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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저의 높다란 담벽을 사이에 두고 밖은 왁자지껄한 축제, 안은 엄숙한 예식이 이어졌다.
사제는 자기 몸통만 한 커다란 성서를 펼치고, 신께서 땅 위의 인간들을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라 칭하며 축복해 주셨던 내용을 기록한 부분, 특히나 부부의 애정을 당부하셨던 부분에 두 사람의 손을 겹쳐 올리게 했다.
루비아나가 먼저 손을 올리니 루이먼드가 그녀의 손을 덮듯 꼭 잡았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손이 크고 부드럽고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루이먼드는 그녀의 손에 가득한 상처와 굳은살의 감촉을 느끼며,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그럴 능력은 없지만, 이 손에 더는 상처가 늘지 않도록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부드럽고 상처 없는 자신의 손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제는 두 사람의 손을 신의 피 흘림을 상징하는 붉은 천으로 동여매고, 하늘에 계신 신께 기도드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싱싱한 백합 향 속에서, 루비아나와 루이먼드가 서로를 바라보며 살풋 웃었다.
두 사람은 사제의 진지한 기도엔 관심 없어 보였다. 오직 서로에게만 집중할 뿐이었다.
하객들도 이때만큼은 예식의 신성함에 취해, 또 서로만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단란한 모습에 취해, 두 사람이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몸이 편찮으신 아버지를 대신해 참석한 오딜 후작가 영애, 리사나.
그녀는 그 둘을, 정확하게는 루비아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기다리듯 담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렇게 성스럽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장면이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신이시여, 이 아름다운 남녀가 신의 이름 아래 하나 되어 부부의 연을 맺고자 하오니…….”
사제가 자신의 기도에 취해 마냥 기도를 이어 나갔다. 흔한 일은 아니나 희귀한 일도 아니었기에, 하객들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좀이 쑤시는 것까진 참지 못했다. 이해하는 것과 집중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니까.
마침 담벽 너머에서 계속 흥겨운 함성과 비명, 노랫가락이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아무리 격식 차리고 예의 좋아하는 귀족들이라지만, 자꾸 담벽 쪽으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밖에 뭐가 있기에 저렇게들 좋아하는 거지?’
‘이번에 작정하고 곡예단들이 잔뜩 몰려왔나 보군.’
‘아우, 체면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 순 없고. 누가 먼저 좀 일어나줬으면 좋겠는데.’
하객들의 엉덩이가 들썩일 즈음, 드디어 사제의 기도가 끝났다.
“이 신성한 결혼식의 당사자인 두 사람은, 오직 서로에게만 속하며 충실할 것을 맹세하십시오.”
사제가 두 손을 루비아나와 루이먼드의 머리에 얹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자매님, 말씀하십시오.”
“저는 신의 뜻을 좇아……”
루비아나가 먼저 신성한 부부의 맹세를 읊으려 할 때였다.
“우리의 왕을 구해라!”
“괴물 공작에게서 루이먼드 님을 구해라!”
“일어나라, 동지들이여!”
빽빽한 하객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자들이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초대받은 누군가로 위장했던 가발과 옷을 벗어 던지고, 숨겨 두었던 검을 빼 들었다.
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을 시작으로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혼식에 초대받지 않고 온 손님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유독 오늘 많이 몰려들었던 곡예사들. 담벽 근처만 맴돌며 곡예를 선보여 사람들을 웃게 만들던 광대들.
그들이 담벽 안의 외침을 듣고는 기다렸다는 듯 펄쩍 뛰어 담벽을 기어올랐다.
“어어?”
“와아아!”
백성은 그것마저 곡예의 일부라 생각하고 박수 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단번에 비명으로 바뀐 건, 담벽에 올라선 광대들의 외침 때문이었다.
“아덴의 이름으로!”
“대 아덴 왕국 만세!”
이 나라에서, 아덴이란 이름은 금기였다.
아직 새벽 전투와 칼레나의 분노를 기억하고 있는 백성은 기겁하며 달아났다. 그 속에서 거꾸로 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대들이 손에 들고 있던 곡예 기구들을 몇 번 얽자, 그것들은 훌륭한 간이 사다리가 되었다. 곤봉을 이어 붙인 장대. 쇠고랑을 이어 만든 사다리. 요요를 엮어 길게 늘어뜨린 줄.
