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31)

***

똑똑, 노크했으나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여기 있다고 했는데.’

살짝 불안해졌다. 안에 없으면 없는 대로, 안에 있는데도 대답을 안 하는 거면 또 그거대로 문제였으니까.

‘무슨 일이 있는 건지도 몰라. 그걸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

루비아나는 그렇게 변명하고는 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당연하게도 방 안에 루이먼드가 있었다.

“루……”

루비아나는 그가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걸 보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색색-.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자고 있었구나. 이래서 못 나온 거군.’

화나서 마중 나오지 않은 게 아니었다. 화나서 대답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안 자고 있었다면 분명히 마중 나왔으리라. 노크 소리를 듣고 들어오라고 대답해 줬겠지. 잘 다녀왔냐고 인사하며 웃어 줬겠지.

불안이 눈 녹듯 사라졌다.

루비아나는 발소리 나지 않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은빛 머리카락이 우수수 쏟아져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조심조심 머리카락을 넘기니, 비로소 잠든 얼굴이 보였다. 두 팔 아래 베고 있는 책의 표지도 보였다. 영애는 도망을 어쩌고저쩌고.

“이 책을 정말 좋아하나 보네.”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한번 읽어 볼까 싶었다. 저렇게 좋아해서 볼 때마다 들고 있는데, 무슨 내용일지 궁금해졌다.

“으음.”

루이먼드가 살짝 뒤척였다. 깰까 싶어 들여다봤지만 깨지 않았다. 꽤 깊게 잠든 듯했다.

“그렇게 온 저택을 다 살피고 다니고, 바쁘게 일하니까 피곤하지.”

마음은 그게 아닌데, 괜히 타박하는 말이 나왔다.

루비아나는 혹시 이 말을 루이먼드가 들었을까 싶어, 정말 잠들어 있는 건지 확인해 봤다. 다행히 루이먼드는 정말 잠들어 있었다.

잠든 척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

루비아나는 안심하며 턱을 괴고 잠든 루이먼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젯밤 루단테의 말도 생각나고, 조금 전 보고 온 피오니도 생각나고, 방금 감히 제게 훈계한 용기 있는 하녀들의 간증도 생각나고.

루이먼드의 청혼도 생각났다.

“절대, 절대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사랑을 원하지 않으시잖아요. 그저 완벽한, 완벽한 남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딴 말로 청혼한 주제에, 자꾸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이 요망한 사내를 어쩌면 좋을까?

루비아나만 흔드는 것만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까지 죄다 홀려 놓고 있지 않은가?

“자꾸 이러면 곤란하지요. 놔주기 싫어지잖습니까, 응?”

하필이면 피오니 로렌을 만나고 온 날 이런 걸 알게 하는 건 반칙이지 않은가?

루비아나는 그의 붉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하아.

루이먼드가 더운 숨을 내쉬었다. 그 숨이 루비아나의 손가락을 덮었다. 손끝이 짜릿하게 저렸다. 루비아나는 그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꽉 주먹 쥐었다.

***

3주는 방금 지나갔다.

막판에 가서는 루비아나 역시 결혼식 준비로 꽤 바빠졌다.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태클이 들어와서였다.

교회. 정확히는 루텔 수도원에서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다.

루비아나는 아직 수도원의 장부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신명 크리스틸.

신의 사도가 사생아와 결혼한다니. 그것도 옛 아덴 왕국의 멸망 원인 그 자체였던 폐왕의 사생아와.

뒤늦게 결혼 소식을 들은 루텔 수도원이 강력히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보낸 것이었다.

루비아나가 여러 수도원 중 루텔 수도원에 들어간 건, 루텔 수도원이 적당히 세속적인 곳이어서였다. 루비아나는 마차 두 대에 금화를 가득 실어 루텔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러자 루텔 수도원은 강력히 반대한다는 의견 자체는 철회했다. 그래도 결혼식에 사제를 보내 줄 순 없다고 고집부렸다.

마차가 몇 대 더 왔다 갔다 해야 했다. 루비아나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편지도 여러 통 썼다.

