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31)

***

피오니와의 면담을 마치고 황궁을 나와 공작저에 도착하니 날이 제법 어두워졌다. 마차에서 내리니, 하녀 두엇이 마중 나와 있었다.

본래 나와야 할 사람들이 결혼식 준비로 바빠 그런 것이리라.

루비아나는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좌우를 둘러보았다.

“루이먼드 님께선 방에 계십니다.”

“의사가 다녀간 뒤 계속 나오지 않으셨어요.”

늘 나와 있던 시녀장을 찾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하녀들은 당연하게 루이먼드를 찾는다고 생각했다. 루비아나 역시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의사가 다녀간 지 얼마나 됐지?”

“공작님께서 황궁으로 가실 때와 비슷한 무렵이었습니다.”

“…….”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던 루비아나가 걸음을 멈췄다.

“내내 방 안에만 있었다고?”

“네.”

“오늘은 결혼식 준비로 누굴 만나거나 할 일이 없었나?”

“시녀장님께서 결혼식 예복을 맞추는 날이니만큼, 오후 일정을 모두 빼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이렇게 일찍 끝날 줄 몰랐다고도 하셨어요. 루이먼드 님도 그렇지만, 공작님께서도요.”

하녀는 성실히 시녀장이 했던 말을 전했다.

시녀장 본인이 와 있는 것도 아닌데, 루비아나는 시녀장의 존재감을 느꼈다. 그녀가 느끼고 있을 불안감마저.

‘내 웨딩드레스가 걱정되나 본데.’

아무래도 마담 루르가 잘 방어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 그럼 모처럼 푹 쉬고 있을 텐데, 방해하지 말아야겠군.”

루비아나는 서쪽 계단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대로 서쪽 계단으로 올라가려는데.

“고, 공작님!”

하녀 한 명이 급히 루비아나를 불렀다.

하녀들은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그중 루비아나를 불러 세운 하녀는 오늘 아침, 식당에서 문을 잡고 있었던 하녀였다. 루비아나는 그녀가 낯이 익었다.

“무슨 일이지?”

“하, 한번, 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

“어딜?”

“루, 루이먼드 님의 처소에요!”

“왜? 쉬고 있을 텐데, 방해되잖아.”

“고, 공작님이 방문하는 걸 방해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절대로요.”

“글쎄.”

루비아나가 난간에 기대 하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보다 루이먼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하녀가 살짝 마음에 안 들었으나 하녀의 모습을 보고는 그런 옹졸한 마음을 잠시나마 가졌던 것을 바로 반성했다.

하녀는 두 손으로 치맛단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루비아나를 멈춰 세우기 위해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하얗게 변한 손가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용기가 가상하고, 또 신기해서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 그것은…… 그, 그러니까…….”

루비아나가 자신을 내려다보자 그새 용기가 사그라든 듯했다. 하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말을 더듬었다.

루비아나는 하녀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어차피 서재로 가 봤자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어쩌면 루이먼드에게 가야 할 이유를 하녀가 말해 주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낱 하녀에게 이유를 구걸하다니.’

루비아나는 그런 자신이 우스워 픽 웃었다.

그 웃음이 하녀에게 어떤 신호가 된 걸까? 하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 어젯밤에 루이먼드님께선 종일 못 주무셨어요.”

“……?”

“제, 제 동료 베키가 그랬어요. 내내 공, 공작님을 기다리면서 깨어 계셨다고요. 그래서 양초를, 새벽까지 계속 가져다 드, 드렸다고요.”

“아아.”

그제야 루비아나는 아침에 식당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날 기다렸다고? 기다리지 말고 그냥 자라고 했는데, 왜?’

푸석한 얼굴로 푹 잘 잤다고 말하던 루이먼드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지금도, 아마, 공작니, 님을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그렇게 가 버리지 마세요…….”

어느새 하녀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했다. 하녀는 이 슬픈 말을 듣고도 감격하거나 ‘내가 왜 그 마음을 몰라줬을까?’ 하고 반성하는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는 루비아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울지 마, 왜 울어?”

옆에 서 있던 하녀가 앞치마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하녀 역시 울상이었다.

“흑…… 루이먼드 님이 너무 불쌍해. 그렇게, 그렇게 좋은 분이…….”

루비아나를 멈춰 세운 하녀는 아예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옆에 서 있던 하녀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같이 울기 시작했고.

“…….”

루비아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한 번에 두 명이나 울린 사람이 되었다.

근처를 지나던 하인, 하녀들이 그 광경을 보고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루비아나가 저 불쌍한 하녀들을 죽이기 전에 얼른 시녀장을 불러오겠다며 뛰어가는 하인도 있었다.