도망치는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온 이들이 그것들을 붙잡고 담벽을 올랐다.
“루이먼드 왕자님을 구해라!”
“아쉴레앙 공작의 마수로부터 루이먼드 님을!”
그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귀족들은 달아나기 바빴다. 물론 모두가 두려워하며 도망갈 생각만 하진 않았다.
맞서 싸우고자 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예복을 차려입고 오다 보니 무기를 가져오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도망가는 분위기에 휩쓸려 사기를 잃는 바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 거지?’
발바닥에 땀나도록 달리던 귀족들은 이내 큰 문제에 봉착했다.
그건 바로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담벽 밖의 백성과 달리, 담벽 안의 귀족들은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활짝 열려 있던 공작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저택을 빙 두른 담벽은 높을뿐더러, 괴한들이 올라서 있어 감히 접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일제히 화살을 쏜다면, 대부분 죽게 될 터. 그걸 깨달은 귀족들은 이성을 잃었다.
“으아아악!”
“난 아냐, 뭔지 모르겠지만 뭐든 아니라고!”
“사, 사람 살려. 반란, 반란이다! 반란이야!”
귀족들은 그 중요한 예의와 위엄 따윈 다 집어던지고, 숨을 구멍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누군가 하인들을 밀쳐 내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다들 그를 쫓아 우르르 저택으로 몰려갔다. 괴한들이 저택에 불을 지르면, 꼼짝없이 불타 죽게 될 거란 생각까진 못 하는 듯했다.
그들에게 다행스럽게도, 괴한들은 귀족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노리는 건 오직, 루비아나와 루이먼드, 정확하게는 루이먼드였다.
예식장엔 아직 도망가지 못한 귀족들도 제법 있었다. 의자 아래 고개를 처박고는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그중에는 위풍당당하게 결혼식에 참석하러 온 그레이움 백작가 사람들도 있었다.
“아, 아니, 뭐지 저것들은?”
그레이움 백작은 감히 아덴 왕국을 운운하는 괴한들을 보며 심히 당황했다. 옆에 함께 엎드려 있던 첫째 아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님, 혹시 저희 쪽……”
“입 닥치거라!”
그레이움 백작은 손으로 아들의 입을 막으며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여나 누가 들었을까 염려한 것이었다.
그는 혹여나 제가 아는 얼굴이 있을까 유심히 살피다가도, 그들과 눈이 마주칠까 싶으면 거북이가 등껍질에 숨듯 목을 움츠리고는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혹시 절 알아보고 아는 척할까 봐 그런 것이었다.
“아니야. 우리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가, 감히 내 명령 없이, 누가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이냐? 내가, 엄연히 새 왕의 할아비이거늘. 그러니 절대 우리 쪽 일이 아니야. 아닐 거야.”
그레이움 백작은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어서 이 갑작스러운 소동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바랐다. 여기서 ‘무사히’는 아무튼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만 무사하면 된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소중하고 귀중하다는 손자에 대한 걱정은 모래알만큼도 하지 않았다.
저택 안으로 숨어들지 않은 사람 중에는 오딜 후작 영애, 리사나도 있었다.
그녀는 괴한들이 등장하기 전, 일찌감치 근처의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제발, 제발 성공해라. 성공해야 해.’
그녀는 두 손을 꼭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두려워한다기보다는, 뭔가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결혼식의 주인공이자 괴한들에게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고 당황하고 있어야 하는 대표적인 인물, 아쉴레앙 공작 루비아나는 오히려 눈을 빛내며 돌아섰다.
“이제야!”
목소리는 아주 밝고 맑고 상쾌했다.
‘이제야?’
루이먼드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당황한 와중에도 용케 루비아나의 혼잣말을 알아듣고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이 소란을 기다리고 바랐던 것 같은 말 아닌가?
“비아……”
이게 무슨 일이냐고, 방금 그 말이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루비아나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돌려세워 어떤 눈빛,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위험합니다. 내 뒤만 있어요. 절대, 나한테서 멀어지면 안 됩니다.”
