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식 후엔 피로연이 이어졌다.
귀족들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하고 피곤한 얼굴을 하고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피로연까지 버텨 받아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인들이 핏빛 결혼식장을 대충 치우고 피로연 장식을 새로 달 동안 두 사람은 저택에 들어가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잠깐 치워서 핏자국을 모두 지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먼드가 급한 대로 저택의 모든 천을 들어내 핏자국을 덮도록 하고, 여분의 백합꽃을 새로 장식하게 하니 분위기가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
피로연이 시작될 때 즈음, 새로운 손님들이 도착했다. 학자의 집 출신 황실 관리들이었다.
일이 바빠 한낮에 시작되는 결혼식까지는 참석할 엄두를 못 내고, 야근 전에 저녁 식사를 할 겸 피로연에 온 것이었다.
막 일하다 온 관리들은 아쉴레앙 공작의 결혼식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은 미처 못 듣고 온 듯했다.
그들은 평소처럼 루이먼드를 얼싸안고 반가워했고, 피로연장에 그득 쌓인 음식을 보고 환호했다.
루이먼드는 그들을 살뜰히 챙기며, 입안에 음식을 마구마구 부어 넣었다. 어차피 그들이 먹지 않으면 다 남을 것이기에, 싸 가겠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낮의 습격을 겪고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귀족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핏자국을 덮은 리넨을 밟고 서서 빵과 고기를 씹는 관료들을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 그런데 피오니가 안 보이네요?”
한참 관리들을 챙기던 루이먼드는 가장 보고 싶었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의아했다.
“아, 안 그래도 못 와서 미안하다고 말을 대신 전해 달라더라.”
“피오니 사무관, 이제 얼굴 보기 힘들어질 겁니다.”
“맞아요. 동부 치수 사업 감독관으로 파견된다나 봐요. 요즘 그 일 준비하느라고, 집에도 안 들어가고 행정관에서 먹고 자고 해요.”
관리들이 앞다퉈 피오니의 근황을 전했다.
“그래도 잠깐이라도 들러서, 식사라도 하고 가지.”
루이먼드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오지 않았기에 피로연장의 평화가 지켜진 거라는 걸, 꿈에도 몰랐다.
피로연장에는 좋은 술도 종류별로 쌓여 있었으나,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관리들도 누구 하나 찾지 않았다.
낮의 일을 겪은 귀족들은 감히 술에 손댈 엄두도 내지 못했고, 관리들은 원래부터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자고로 준비한 술이 일찍 동날수록 성공한 결혼식이라고들 말해 왔건만. 루이먼드는 살짝 속이 쓰렸다.
관리들은 루이먼드의 결혼을 실컷 축하하고, 피로연장의 음식을 적당히 축내고 적당한 시간에 돌아갔다.
루이먼드는 그들을 좀 더 잡아 두고 싶었지만, 남아 있는 일거리로 근심 걱정이 가득한 눈들을 보고서는 말없이 고이 보내 주었다.
하인들을 시켜 음식을 싸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히 와서 음식만 축내고 가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하지만 진심으로 결혼을 축하하고 있다네.”
“잘 살아야 하네. 자고로, 부인은 남편하기 나름이라는 옛말이 있지.”
“옛말에 결혼해야 어른이라는 말도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루이먼드가 우리 모두보다 어른일세.”
공부에 평생을 바쳤고, 또 바치기로 마음먹은 관리들은 모두 미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 중 유일하게 결혼하게 된 루이먼드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황궁으로 돌아갔다.
관리들은 음식이나 축내고 간다고 미안해했지만, 그들 덕분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루이먼드는 진심으로 그들의 방문에 감사했다.
‘그나저나 이 피로연은 언제쯤이나 끝날까?’
관리들을 배웅하고 연회장으로 돌아오니, 루이먼드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루비아나는 그새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실없는 말을 들어 주느라 바빠 보였다.
루이먼드가 멀거니 연회장에 혼자 서 있자, 그가 혼자 되기만을 바랐던 이들이 하이에나처럼 눈을 빛내며 슬금슬금 몰려들었다. 대다수의 여자들, 그리고 약간의 남자들이었다.
익숙한 일이었기에, 루이먼드는 금방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루비아나에게로 달아났다.
“루이?”
“비아.”
루비아나는 뭉게구름처럼 제 곁으로 몰려든 사람들 틈바구니로 끼어드는 루이먼드를 바로 알아보았다.
루이먼드가 내민 손을 쑥 잡아당겨 바로 자신의 옆자리로 데리고 왔다.
“오오, 벌써부터 그렇게 정답게 부르시는군요.”
“하긴 이미 결혼식 전부터 함께 살…… 흠흠.”
“아무튼 참 보기 좋습니다. 하하하!”
귀족들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끝없이 말을 걸고, 자신의 이름과 가문을 기억해 달라는 듯이 강조했고,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고자 애썼다.
