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31)

***

신부와 신랑이 하나 된 길을 다 걷지 않고 두 걸음 전에 멈춰 섰다. 주변의 시선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서로를 껴안고 입을 맞췄다.

그 시간이 천년만년 길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만큼 길게 느껴졌다.

리사나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예식장을 떠났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혼식의 주인공들은 물론이거니와 하객 중 누구도 그녀가 도망치듯 떠나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리사나는 마차에 올라타 후작저로 도착할 때까지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루이,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비록 첫 만남은 정략혼을 위한 것이었지만,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루이먼드를 사랑하게 됐다. 아버지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그와 결혼하여 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마음먹었다.

그가 부담스러워하고 거절하는 건 쑥스럽고 부끄러워서 그런 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나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니까.

오딜 후작가의 리사나.

만약 황제가 사내였다면, 황후가 되었을 거라는 소리를 듣는 여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그 엉망진창인 결혼식의 끝에서 그녀는 보았다. 루비아나, 그 무시무시한 아쉴레앙 공작을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루이먼드를.

그는 그녀에게 기꺼이 먼저 입 맞추고, 무언가 말을 속삭이고, 행복해 죽겠다는 듯 웃었다. 리사나와 함께 있을 땐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루이가 아쉴레앙 공작을 사랑하고 있어.’

하객들 중 그 누구보다 리사나가 가장 정확하게, 뼈저리게 루이먼드의 감정을 알아챘다.

당연했다. 루비아나와 함께 있는 루이먼드의 모습은, 루이먼드와 함께 있을 때의 리사나와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패배감과 절망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어째서? 어째서…… 내가 아니라, 그 여자인 거지? 그렇게 무섭고 끔찍한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절망스러운 것인지도 몰랐다.

리사나는 마차가 달리는 내내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대로 사흘이고 열흘이고, 눈이 녹아내릴 때까지 울고 싶었으나 그녀에게 허락된 시간은 마차가 후작가에 멈춰 설 때까지였다.

마차가 멈춰 섰다.

“다녀오셨습니까, 아가씨.”

집사가 문을 열고 정중히 인사 할 때.

“……그래요. 조금 일이 있기는 했지만.”

리사나는 언제 울었냐는 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옅은 웃음을 띤 채 마차에서 내려야 했다.

눈은 부었고, 뺨엔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집사와 뒤에 늘어선 하녀들 중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리사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져, 미처 흘리지 못한 눈물을 남김없이 토해 내고 싶었다.

하녀든 유모든, 상냥한 누구라도 붙잡고 울며불며 화를 내고 또 위로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래선 안 됐다.

그녀는 뻣뻣하다 싶을 정도로 온몸에 힘을 주고 천천히 걸어 자신의 방으로 갔다. 더없이 귀족답게, 오만하다 싶을 정도로 우아하게, 하녀들의 수발을 받으며 몸을 씻고 구겨지고 더러워진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잠시 앉아 쉴 틈 없이, 물만 한 모금 입에 머금고는 바로 서재로 향했다.

서재엔 오딜 후작이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리사나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한 고스란히 봤으리라.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리사나는 공손히 인사했다. 후작은 돌아보지 않았다.

“게일 대령을 움직였더구나.”

“……!”

리사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일찌감치 우리 세력에서 떨어져 나갔으니 일이 실패한들 우리에게까지 피해가 오지 않을 거라 예상 가능했지. 게일 대령은 목소리도 크고 행동도 과격해 언제고 일을 내리라 평가받는 사내였으니까.”

오딜 후작이 책상을 짚으며 돌아섰다. 리사나는 그의 시선을 느끼며 발끝을 오므렸다. 자신이 손가락까지 꼬물대고 있다는 건 미처 알지 못했다.

치맛단을 만지작거리는 리사나의 손을 본 오딜 후작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가 사고를 쳐도,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그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말하겠지. 네가 그에게 섣불리 접근하여 흔적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그, 러지 않았어요.”

“그랬을 거라 믿는다.”

“예, 그,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너무 긴장해 입술이 바싹 말랐다. 리사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힘겹게 대답했다.

‘떨면 안 돼. 담담하게, 당당하게.’

계속 자기 자신에게 되뇌었으나, 쉽지 않았다. 리사나의 어깨가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오딜 후작의 얼굴도 점점 굳어 갔다.