루비아나는 가장 먼저 루이먼드부터 챙겼다.
그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고, 계속 주변을 살피며 괴한들과의 거리를 확인하고는 치마를 치켜들었다.
“비, 비아!”
루이먼드는 이 다급한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괴한들보다 당장 루비아나의 치맛자락이 들리는 데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루비아나는 앞으로 나서려는 루이먼드의 가슴을 꾹 눌러 다시 제 뒤로 숨기고, 발로 힘껏 제단을 깠다.
“형제님, 엎드리십시오.”
사제에게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 예예? 이게 무슨 일…… 으아아악!”
돌을 쌓아 만든 제단이 기우뚱 사제 쪽으로 기울었다.
“크리스틸 니이이임!”
사제가 그 자리에 엎드려 몸을 웅크렸다. 그 위로 제단이 엎어졌다. 와르르 무너진 게 아니라 탁자처럼 엎어진 것이다. 사제는 제단 속에 갇혔다.
쿠웅. 땅이 울렸다. 루이먼드의 마음도 덩달아 흔들렸다.
“됐어.”
루비아나는 탁탁, 손을 털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루이먼드는 멍하니 루비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
결혼식장에 놓는 제단은, 오색 돌로 차곡차곡 쌓아 만든다.
예식이 끝나면 참석한 하객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데, 그 돌은 결혼식을 올린 가문과 하객으로 왔던 가문이 돈독한 사이임을 증명하는 징표가 된다.
훗날 하객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 오색 돌을 상자에 넣어 보내면, 오색 돌을 주었던 가문에서는 반드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옛 아덴 왕국 시절부터의 오랜 풍습이었다.
때문에 돈 좀 있다 거들먹거리는 가문에선 그냥 돌이 아니라 보석 원석으로 제단을 쌓기도 한다. 하객들을 잔뜩 초대해, 그 정도는 얼마든 도와줄 수 있다고 가문의 힘을 에둘러 자랑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루이먼드 역시 그 짧은 기간 동안 급히 보석 원석들을 구해 제단을 쌓았건만. 지금 루이먼드 앞에 있는 제단은 그 제단이 아니었다.
‘어제 저녁에 리먼스 부인과 최종 확인을 할 때만 해도 분명, 그대로였는데……. 설마. 비아가 따로 준비해서 바꿔치기한 건가?’
검은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언제? 왜 나한테 말해 주지 않은 거지?’
물론 그 고민을 오래 할 순 없었다.
“루이먼드 왕자님!”
“아덴 왕국에 영광을!”
“저희에게 오십시오. 저희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괴한들이 루이먼드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루이먼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목을 뎅겅 잘린 것처럼, 목 아래가 서늘해졌다.
이들이 누군지, 혹시 그레이움 백작과 관련이 있는 건지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냐, 나 안 가. 나한테 왜 이래!’
루이먼드는 그저 루비아나의 등에 바짝 매달렸다. 혹여나 루비아나가 자신을 의심할까 봐 무서웠다. 오직 그것만이 무서웠다.
“비아, 나, 난 아무것도 몰라요. 정말입니다. 전, 저는……”
“진정해요, 루이. 당신하고 상관없는 거 알아요.”
늘 그렇듯,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 줬다.
“하아, 다행, 다행…….”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루비아나에게 기대 축 늘어졌다. 하지만 곧 자신의 그런 행동이 민폐라는 걸 깨닫고 얼른 뒤로 물러섰다.
“내게 기대도 좋아요. 멀어지지만 말아요.”
루비아나는 이렇게 당부하고는, 괴한들에게 소리쳤다.
“정체를 밝혀라. 너희는 누구냐?”
‘수는 대략 서른. 저 위에 쉰.’
눈동자만 굴려 괴한들의 수를 확인했다.
하객으로 위장해 들어온 괴한들은 루비아나와 루이먼드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담벽 위에 올라가 있는 괴한들은 활이나 단검을 들고 이쪽을 노리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담벽 위 괴한들이 루이먼드가 다칠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활을 쏠까 가늠해 보았다. 그러기 힘들 것 같았다.
