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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진정된 것 같자, 저택으로 뛰어들어가 숨어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식장 여기저기에 숨어 있던 귀족들 역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괴한들이 루비아나와 루이먼드만을 노렸기에, 귀족들 중 괴한의 공격을 받아 죽은 사람은 없었다. 다친 사람들은 좀 있었지만, 도망치다 자기들끼리 밀치고 밟혀서 그런 것이었다.
루비아나는 그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이는 걸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일어나기 싫다.’
오랜만에 느낀 고단함에 젖어, 이대로 계속 루이먼드에게 기대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일어나야 했다.
“비아.”
루이먼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루비아나를 붙잡았다.
루비아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검을 어깨에 걸치고 뚜벅뚜벅 걸어, 그레이움 백작 앞에 섰다.
그는 여전히 의자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루비아나가 제 앞에 멈춰 서자, 피범벅이 된 부츠를 보고는 기겁하며 뒤로 넘어갔다.
“끄아아악- 억!”
의자에 머리를 박고, 바닥에 엉덩이를 찧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의 세 아들은 아비를 버리고 네발로 기어 저만치 도망가 있었다.
“고, 고고고, 고, 공자, 작, 님? 저, 저저저, 저한테 왜……?”
그레이움 백작이 부들부들 떨며 루비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매우 겁먹은 모습이었다.
루비아나는 피에 젖어 더 붉게 느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레이움 백작,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나쁜 사람이었군.”
“히이이이익! 제, 제가 뭐, 뭐뭐, 뭘?”
“아무리 이 결혼식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감히 나를 죽이려 들어?”
“예? ……예에에에에에?”
그레이움 백작이 그 자빠진 상태로 펄쩍 뛰었다.
“그, 그그, 그게 무, 무, 무슨, 무슨 말이신지……?”
“처음부터 내가 루이와 혼인하는 걸 싫어했지.”
“제, 제가, 어, 언제, 언제 그런 짓을……”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암살자들을 고용해서 내 결혼식을 망치고 날 죽이려 들어?”
“…….”
그레이움 백작이 입을 쩍 벌렸다.
슬금슬금 다가오던 귀족들은 황당해하며 루비아나를 바라봤다.
그들이 듣기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결혼식을 망친 괴한들은 옛 왕국을 지지하는 반란 세력이었다. 혹시나 헷갈리지 말라고, 옛 아덴 왕국의 이름을 소리쳐 외치지 않았던가?
‘그게 그레이움 백작과 무슨 관계라고?’
‘그레이움 백작은 황제 폐하께도 총애받는 사람 아닌가?’
‘아니, 옛날에 폭군에게도 충성하긴 했지만, 그래도 새벽 전투 전에 가장 먼저 투항했던 사람인데?’
하지만 누구도, 감히 루비아나에게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참신하게 하냐고 반박하지 못했다.
“여, 여, 여러분! 여러분도 듣지, 않으셨습니까? 나, 나랑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걸. 나는 그저 여기, 숨어, 숨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옛 아덴 왕국인지 뭔지, 전혀 모릅니다. 전혀 상관없단 말입니다.”
그레이움 백작은 루비아나가 말이 안 통한다 생각한 건지, 주변을 돌아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특히 근처에 같이 숨어 있던 귀족들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자신이 얼마나 두려워하며 추하게 엎드려 고개를 의자 밑에 처박고 있었는지 증언해 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루비아나의 따사로운 시선을 먼저 맛본 상태였다.
피 칠갑을 하고선 껄렁한 자세로 검을 어깨에 걸치고 무시무시하게 웃고 있는 괴물 공작.
그녀가 아무튼 그레이움 백작을 이 소동의 제물로 삼으려는 건 분명해 보였다.
‘누, 누굴 끌어들이려고!’
‘왜 이쪽을 쳐다보는 거야! 나, 난 아무것도 못 봤어.’
귀족들은 그레이움 백작을 외면했다.
퍽.
그레이움 백작의 가랑이 사이에 검이 박혔다.