루비아나가 무심한 태도를 보이니, 귀족들은 그나마 만만한 루이먼드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여덟 번째 삶을 살고 있는 루이먼드마저 벅차다고 느낄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이에나를 피하려다 뱀 소굴로 들어온 격이었다.
루이먼드는 이 속에서 태연하게 서서는, 대부분의 실없는 말을 무시하거나 칼같이 쳐 내며 평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루비아나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먼저 들어가 있어요, 루이.”
“예? 하지만……”
“난 괜찮아요. 나도 곧 다 정리하고 들어갈게요.”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피곤해하는 걸 보고는, 루이먼드를 먼저 저택에 들여보냈다. 괜한 날파리가 꼬일까 봐 튼튼한 하인 서넛을 붙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웬만하면 루비아나와 끝까지 함께 있으려 했지만 귀족들이 개미 떼처럼 주변에 몰려드는 걸 보고는 바로 뒷걸음질 쳤다.
“이따 봐요.”
루비아나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루이먼드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려 목을 움츠렸다. 뒷목이 뜨끈뜨끈해졌다.
루이먼드가 하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저택으로 도망친 후, 루비아나는 가차 없이 귀족들을 정리해 나갔다.
아까 결혼식장을 습격한 괴한들처럼 단칼에 죽여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단지 서늘한 눈으로 하객들을 둘러보기만 했다. 둘러보기만.
‘슬슬 돌아가고 싶을 텐데? 원래, 빨리 돌아가고 싶어들 하지 않았나?’
루이먼드가 옆에 있을 때야 그가 놀랄까 봐 참고 있었다지만, 그가 없으니 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다.
루비아나가 대놓고 살기를 팍팍 뿌리자, 귀족들은 잠깐 잊고 있었던 루비아나의 본 모습을 기억해 냈다.
피로연장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신랑이든 신부든 한 명을 최대한 오래 붙잡고 신방으로 보내지 않는 게 아덴 왕국에서 내려오는 짓궂은 풍습이었다. 하지만 하객들 중 누구도 감히 루비아나를 붙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귀족들이 허둥지둥 떠날 준비를 하며 목을 길게 빼고 루비아나만을 바라보았다.
‘이제 주려나?’
‘언제 주려는 거지?’
‘아니, 그걸 줘야 가지.’
귀족들은 언제나 루비아나가 제단을 흩트려 돌을 나눠 줄지만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의 간절한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해가 뉘엿뉘엿하게 지는 하늘을 등지고, 빈손으로 귀족들을 배웅했다.
정말 빈손인 건 아니었다. 루이먼드가 정성껏 준비한 선물이 한 꾸러미였다. 하인들은 귀족들이 타고 온 마차에 큰 짐을 턱턱 실었다.
안에는 값비싸고 의미 있는 것들만 들어 있었으나, 그건 귀족들이 원하는 오색 돌 - 언제든 한 번은 아쉴레앙 공작가에 신세 질 수 있는 징표 - 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 안 줄 셈인가?’
‘왜? 왜에?’
‘그 광경을 보고서도 안 가고 자리를 지켰는데. 그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줘야지!’
귀족들은 당황했다.
“저, 저기 공작님!”
누군가 용기를 내어 루비아나 앞에 섰다. 모두들 그가 속 시원히 말해 주길 바라며 시선을 집중했다.
“내게 할 말이 있습니까?”
“그, 그것이…….”
뻐끔뻐끔. 그는 갑자기 물 밖에 나온 금붕어가 됐다.
루비아나는 그가 사람 말을 토해 내길 기다려 주었으나, 그는 결국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쓸쓸히 돌아섰다.
‘저 등신!’
‘왜 말을 못 해! 돌을 달라고 왜 말을 못 하냐고!’
귀족들은 그런 그를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대신해서 나서진 못했다.
결국 귀족들은 마차에 올라 떠나는 순간까지 할 말 많은 눈으로 루비아나를 바라보며 떠났다. 루비아나는 그저 빈손을 흔들며 그들을 배웅했다.
루이먼드가 정성껏 준비한 제단은 저택 어딘가에 고이 모셔 두었다. 루비아나는 애초부터 그 돌을 흩트려 하객들에게 나눠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객 중에는 제국에 충성하는 자도 있지만 아직 마음에 옛 아덴 왕국을 품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 모두에게 제단의 돌을 빼 주고, 미래의 인연을 약속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루비아나는 그 풍습이 옛 아덴 왕국에서 전해지는 것이라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누가, 그때 우리의 요청에 응했지?’
루비아나는 터덜터덜 떠나는 하객들의 마차 행렬을 보며 차게 웃었다.
끌려가듯 수도로 떠난 부모님에게서 연락이 끊긴 지 한 달쯤 되었을까? 룩센 백작 부부가 잔인하게 죽임당했다는 소문이 남부에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그날 밤, 어린 루비아나는 부모님이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오색 돌을 전부 꺼내, 하나하나에 편지를 매달아 보냈다. 족히 스무 개는 넘었던 오색 돌.
그 부름에 응한 가문은 단 한 가문도 없었다.