“반역자에게 알려 줄 이름 같은 건 없다!”
“반역자? 내가?”
루비아나가 부케를 든 채 어깨를 으쓱였다.
“어이없군. 반역자는 너희일 텐데.”
“감히 신하 주제에 왕을 죽이고 왕국을 무너뜨리고선, 스스로 황제며 공작을 칭하면, 세상이 알아줄 줄 아느냐!”
괴한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버럭, 소리쳤다. 그는 우스꽝스러운 분장 속에 숨기고 있던 날 선 살기를 드러내고 루비아나를 노려보았다.
문득, 이 상황과 아무 상관없는 피오니가 생각났다. 뛰어난 역사학자인 그녀는 시대에 뒤떨어진 저 말을 듣고 뭐라고 할까 궁금해졌다.
이딴 생각을 할 만큼, 괴한과의 대화는 많이 따분했다.
“에잇! 더는 반역자 계집과 할 말이 없다. 당장 왕자님을 풀어 줘라.”
“반역자, 계집이라.”
루비아나가 픽, 웃었다. 드디어 덜 따분한 말을 하는구나 싶었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소린데.”
“흥, 그럼 반역자 계집을 반역자 계집이라고 하지, 다르게 불러 줘야 하나?”
“글쎄. 어떻게 부르든 그건 그 쪽 사정이고. 내 사정은 이래.”
휘익-.
루비아나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괴한들은 잔뜩 긴장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루비아나의 부하들이 몰려오기라도 할까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 틈에 루비아나는 부케에 손을 집어넣었다. 탐스러운 꽃송이들을 잔인하게 헤집고, 그 속에 숨겨 놓았던 걸 꺼내 들었다. 한 뼘 남짓한 단검이었다.
“난 말이야, 내 앞에서 날 그렇게 불렀던 놈을 단 한 번도 살려서 돌려보낸 적이 없어.”
루비아나는 부케를 미련 없이 던져 버리고, 단검으로 치맛단을 그었다. 부욱- 소리가 나며 드레스 자락이 단번에 찢어졌다.
튤립 꽃송이를 연상할 만큼 봉긋했던 치맛자락 안에는 고래 뼈로 만든 크리놀린도, 잔뜩 부풀린 여러 겹의 속치마도 없었다.
두 겹의 얇은 치맛자락에 붙어 있던 건 두껍고 거친 종이, 그리고 바지를 입은 두 다리였다.
허벅지에 가죽끈이 여러 겹 달려 있었는데, 그 가죽끈에 장검과 단검 몇 자루가 매여 있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건 오랜만이라, 힘 조절이 될지 모르겠군.”
루비아나는 들고 있던 단검을 입에 물고, 치마 속에 숨겨 두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게 30 대 1. 아니, 80 대 1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루비아나는 일단 왼손으로 루이먼드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달렸다.
“으어어어어어-.”
루이먼드가 덜그럭덜그럭 끌려갔다.
“와, 왕자님을 지켜라! 어서!”
당연히 루비아나가 자신에게 달려들리라 생각하고 긴장하고 있던 우두머리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루비아나를 뒤쫓았다.
루비아나는 앞을 막아서는 괴한 둘을 한칼에 벴다. 윽. 끅. 별볼일 없는 비명이 들렸다. 흰 드레스 위로 피가 튀었다.
루비아나는 나무를 등지고 섰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와 나무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야, 루비아나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칼을 물고 웃는 모습은 적을 소름 돋게 만들기 충분했다.
“여, 역시…….”
“괴, 괴물 공작!”
괴한 중 몇몇이 겁을 먹고 움찔거렸다.
“정신 차려!”
우두머리가 일갈하여 그들을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나무를 등지고 선 루비아나는 여유롭게 적들을 상대했다. 루비아나의 예상대로, 담벽 위의 괴한들은 섣불리 활을 쏘지 못했다.
루비아나는 제게 달려드는 괴한들을 하나하나 여유롭게 처리했다.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는 치맛단이 다 뜯기고 찢기다 못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에 비해 루이먼드의 턱시도는 피 몇 방울 튄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새하얬다.
괴한 셋이 뒤로 다가와 루이먼드를 빼 가려 했다.