루비아나는 손을 내저어 주변에 몰려든 하인, 하녀들을 물리고 우는 하녀들에게로 갔다.

하녀들은 부둥켜안고 엉엉 우느라 루비아나가 계단을 내려오는지도 몰랐다.

루비아나는 계단을 고작 몇 개 남겨 두고 멈춰 섰다. 그래도 하녀들보다 눈높이가 높았다. 하녀들의 머리 위로 루비아나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루비아나는 계단에 주저앉았다. 그러니 고개를 숙이고 흑흑 우는 하녀들과 대충 눈높이가 맞았다.

“…….”

루비아나는 턱을 괴고, 하녀들이 우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경험상 이렇게 울 때 말을 걸면 더 놀라거나 더 울었다. 심하면 기절해 뒤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냥 실컷 울게 놔두면 긴장이 풀려서 겁을 덜 먹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녀들은 어느 정도 울고 나자 히끕, 히끕, 하며 알아서 울음을 그쳤다.

“꺅.”

“악!”

눈앞에 앉아 있는 루비아나를 보고 깜짝 놀라긴 했지만 기절할 힘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그냥 스르륵 주저앉기만 했다.

“다 울었나?”

“예? 예에?”

“흐윽…….”

“미안한데, 다시 울고 싶어도 일단 내 질문에 대답하고 나서 울면 안 될까? 내가 마냥 기다려 줄 순 없어서 말이야. 곧 리먼스 부인이 너희를 구하겠다고 달려올 텐데 내가 그 전에는 도망가야 하거든.”

루비아나가 픽 웃으며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

“…….”

두 하녀가 멍한 얼굴로 루비아나를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다시 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다 울었으면 말해 봐. 뭐가 그렇게 슬펐는지.”

“네?”

“예에?”

두 하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궁금해서, 그거 물어보려고 기다린 거거든.”

“어…….”

“그게…….”

잠깐 머뭇거리던 하녀들은 곧,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을 꺼냈다.

“루이먼드님께선 정말 공작님과 이 저택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거든요.”

“그걸 공작님께서 몰라주시는 게 너무 슬펐어요.”

“루이먼드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공작님을 정말, 정말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루이먼드님께 조금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세요.”

하녀들은 북부에서 온 괴물 공작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조잘조잘 말했다. 루비아나는 그런 하녀들이 신기했다.

“루이먼드가 그렇게 좋아?”

그래서 물어보았건만. 하녀들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앞다퉈 말하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상냥하고 모르는 게 없으세요. 제가 부족해서 실수해도 화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절 걱정해 주셨어요.”

“그리고 늘, 늘 공작님을 걱정하셨어요. 공작님께서 매일 술을 얼마만큼 드셨는지 확인하시곤, 주방장 어르신께 다음 날 아침 식사에 뭘 올려야 할지 미리 말씀해 주세요. 공작님 속 쓰리면 안 된다고요!”

“또, 또, 녹슨 동상을 빤짝빤짝하게 빛나게 만드는 법도 알려 주셨어요!”

“양탄자를 깨끗하게 터는 시범도 보여 주셨어요!”

“그냥 시범만 보여 주신 게 아니라 같이 해 주셨어요! 저희들끼리 하면 힘들 거라고, 남자가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요!”

“등잔에 그을음 지울 때도 같이 해 주셨어!”

처음 몇 개야 그래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 줄 만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뭔가 이상했다.

‘리먼스 부인은 왜 루이가 그런 일을 하도록 놔둔 거지?’

의아했다가.

‘루이가 저런 일까지 하게 했다고?’

슬슬 빈정 상하기 시작하더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절로 얼굴이 싸늘해졌다.

‘감히 나 없을 때 루이에게 텃세를 부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하녀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폭 빠져 있어, 루비아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 덕에 하녀들의 간증은 끝없이, 끝없이 이어졌다.

“며칠 전엔 아침부터 저희랑 같이 뒷문에서 식재료상 마차를 기다려 주시다가, 가격표를 보시고 이걸 왜 이 가격을 받느냐,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런 걸 가져다 바치냐, 막 이러면서 혼내 주셨어요!”

“그 사람, 저희가 채소가 조금 비싼 것 같다고 그러면 오히려 저희한테 화내고 그랬거든요. 시녀장님께 말씀드리긴 너무 작은 일이라 말씀도 못 드리고 그랬는데…….”

“아, 어, 어제는! 저희 겨울 의복을 한 벌씩 다 맞춰 주신다고 하셨어요. 올해 겨울은 특히 추울 거라고요!”

우리 루이먼드 님께서요! 우리 루이먼드 님께서요! 또 우리 루이먼드 님께서요! 누가 들으면 제국에 루이먼드라는 신을 믿는 종교가 하나 새로 생겼나 의아할 정도였다.