목이 부서져라 주변을 돌아보며 도움을 구걸하던 그레이움 백작은 돌처럼 굳어 버렸다.
끼기긱, 그레이움 백작이 굳은 목을 억지로 움직여 루비아나를 바라봤다.
“날 앞에 두고 어딜 보는 거지?”
루비아나가 씩, 웃으며 물었다.
검에 묻어 있던 피가 뚝, 바닥에 떨어졌다.
“……!”
그레이움 백작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루비아는 허리를 숙여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나는 지금 내 결혼식을 방해받아 굉장히, 화가 나 있는 상태인데. 그걸 어떻게 보상받을지에 따라 이 분노가 여기에서 끝날지, 아니면 복수로 이어질지 결정 날 것 같은데.”
“…….”
“백작은 어떻게 생각하나? 역시 내가 꽤 자비로운 것 같지? 약간의 보상을 받고는 봐줄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
그레이움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비아나는 그를 돕기 위해, 손으로 그의 머리를 꾹 눌러 주었다. 끄덕. 그레이움 백작의 목이 타의에 의해 위아래로 흔들렸다.
“역시, 백작의 생각도 나와 같군.”
“억, 억…… 커헉…….”
“그럼 보상을 기대하고 있겠네, 백작.”
루비아나는 검을 뽑아 들고 돌아섰다. 그러다가 멈춰서 다시 그레이움 백작을 돌아보았다.
“되도록 겨울이 오기 전, 끝내 줬으면 좋겠군. 아니면 겨울에 나랑 같이 북부에 올라가 봐도 좋고.”
그레이움 백작의 바짓가랑이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루비아나는 그 지린내가 제게 닿기 전, 돌아섰다.
루이먼드에게 돌아가는 발걸음이 더없이 가벼웠다.
이번 소동에 그레이움 백작이 연관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럼에도 일부러 그레이움 백작을 찾아가 겁준 건, 주변의 생각대로 개소리가 맞았다.
굳이 말하자면, 화풀이? 복수?
루비아나는 이전에 결혼 협상 때, 루이먼드가 섭섭한 표정을 짓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소동 때에도 그는 제 세 아들들만 챙겼다. 루이먼드 가까이에 앉아 있었으면서도 루이먼드를 보호하긴커녕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걸 살짝, 아주 조금 갚아 준 것뿐이었다.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는군.’
자신들 좀 살려 달라고 루이먼드에게 매달려 싹싹 비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비아?”
루이먼드도 다른 사람들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비아나가 무턱대고 그레이움 백작에게 가 억지를 쓴 걸, 아리송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레이움 백작이 반란을 꾀하는 걸 알고 있긴 하니, 다른 하객들처럼 무턱대고 루비아나가 개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한데. 그렇다고 이번 일이 정말 그레이움 백작이 벌인 일일까 싶은 모양이었다.
설마 루비아나가 자신을 위해 쪼잔한 복수를 하고 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가 픽 웃고 말았다.
이렇게 열심히 루이먼드의 얼굴 표정을 살피고,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였다.
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의 표정이 어떤지, 딱히 신경 쓰며 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루이먼드를 만난 뒤로는 달라졌다.
루이먼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유심히 살피게 된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물론, 변한 건 딱 거기까지만이다.
지켜볼 뿐, 배려해 주지는 않는다. 그의 뜻대로 해 주려고 노력하진 않고, 제멋대로 한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루이, 계속 결혼식을 이어 가도 되겠습니까?”
말이 묻는 거지, 난 계속하고 싶은데 내 뜻을 따라 줬으면 좋겠다는 강요나 다름없었다.
“지금…… 이 상태로 말입니까?”
“네.”
루비아나는 문제 될 거 뭐 있냐는 태도로 대답했다.
제단이 무사하고, 그 안에 가둬 둔 사제도 무사하다. 신부와 신랑도, 비록 신부가 매우 피투성이긴 하지만 멀쩡하고.
하객들도 겁에 질려 있지만 죽은 사람은 없다. 식장은 뭐, 죽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지만 치우면 될 일.
