ‘네가 내 남편 될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얼굴 한번 보러 왔다.’라고 말하기가…… 참 그랬다.
피오니는 루비아나가 루이먼드 일 때문에 찾아온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공과 사 구분 한번 분명하네.’
하긴. 나랏일 하는 사람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싶다가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싶기도 하고.
아무튼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 봤자 마음속 고뇌였다. 루비아나의 입은 착실하게, 머리가 시키는 대로 말을 꺼냈다.
“요즘 어떤 업무를 맡고 있습니까, 피오니 사무관?”
“예, 공작님!”
피오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해 보였다.
그 모습이 루비아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한낱 사무관도 이렇게 공과 사를 구별하는데, 난 공작씩이나 되어서…… 행정관까지 찾아와선…….’
루비아나를 부끄럽게 만든 피오니는 자신의 업무를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단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저는 지금 수도의 서쪽 도로 보수 공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수로도 정비하고, 바닥에 벽돌도 다시 깔려고 합니다.”
발음이 분명했다, 듣는 사람을 배려해서 전문 용어가 나온다 싶으면 설명해 주는 게 자연스럽기도 하고.
한마디로 피오니의 발표는 완벽했다. 즉석에서 시킨 건데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사람처럼 막힘이 없었다.
루비아나는 듣다 보니 관심이 생겨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때마다 피오니는 막힘없이 술술 대답했다. 단 한 번도 머뭇거리거나 말을 흐리지 않았다.
‘대단한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똑 부러진 사람을 보는 건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루비아나는 점점 더 피오니가 마음에 들었다.
“제가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경 쓰고 있는 업무는 수로 수리입니다. 제가 수로를 정비하는 작업은 지금 폐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동부 치수 사업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동부 치수 사업 업무에 투입된다면, 제가 수도의 수로를 보수했던 지금의 업무에서 배우고 느낀 점을 바로 활용할 수 있겠지요?”
슬쩍, 루비아나의 눈치를 보며 맡고 싶은 업무가 있다는 야망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야망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다. 힘들어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힘낼 수 있을 테니까.
‘탐나네.’
루이먼드를 사이에 두고 얽힌 사이만 아니라면, 북부로 데리고 가고 싶을 정도였다. 칼레나가 이 똑똑한 신입 관리를 알아보기 전에 얼른.
‘혹시, 추운 거 좋아해? 나랑 북부 같이 안 갈래? 동부 치수 사업에 관심이 많은 건 알겠는데, 혹시 북부를 안정화하는 일을 해 보는 건 어때? 이것도 나름 보람찰 거야. 거기엔 정말 아무것도 없거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어.’
하지만 참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부로 가자고 꼬시면, 꼬시는 걸로 안 들리겠지.’
아름다운 애인을 뺏는 것도 모자라 북부로 좌천, 아니, 귀양 보낸다고 생각할 것이다.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동부 치수 사업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동부 치수 사업에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네!”
피오니는 루비아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리쳤다. 배 속에서부터 우러나온 우렁찬 목소리였다.
“아, 죄송합니다.”
피오니는 곧바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루비아나는 괜찮다고 말한 뒤, 이유를 물었다. 피오니가 다시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눈으로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역사적으로 새 시대를 연 지배자들은 반드시 치수 사업을 했어요.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서지만, 그 거대한 사업을 통해 자신의 지배력을 완성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죠. 사실 후자의 이유를 더 우선시했을 거예요.”
그렇게 루비아나는 피오니에게 치수 사업과 새 왕조, 새 지배자의 상관관계에 대해 한바탕 강의를 들었다. 동생 칼레나가 아니라 황제 칼레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동부 치수 사업을 그렇게 밀어붙인 거구나.’
역시 내 동생은 똑똑해. 루비아나는 자랑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저기, 공작님.”
피오니는 이제 더없이 간절한 표정을 짓고 루비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저를 찾아오신 건 분명, 어떤 깊은 의도가 있으셔서지요?”
“…….”
‘내 남편의 여자, 얼굴이나 한번 보겠다는 의도?’
“그리고 제가 진행 중인 업무 사항을 물어보시며 제 업무 능력을 평가하신 것 또한 분명, 어떤 깊은 의도가 있으신 거고요!”
“…….”
‘그건 그냥 그쪽이, 물어봐 달란 얼굴을 하고 있어서.’
“공작님 같은 분이 한낱 사무관일 뿐인 저와 제 업무에 관심을 가지시는 건, 절 크게 쓰실 생각이신 거라고, 제가 그렇게 생각해도 될까요?”
루이먼드가 알려 줬다거나, 루이먼드와 관련 있는 사람이기에 루비아나가 자신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데에서 학자다운 외골수 기질이 드러났다.
“…….”
루비아나는 퍽 난감했다.
사무관 하나쯤 원하는 곳에 꽂아 줄 정도의 힘이 있긴 한데. 있긴 있는데…….
“제발, 제발 그렇다고 말씀해 주세요!”
피오니가 두 손을 꼭 쥐고, 간절하게 말했다. 루비아나는 거기에다 대고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렇……겠지요?”
‘나 뭐라는 거니?’
저 멀리서 칼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언니는 원래 그랬어.’라고.
“역시! 열심히 일하면 다 알아주실 거라고 믿었어요!”
꺅! 피오니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빙빙 돌았다.
‘독특하긴 하네.’
루비아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피오니를 바라보았다.
루비아나는 칼레나가 동부 치수 사업을 맡길 관리가 부족하다고 한숨 쉬던 게 기억났다.
다들 동부에 내려가는 걸 좌천이라 생각하고 싫어한다고 했다.
“그렇게 좋습니까?”
루비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물어보았다.
“당연하죠!”