루비아나는 기척을 느끼자마자 돌아서, 입에 물고 있던 단검을 왼손으로 잡고 던졌다.
휙!
단검이 루이먼드의 뺨을 스치고 날아가 누군가의 몸에 박혔다.
루이먼드는 손을 더듬더듬, 뺨을 만져 보았다. 뺨엔 실오라기만한 생채기도,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루이, 눈 감아요.”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얼굴을 품에 안고 검을 휘둘렀다.
“……!”
루이먼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등 뒤에서 끔찍한 비명이 삼중주로 들렸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안은 채 팔을 뒤로 돌려, 등을 노리고 뛰어오는 괴한을 죽였다.
끄억. 등 뒤의 비명보다, 품에 갇힌 떨림이 더 신경 쓰였다.
루이먼드의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루비아나는 그런 루이먼드가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학자의 집에서 공부나 하던 사람이 아닌가? 이런 일은 처음 겪었을 텐데, 비명을 지르거나 패닉에 빠져 무턱대고 달아나려 하지 않는 것만도 대단한 것이었다.
다 지난 일곱 번의 삶에서 우러난 경험 덕분이지만 그걸 알 리 없는 루비아나는 자기 식대로 해석했다.
‘학자의 집에선 담력 훈련도 하나 보지?’
챙, 날아오는 적의 검을 막고 손목을 비틀어 상대방의 중심을 흔들었다.
어어, 하면서 비틀거리는 적의 발목을 차서 넘어뜨리고 칼을 박아 넣었다. 푹. 으악.
루이먼드가 움찔, 떠는 게 느껴졌다.
“괜…….”
괜찮으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괜찮을 리가 없지 않은가?
대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적들을 해치우고자 노력했다.
오래지 않아 삼십여 명 중 대부분이 죽었다. 누구도 루비아나의 머리카락 한 올 상하게 하지 못하고 그녀의 칼질에 쓰러졌다.
머릿수만 믿고 의기양양하던 괴한들의 우두머리는 얼굴이 새하얘졌다.
루비아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보란 듯이 괴한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푸헉!”
괴한이 토한 피가 우두머리에게 쏟아졌다.
“으악.”
그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비볐다. 그때 그를 죽일 수 있었다. 역시나 칼질 한 번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루비아나는 그를 놔두고, 옆에 서 있는 다른 사내를 찔렀다.
“컥! 대, 대자, 니…….”
그가 쓰러지며 우두머리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우두머리는 그를 발로 차며 뒤로 물러섰다.
“너무 냉정하네. 부하 아냐?”
루비아나가 검을 허공에 돌리며 물었다. 후드득, 검에 묻어 있던 핏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 닥쳐라, 반역자 계집!”
혼자 남은 우두머리는 정말 자기 혼자만 남았는지 확인하고는 담벽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쏴, 쏴라! 쏴 버려!”
“뭐? 그랬다간 네 소중한 왕자님이 다칠지도 모르는데?”
루비아나가 깜짝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다, 닥쳐라! 네년을 살려 두는 게 왕국에 더 큰 죄다! 저, 전하의 사생아 따위는 얼마든지 또 찾을 수 있을 거야!”
우두머리가 비로소 본색을 드러냈다.
“어서 쏴!”
그가 재차 외치자, 장벽 위 괴한들이 활시위를 최대한으로 당겼다.
휘이익!
루비아나가 휘파람을 불었다.
우두머리는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내가 또 속을 줄 알…… 컥!”
화살 한 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와 그의 어깨에 박혔다.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다 무릎을 꿇었다.
그의 머리 위로 화살 비가 내렸다. 저택의 지붕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비아나의 부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긴 것이었다.
담벽 위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곡예사들과 광대들은 우수수 떨어졌다. 그들은 죽기 직전까지 활시위를 잡고 있다 놓쳤다,
힘없이 비실비실 날아간 화살들은 루비아나의 발치에조차 닿지 못하고 널브러졌다.
루비아나는 우두머리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건 아마도 부하들이 루비아나의 몫으로 남겨 준 것일 터였다.
“내가 누구라고?”
루비아나가 검을 높게 들며 물었다.