“아무튼,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구나. 결과와는 상관없이.”

“저…… 죄, 죄송해요. 미리 말씀 드리지 않고……”

“떠는구나. 지금 이곳이 춥더냐?”

“그, 그게 아니라…… 저는…….”

리사나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다정하지는 않아도 화나 있지도 않았던 오딜 후작의 눈이 매서워졌다.

“리사나 폰 오딜!”

벼락같은 호통이 쏟아졌다. 리사나는 용수철처럼 몸을 튕기며,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고개를 뻣뻣이 들었다.

리사나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쳐다보자, 오딜 후작의 얼굴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자세입니다. 미래의 아덴 왕비시여.”

“…….”

리사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실망, 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무엇을 실망했단 말입니까?”

“제가 말도 없이 게일 대령에게 접근하여……”

“정체를 숨기고 막 수도에 올라온 하녀에게 일을 시켜 말을 전하도록 하셨더군요.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은 칭찬할 만합니다.”

“게일 대령으로 하여금 소동을 일으키게 했어요. 아버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루이먼드 님을 구하려고요.”

“훌륭합니다.”

오딜 후작이 감탄했다. 진심으로.

“…….”

“자신의 남편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내의 미덕이지요. 왕에게 충성해야 하는 왕비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기도 합니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어요.”

“오늘의 실패를 잊지 않고 반성하여, 다음번엔 성공하시면 될 일입니다.”

오딜 후작이 천천히 걸어 리사나 앞에 섰다. 리사나는 다시 숨이 가빠 오는 것을 느꼈다.

‘떨지 마. 두려워하지 마. 당당하게. 오만하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약한 모습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것만 아니라면 무슨 일을 하든, 또 실패하든, 탓하지 않았다.

리사나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앞선 못난 모습들이 제 것이 아니었다는 듯,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오만하리만치 눈을 치켜뜨고 오딜 후작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오딜 후작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는 자신에게 말도 안 하고 큰일을 벌린 주제에 실패하고 돌아오기까지 한 딸에게, 진심으로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 모습이다. 올리나 왕비님께서 폭정을 일삼던 전하로부터 어떻게 첫째 왕자님을 지킬 수 있었겠느냐? 바로 지금 너의 모습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또 우아하게 모든 사람들을 대하셨지.”

“…….”

“그분이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완벽하셨던 건 아니었다. 왕자님께서 어리셨을 땐, 미숙하여 여러 번 실수도 하셨단다. 그 실수를 딛고 일어섰기에, 자라난 첫째 왕자님을 완벽하게 지켜 내실 수 있게 된 거지.”

“……네.”

“리사나, 너 또한 그래야 한다. 올리나 왕비님처럼, 훗날 아덴의 왕이 되신 루이먼드 님을 돌봐 드려야 해.”

루이먼드.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던 리사나는 오딜 후작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다시 흔들렸다.

“아버지, 하지만 루이먼드 님께선 그 여자를, 아쉴레앙 공작을 진심으로……”

저도 모르게 하소연하고 말았다. 그 대가는, 오딜 후작의 정중한 존댓말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 그것이…….”

리사나는 입술을 깨물고, 방금 자신이 한 실수를 후회했다.

“왕비님이 되실 리사나 님께서 아덴의 국왕 전하가 되실 루이먼드 님을 흠모하고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 넘어가면 곤란합니다.”

“명심, 하겠습니다.”

리사나는 턱을 들고, 다시 우아하고도 오만한 모습으로 오딜 후작을 대했다.

흠. 오딜 후작은 더없이 만족했다.

“오늘은 많이 피곤한 것 같구나.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도록 하자. 이만 돌아가 쉬거라.”

“예, 아버지.”

리사나는 기다렸다는 듯 돌아서 서재를 나갔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오딜 후작은 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가 아덴의 왕비가 되어야 한다니. 미리 알았다면 좀 더 어릴 때부터 제대로 교육했을 것인데.”

아니, 따지자면 아덴 왕국이 그렇게 무너지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한 게 먼저긴 했다.

오딜 후작은 다시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눈가에 회한이 어렸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복잡해 보이던 기색은, 부하가 노크하고 들어오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레이움 백작이 소금 산을 바쳤습니다.”

“소금 산만 바쳤다던가?”

오딜 후작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저희가 협상 내용을 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그럴 테지.”