피오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전 역사 전공 학자예요. 그리고 운 좋게 역사의 새 장이 열리는 시대를 살고 있죠. 그 현장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냥 보는 것도 아니고, 제가 직접 그 치수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니! 제가 그 역사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되는 거잖아요!”
목소리에서 열정이 흘러넘쳤다. 보기 좋긴 한데, 학자의 집 출신이 저렇게 활기찬 게 낯설기도 했다.
“학자들은 원래 이렇게, 적극적인 편입니까?”
루비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고로 학자란 도서관에서 책만 읽고, 햇빛이라고는 본 적 없는 창백한 얼굴로 비틀비틀 걸어 다니는 존재 아닌가?’
특히나 역사학자 같은 사람은 더더욱.
“그 무슨 말씀! 공부하려면 체력이 필요하다고요. 특히나 역사는 더더욱이요!”
피오니는 학자의 집에서 학자들의 체력을 기르기 위해 어떤 운동을 시키는지 줄줄 말했다. 가만 들어 보니, 견습 기사들의 훈련량 못지않았다.
“물론 기사님 앞에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민망할 만큼, 아주 기본적인 거긴 하지만요.”
“아니, 아닙니다.”
‘뺀질대는 놈들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
뒷말은 제국 기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꿀꺽했다.
루비아나는 학자의 집 식당 입구에 걸려 있다는 문구가 특히나 가슴에 와닿았다. ‘건강한 몸은 더 오래 공부할 수 있다.’
“오히려 학자의 집을 나온 뒤에 건강이 더 안 좋아졌어요. 건강하지 않으면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효율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하지만 바쁘니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생활 속에서 틈틈이 운동하고 있답니다.”
피오니는 자기 자리에 아령을 여러 개 가져다 놓고 한 손으로 들며 서류를 읽는다고 했다.
발목에는 모래 자루를 차고 있다며, 보여 주겠다고 바지를 걷으려고 해서 루비아나가 급히 말리기도 했다.
다시는, 다시는 학자의 체력을 무시하지 마라.
펄럭이는 옷소매 속에서 수줍게 드러난 피오니의 튼튼한 팔뚝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루이가 그렇게…… 그랬구나.’
루이먼드의 몸이 군살 없이 탄탄했던 거나, 배에 은근 복근까지 있었던 것, 그리고 침대 위에서 밤을 새워도 지치지 않았던 모습까지.
루비아나는 인상 깊었던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그간 학자란 종족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편견을 버릴 수 있었다.
루비아나가 의식의 변화를 겪는 와중에도 피오니는 폴짝폴짝 뛰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루비아나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마침 잘됐네.’
동부 치수 사업 쪽 업무를 맡으면 필히 한동안 동부로 내려가 있어야 할 터. 사랑하는 남자가 딴 여자와 결혼하는 걸 지켜보지 않을 수 있으니, 좀 덜 힘들지 않겠는가?
저 의욕으로 일한다면 금방 칼레나나 카드릭의 눈에 띄리라. 그렇게 된다면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일 터.
‘그대로 쭉쭉 승진해서, 제국 최초의 재상이 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루비아나는 칼레나가 생각만 해 두고, 아직 만들지 않은 최고위 관리직에 피오니가 오를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아까웠다.
이렇게 뛰어난 능력을 갖춘 관리가, 3년 뒤 루이먼드와 함께 사라져야 한다니.
‘저 능력과 야망을 버리면서까지 사랑을 택했다는 건가?’
과연 루이먼드 같은 미남을 가질 만한 여자였다. 피오니 로렌.
‘난 그럴 수 없어.’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3년 후 이혼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하지만 그를 위해, 그를 가지기 위해, 자신의 무엇도 희생할 수 없었다.
루비아나는 그 차이가 루이먼드의 마음을 손에 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졌군.’
루비아나는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3년. 딱 3년 만이야.’
그 후엔 루이먼드를 이 여자한테 돌려주자.
어쩌면 루이먼드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빈자리는, 곧 찰 것이다. 루이먼드를 꼭 닮은 아이들로.
그리고 그 아이들의 존재는 늘 피오니에게 마음의 짐이 되겠지.
아이들의 존재가 피오니를 슬프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기분이 안 좋았다.
아예 얼굴 한 번 안 본 사이였다면 모를까.
이렇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를 알고 난 다음에 가지는 부채감은 꽤 무거웠다.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되도록 루이와 당신이 3년 뒤에 신분을 바꾸고 도망치는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당당히 살 수 있는 방법을 내가 최대한 찾아보겠습니다.’
끝내 루이먼드가 반역에 휘말려 사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비슷한 체구의 다른 사형수와 바꾸는 방식으로라도 그를 살리자고 생각했다.
가짜 이름과 신분을 주고, 제국 변방으로 도망치게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피오니의 능력이 아까워서라도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피오니와 루이먼드 둘이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방법. 피오니가 저 능력을 포기하지도 않고, 계속 제국에 봉사하며 루이먼드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어려운 문제였다. 하지만 그 문제를 못 풀겠다고 집어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귀찮지만, 최대한 해 봐야지.’
오랜만에 책임감이 귀찮음을 이겼다.
“지금은 동부 치수 사업과 관련한 업무 전반을 폐하께서 총괄하고 계시지만, 내 생각에 곧 그 업무는 펠트하르그 공작이 맡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펠트하르그 공작에게 따로 말을 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경력이 짧으니 당장에 중임을 맡지는 못하겠지만,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될 것이고 승진도 하게 되리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피오니는 기뻐하며 깍듯하게 인사하면서도, 은혜를 잊지 않겠다느니 언제든 불러 주시면 공작님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거라느니,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까지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태도였다.
‘루이는 이런 대단한 여자를 마음에 담고 있는 건가?’
입안이 씁쓸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오늘의 만남이 정말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