“사, 살려…… 살, 살, 사…….”
괴한의 우두머리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는, 반역자 계집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화살 맞은 어깨를 움켜쥐고는 무릎을 꿇은 채로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모르겠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반역자에게 알려 줄 이름 따윈 없어서 말이야.”
루비아나는 그의 앞에 멈춰 서서 검을 휘둘렀다.
돌아서자 건장한 몸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털썩.
“흡!”
내내 나무 뒤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리사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돌아서서 몸을 웅크렸다.
핏기 가신 하얀 얼굴에서 주르륵,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괴, 괴, 괴물…… 괴물, 공작……!’
두 눈에서 미지근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리사나는 자신이 우는 줄도 몰랐다.
루비아나는 돌아서려다 말고 멈춰서 힐끔, 그쪽을 바라보았다.
“…….”
녹색 눈이 번뜩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루비아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보다는 일곱 발자국 앞에 서 있는 루이먼드를 보는 게 더 중요했다.
루이먼드는 나무에 기대서 있었다. 눈은 질끈 감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계속 눈을 감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여전히 눈처럼 새하얬다.
루비아나는 그에게 걸어가려다 멈칫했다. 뚝. 뚝. 온몸에서 핏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다가가도 될까 싶었다. 혹여나 루이먼드가 제 모습을 보고 기겁하거나 기절하거나 두려워하는 눈빛을 보인다면, 아주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았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피에 젖어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루이먼드의 머리 위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쑥 내려왔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손에 날카로운 단검을 든 사람.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눈으로 보고 있어서 안 것이지 만약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면, 루비아나 역시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을 터였다.
번뜩이는 단검이 루이먼드의 목을 노렸다.
루이먼드는 제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지 못했다.
“……!”
루비아나는 돌아서 우두머리의 어깨에 박혀 있던 화살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집어 던졌다.
쐐액!
화살이 그림자의 목에 막혔다.
그림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쥐고 있던 단검도 함께 바닥을 굴렀다. 털썩. 데구르르.
“어?”
그제야 루이먼드가 뭔가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채고 눈을 떴다. 눈을 떠서는 제 주변부터 돌아보는 게 아니라, 루비아나가 어디 있는지부터 찾았다.
그걸 기특하다고 여길 틈이 없었다. 루비아나는 잠깐 머뭇거렸던 걸 후회하며 달렸다.
“루이, 숙여요!”
“네? 비아, 뭐라고……”
루이먼드는 엎드리는 대신 루비아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쐐액,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이 그에게 닿기 직전, 루비아나가 그에게 닿았다.
“젠장!”
루비아나는 한 손으로 루이먼드의 멱살을 잡아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구르는 도중, 바닥에 있는 활과 화살을 주웠다.
방금 루이먼드가 서 있던 자리에 화살이 박혔다. 퍽, 소리가 나며 화살 절반이 땅에 박혔다.
바람 가르는 소리를 듣고도 짐작했으나 강궁에 철화살이었다. 반드시 목표물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집착이 느껴졌다.
루비아나는 발딱 일어나 루이먼드를 제 등 뒤로 숨기고, 바로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날아들었던 방향을 바라보고 숨을 멈췄다. 등 뒤에 있는 루이먼드를 잠깐 잊을 정도로 집중했다.
반짝.
담벽 앞에 있는 떡갈나무 위에서 뭔가 빛났다. 루비아나는 바로 화살을 날렸다.
한 무리의 화살이 루비아나의 화살을 뒤쫓았다. 저택 옥상에 있는 부하들 역시 그 빛을 본 듯했다.
루비아나의 화살이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들어갔다. 퍽, 소리가 났다.
이어 뒤따르는 화살 무리가 쏟아졌다. 후두둑. 화살 세례를 받은 나무가 흔들렸다.
무언가 툭 떨어졌다. 활을 든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도, 루비아나는 활을 내려놓지 않았다. 다시 활에 화살을 메겨 활시위를 끝까지 당기고는, 조용히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다른 공격은 날아오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힐끔 저택을 바라보았다. 숨어 있던 부하가 나와 손을 흔들었다.
후우. 루비아나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쉬며 활을 내려놓았다.