협상 자리엔 황제가 보낸 시종 한 명과 당사자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협상 내용이 담긴 계약서는 세 장. 그마저도 그레이움 백작과 루비아나, 그리고 황제가 나누어 가졌다.

“그러니 자신들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우리가 모르리라 생각했던 건가?”

오딜 후작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레이움 백작은 자신이 세력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루이먼드와 리사나의 혼사를 미끼로 삼아 오딜 후작을 끌어들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래서 아쉴레앙 공작과 루이먼드의 결혼식 날짜가 발표된 이후 한동안 오딜 후작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혹시라도 오딜 후작이 실망하여 이 반란 세력에서 떨어져 나갈까 봐.

오딜 후작은 기꺼이 그레이움 백작의 착각에 발맞춰 주며 실망한 척했다. 연기가 적성에 맞지 않아 고단한 일이었으나,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그레이움 백작은 깜빡 속아서는 여전히 이 반란 세력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어떻게 할까요? 다이아몬드 광산을 마저 바치도록 할까요?”

“아니, 그냥 두게.”

“예.”

“소금 산은 어떻게 할까요?”

“그 역시 그레이움 백작에게 돌려주게.”

“예?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1년 이득의 절반만 저희 쪽에 유입되어도 재정 상황이 훨씬 나아질 겁니다. 그리고 소금 산 자체가 외진 곳에 있어 군사 훈련 장소로 이용하기도 적격입니다. 저희 병력을 이동시켜 숨겨 두면……”

“그걸 노리고 준 걸 텐데,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하면 안 되지 않겠나?”

부하가 헉, 숨을 들이켰다. 오딜 후작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자금 상황과 병력 규모를 가늠해 보고 싶었나 보지. 어쩌면 그곳에 첩자를 심어 놨을지도. 아니, 분명 심어 놨을 게야.”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만하네. 자책 말게. 아무튼, 내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하게. 그만 나가 보고.”

오딜 후작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하며 부하를 내보냈다.

“제법이군, 아쉴레앙 공작.”

다시금 혼자가 된 오딜 후작은 소리 내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앉아서도 못내 즐거워하며, 주먹으로 책상을 가볍게 내리치기까지 했다.

자신의 딸과 측근에게도 거의 보여 준 적 없는 모습이었다. 리사나가 봤다면, 그가 진짜 자신의 아버지가 맞는지 의심하며 뒷걸음질 쳤을 것이었다.

“게으름 피울 줄만 알고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의외의 변수가 됐어.”

그를 웃게 만드는 건 의외의 성실성을 보이는 아쉴레앙 공작과 루이먼드였다.

“왕자님, 과연 아이너스 왕가의 핏줄다우십니다.”

첫째 왕자와 그레이움 백작의 다툼에 끼여 이리저리 치이던 사생아 루이먼드. 그가 첫째 왕자의 스승이었던 오딜 후작의 눈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그건, 그가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학자의 집으로 도망치기를 선택했을 때였다.

저 스스로 학자의 집으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스승님. 뜻밖이긴 한데, 마침 잘됐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그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학자의 집 앞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그레이움 백작의 꼴을 스승님께서도 보셨어야 했는데. 참으로 아쉽습니다.

첫째 왕자가 보내온 편지를 읽은 오딜 후작은 내심 루이먼드에게 감탄했다.

그러고 나선 루이먼드에 대해 잠시 잊고 있었으나, 루이먼드는 다시 한번 자신의 뛰어남을 증명하며 오딜 후작에게 자기 자신을 각인했다.

황제가 학자의 집을 무너뜨리자, 루이먼드가 그레이움 백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아쉴레앙 공작과 결혼하려 했다.

오늘이 바로 그 결혼식 날.

리사나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큰 소동이 있었는데도, 결혼식은 계속 진행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제 루이먼드 휀 룩스 아멜 폰 그레이움은 루이먼드 폰 아쉴레앙이 된다.

“위험에서 가장 멀어져 살아남더니, 이제는 가장 위험한 곳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살길을 도모한다.”

오딜 후작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너스 왕가의 핏줄.

선택의 여지가 없으나, 사생아이기에 꺼림칙했던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사자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루이먼드의 용기와 지혜로 인해, 오딜 후작은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당신은 반드시, 아덴 왕국의 왕이 될 겁니다.”

루이먼드를 자신의 왕, 아덴의 새 왕으로 삼고야 말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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