계속 하녀들의 말을 듣고 있던 루비아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언제부터 이 저택 대소사를, 루이가 다 관장하게 된 거지?’

시녀장이 신랑 수업을 시킨다는 구실로 루이먼드를 괴롭히는 게 아닐까 의심했건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진 하녀들의 간증이 그 느낌에 쐐기를 박았다.

“어제는 시녀장님께서 다음 달 저택에서 쓸 예산을 보여 드렸는데, 거기서 잘못된 걸 찾아내셨어요!”

“시녀장님께 저희 잠자는 숙소를 좀 더 신경 써 달라고, 이번 겨울 진짜 추울 거니까 벽도 두껍게 고쳐 주고, 그러라고 하셨어요.”

하녀들이 말한 대로라면, 시녀장이 루이먼드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는 수준이었다.

“오늘 입으신 그 셔, 셔츠도 루이먼드 님께서 어제 골라 놓으신 거예요!”

“이걸?”

“네, 네네! 직접 다리기까지 하셨어요!”

“직접, 다려?”

루비아나는 제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듣고 보니 확실히 이전과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좀 더 부드럽고 주름이 덜 지는 것 같기도 하고, 편한 것 같기도 하고.

“…….”

정말 기분이 묘했다.

아쉴레앙 공작가엔 안주인이 없다. 그런데 저택은 크고 관리해야 할 사람은 많다. 주인은 저택을 관리하고 집안 대소사를 돌보는 데 전혀 관심이 없다.

그나마 시녀장이 애쓰고 있어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을 뿐.

시녀장의 공을 모르지 않기에, 루비아나는 더더욱 저택 관리를 시녀장에게 떠넘겼다.

“내가 리먼스 부인을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다는 의미지.”

“제발 절 의심해 주세요, 공작님.”

“그건 배신이지. 난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리먼스 부인을 믿고, 저택 일을 다 맡길 거야. 하하하.”

“……폐하, 어째서 절 여기로 보내셨나요?”

“어째서긴, 나 굶어 죽지 말라고 보냈지. 내가 예전에 수도원에 몇 년 살았던 적 있다고 말했나? 그때도 나 식사 챙겨 주는 당번이 따로 있었어. 거기 수도원의 규칙이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였는데 말이야.”

이런 훈훈한 대화도 오갔더랬다.

루이먼드를 저택으로 데리고 오고, 또 결혼하기로 했지만, 딱히 루이먼드에게 저택 안주인 자리를 맡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3년 기한의 계약 결혼이니까, 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부군에게 저택 관리와 집안일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냥 개인 예산이나 넉넉하게 잡아 주면 될 줄 알았지.

그런데 어느새 루이먼드는 시녀장을 제 편으로 삼는 것도 모자라, 저택의 안주인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안주인이 없어 허술했던 저택 관리를 도맡아 하며, 그 짧은 기간에 벌써 이렇게 어린 하녀들에게까지 인망을 쌓았단다.

아침 식사 메뉴를 살피고, 오늘 입을 셔츠까지 준비해 주었고.

루비아나도 모르는 사이, 당연한 일상에 루이먼드의 손길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루이가 저택에 온 뒤로 음식이 더 맛있어진 것 같았던 게, 그냥 기분 탓은 아니었군.’

루이먼드가 꼼꼼하게 식자재를 검수하고, 최고의 재료를 적당한 가격으로 들여와 준 덕분이었다.

저택의 분위기도 분명 달라졌다.

예전에 언제고, 하녀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건 적이 있었던가? 하인, 하녀들이 대놓고 수군거렸던 적이 있었던가?

답은 아니오.

저택엔 늘 루비아나와 시녀장, 두 사람의 목소리만 들렸다.

고용인들은 그저 루비아나를 두려워했고, 엄한 시녀장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따르기만 했다. 그들은 늘 기죽어 있었고 조용했다.

재료상이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가격을 장난쳐도, 혹시나 이걸 시녀장이 알면 혼날까 두려워하며 쉬쉬할 정도로.

루이먼드가 그런 곳을, 사람 사는 곳답게 만들고 있었다.

‘정말 결혼하는 것 같네. 아니, 정말 결혼하는 거긴 한데.’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 그런 루이먼드 님을 구박하시면 안 돼욧!”

“맞아요, 루이먼드 님 박대하지 마세욧! 그, 그러다 어디 딴 데 도망가시면 어떡해요!”

하녀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루비아나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하녀들을 가볍게 피해 중앙 계단으로 올라갔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고, 공작님, 감사합니다!”

“루이먼드 님이 기뻐하실 거예요!”

등 뒤에서 하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루비아나는 등 뒤로 대충 손을 흔들어 주고는 루이먼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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