돌아보니 루이먼드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절 올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바닥을 뒹굴어 하얀 턱시도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에도, 뺨에도 흙먼지와 풀잎이 묻어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콕콕 박혀 있는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많이 무서워하려나?’
루비아나는 끓어오르는 한숨을 애써 삼키며 숨을 골랐다. 닿는 것도 질색하며 쳐 내거나 물러서면 어떻게 해야 하려나?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괜찮……”
“다친 겁니까? 어, 얼마나, 어디를 다친…… 이 피는 대체!”
일단 다친 곳은 없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채 말을 하기도 전에 루이먼드의 버럭 소리치는 기세에 눌려 버렸다.
‘윽.’
루비아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눈앞으로 화살이 날아와도 눈을 감지 않고 바라볼 자신이 있건만, 루이먼드의 고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나 지금 뭐 하고 있지?’
눈을 감고 나서야 이게 뭔가 싶었다.
다시 눈을 뜨니, 이번엔 눈 감기 전과는 전혀 다른 루이먼드가 보였다.
“아니, 나는, 화내는 게 아니라…… 걱정해서, 걱정해서 그러는 겁니다. 비아, 많이 아픕니까? 어디, 어딜 얼마나 다친 거예요?”
루이먼드는 제가 소리를 질러 루비아나가 겁먹었다고 생각하는지, 안절부절못하며 루비아나를 달래려고 했다.
“…….”
루비아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눈만 껌뻑였다.
그때 이마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눈가를 적시고, 뺨을 타고 내려갔다.
닦으려고 손을 들어 올리려는데, 루이먼드에게 막혔다.
“만지지, 함부로 만지지 마십시오. 의사, 어서 의사를. 의사한테 가야 해!”
루이먼드가 벌떡 일어서더니 자신의 뺨을 자기 손으로 짝짝 내리쳤다.
“정신,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비아, 비아를 치료해야 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다시 루비아나 앞에 주저앉았다. 등을 보인 채로.
“……?”
“업히세요, 얼른!”
“……예?”
“업히란 말입니다. 당장 의사한테 가 봐야……”
“아.”
뭐 하는 짓인가 싶었더니, 자신을 업으려는 짓이었다.
“아는 무슨. 얼른, 얼른요.”
루이먼드가 루비아나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루비아나는 그런 루이먼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군가 날 이렇게 걱정해 준 게, 얼마 만이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려니 너무 아득했다. 그래서 그걸 핑계 삼아 무릎을 접고 앉았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에게 업히는 대신, 그가 내민 등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닿은 곳이 따뜻했다. 살아 있는 루이먼드의 온기였다. 그 온기가 이마에서 온몸으로 퍼졌다. 덩달아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났다.
하아.
루비아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새삼, 피곤했다. 고작 이 정도에 피곤할 리 없는데.
“다친 곳, 하나도 없습니다.”
“네? 하, 하지만……”
“내 피 아닙니다. 다른 사람 피예요.”
“아…….”
이번엔 루이먼드가 멍하게 입을 벌렸다.
루비아나는 ‘아는 무슨.’ 하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대신, 얼굴을 마주 보고는 못 할 말을 꺼냈다.
“날…… 음…….”
말하는 데 살짝, 용기가 필요했다.
“……무서워하지 않아 줘서, 고맙습니다.”
“…….”
“고마워요, 진심으로.”
“비아.”
루이먼드가 어깨에 얹었던 루비아나의 손을 잡았다.
내내 검을 잡고 휘둘렀던 손이었다. 사람을 죽인 손. 피범벅인 손. 묻은 거라고는 흙먼지밖에 없는 루이먼드의 손이 그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았다. 그냥 잡은 것도 아니고 깍지까지 꼈다.
“날 지켜 주려고 그런 거잖아요. 내가, 내가 고마워요, 비아.”
“…….”
“날 지켜 줘서, 또 다치지 않아 줘서.”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손을 잡아끌어, 그 피범벅인 손등에 입 맞췄다.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고,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쩌지? 큰일 났네.’
루비아나는 정말, 이 사람이 가지고 싶어졌다. 3년만 말고, 평생. 가능하면 죽어서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