“음, 제 생각에는 나중에, 다시 날을 잡아서……”
루이먼드가 떼쓰는 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지금, 하고 싶습니다.”
루비아나가 힘주어 말하자 루이먼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데굴데굴,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곤란해하고 있네.’
그걸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반드시 오늘, 결혼식을 끝내고 싶었다.
이대로 결혼식을 흐지부지 중단하면, 다시 황궁에 결혼식 날을 잡아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결혼식 준비도 또 해야겠지.
루이먼드가 결혼식 준비로 고생하는 게 마음 아픈 건 둘째 치고서라도, 그 새로운 결혼식 날이 언제일지 모른다는 게 제일 마음에 안 들었다.
이번처럼 짧게 잡아 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칼레나가 변덕을 부려 한참 뒤로 미뤄 버린다면 결혼식도 안 올린 상태로 지내야 하는데.
루비아나는 그게 싫었다.
‘3년뿐인데 왜 그 시간을 그런 식으로 낭비해야 하지?’
얼른 결혼식을 해치우고 루이먼드를 제 남편으로 땅땅, 확인받고 싶었다.
그리고 루이먼드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의 마음속엔 딴 여자가 들어 있으니까. 그놈의 피오니 로렌. 그 똑 부러진 역사학자.
‘진정하자.’
루비아나는 끓어오르는 살기를 애써 가라앉혔다.
피오니에게 딱히 나쁜 감정은 없었다. 루이먼드 때문에라도 나쁜 감정을 가지는 게 맞긴 한데, 놀랍게도 정말 나쁜 감정은 없었다. 지난번에 봤던 똑 부러진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나쁜 감정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검을 들고 피를 본 상황에서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는 건 그리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괜히 죽이고 싶어지니까.
“싫습니까?”
머뭇거리는 루이먼드에게 섭섭해서, 말이 살짝 퉁명스러워졌다.
“아니, 아니요. 싫은 건 아닙니다.”
루이먼드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비아, 정말로 괜찮은 겁니까?”
“나, 말입니까?”
“네.”
루이먼드는 오히려 루비아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엉망이 된 상태에서 결혼식을 이어 가면 혹여나 루비아나에게 상처가 될까 봐.
결혼식은 삶에서 몇 안 되는 특별한 이벤트 중 하나다. 괜히 몇 달씩 공들여 준비하는 게 아니다.
루비아나는 조촐히 하라는 말만 입버릇처럼 말하고, 정작 결혼식 준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막상 결혼식이 정말 조촐하고 허술하게 준비되어 있으면 다른 귀족들 보기에 민망하고 속상하리라.
그리 생각했기에 루이먼드는 정말 결혼식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오직 루비아나를 위해서.
결혼식의 주인공인 루비아나가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하나 안 듣고, 찬사만 듣고 가장 빛났으면 해서.
하지만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괴한들의 습격으로 결혼식이 엉망이 되었다.
이 상태로라도 결혼식을 계속 이어 가고 싶은 건 루이먼드 역시 원하는 것이긴 하나, 루비아나가 나중에라도 아쉬워할까 봐, 그게 걱정됐다.
“그럴 리가.”
루비아나는 그의 걱정을 한마디 말로 끊어 내 버렸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이고 루이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계속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루이,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루비아나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루이먼드도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기꺼이. 사실, 제가 먼저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요.”
루비아나는 그를 부축해 주며 슬쩍 그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를 죽이려 했던 그림자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저 건너편 떡갈나무 아래에는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다다닥 박혀 죽어 있는 다른 그림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 둘은 루이먼드를 왕자님이라 부르던 반란 세력과 결이 달랐다.
‘루이먼드를 죽이는 게 목표였어.’
그래서 루비아나도 이들을 보이는 족족 죽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루이먼드가 위험했기에 살려서 배후를 캐야 한다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게 이제 와 아쉽긴 한데, 후회하진 않았다.
만약 살려 둘 생각으로 여유를 부렸으면 루이먼드는 정말 큰일 났을지도 모르니까.
‘누구지? 누가 루이를 노리는 거지?’
녹색 눈이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