결혼식 사흘 전, 루텔 수도회가 겨우 마음을 돌렸다. 고맙게도 루이먼드가 사생아가 아닐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성명도 발표해 줬다. 덕분에 루이먼드는 이제 예배당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루텔 수도원에서 보낸 결혼식 축하 서한이 결혼식 전날에 딱 도착했다. 그 서한을 들고 온 사제가 결혼식을 주관할 사제였다.

“크리스틸 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제는 루비아나에게 더없이 정중했다. 마치 교황이나 받을 법한 존경을 표했건만 정작 루비아나는 심드렁했다.

루이먼드는 그 모습이 신기했으나 오래 기억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

결혼식 날, 이른 아침부터 아쉴레앙 공작저의 문이 활짝 열렸다.

수도의 내로라하는 귀족들과 동, 서, 남부에서 죽자 사자 달려온 귀족들이 공작새처럼 치장을 뽐내며 이른 아침부터 공작저로 찾아들었다.

수도의 백성 역시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비록 공작저의 담벼락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그 주변에서 자신들끼리 알아서 축제를 열었다. 돌을 쌓아 탑을 만들고,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한몫 단단히 잡으러 온 곡예사와 소매치기들이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거리에 주욱 늘어선 천막마다 술과 고기를 공짜로 뿌렸다. 모두 아쉴레앙 공작가에서 이미 값을 치른 것들이었다.

아쉴레앙 공작의 결혼은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축제나 다름없었다. 루비아나가 아무리 “조촐하게!”를 외쳐도, 절대 조촐해선 안 되는 이유였다.

이 떠들썩한 결혼식의 주인공인 루비아나는 시녀장의 성화에 동이 트지 않은 새벽부터 침대와 헤어져야 했다.

눈을 뜨지도 못했는데 욕조에 풍덩 빠졌고, 온몸을 박박 밀었다.

“내 몸에 있는 상처는 다 진짜야. 그런다고 안 지워지니까 포기해.”

루비아나는 꾸벅꾸벅 졸면서 중얼거리는 내용으로 시녀장의 속을 긁었다.

이후 루비아나는 투알레트 룸에 갇혀, 수십 명의 하녀와 마담 루르의 직인들에게 둘러싸였다.

공작저의 투알레트 룸이 처음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시녀장은 화장대에 앉아 화장 당하는 루비아나를 보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마담 루르가 웨딩드레스를 꺼내 펼쳐 들자 시녀장의 감동은 절정에 치달았다.

“제대로 된 드레스였어……!”

그간 시녀장이 아무리 캐물어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마담 루르가 다가와 시녀장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루비아나는 마담 루르와 직인들의 도움을 받아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그 모습을 본 시녀장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공작님? 이건……”

“쉿!”

루비아나가 씩 웃으며 시녀장의 입을 막았다. 시녀장은 조금 전, 감동했던 걸 후회했다.

치장이 모두 끝난 뒤, 루비아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길지 않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진주로 장식하고, 목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드레스로 덮은 여자가 거기 서 있었다.

꽃봉오리처럼 부풀린 치맛자락 끝에는 새끼손톱만 한 다이아몬드가 빼곡히 박혀 달랑달랑 흔들렸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고, 예뻤다. 그리고 역시나 낯설었다.

‘얼마 만에 입어 보는 치마지?’

수도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입지 않았으니,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름다우세요!”

“와아, 너무 아름다우세요.”

“어쩜 이렇게 아름다우시죠?”

“정말 아름다우세요.”

하녀들과 직인들이 돌아가며 칭찬해 주니 어깨가 으쓱했다. 아니, 으쓱할 뻔했다.

루비아나는 자만하지 않고 남편 될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면 마음이 단번에 차분해졌다.

치장이 다 끝나고도 루비아나는 계속 투알레트 룸에 갇혀 있어야 했다. 결혼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서류나 보게 가져다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렇다고 누워 잘 수도 없었고 멍하니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누우면 머리가 망가지고, 앉으면 드레스가 구겨진다는 이유였다.

루비아나는 투알레트 룸 한가운데에 멀뚱히 서서 시녀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루이도 나처럼 고문당하고 있는 거겠지?”

“부군 되시는 분께서라도 편안히 계시길 바라진 않으십니까?”

“왜? 부부는 한 몸이라며? 그럼 같이 고통스러워야지.”

“…….”

시녀장은 못 들은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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